센다이 시의 ‘규탕’, 전주의 ‘비빔밥’ 그리고 연세대학교 신입생이 된 나.
도쿄 출신의 시나는 대학에 진학하면서 센다이 시로 이사를 온다. 시나는 새 집에 짐을 풀며 고향집에 전화를 한다. 엄마는 ‘다이조군이 센다이 시는 규탕(소 혀 요리)이 맛있다’고 했다며 규탕을 먹어봤냐고 묻는다. 대학에서 만난 친구도 센다이 시에 왔는데 규탕은 먹어봤느냐고 물어본다. 이에 시나는 가와사키와 도시락 점에 가서 규탕 도시락을 찾지만, 팔지 않는다. 심지어 센다이 시에 이년간 산 가와사키도 규탕을 먹어본 적이 없다. 작품의 후반부에서 시나는 도쿄로 부모님을 뵈러간다. 내려가는 기차에서 규탕 도시락을 사먹는다. 규탕에 대해 말하는 장면들은 작품의 처음부터 끝까지 곳곳에 등장하며 관객에게 ‘센다이 시에 가면 규탕를 먹어봐야 하는가?’는 생각을 들게 한다. 외부인들은 규탕이 센다이 시를 대표하는 음식이기에 그 곳 시민이라면 당연히 규탕을 먹어봤으리라 생각한다.
지난달 나는 전주 출신의 친구를 사귀게 되면서 이와 유사한 경험을 했다. 내가 그 친구에게 전주가 어디에 있는지 물었더니, 전주는 전라북도의 도청 소재지라고 답했다. 친구는 그러면서 ‘사람들은 전주가 전라북도의 도청 소재지인 것은 모르지만 전주비빔밥의 전주라는 것은 안다’고 쏘아붙였다. 하지만 전주 사람들이라고 특별히 비빔밥을 즐겨 먹지는 않는다고 말했다. 이렇게 우리는 종종 모르는 장소나 집단을 어떤 상징을 통해 배우고, 그 구성원들을 상징의 고정관념에 입각해 해석하는 오류를 범하곤 한다.
한편 이런 오류는 비단 외부인에게만 영향을 끼치는 것이 아니다. 그래서 시나가 부모님을 뵈러 가는 기차에서 규탕 도시락을 사먹는 장면은 인상적이다. 규탕을 센다이 시가 아니라 여행객들의 공간인 기차에서 사먹은 것이다. 시나가 굳이 기차에서라도 규탕을 사 먹은 것은 센다이에서 왔는데 규탕을 먹어보지 못했다고 도쿄에서 말하기 껄끄러웠기 때문이라고 추측해 볼 수 있다. 즉 고정관념의 대상이 되는 구성원들은 그런 외부인들의 기대에 부응하기 위해 자신들에게 자연스럽지 않은 상징행위를 하기도 한다.
나 또한 이런 경험이 있는데, 채팅을 통해 만난 외국인 친구가 올림픽에서 한국이 양궁에서 선전하는 것을 봤다며 내가 양궁을 얼마나 잘 하는지 물은 적이 있다. 올림픽을 보고 한국인들이 취미생활로 양궁을 즐긴다고 생각한 것이다. 나는 양궁에 대해 아는 것이 거의 없었는데도 인터넷을 검색해서까지 양궁에 대해 아는 척하며 설명해줬던 것이 기억난다.
이렇게 보면 사람들은 한 집단을 타당성이 고려되지 않은 어떤 상징을 통해 배우고 이를 통해 해석하는 경향이 있다. 또한 그 집단 구성원들은 그런 외부의 잘못된 기대, 즉 편견에 부응하려고 애쓸 때가 있다. 하지만 사람을 사귐에 있어 우리는 이런 식의 규칙들에 익숙해져서는 안 된다. 이런 원리로 사람을 이해하려들면 그 사람과 참된 교감을 할 수 없다. 왜냐하면 그 사람의 속성이 아닐지도 모르는 상징으로 상대를 해석하게 되어 그 사람을 내 안에서 다른 사람이 되게 만드는 큰 오류를 범할 수도 있기 때문이다.
스스로에게 있어서도 그렇다. 올해 나는 ‘자유’, ‘개인주의’ 그리고 ‘세련됨’ 등으로 상징되는 연세대학교의 학생이 되었다. 그렇다고 내가 꼭 자유분방한 사고방식을 가지고 개인주의적인 삶을 살려고 노력할 필요는 없다. 하지만 벌써 나는 옷을 고를 때 세련된 연세대학교 학생에 걸맞은 패션리더가 되어야겠다는 무언의 압박감을 느끼기도 한다. 내가 속한 상징에 부합하도록 나를 끼워 맞추기만 해서는 자칫 진정한 나를 잃을 지도 모른다.
대학에 와서 수많은 새롭고 다양한 사람들을 만나게 된 지금, 하고 싶은 일도 고민도 많은 나에게 영화 ‘집오리와 들오리의 코인로커’는 여러 가지 생각을 들게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