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월 232006
 

0. 도입

 

  “검증되지 않은 삶은 살 가치가 없다” – 소크라테스

 

  삶을 산다는 것, 그것은 단순히 생명을 유지하는 것만을 의미하지는 않는다. 거기에는 무언가가 더 있어야 한다. 그래야만 ‘삶’이라고 부를 수 있게 된다. 우리는 거기에 무엇을 더 붙일 수 있을까?

  보통은 거기에 ‘괜찮은 직장과 안정된 가정’을 덧붙인다. 그것은 이 시대(특히 이 조그만 나라)의 캐치프레이즈다. 그리고 대부분의 경우, 사회는 여기까지만을 요구한다. 그 외의 것에 대해서는 신경쓰지 않거나 가로막는다.

  그러나 인간은 이런 삶을 산다고 해서 반드시 행복해지거나 하지는 않는다. 그에게는 어떤 ‘불안’이 있다. 그것은 ‘지금과 같은 삶을 살아간다는 것’에 대한 불안이다. “내 삶은 과연 행복한 걸까?” 이 질문이 인간의 모든 문제의 시작점이다. 인간의 행복은 의심에 의해 가장 빨리 무너져 내린다. 여기에는 톱스타든 일개 청소부든 아무런 차이가 없다는 점에서 공평하다. 누구든 행복을 세울 수 있지만, 반대로 누구의 행복이든 무너질 수 있다.

  이런 ‘불안’과 ‘의심’의 원인은 어디서 오는가? 당연하게도 ‘확신’이 없기 때문이다. 내 삶이 올바른 것인가 – 또는 행복한 것인가 – 에 대한 확신이 없기 때문이다. 특히 우리나라의 경우, 대학을 졸업하기 전까지는 한 인간에게 사회가 대신 확신을 심어주기 때문에 더욱 그렇다. “너는 제도 안에 있고 그 안에서 너의 위치는 어디이다”라는 정확한 포지션까지 짚어준다. 그러나 그 이후의 인생에 등수는 없다. 판단해줄 심판도, 점수를 매겨줄 선생님도 없다.(주1) 이 때문에 젊은이들은 불안에 떤다. 사람을 몰아대는 이 시대를 살아가는 젊은이들은 특히 그렇다.

  등수가 없는 본격적인 인생에서, 불안해하지 않으려면 자기 스스로 확신을 가질 수밖에 없다. 그리고 그것은 본인의 삶에 대한 ‘검증’에서 시작된다. 내가 있는 위치와, 그곳의 상황과, 스스로의 지향점을 하나하나 따져나가지 않으면 언젠가는 다시 ‘불안’과 마주하게 된다.

  나는 여기에서, 바로 이 ‘검증’을 시작해보려 한다. 우리는 과연 어떤 시대에 살고 있는가. 그 시대의 본질적인 문제점은 무엇인가. 그리고 우리는 어떻게 해야 하는가. 나는 이런 이야기를 해보고 싶다.

 
 

1. ‘할 수 있다’와 ‘할 수 없다’의 문제

 

  우리가 불안과 마주치는 대부분의 경우, 우리는 ‘다른 어떤 삶’을 꿈꾼다. 지금과는 전혀 다른 삶, 또는 조금이라도 다른 삶을 원한다. 그렇지만 역시 대부분의 경우, 우리는 그 ‘다른 어떤 삶’으로 이행하지 못한다. 우리는 이것을 할 수 있을까, 아니면 할 수 없을까.

 

1-1. ‘할 수 있다’ – 사르트르의 경우

 

  “인간은 자유라는 형벌에 처해져 있다” – 장폴 사르트르

 

  사르트르는 그의 저서『존재와 무』에서 ‘대자존재(對自存在, a for-itself)’와 ‘즉자존재(卽自存在, a in-itself)’라는 개념을 사용했다. 이 두 개의 개념은 그의 철학에 핵심적인 요소로 작용하는데, 간단하게 설명하자면 이렇다. “잉크병은 잉크병일 수 있지만, 웨이터는 웨이터가 될 수 없다.” 여기에서 잉크병이 ‘즉자존재’, 웨이터는 ‘대자존재’이다.

  잉크병은 본질적으로 고정되어 있는 사물이다. 그것에는 본래의 용도가 있고 그 용도에 맞춰 존재하게 되어 있다. 잉크병은 밥공기가 되거나 다른 사물이 될 수 없다.

  반면에 웨이터는 고정되어 있지 않은 인간이다. 그에게는 본래의 용도 같은 건 애초에 존재하지 않고 그의 삶에 정해진 목적 같은 것도 없다. 웨이터는 정비공이 되거나 교수가 ‘될 수 있다'(이건 어디까지나 가능성의 측면이다).

  또한 잉크병은 3시 10분이나 7시 50분에나 똑같이 잉크병이지만, 웨이터는 퇴근 후에는 웨이터가 아니다. 그에게는 ‘항상 웨이터로 존재할 수 있는’ 가능성이 전혀 없다. 심지어 서빙을 하고 있는 동안에도, 그는 ‘웨이터’라는 존재가 될 수 없다. 그는 순간순간 변화한다. 웨이터가 ‘즉자존재’가 될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은 자살 뿐이다.

