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월 152007
 

0. 들어가며

  

 우리가 어떤 사물이나 사람을 좋아하는 것이 꼭 그 대상을 잘 알거나 이해하는 것을 전제로 하진 않는다. 내게도 그런 대상이 굉장히 많은 것 같은데, 무라카미 류도 그 중 하나이다. 내가 읽은 류의 책은 고작 두 개인데, 하나는 <식스티나인(69)>이고 다른 하나가 이번에 읽은 <고흐가 왜 귀를 잘랐는지 아는가> – 원제: <엑스터시> 이다. 정통SM소설으로 성性적으로 제법 자극적이라 더욱 즐겁게 읽었는데, 단순히 사디즘-마조히즘을 통한 (일반적이지 못해) 변태적이고 파격적인 성애 묘사에만 주목할 수도 있지만, 그 가운데 ‘자아self’와 관련해서 꽤 중요하고 예민한 문제를 탁월하게 건드려주고 있다는 생각이 든다.

“고흐가 왜 귀를 잘랐는지 아는가?”
  
  그러고보니 궁금하다. 미쳐서 그런 것이라는 설명은 부족하고, 재미도 없다. 비디오촬영기사인 주인공이 해외 로케를 나가서, 한 노숙자(야자키)를 만나게 되고, 그 술과 마약에 쪄든 노숙자가 던진, 이 쌩뚱맞은 질문으로부터 모든 것이 시작된다. 질문에 대한 답도 명쾌하고, 벌써 책 겉표지에 적혀있다.

// “파일럿에게 있어서 최대의 공포는 뭐라고 생각하나? 그래, 비행기를 떨어뜨리는 것이야. 공포라고 하는 것은 상상력에 의해 생긴다. 밥을 먹을 때도 화장실 안에서도 그는 그 공포에서 벗어나지 못해 전전긍긍하다가 드디어 해결책을 하나 찾아냈지. 바로 실제로 비행기를 떨어뜨리는 거야. 실제로 떨어뜨려 버리면 더 상상하지 않아도 되니까, 고흐도 그랬겠지?” // – 책 뒷표지

1. 자기애와 자기비하, 사디즘과 마조히즘

   주인공은 그저 주인공이고, 소설의 중심인물은 야자키, 게이코, 그리고 레이코까지 세 사람이다. 이들의 묘한 관계와 그 관계 밖에서 차츰 그들에게 이용당하고 마침내 게이코에게 철저히 복종당하는 주인공의 심리에서 내가 읽어낸 것은 인간 본연의 자기애와 자기비하 문제, 그리고 바로 거기에서 움트는 보편적인 사디즘, 마조히즘이었다.

  이영기씨의 <발췌언 11. 자기비하와 자기애>  (http://wslm.egloos.com/411572) 를 발췌해보자.

// (전략) 자기비하는 따라서 지나치리만큼 팽창한 자기애를 전제로 하는 경우가 많다. 자기 스스로를 너무도 사랑하기 때문에, 예측하지 못한, 즉 공포 아래에 자신을 두는 것을 못내 견딜 수가 없는 것이다. 따라서 이미 예측한 자신의 단점을 과대 포장하고 직접 설파한다. 모든 행위와 도전의 실패의 원인을 자기 안에서 찾아낸다. 그가 불행하기 때문에 자신을 비하하는 것이 아니다. 그보다는 그 자신 스스로가 너무도 행복하기 때문에 비하하는 것이다. (후략)//  – 이영기, 발췌언 11. 자기비하와 자기애 中

   공포 아래에 자신을 두는 것을 못내 견딜 수 없다는 것, 불안을 견디지 못하고 마침내 상황에 대한 자기통제감을 포기해버리는 것, 그것이 바로 마조히즘의 심리적 연원이다. 이런 심리를 갖고 있는 사람에게 사디스트가 나타나 적당히 방아쇠만 당겨주면, 그는 마조히스트가 된다. 이렇게 되면 자기 스스로가 너무도 행복하기 때문에 자신을 비하하는 것은 이내 자신을 비하하는 것으로 행복과 편안함을 느끼는 것으로 역전되고 마는 것이다.

