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월 172006
 


  독일의 저명한 사회학자인 하버마스는 ‘일상(생활)세계의 식민화’ 라는 단어를 통해 현대인의 일상이 처해있는 어려움을 표현했다. 일상, 우리가 매일 매일 친근하게 경험하는 일상이 무언가의 식민지가 되고 있다는 것이다. 무엇이 일상의 주권을 찬탈하였는가? 하버마스는 이데올로기와 같은 거대 담론을 그 주범으로 꼽았다. 이데올로기 뿐 아니라 온갖 형이상학, 세분화된 전문 분야들, 종교적 신념 역시 일상성을 갉아먹는 제국주의 연맹의 회원들이다.

  제국주의적 야망을 품은 거대 담론들은, 그 야망 자체와 더불어 지난 세기 모든 문화적 비평과 비난의 초점이었다. 서구문명은 – 그리고 본의 아니게 그들과 모든 면에서 얽혀버린 동양 문명은 – 지난 세기에 거대한 형이상학이 지닌 위험을 몸소 체험하였다. 나치즘과 파시즘, 레닌과 스탈린주의, 두 차례의 세계 대전, 냉전 등은 일상과 역사의 다양성을 하나의 흐름으로 환원시키려고 하는 시도가 얼마나 어리석으며 그 결과가 얼마나 파국적인지 전 인류의 기억에 잔인하리만큼 선명하게 그 자취를 새겨놓았다.

  이 자취, 현대 서구문명의 집단적 트라우마는 인류의 성격을 지난 세기나 그 이전 세기와는 매우 다른 방향으로 이끌어가고 있다. 인류의 집단적 무의식에 각인된 상처는 여러 콤플렉스를 만들었다… 이 콤플렉스들 중 하나를 키르케 콤플렉스 라고 부르고 싶다. (키르케는 그리스신화에 나오는 여신으로서 스스로의 신적인 우월함을 부담스러워하며 글라우코스라는 어부를 사랑하게 되고 그와 함께하는 소박한 일상을 꿈꾼다. 우연히 이 이름이 떠올랐다.) 이 단어로 내가 의미하고자 하는 바는 대략 다음과 같이 이야기할 수 있을 것이다. 이 시대의 많은 사람들은 진지함에 대해 강한 거부감을 가지고 있다. 그들은 소박한 여유와 일상의 피상성을 그 무엇보다 사랑한다. 삶의 진리는 가장 가까운 곳에서 발견된다는 말에 강한 애착을 갖고 있다. 그 어떤 분야보다도 ‘일상’이라는 분야에 우선순위를 둔다. 훌륭한 성취를 부담스러워하고 안락한 일상을 선호하는 현상, 이를테면 ‘위대함으로부터의 도피’, 이것을 키르케 콤플렉스라고 부르려는 것이다.


하버마스는 일상이 침해받고 있다고 주장했지만 – 그리고 그의 전성기 시절에 이것은 사실이었을지 모르겠지만 – 오늘날 현대인의 일상은 침해‘받고’ 있다기 보다는 침해 ‘하고’ 있다. 현대인에게 일상은 다른 모든 것을 압도할 수 있는 기준이 된다. ; 우리는 가끔씩 진지해진다. 그러나 일상의 근간이 침해받을 정도로 진지해져서는 안 된다. 우리는 종종 무언가에 몰두한다. 그러나 내일 하루가 피로해질 정도로 몰두해서는 안 된다. 설사 어떤 일에 강력하게 몰두할 때에도, 그것은 최종적으로 자신의 일상을 조금 더 풍요롭게 하기 위한 것에 불과하다. 왜 돈에 몰두하는가. 풍요로운 일상을 위해서이다. 우리는 가끔씩 이 세상에 거대한 의미를 부여한다. 그러나 그런 것은 어차피 별 것 아닌 것 같다. “인생 뭐 있어?” 라는 장난스런 말은 결코 시대상황에서 독립적인 말이 아니다. 결국 오늘날의 삶에는 별 특별한 것이 없다. 열정은 과장의 일종으로, 천재성은 광기의 일종으로, 집념은 집착의 일종으로 간주된다. 현대인의 목적지는 탁월함이 아니라 평범함이다. 현대인은 ‘평범한 삶’이 은근히 성취하기 어렵다는 사실을 강조하며, 자신의 목적이 결코 하잘 것 없는 것이 아님을 자랑스럽게 이야기한다.

이런 ‘일상주의’속에서  예술, 철학, 종교 등은 더 이상 독립적인 목적을 갖지 못한다. 이 모든 것은 일상의 노예들이다. 예술은 인테리어를 위해, 철학은 뭔가 있어 보이기 위해, 종교는 단지 마음의 평안을 얻기 위해 활용되는 소모품일 뿐이다.( 때문에 없어도 상관없다.) 모든 것은 집안의 장식장에 진열해 놓을 수 있는 아이템으로 전락한다. 그것들은 단지 각양각색의 방법으로 일상을 아름답게 꾸며주고 있을 뿐이다. 현대인은 그러한 아이템들을 하나씩 획득하며 소박한 즐거움을 느낀다. 그러나 그 아이템 들 중 어느 하나라도 일상의 지배를 거부하고 스스로의 독립성을 표출하기 시작할 때 – 그래서 예술이나 철학이나 종교 자체의 목적이 삶을 지배하게 될 때 – 현대인은 서둘러 그것을 과장이나 광기나 집착으로 매도하고 자신의 평범한 일상을 보호한다. 열정의 지배 하에서 살고 있는 사람들은 소수이며, 그들은 괴짜나 이상한 사람, 싸이코 등등으로 불리게 된다.