  결국 사르트르에 의하면, 인간은 본래 ‘할 수 있는’ 존재다. 그는 다른 삶을 꿈꿀 수 있고, 그것을 실행할 수 있다. 그리고 또 그렇게 하지 않을 수가 없다. 왜냐하면 인간은 항상 변화하는 ‘대자존재’이기 때문이다. 그가 고정된 실체를 가지고 있는 것은 아니다. 그게 그가 처해진 운명이다.

  이런 주장은 인간의 자유를 무한한 것으로 본다. 주영준의 말대로, “목숨이 서른 두 개쯤은 있어야 할 수 있는 일을 아무렇지도 않게, ‘그런 것 쯤은 간단하잖아?’라고 말하는 듯한” 느낌이 든다.

 

1-2. ‘할 수 없다’ – 카뮈의 경우

 

  “문제는 부조리의 상태, 그 안에서 사는 일이다” – 알베르 카뮈

 

  ‘부조리(不條理, absurdity)’는 카뮈가 본격적으로 확립한 개념이다. 이 ‘부조리’라는 것은 어떤 사물로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의 현상이자 상태이다. 그것은 ‘현실’과 ‘인식’의 괴리에서 온다. 이 괴리는 어디서 발생하가?

  ‘현실’과 ‘인식’이 일치가능하다면 괴리는 오지 않는다. 그러나 실제로는 그렇지 않다. 내가 처한 상황과 내가 의도하는 바는 항상 다르다. 내가 읽은 까뮈에 의하면 “그렇게 할 수 있는데도 불구하고 그렇게 할 수가 없다”는 데서 이 괴리가 만들어진다. 시지프스는 돌을 굴리지 않을 수 있는데도 불구하고 돌을 굴리지 않으면 안 된다.

  이것이 의미하는 바는, 우리가 처해진 상황은 결코 벗어날 수 없는 하나의 ‘상태’라는 것이다. 간단히 말하자면 우리는 다른 삶을 꿈꾼다. 그러나 우리의 상황은 그 삶을 지향할 수 없다. 우리는 당장 현재의 모든 것을 버리고 떠날 수 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렇게 할 수가 없다.

  내가 보기에 카뮈는 이것을 인간이 처한 본질적인 상태로 보았다. 그렇기 때문에 그의 인간상은『반항하는 인간』이 될 수밖에 없는 것이다. 그가 중요하게 생각한 것은 ‘인간은 모든 것을 할 수 있다’는 원초적인 자유의 문제가 아니라,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렇게 할 수 없다’는 둘 사이의 괴리이다. 그는 이 괴리의 상태, 즉 부조리 안에서 어떻게 하면 살아나갈 수 있을 것인가를 탐구했다.

  물론 그것은 문제를 회피하기만 하면 쉽게 해결되는 일이다. 생을 마감하던가, 나 자신을 ‘즉자존재’로 만들면 된다. 스스로를 24시간 웨이터로서 존재할 수 있는 ‘즉자적 인간’으로 만들면 되는 것이다.(주2) 그런 인간의 삶에 부조리는 없다. 카뮈는 그런 의미에서 자신의 탐구가 “스스로를 속일 생각이 없는 사람에 한해서” 유효하다고 말했던 것이다. 그러나 그의 부조리는 유예되어 있을 뿐, 언젠가는 다시 찾아온다. 그것은 인간이 피할 수 있는 사건이 아니라 인간이 처한 본질적인 조건인 것이다.

 
 
2. ‘선택의 비자유’ 문제
 
  “이제 선택의 자유에 대해 말해보자. 다른 글에서 나는 아미시(Amish) 공동체의 청소년들 앞에 주어지는 사이비 선택을 거론한 바 있는데, 이들은 지극히 엄격하게 양육되다가 열일곱살이 되면 현대 자본주의문화의 모든 과잉들─질주하는 차, 분방한 성, 마약, 술 등의 소용돌이─을 겪어보라는 권유를 받는다. 그리고 한두 해 지난 후 아미시 방식으로 돌아가고 싶은지 아닌지 선택할 수 있다. 자라나는 과정에서 실질적으로 미국 사회에 대해 아무것도 배운 바가 없기 때문에 이 젊은이들은 이런 자유방임에 어떻게 대응해야 할지 알지 못하며, 대개의 경우 참을 수 없는 불안에 시달리게 된다. 결국 절대다수가 자기 공동체의 격리된 생활로 돌아가는 쪽을 선택한다. 이는 ‘선택의 자유’에 어김없이 따라오는 난점들을 보여주는 완벽한 사례이니, 아미시 아동들에게 형식적으로는 자유로운 선택이 주어지지만, 선택을 하는 정황 때문에 자유롭지 않은 선택으로 바뀐다.