   사디즘의 심리기제도 이와 비슷하다. 그것은 자신의 기준에 미치지 못하는 자기 모습에 대한 증오의 뒤틀린 표출에 다름아니다. 통제불능의 불안감을 자신의 인격을 버리고 노예가 되는 것을 스스로 택함으로써 해소해버리는 마조히즘과 달리, 사디스트는 다른 사람을 철저히 지배하고, 모든 상황을 컨트롤하고 있다는 느낌을 원한다. 그리고 그 과정의 치밀한 설계와 긴장감을 즐기기 때문에 순수한 사디스트들은 가히 수학적/논리적이라고 할 수 있다. 요컨대 소변을 뿌리면서 사정하고 싶은 게 궁극적인 욕망이라면 어떻게 최대한의 자극과 함께 상대의 마조히즘을 이끌어 내느냐를 생각하는 것이다.

   그리고 작품 속에서 이는 구체적인 성性적 SM플레이로 그려진다, 코카인, 엑스터시, LSD 등의 마약 얘기와 함께, 맨 정신으로는 도저히 쉽게 할 수 없는 행위를 단기간에 최대한 이끌어내기 위하여.

2. SM플레이와 에로티시즘, 강요된 ‘자아’, 그리고 우리의 문제

   이러한 SM의 세계에서, 수치가 없는 곳에는 에로스도 없다. 아마 일본산 포르노를 좋아하는 사람들의 마음 속에는, 인종적 유사성에 따른 친밀감 이외에도, “안 되, 안 되요, 되요, 되.” 의 므흣함에 대한 강렬한 충동이 자리잡고 있음이 틀림없다. (하지만 포르노는 연출된 것임을 잊어선 안 된다.) 작품 속 주인공의 독백을 들어보자.

// 많은 여자와 섹스한 남자를 부럽다고 생각하지는 않는다. 그것만을 지상 최고의 낙으로 삼고 사는 사람도 있다. (중략) 무엇을 하든 돈만 들어오면 된다는 사회성으로 몸을 팔고 있어 수치에 대한 의식이 없다. 수치가 없는 곳에 에로스는 없다. 게이코는 다르다. 게이코는 수치에 뒤범벅이 되어 수치를 제어하고 있다. 게이코의 길고 긴 고백에 등장한 다른 여자들도 모두 자신의 수치, 혹은 자존심이라는 것을 인식하고 있으며, 어느 순간 그것을 버린다. 타인의 폭력에 의해 강제로 하는 것이 아니라 스스로의 욕망을 위해 버리는 것이다. 모든 것은 스스로의 힘을 확인한다. 예를들면 전자공학 통신이니, 무연 가솔린이니 사법시험이니 선거제도니 하는 것들이 그러하다. (후략) // – 책 中, 주인공의 말

   여기까지 왔을 때야 비로소 작품 속에서 게이코와 레이코, 두 명의 대단한 여자를 거느린 사디스트 야자키의 아래와 같은 지론이 독자에게 설득력을 얻게 된다. 그들의 행위는 이제 더 이상 절대이해불능의 변태성욕 도착행위가 아니라 자아self의 문제에서 실패한 개인이 겪는 자기애와 자기비하가 육체적 쾌락 추구의 방향으로 극적 발현된 것에 지나지 않는 것으로 설명할 수 있게 된다.

//
– 책 中 진정한 사디즘에 대한 야자키의 말
“사람들은 사디즘을 단순히 여자를 고문하여 기쁨을 얻는 것이라고 오해하더군, 그게 아냐, 의상을 한 장씩 벗기듯 수치를 잘 벗겨주어 여자가 페니스를 갖고 싶어 죽을 것 갖도록 만들어 놓은 상태에서 그냥 방치해둬, 인격을 빼앗는 것, 그것이 최고로 즐거운 거야.”