조금 과격하게 나열했지만, 이 모든 것이 키르케 콤플렉스의 증상들이다. 이제 내가 이 단어로 어떤 상황을 묘사하려고 하는지 대강 알 수 있을 것이다. 이 콤플렉스는 분명 과도한 억압에서 발생하였을 것이다. 근대의 서구문명은 일상의 희생을 강요하고 위대한 결과물에 집착했으며, 평범함을 경멸하고 천재성만을 찬양하였다. 또한 얼마나 많은 삶과 생명이 종교라는 이름 하에 유린당했는가. 이 모든 것은 더할 나위 없는 폭력이었으며, 이러한 폭력에 대해 강력한 반발감이 생긴 것은 당연한 일이고, 그 반발감을 현실화시킨 현대 문명은 심지어 대단하다고까지 할 수 있을 것이다. 그것은 평범한 민중의 승리였다.

그러나 내가 보기에 지금의 상황은 뒤바뀌어 있다. 여전히 많은 지식인들은 바로 위에서 언급한 폭력성을 비난하고 있지만 그것은 일종의 뒷북치기, 혹은 확인사살이 아닐까 한다.  오직 사소함에서 아름다움을 찾고, 신변잡기적인 이야기만을 즐기며, 삶의 진실을 바로 앞의 일상에서만 찾는 행위들 – 여전히 적지 않은 사람들은 이런 활동 속에서 자신이 독창적인 미의 기준을 발견한 듯 생각하지만, 사실 이것은 이미 진부해진 사회적 분위기의 재생산에 불과하게 되었다. 그리고 내가 지금 비판하고 있는 것은 바로 이렇게 끊임없이 재생산되고 있는 사회적 분위기이다.

  물론 내가 소박함의 가치를 부정하고 있는 것은 결코, 절대로 아니다. 현대인들이 소박한 일상에 주목하게 된 것은 자연스러운 문화사적 행보였으며, 심지어 바람직하기까지 했다고 생각한다. 지나친 진지함과 과도한 목적성으로 가득 차 있는 삶은 얼마나 갑갑한가. 오직 거대한 것들만 노래하고 위대한 것들만 찬양하는 사회는 우리 같은 범인에게 얼마나  가혹한가. 삶에는 여백이 있어야하는 것이다. 그러나 지금 우리 사회의 문제는 여백이 너무 많다는 것이다. 여백의 아름다움은 오직 내용물에 대한 반사적 효과로서만 존재한다. 소박함의 아름다움은 위대함의 팍팍한 성격에 대한 대비 속에서 비로소 빛을 발할 수 있다. 오직 여백으로만 가득한 그림, 소박함과 사소함으로만 가득한 삶, 무목적성과 뻔한 것들이 중심이 되는 세계, 이것이 과연 우리가 원해야할 것들인가? 정말로 수천년의 인류 역사가 온갖 질곡을 견디고 얻어내야 할 것이 겨우 이러한 것에 불과한가?


  키르케 콤플렉스는 부당한 폭력에 대한 정당한 방어기재였을지 모르겠지만, 그 폭력의 힘이 방어기재에 의해 압도된 지금, 다시 말해 일상이 도리어 그 무엇보다 강력한 폭력의 주체가 된 지금, 일상성에 대한 찬미와 애착은 더 이상 정당한 것이 아니다. 우리는 이제 이 콤플렉스를 치유해야할 시점에 와있다. 물론 과거의 교훈을 그냥 잊어버리자는 것은 아니다. 앞에서 언급했듯이, 두 차례의 세계대전과 수많은 거대담론이 인류 역사에 가져다준 폐해는 결코 잊어서는 안 될 것이다. 그러나 이미 세계는 그 반대방향의 폐해를 더 강하게 경험하고 있고 우리는 균형을 맞춰야할 필요가 있다. 이를 위해서 우리는 일상의 의미를 좀 더 다양한 방식으로 이해할 필요가 있다. ‘그냥 뭐 대충 다 그런 것’ 이 일상성의 전부는 아니다. 신변잡기적인 시시콜콜한 얘기들이 일상성의 전부는 아니다. 과학자에게는 연구가, 예술가에게는 예술의 혼에 사로잡힌 순간들이, 종교인에게는 기도가 일상일 수도 있다. 그들에게 그것은 과장도, 광기도, 집착도 아닌 삶 자체일 뿐이다. 나는 오히려 이렇게 ‘진지한 일상’을 소유한 이들에게 소박한 아름다움이 더 선명하게 느껴질 수 있으리라고 확신한다.

  누군가 그랬다. 산다는 것은 어려운 일이라고. 그리고 잘 산다는 것은 정말로 어려운 일이라고. 그래, 정말 어려운 일이다. 짧고 파편적인 사고로 가득 찬, 피상적이고 가벼운 삶을 사는 것은 쉽다. 그러나 그 반대는 정말로 어렵다. 우리의 열정이 게으름에, 진지함이 사소함에, 의미가 무의미에, 질서가 무질서에 굴복하게 되는 것은 쉬운 일이며 순식간에 일어나는 일이다. 그러나 그 반대는 정말로 어렵다. 우리 노력의 대부분은 그 반대를 이루기 위해 사용되어야한다. 오직 그 때에만 일상도 진정한 여백의 미를 뽐낼 수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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재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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