  사이비 선택의 문제로 보면, 베일을 착용하는 무슬림 여성에 대한 일반적인 자유주의적 태도의 한계도 드러난다. 자유주의는 남편이나 가족의 강요가 아니라 스스로 자유롭게 선택한 것이라면 베일도 괜찮다고 한다. 그러나 여성이 개인적 선택의 결과 베일을 걸치는 순간 베일의 의미는 완전히 달라지니, 베일은 더이상 무슬림 공동체 소속이라는 표지가 아니라 특이한 개성의 표현으로 읽히는 것이다. 바꿔 말해, 선택이란 언제나 메타선택, 즉 선택이라는 양식 자체를 택하는 선택이며, 베일을 쓰지 않기로 선택하는 여성만이 실제로 선택을 선택하는 것으로 간주된다. 우리의 자유민주주의 세속사회에서 종교적 소속을 중시하는 사람들이 예속적 위치에 놓이는 이유도 여기에 있다. 그들의 신앙은 개인적 선택으로 ‘관용’되지만, 그들이 자신들에게 신앙이 갖는 의미─실질적인 소속의 문제─를 공적으로 드러내 보이는 순간 ‘근본주의’라는 비난이 가해진다. ‘관용적’인 다문화적 의미에서 ‘자유로운 선택의 주체’란 자신의 생활 세계로부터 분리되는 지극히 폭력적인 과정의 결과로만 출현할 수 있다.

  자본주의 민주사회 내부에서 ‘자유로운 선택’이라는 이데올로기적 관념이 갖는 물적 힘은 클린턴정부가 추진한 조심스럽기 짝이 없는 건강관리 개혁프로그램의 운명에서 확실히 드러났다. (악명높은 군수산업 로비세력의 두배 규모인) 의료계 로비세력은 국민개보험이 되면 의료 영역에서 선택의 자유가 어떻게든 위협당할 것이라는 생각을 퍼뜨리는 데 성공했다. 이런 확신 앞에서는 아무리 ‘엄연한 사실’을 열거해도 소용이 없었다. 이것이 다름아닌 자유주의 이데올로기의 중추로, 곧 사람은 각기 특정한 성향을 지니며 그것을 실현하려 애쓰는 ‘심리학적’ 주체라는 개념에 입각한 ‘선택의 자유’인 것이다. 오늘날 ‘위험사회’의 시대에는 특히 그러해서, 지배이데올로기는 복지국가의 와해로 초래된 불안을 오히려 새로운 자유의 기회로 팔아먹으려고 애쓴다. 노동의 유연성이 해마다 직장을 바꾸어야 한다는 뜻이라면, 이것이야말로 평생직장이라는 속박에서 해방되는 것이요, 스스로를 갱신하고 자기 개성의 잠재력을 실현할 기회라고 보면 되지 않는가? 표준 의료보험 및 은퇴 연금제도에 부족한 부분이 있다면, 그래서 추가보험을 들어야 한다면, 또 하나의 늘어난 선택의 기회로, 즉 지금 더 나은 생활을 할지 아니면 장기적인 안정을 도모할지 택할 기회로 여기면 되지 않는가? 만약 당신이 이런 곤경에 불안을 느낀다면 ‘2차 근대'(second modernity) 이데올로기를 설파하는 사람들은 당신이 ‘자유로부터의 도피’를 갈망하며, 안정된 낡은 형식에 매달리는 미성숙한 성향을 보인다고 진단할 것이다. 나아가 이런 곤경이 주체란 타고난 자연적인 능력들을 지닌 ‘심리학적’ 개인이라는 이데올로기로 포장될 때, 자동적으로 당신은 이 모든 변화가 당신 인물됨의 소산이지 시장세력에 이리저리 휘둘린 결과는 아니라고 해석하기 쉽다.” – 슬라보예 지젝

 

  길지만 그냥 읽자. 다 피가 되고 살이 되는 글이다(귀찮으면 밑줄친 부분만 읽어도 된다). 위 인용문은 슬라보예 지젝의 <반인권론> 중 ‘선택의 비자유’ 부분이다. 여기서 지젝은 ‘선택이 진짜 선택이 될 수 없는’ 조건에 대해 이야기한다. 아미시 청소년들은 두 가지의 선택지를 받았지만, 사실상 그들의 선택지는 하나였다. 이것은 무슬림 여성에게도 마찬가지다. 현대의 ‘노출 중심’ 사회에서는 베일을 걸치겠다는 선택이 그들의 정체성에 기반한 것이 아니라 ‘근본주의의 표출’이 되고 마는 것이다.

  지금 우리에게 더 중요한 것은 인용문의 세 번째 문단이다. 지젝은 ‘자본주의사회에서의 선택 문제’에 대해 말한다. 고용의 불안정은, 우리에게 더 많은 선택의 기회를 주는 것이 아닌가? 물론 여기에 대해 거부반응을 보이면 그는 순식간에 이 시대의 루저가 되고 만다. 그가 원했던 안정된 직장은 구태의연한 구시대의 사고방식으로 치부되고, 자신의 가치를 높일 의지가 없는 게으름뱅이로 낙인찍힌다. 그가 높이고 싶었던 가치는 몸값이 아니라 스스로의 인생에 대한 통제권이었는데도 불구하고.