– 책 中 노예로 삼고자하는 좋은 아이에 대한 야자키의 말
“좋은 아이라는 것은, 문자그대로, 좋은 술이라든가, 좋은 고기라든가, 좋은 옷이라든가 그런 의미야, 요컨대 소재로서도 좋고, 소중하게 다뤄졌다는 뜻이야.”
//

   그래, 무슨 말인줄 알겠는데 꼭 그렇게 굳이 SM플레이까지 해야한단 말인가. 물론 그럴 필요가 전혀 없다. 어설프게 시도하는 것은, 쉽지도 않고, 위험한데다가, 사회적으로, 정치적으로도 옳지 않은 행위를 저지를 가능성이 높다. 부부강간은 엄연한 불법이며, 당신의 독특한 성적취향을 ‘사랑’의 이름으로 상대방에게 이해하기를 강요하는 것은 용서될 수 없다. 설사 뜻이 통하는 연분을 만났다하더라도 왠만큼 용감함을 넘어서 무모하지 않으면, 어설픈 흉내내기는 결코 쉽지도 않고, 바라던 쾌락을 선사해주지 못할 것이다. 결정적으로 몸에 해롭다. 돈 많고, 시간은 남아돌아 심심하고, 권태에 빠졌고, 약도 했고, 게다가 호색이니까 하는 짓이지.

   게다가 우리 주변에는 이미 대용물이 많은 것 같다. 직접적으로 쇼/오락 프로그램에서는, 욕구의 대리만족 차원에서, 연예인들을 밤낮없이 막 굴린다. 돈 벌기 참 힘들다. 게임을 하고, 퀴즈를 풀고, 벌칙을 받고, 벌칙을 받기 전에 겁에 질린 모습, 벌칙을 받으며 고통스러워하는 리얼한 표정을 클로즈업해서 보여준다. 커플선정의 시간에는 어김없이 관능적인 춤으로 사람들의 성욕을 환기시킨 다음에, 마음에 드는 이성을 향해 수줍은 고백의 말을 건네는 신인 연예인이 등장한다. 선배 연예인들은 윽박지르고, 뻔뻔스럽게 장난스러운 ‘작업’을 걸며 — “나랑 사귈래? 너 내가 그렇게 좋아?”– , 신참내기들은 부끄러워하고, 어쩔 줄 몰라한다, 그래야한다. 굳이 여남을 가릴 것도 없다. “누나랑 사귈래? 예뻐해줄게.” 는 이제 그리 낯설지 않으며, 심지어 쥐잡는 오락프로에서는 여자 여럿이 남자 한 명을 대상으로 거침없이 자신의 욕망을 던져댄다. 위계질서가 확실한 명령-복종의 군대 내 사회에서 이런 프로그램이 더욱 인기를 끄는 이유는 단지 울타리 구성원 다수가 남자이기 때문만이 아니다. 우리는 성욕이라는 기본적인 욕구에 대한 자기통제권을 권력에 이양해버렸고, 마침내 포기하고 상황을 즐기는 데 이른 것이다. 끊임없이 성욕에 불을 당기는 TV프로그램에 집착하지만 만족은 허락되지 않는다. 발기는 시켜주되 사정은 불허하는 이런 마조히즘적인 생활은 울타리 밖의 지극히 폭력적인 사디즘과 쉽게 연결되고 만다. 수많은 남성들이 여성의 인격을 배제해버린 채 자신의 성욕의 배설구로 대상화시키면서도, 동시에 참하고 ‘좋은 아이’이길 바란다. 다른 여자의 노출에는 침을 흘리면서, 내 여자친구의 옷차림에는 하나하나 간섭하고 통제하고 싶다.

   문제를 보다 사회적인 차원으로 확대시켜 생각해 보자.

// 당신이 스스로 설정하고 있는 레벨을 나는 알고 있어, 하고 게이코는 말하고 있는 것이다.
그것이 상대적으로도, 절대적으로도 낮은 레벨이라는 것을 당신은 잘 알고 있어, 태어났을 때부터 당신은 그 레벨을 따라 살아왔고, 한번도 바꿔보려고 하지 않았어 그것 때문에 당신의 얼굴은 언제나 수치에 범벅이 되어 추한 모습을 드러내곤 했지, 몇 번인가 레벨을 올리려고도 해보았지만 실패를 두려워하여 결국은 시도도 해보기 전에 달아나는 꼴이 되고 말았어. 그런 모든 것이 당신의 육체에 노골적으로 드러나 있어, 그래서 당신은 무엇을 해도 만족감이 없으며, 투쟁이라는 단어조차 점차 잊어가고 있어, 사회적인 지위도, 돈도, 세간의 평에도 당신은 아무 관심이 없어, 당신의 관심사는 유일하게 한가지, 자신을 어떻게 벌줄까 하는 것이지… (중략)…그러나 지금은 당신에게는 자신을 벌하는 것밖에 자신을 확인하는 수단이 없으니까, 레벨을 조금만 높여봐, 레벨의 배를 지향하리라고는 하지 않겠어요, 레벨을 아주 조금이라도 높일 수 있도록 분발해, 그 정도, 할 수 있겠지? //
– 책 中 주인공과 게이코의 전화통화에서, 주인공을 노예로 만들어가는 게이코의 말

