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월 122006
 


전화를 거는 건, 2년 가까이 걸지 않았던 것만큼 내겐 용기가 필요한 일이었어. 그간 다른 누구보다도 너의 소식이 궁금하고, 보고싶은데 그저 견뎌왔으니까. 목소리를 듣게 되어 좋았어. 너처럼 나도 정신 못 차릴 정도로 여러 감정이 벅차올랐지만, 그 모든 건 반가움에 비할 바가 아니었나봐.


나는 운명을 믿지 않기 때문에, 우리가 모르는 사람에서, 사랑하는 사이가 되고, 사랑했던 사이가 되고, 아니 보다 정확히는 이렇게 말로 나눌 수 없는, 과거와 현재, 미래 어딘가의 사이에 놓인 ‘사이’일 지라도, 운명이 우리의 관계를 재단하는 것이라 생각해 본 적이 없어. 그래도 내 삶을 설명하기엔 충분해, 분명해, 너를 만난 뒤의 내 삶을 너 없이 설명하기란 불가능한 건, 내겐 정말 그래. 그래서 너를 지울 수 없어.


처음에는 잊어서는 안 된다고 생각했어. 그러면 나는 정말 나쁜 놈이라고. 우린 아무 것도 아닌 게 되어버린다고. 너는 내 마음을 결코 모르게 될 거고, 다 타고 재만 남았을 얼마간의 흐린 과거의 감정마저, 조금의 의미도 갖지 못할까봐서. 별명이 ‘도라이’라고, 다른 누구에게든 욕을 먹고 미움을 사더라도 아무렇지 않겠지만 네가 날 미워하는 건, 내 말에 귀 기울이지 않는 건 견딜 수 없는 일이었어. 시간이라는 고무줄이 얼만큼이나 필요하든 나는 기다려서 너와 말하고 싶었어.


어렸고, 이기적이고, 짧은 생각이었지. 소통을 강요하는 건, 어떻든 폭력이니까. 나는 군에 오고, 넌 이국으로 떠난 만큼 우리가 우연히라도, 닿기 어렵게 되어버린 걸, 나는 다행이고 잘 됐다고 느꼈지만 꼭 그만큼이나 이 모든 상황에 화도 났고, 미치도록 슬펐어. 그리웠고, 말할 수 없었고, 떠올랐고, 내버려둘 수 밖에 없었어. 그걸 깨고 나는 말을 걸었고,


넌, 시간이 좀 더 필요하다고 했잖아.


그런데 내가 할 수 있는 일이 없다. 왜 무서운지 물어보지만 내가 무섭다는 너에게 나는 맘대로 다가갈 수 없어. 늙었나봐. 전처럼 나와 너의 상처를 무릎쓰고 덤벼들지 못하는 건. 그래선 안 된다고 깨달은 건. 그렇게 이기적이기만 한 거라면 더는 ‘사랑’이라고 부르지 않기로 다짐한건. 이렇게 내가 더는 네가 알던 내가 아닐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문득 겁부터 난다. 아니 나는 너에게 어떤 기억으로 남아 있을까. 너에게 나는 어떤 사람일까. 아무리 용기를 내어도 쉽게 마주칠 수 없는 두려운 일이야. 생각날 때마다, 과학자스러운 내 성격에, 가능한 모든 경우를 상정하고, 너에게게 건넬 말을 연습해보고, 네 마음마저 추측해보곤 하지만, 무엇이 너를 위한 일인지, 그래봐야 결국 날 위한 내 이기적인 뻘짓일 뿐인지, 나는 분명하게 알 수가 없어. 내 욕심대로 하면 모두가 아프고, 둘러싼 환경도 거칠게 휘돌까봐, 두려워. 이렇게 달라진 나는 내게도 익숙치가 않아. 정말이지 일종의 확신감에 그치더라도, 운명이라도 믿고 싶다. 이렇게 할 수 있는 일이 없는데, 너처럼 똑같이 무슨 말을 해야 할지 나 역시 모르는데, 전화를 하고 말을 했어.  미안해. 그리고 전화해주어 고맙다는 말, 정말 고마워.


그 흔한 시간조차도 네게 줄 수 없어 안타까워.
그저 그대로 두고, 점점 엷어지기를, 희미해지기를 언제까지고 마냥 기다릴 수만은 없어.


우린 발디딘 공간에서, 들리는 이름에서, 스쳐가는 소리에서 언제까지고 마주칠 수 밖에 없을테니, 일부러 피하고 한 마디 말도 건네지 않으려면, 그 만큼 더욱 강하게 기억을 붙들고 있어야 하니까. 아냐아냐, 차마 말하지 못했지만, 아직도 사랑하니까. 그래서 널 내버려둘 수가 없어. 날 떠올리면 아프다는 널, 그 상처를 전적으로 너 혼자서 짊어지고 있는 걸 난 그냥 둘 수가 없어.


하지만 전화를 끊고 난, 난 할 수 있는 게 없다. 다시 네게 말을 거는 조차. 우는 목소리가 반가운 것도 더는 아닐테니.


말을 걸지 않든 어떻든 내겐 똑같이 못할 짓이야.


너에게 사랑한다고 말할 수 있을까? 그럴 수 없겠지만, 언젠가 꼭 말할 거야.
사랑하는 사람을, 내 손으로 죽이고 싶진 않지만, 돌이킬 수도 없는 일이지만, 걷잡을 수 없지만.
말하지 않고서 견딜 수 없는 그런 날이 올까봐
그게 두렵다.
그리고 얽혀버린 실타래가 풀려, 맑게 갠 하늘에서 서로를 향해 웃을 수 있는, 그런 일은 절대로 일어날 수 없을까. 있다고 믿기에, 믿고 싶기에 그렇게 하지 않으면 못 살겠기에, 두려워도 용기를 내고 있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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