  여기에서 우리가 깨닫는 것은, 선택의 기회가 주어진다고 해서 그것이 무조건 ‘진짜 선택’이 되지는 않는다는 것이다. ‘메타선택’이라는 말의 의미가 그런 것이다. 우리가 어떤 것을 선택할 때, 그것은 그 선택의 방식도 함께 선택하는 것이 된다. 즉, 우리가 택할 수 있는 가능성을 스스로 제한하는 방식을 고르게 된다는 것이다. 이건 김강록이 많이 했던 말이다. “나는 귤이 먹고 싶은데, 사과와 배 중에 하나를 고르라고 한다”는 식의 발언 말이다. 내가 택하고 싶은 삶의 방식은 저 속에 없는데, 시대와 사회는 나에게 그 중 하나를 고르라고 한다. 만일 내가 그 선택지 안에 없는 다른 삶의 방식을 골라내면, 시대와 사회는 그것을 그들의 방식으로 규정한다. 거기에 나 개인의 진정한 선택이라는 의미는 없다. 이것이 이 더러운 시대의 특징이다. 다른 삶을 상상할 수 있는데도 불구하고(김강록), 그렇게 할 수 없다. 그 삶을 살 수가 없다.(주3)

 
 

3. 이것은 우리들의 문제

 

  이 ‘선택의 비자유’ 문제가 왜 중요하냐 하면, 이것은 우리 세대(즉 80년대 이후 출생한 세대)의 문제이기 때문이다. 한국전쟁 세대와 4·19 세대를 젖혀두면, 이후의 우리 세대는 60년대 이후 출생한 세대와 70년대 이후 출생한 세대, 그리고 우리들로 나눠진다. 386으로 요약되는 60년대 출생 세대는 이 ‘선택의 비자유’ 문제가 그들의 문제가 아니었다. 물론 폭넓게 보자면 그들 역시 진정한 선택의 자유가 없었다고 보아야겠지만, 그들에게는 그보다 더 앞에 당면한 과제가 있었다. 그들에게는, 그리고 그 이전 세대들에게는 ‘선택의 비자유’를 논할 만큼 배부른 시기가 없었다.(주4) 70년대 출생 세대들은 사실상 60년대 출생 세대들의 연장선이라고 볼 수밖에 없다. 그들의 시대 역시 그다지 배부른 시대는 아니었다.

  우리는 정치적으로 자유로운 시대에 20대가 된 유일한 세대다. 대통령이 탄핵당할 수 있는 시대를 우리는 살고 있다. 그것은 이전까지는 있을 수 없었던 시대다. 그런 의미에서 우리의 과제는 이전 세대들의 과제와 달라질 수밖에 없다. 그리고 그 중심에는 ‘선택의 비자유’ 문제가 있다. 그것이 우리 세대의 문제라는 것은 우리 세대의 청년들이 쓴 글에서 찾아볼 수 있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과거 시대의 사람들보다 훨씬 더 쉽고 편하게 살고 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불행하다. 연애같은 것으로 행복을 누려보려 하기도 하지만 사실 연애도 모든 사람이 할 수 있는 것은 아니니까. 연애로 행복해질 수 있는 사람도 있는 반면, 그렇지 못한 사람도 있는 것이 현실이다. 그 결과가 바로 니트족, 히키고모리, 귀차니즘이라는 시대적 현상인 것이다. 이들은 자신이 연애를 할 수 있고 거기서 행복해질 수 있을 거라고 생각하지 않는다. 어쩌면 그만큼 영리한 것이다. 또한 사회가 제시하는 권력과정에 ‘포섭’되어 행복을 누릴 수 있을 거라고도 생각하지 않는다. 그 두 가지의 길이 원천적으로 차단되었을 때, 사람들은 그저 쉽고 편하게 살고 싶다는 생각을 하게 되는 것이다. 그 어떤 시도도 거부하게 되는 것이다. 목표나 꿈이 있다고 해도, 그것을 이룰 방법이 없다면 그런 건 의미가 없다. 내 생각에 히키고모리나 귀차니즘에 빠진 사람들, 그리고 니트족들은 오히려 너무도 거대한 목표를 가지고 있었던 사람이 아닐까, 한다. 너무 거대하기 때문에, 너무 불가능하기 때문에, 노력을 포기한 것은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든다. 원하는 것이 이미 이 사회에서 실현 불가능하다는 것을 알고 있기 때문에, 틀어박혀서 그저 쉽고 편하게 살고 싶어진 것은 아닌가 하는.” – 김형진

 

  “우리 세대에게 과거에 비해 많은 풍요와 자유가 주어졌다는 이야기는 오히려 실제로 우리가 처한 위기에의 직시를 가로막는 장애물이 되고 있습니다. 설령 우리의 상대적인 풍요와 자유가 사실이라 하더라도, 우리가 우리 세대에 새롭게 맞이하게 된 특수성으로서의 어떤 공통된 고난과 시련에 대해 침묵하고 견뎌야 한다는 식으로 그 이야기가 신화화되어서는 곤란합니다.  