   자기애나 자기비하의 열쇠가 되는 이 빡센 레벨-‘기준’은 결국 사회, 이 무한경쟁의 살벌하고 냉정한 사회에 뿌리를 둔 것이 아닐까. 그리고 마침내 그 기준이 온전히 개인의 책임으로 귀속됨으로써 자아의 붕괴로 이어지게 되는 것이다. 역설적이지만 평범한 사람보다도 사회/경제적으로 성공하여 높은 지위에 있는 사람이 마조히즘에 쉽게 사로잡히는 까닭도 여기에 있다. 그들이 그런 성취를 얻는 과정에서 쏟은 노력과 처세술이, 결국 “현대사회라는 거대 시스템 속에서, 개인의 의지는 도저히 살리지 못한다.”를 콤플렉스로 각인시킨 것이다. 그들이 스스로 설정한 레벨은 결코 낮지 않지만, 그들은 끊임없이 자기비하를 할 수 밖에 없다, ‘자아’에만 집착하기 때문에.

3. 해법 모색

   해결책은 없을까?

   아마도 우리가 살아가는 사회에서 발생하는 대부분의 자아붕괴에 대한 근본적이고도 시급한 해법은, 사회가 강요하는 ‘기준’을 변혁시키는 동시에 ‘강요’하지 못하는 교육을 만드는 데 있을 것이다. 그러나 흥미로운 사실은 이러한 변혁을 꿈꾸는 사람이 현실과 맞서 싸우며 겪게 되는 눈 앞의 자아붕괴 역시 가만둘 수 없는 지경이라는 것이다. 극좌는 극우와 통한다는 말은 사디즘이 마조히즘과 통한다는 말과 묘하게 섞인다. 이것은 우리의 문제이고 나의 문제이다. 더 나은 세상을 향한 발걸음 도중에 수없이 맞게 되는 숱한 실패와 좌절 속에서, 우리는 ‘기준’을 조정해야만 할까? 기준을 양보하지 않는다면, 스스로 용납할 수 없는 행동을 저지르고 만 자신은 벌을 받아야 할까? 이런 고통과 불안 속에서 고민의 끈을 놓아버리고, 몸담은 운동조직의 노예가 되는 것을 택하는 것은 너무도 편리한 일이다. 마조히스트는 편하다, 의복과 운동과 이름과 의미를 버린 아기처럼, 노예처럼 살면 되니까 편한 것이다.

   그래서 나는 우선 개인의 심리적 건강을 해법으로 제시하고 싶다. (심리적 건강을 해치는 사회를 문제 삼지 않는 것은 아니다.)

   분명 좋은 세상이다. 다양한 성적취향도 받아들여져 즐거운 성생활을 하는 것도 좋고, 누구나 안고 있는 심리적 긴장감을 해소시켜주는 오락프로그램의 효용도 무조건 나쁘게 볼 것만은 아니다. 그러나 문제를 한꺼풀 벗겨내고 보면, 이런 방책들은 자아의 붕괴를 막는 쿠션의 역할을 하는 것임엔 틀림없지만, 그 부작용을 결코 쉽게 볼 수 없다는 점에서 최선이라고 보기 어렵다. 감각자극을 통해서만 심신의 권태에서 벗어날 수 있고, 섹스를 통해서만 살아있음을 느낄 수 있다는 것은, 결국 인간의 인격을 부정하는 것으로 이어지고 휴머니즘을 쓰레기통에 쳐 박기 쉬워지기 때문이다. 쾌락은 좋다, 쾌락이 없다면 정말 살기 힘들 것이다. 그러나 끝없는 쾌락의 추구는 언제나 파멸을 품고 있음을 잊어서는 안 된다.