  사실 우리는 역사상 그 어느 때보다도 무기력한 젊은 세대입니다. 과거의 청년 계급은 이성과, 자유와, 사회 변혁을 향한 의지의 상징이었습니다. 하지만 지금 우리는 우리의 목소리를 높이는 대신 고양이에게 쫓기는 쥐와 같은 몰골로 제각기 열람실로 기어들어가선 책을 펴들고 공부 나부랭이를 하고 있습니다. 젊은이들에게는 이제 어떻게 하면 부조리와 맞서 싸워 이 세계를 변화시킬 것인가 하는 생각을 하기보다는 오직 어떻게 하면 나도 별탈없이 먹고 사는 중산층이 될 수 있을까에 대해 골몰할 뿐입니다.  

  실제로 오늘날 우리 세대가 이 사회에 대해 더 이상 할 수 있는 일들은 없습니다. 세계는 우선 반 강제로 젊은이들의 관심을 사회의 부조리가 아닌 생존의 문제로 완전히 돌려놓았습니다. 그리고 이제는 바늘 구멍 같은 사회 편입의 통로를 손에 쥐고서 살랑살랑 흔들며 그걸로 우리를 협박하고, 농락하고, 기만하고 있습니다. 아무런 힘이 없는 우리는 그저 당하고만 있구요.

  지금 와서 대두되고 있는 생존의 문제는 우리 세대의 잘못이 아닙니다. 물론 역사적인 부분에서 우리가 물려받고 싶은 것만 물려받기를 바랄 순 없습니다. 하지만 어떤 과제가 주어지더라도 어느 시대에나 청년들은 그것들을 해결할 당대의 희망이어야 할텐데, 우리는 그렇게 대우받지 못하고 있습니다. 우리가 무능해서? 우리에겐 처음부터 뭔가를 해볼 기회조차 주어지지 않았습니다. 처음부터 이 사회가 우리에게 정해놓은 자리는 비정규직, 몇 호봉 올라가기 무섭게 다시 짐을 싸야 할 계약직이었습니다. 이제 청년 계급은 사회의 희망이 아니라 값싼 사회의 소모품일 뿐입니다. 물론 전통적인 예외조항들이야 여전히 존재하지요. 의사, 변호사, 그리고 각종 국가고시들.” – 김강록

 

  역시나 길지만, 읽을 만한 글이다. 읽은 사람들은 다시 읽을 필요가 없다. 내가 말하고 싶은 것은, 이것이 동시대의 문제의식이라는 점이다. 김형진은 “자본이 재단할 수 없는 욕망들이 있다.”고 말한다. 그 다운 지적이다. 김강록은 “우리에겐 처음부터 뭔가를 해볼 기회조차 주어지지 않았”다고 말한다. 역시 그 다운 지적이다. 우리가 무얼 욕망하든, 우리에게는 그걸 할 수 있는 ‘선택지’가 없었다.

  그럼 이런 ‘문제의식’이 ‘동시대’의 것이 될만큼 포괄적인데도, 이것을 바꾸려는 움직임이 없는 이유는 무엇일까? 그것은 뭣보다 먼저, 시대가 사람을 몰아대기 때문이다. 시대가 느긋하면 인간도 여유가 생기고, 사람들은 무언가를 ‘할 수 있다’는 생각을 하게 된다. 그러나 이 시대는 그렇지가 않다. 그들이 보여주는 답안은 단 몇 개밖에 되지 않는다. 그것은 사람들의 조바심을 부추긴다. 다른 생각을 하다가는 뒤처지고 낙오한다는 불안감이 조성된다. 그리고 그것이 청년 사회의 흐름이 된다. 결국 모두가 그 흐름에 따라 흘러가게 된다.

  그리고 이 ‘문제의식’이 소수에 의해 공유되는 것이라는 점도 이유가 된다. 자본주의는 하나의 환경이 되었고, 구조는 교묘하기 때문에 그것에 대해 의심을 품는 것은 상당히 어렵고, 또 귀찮은 일이다. 공기가 있다는 것에 대해 신경쓰는 사람이 없는 것과 마찬가지다. 거기에 대해 의심을 품는 것은 ‘교묘함의 장막’을 뚫고 그 속을 들여다보아야 하기 때문에 어렵고, 그걸 본다 한들 ‘너무 거대하고 중첩적이며 위협적이기 때문에’ 귀찮아진다. 뭔가 할 수 있는 일이 없다고 느낀다(흔히 ‘철든다’라고 하는 과정은 바로 이런 걸 말한다). 그러면 남게 되는 것은 ‘주어진 선택지를 받아들이는 것’ 밖에는 없다. 우리는 다시, 즉자존재가 되어야 하는 것이다. 잉크병이 되는 길 말고는 방법이 없게 된다.

  혹자는 이것을 배부른 고민이라고 생각할지도 모른다. 지나가면 다 잊혀질 쓸데없는 걱정이라고 비웃을 사람도 있을 것이다. 그런 생각이 들 때는 공복에 한 번씩 아래에 있는 사르트르가 한 말을 읽자.

 

  “그러나 다른 한편으로 방금 말한 바와 같이 우리의 역사성은 처음에는 절대적인 것을 박탈한 것처럼 보였지만, 도리어 그것을 복원(復元)시켰다. 왜냐하면 우리는 그 역사성을 매일 체험해 나갔기 때문이다. 우리의 기도와 정념과 행위는 이미 이루어진 역사의 견지에서 볼 때는 설명이 가능하고 또 상대적인 것이었지만, 그것들은 현재의 고독과 불확실성과 위험에 비추어 볼 때는 다른 어떤 것으로도 환원될 수 없는 밀도를 지닌 것이었다. 장차 역사가들은 우리가 시시각각으로 열병에 걸린 듯 살아가고 있는 이 시간을 전체적으로 조감(鳥瞰)하고, 우리의 미래의 입장에서 우리의 과거를 밝히고, 우리의 기도의 가치를 그 결과에 따라서, 우리의 의도의 성실성을 그 성공 여부에 따라서 판정하리라는 것을 우리는 모르는 바 아니었다. 그러나 우리 시대의 불가역성(不可逆性)은 우리만의 것이었고, 우리는 이 불가역적인 시대 속에서 암중모색으로 자신을 구하거나 상실할 수밖에 없었다. 무릇 사건들이 마치 강도들처럼 우리를 덮쳤다. 우리는 이해할 수 없는 것, 견딜 수 없는 것과 대치(對峙)하면서 인간으로서의 과업을 이어나가고, 내기를 하고, 확증도 없이 추측하고, 불확실성 속에서 계획을 짜고, 희망 없이 버텨나가야만 했다. 후대의 사람들은 우리의 시대에 대해서 설명을 가할 수 있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누가 무엇이라고 해도 우리로서는 이 시대는 설명할 수 없는 것이다. 오직 우리만이 알고, 우리가 죽어야만 사라질 이 쓰디쓴 시대의 입맛을 가시게 해줄 사람은 아마도 없을 것이다.” – 장폴 사르트르

 

  후대의 사람들은 우리가 처한 ‘선택의 비자유’라는 상황이 전혀 문제가 안되는 것이었다고 말할지도 모른다. 우리가 변화를 꿈꾸는 행동이 하나의 미약한 움직임으로 기억될지도 모른다. 그러나 지금 우리에게, 적어도 한 번 쯤은 ‘지금 내가 선택하려는 삶은 올바른 걸까’라고 자문해본 사람들에게, 이것은 불가역적인 문제다. 우리는 어떻게 될 것인지 알 수 없는 우리의 현실 속에서 공부를 하고 돈을 벌고 틈틈이 책을 읽고 토론을 하면서 우리의 앞날을 헤쳐나아가고 있다. “우리로서는 이 시대는 설명할 수 없는 것이다”. 우리의 문제는, 결국 우리의 문제다. 그것은 우리가 해결해야 할 우리의 문제다.

 
 

4. 변화의 문제

 

  “철학자들은 지금껏 세계를 다양한 방식으로 ‘해석’해왔을 뿐이다. 중요한 것은 세계를 ‘변화’시키는 일이다” – 칼 마르크스

 

  우리는 본질적으로 ‘할 수 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할 수 없는’ 존재이고, 그러므로 반항할 수밖에 없다는 것을 알았다. 그리고 그 반항의 이유가 ‘부족한 선택지’에 있으며, 그것이 ‘우리의 문제’라는 것도 알았다. 그럼 이제 우리는 어떻게 해야 하는 걸까?

  인용문이 말하고 있듯이, 중요한 것은 ‘변화’에 있다. 그러나 그 변화는 쉽지가 않다. ‘구조’의 문제고, ‘환경’의 문제가 되어버렸다. 우리가 우리만의 힘으로 전부를 바꿀 수는 없다. 그런 발상은 딱 스무 살 전후로 유효한 생각이다.

  ‘단시간에 이루어지는 구조의 전복’이 거의 불가능한 것과 마찬가지로, ‘시대의 환경을 벗어나 살아가는 것’ 역시 거의 불가능하다. 좋든 싫든 이 사회를 살아가는 이상 생계를 위한 소득은 필요하다. 물론 내가 원하는 ‘다른 삶’은 ‘일하지 않아도 먹고 사는’ 베짱이 같은 삶은 아니지만, 그런 삶을 간절히 원하는 누군가의 발상 역시 대학교 입학 전후까지 유효하다.

  그렇다면 우리가 해야 하는 것은 하나뿐이다. 이 시대에 살아남아서, ‘다른 삶의 방식’이 가능하다는 것을 직접 몸으로 보여주는 것 밖에는 방법이 없다. 우선 ‘살아남고’, 그러면서 우리가 택하고 싶은 ‘다른 삶의 방식’이 있을 수 있고 또 그것으로도 인간은 충분히 행복할 수 있다는 것을, 대기업이나 안정된 직장이 아니라도, 사회적 지위나 부의 순위에 의해 매겨지는 등수가 아니라도 만족할 수 있다는 것을, 무엇보다 스스로 자신의 가치를 발견하는 삶이 정말로 살 만한 가치가 있는 삶이라는 것을 보여주어야 한다. 그런 삶이 ‘있을 수 있고’, 또 ‘유효하다는’ 것을 드러내야 한다. 그것이 우리가 이 시대에 짊어진 수많은 과제들 중 하나다. 무슬림 여성의 ‘베일 쓰기 문제’에 대한 지젝의 말을 다시 빌리자면,

 

  “그러나 또다른 주장도 가능하니, 자기 몸을 성적 유혹이나 이와 관련된 사회적 교환 및 유통에 내놓는 게임에 참여하지 않는 여성들이 있다는 점이야말로 무슬림 ‘근본주의’를 비판하는 이들에게는 정말 외상적(外傷的)인 충격이라는 것이다.” – 슬라보예 지젝

 

  이런 것이다. 이 ‘비자유의 게임’에 참여하지 않는 사람들이 있다는 것을, 그리고 그런 행동과 삶이 유효하다는 것을 보여줌으로써, 우리는 몇 안되는 ‘선택지’를 강요하는 이들에게 지속적으로 ‘외상적 충격’을 줄 수 있다. 모두가 암묵적으로 동의하는 이 ‘선택의 양식’에 대해 의문을 제기하는 사람들이 있다는 것이야말로 이 시대의 우리에게는 매우 효과적인 전술이다.

  그렇게 하기 위해서 첫째로, 우리는 살아남아야 한다. 나는 그런 면에서 김강록을 지지한다.

 

  “제가 갓 스물을 넘겨 대학생이 되었을 때는 입시생 생활에서 벗어났다는 해방감과 이제 성인이라는 기대감 같은 것들로 한창 고무되어 있었습니다. 하지만 여기에 찬물을 끼얹는 것이, 이른바 ‘1학년 때부터 다짜고짜 열심히 공부하는 되먹지 못한 풍토’였습니다. 그것도 그동안 하지 못했던 정말 내가 하고 싶었던 공부를 찾아서, 라는 식의 뭐 그런 것도 아니고 어디서 주워들은 얘기에 잔뜩 겁에 질린 표정으로 아무 짝에도 쓸모없는 영어 공부를 하겠다는 발상에 대해 저는 분개하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그때는 복학생들이야 제 알 바 아닙니다. 대학 초년생이 영어 공부에 대해 적개심을 갖는 것은 당연합니다.

  그런데 이제 어느덧 저도 복학생이 되었습니다. 또래의 다른 모두와 마찬가지로, 이제 사회로의 진출이라는 문제는 논리적으로 이 다음에 떡하니 있으리라 여겨졌던 관념이 아니라 슬슬 손에 하나둘씩 잡히기 시작하는 현실이 되었습니다. 지금 저에게는 제가 힘으로 혼자서 온전히 자신의 삶을 책임지고 이끌어나갈 능력을 갖춘 사람이라는 자신감이 필요합니다. 그런 자신감을 얻기 위해서는 실제로 제가 뭔가에 부딛쳐서 그것을 겪어봐야겠구요. 그래서 지금 꼭 해보고 싶은 일이, 외국에서 혼자 한번 살아보는 일입니다. 영어는 이를 위해 부수적으로 뒤따르는 수단입니다. 따라서 과거에 영어 공부에 대해 분개했던 것 만큼이나 지금 제가 영어 공부를 하겠다는 것도 역시 정당합니다.” – 김강록

 

  인용문이 많은 건 이제 이해하리라 믿는다. 그의 영어 공부는 정당하다. 그것은 나의 일본어 공부나 김형진의 영어 연습만큼이나 정당하다. 그것은 내가 원하는 ‘다른 삶’의 지향을 잊지 않고 있기에 정당하다. 우리의 선택이 이 ‘비자유’의 시대에는 체제에 편입되는 선택으로 보일 수밖에 없다는 것을 나는 알고 있다. 그러나 그것 역시 ‘메타선택’에 의한 착시일 뿐이다. 내가 그 선택지를 선택한 것처럼 보일지라도, 내가 선택한 것은 그 선택지가 아니다. 내가 가리키고 있는 것은 그 너머에 있다. 나는 그 너머의 다른 삶을 가리키고 있다.

  살아남기 위한 연습을 하면서, 동시에 우리는 스스로의 지향점에 대한 고민과 삶에 대한 ‘검증’을 지속적으로 유지하지 않으면 안된다. 그렇지 않으면 이 시대에 먹혀버린다. 구조 속에 편입된다. 카뮈 식으로 말하자면, 돌을 굴리되 그걸 왜 굴리는지를 알아야 한다. 그게 정말로 내가 필요해서 굴리는 것인지, 아니면 시대가 원하기 때문에 굴리는 것인지를 구분할 줄 알아야 한다. 그러기 위해서 우리는 서로간의 소통이 필요하다.

 

  게임이론에 ‘죄수의 딜레마’라는 유명한 문제가 있다. 이것은 두 명의 죄수(A와 B라고 하자)를 각각 서로 전혀 소통할 수 없는 방에 따로 가둬놓는 것으로 시작한다. 둘에게는 세 가지의 선택지가 주어진다. 둘 다 범죄를 딱 잡아떼면, 둘은 무죄로 석방될 수 있다. 만일 한 명이 다른 한 명과의 공동범죄임을 자백하면 그 사람에게는 정상이 참작돼 5년형을 받지만, 끝까지 잡아뗀 다른 한 명은 10년형을 받는다. 만약 둘 다 자백하면 둘은 모두 10년형이 된다.

  A와 B는 서로 소통할 수 없다. 그렇기 때문에 둘 다 잡아떼면 무죄로 석방될 수 있음에도 불구하고 범죄를 자백하여 10년형을 받는다. 이건 전적으로 ‘소통의 부재’에 의해 생기는 문제다. 우리가 서로 소통하면 우리는 우리의 ‘다른 삶’을 온전히 꾸려나갈 가능성이 높아진다. 그러나 소통하지 못하면 거짓된 자백과 사이비 선택을 하게 될 수밖에 없다. 그것이 이 시대가 말하는 ‘철들기’의 메커니즘이다. 모두가 속으로는 다른 생각을 하고 다른 삶을 상상하는데, 아무도 그렇게 말하지 않는다. 소통하지 않기 때문이다. 모두가 각자의 방에서 주판알만을 튕기면서 5년형과 10년형 사이를 오간다. 그렇게 하면 결국 우리가 받을 수 있는 형량은 무기형 뿐이다. 당신이, 그리고 바로 우리가 꿈꾸는 ‘다른 삶’은 결국 영원히 살 수 없게 될 것이다.

 

 


1) 그 이후의 인생에서도 지속적으로 타인의 기준에 따라 자신의 인생을 검증하며 답을 맞춰가듯이 살아가는 사람이 있다. 나는 그런 삶의 방식이 나쁘다고 말하는 것이 아니라, 그것에 대해 진정으로 생각해보고 스스로 해답을 내서 가지고 있지 않은 한 언젠가는 인간의 본질적인 불치병인 ‘불안’과 마주하게 될지도 모른다는 것이다. 수십 년 동안 살아온 스스로의 인생을, 단 한 번에 부정해야만 하는 때가 올지도 모른다는 말이다. 나는 그런 최악의 상황을 방지하고 싶기 때문에 이 글을 쓴다.

2) 사실상 근대의 공업혁명과 함께 탄생한 모든 노동·노동제도들은 인간을 인간이 아니라 ‘즉자존재’로 만드는 것을 목표로 삼았다. 공장에서 한 명의 인간은 없고, 한 ‘노동자만이 있을 뿐이었다. 복리후생 역시 ‘노동의 효율성’을 위해 점차 개선된 것이지, 결코 인간을 인간으로 대접하기 위한 목적은 아니었다.

3) 나는 이 시대가 준 선택지에 대해 만족하는 사람은 그런 삶을 살아도 된다고 생각한다. 아니 된다 안된다고 말할 수 있는 게 아니라, 그것은 올바른 삶이다. 거기에 진정으로 만족할 수 있다면, 그게 바로 행복한 삶이 된다. 선택지에 있는 답을 고르고 싶은 사람은 그 답을 고르면 된다. 거기에는 시대가 제공하는 편의와 행복이 있을 것이고, 그것에 만족하면 아무 상관이 없다.

  그러나 그런 답은 누구나 고르라고 말하는 것이다. 나는 다른 이야기를 하고 싶다. 문제는 ‘그 선택지가 아니면 안되는’ 시대상황에 있다. 다른 삶의 기회를 제공하지 않는 사회, 그것은 얼마나 불합리한 것인가? 그 ‘다른 삶’을 원하는 사람이 많든 적든 간에, 우리는 그것을 ‘선택할 수 있는’ 자격이 있다. 그리고 그것을 제공할 수 없는 사회는 분명 문제가 있다. 다시 한 번 말하지만, 나는 내 기준의 ‘다른 삶’이 다시 선택지가 되어버리는 상황으로 만들자는 것이 아니다. ‘그것 역시 택할 수 있는’ 사회가 되기를 나는 바란다.

4) 물론 이것이 우리 세대가 그들보다 열등하다는 것을 의미하지는 않는다. 우리의 문제가 그들의 문제에 비해 더 하찮거나 더 중요하지는 않다. 무엇보다, 우리는 그들의 삶을 살 수 없다. 그 시대를 살 수는 없다. 우리는 우리의 시대를 살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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