   심리적 건강에는 역시 관용, 그 중에서도 ‘남처럼 느껴지는 자기 자신’에 대한 관용이 필수적이다. 마지막으로 책 속에서 끌어온 다음 단락은 이런 점에서 의미심장하다.

// 그남자의 에너지원은 오로지 한가지, 건강할 때의 자신에게 레벨을 설정하여 그에 미치지 못하는 또다른 자신을 증오하는 것이었어요, 나는 책 같은 건 별로 읽지 않지만, 그런 다이너미즘이 어떤 계기를 만들고 그 계기가 서로 연결되어 기승전결 같은 게 생기는 것이 아닐까요, 인생의 교훈따위에 반응하는 것은 지쳤을 때이고 종교속에 사는 사람은 모두가 지친 사람이겠죠? 아무튼 건강할 때의 레벨에 항상 세팅되어 있는 그남자의 아드레날린이 지친 자신에 대해 맹렬하게 화를 내기 시작한 거에요. 그것이 그 남자의 메커니즘이었죠, 만약 그것만 제대로 파악하고 있었다면 미에 같은 전형적인 보통 여자를 강간하지 않아도 됐을 거에요, 힘이 없을 때의 자신에게도 조금 다정하게 말을 걸어주면 좋았을 텐데, 그건 타인이니까, 타인을 인정한다는 것은 그런 것이니까 말이에요.   //  – 책 中 ‘야자키의 사디즘’의 매커니즘에 대한 게이코의 말

   자기가 최고로 건강할 때의 레벨에 자신을 세팅하는 것은, 언제나 레벨을 낮추어 조정하거나, 마조히스트가 되거나, 자신을 지우는 것 등의 위험을 내포한다. 우리는 우리 몸 속에 하나의 자신만 있는 것이 아니라는 당연한 사실을 적극적으로 되새겨야 한다. 누구나 고상한 동시에 천박하고, 외향적인 동시에 내성적일 수 있다. 심리학에서도, 한 사람의 성격이 고정불변의 특질이라는 것이 전통적인 입장이라면 최근에는 상황에 따라 변화무쌍한 ‘자아’의 모습과 그 변화양태, 그리고 균형에 보다 주목하고 있다. 자아정체감의 일관성을 높이는 것이 삶의 주관적안녕감, 행복을 보장해준다는 연구결과는, 심지어 각기 다른 웹 사이트, 온라인 게임마다 각기 다른 ‘자아’를 만들어 관리해야하는 이 미칠듯 복잡다양한 현대사회에 더이상 딱 들어맞지 않게 됐다. 최근의 연구들은, 상황에 따라 폭발적으로 다양한 복합정체성의 개념을 지지하고, 그것은 병적인 정신분열이 아니며, 개인 스스로가 여러 개의 ‘자아’가 존재함을 인지하고 그것들 사이에 밸런스를 유지하고 있을수록 더 행복을 느낀다는 것을 증명해주고 있다.

  덧붙여, 당장 여러가지 문제로 불안과 공포에 시달려 처방이 시급한 사람들에게는 단기간에 심리적 안정성을 확보할 수 있는 방법도 있다. 새삼 이론을 들먹이며 말할 것도 없고, 굳이 일상적 언어로 적어보면,
 
  “그렇게 방 구석에 쳐 박혀 뒹굴기만 하니까, ‘자아’의 문제에만 천착하다가 궁상을 떨고 있는 게지, 나가서 사람들을 만나고, 호연지기를 길러야지. 혼자만 잘살믄 무슨 재미야?”
 
  (그리고 방 구석에 쳐 박혀 있는 것과 관련해서는 김형집의 인상적인 글이 있습니다.
   <060409 김형진, 귀차니즘, 니트족, 그리고 히키고모리. 나는 행복해 질 수 있을까.> )

 

4. 마치며

  // 고흐는 자신의 레벨을 최초의 작품을 그렸을 때에 맞추었다. 그 이외의 자신은 모두 용서할 수 없었다. 그래서 자신에게 벌을 준 거다. // – 책 中  “고흐가 왜 귀를 잘랐는지 아는가?” 에 대한 주인공의 답

  거 참, 그럼 눈을 도려내지 왜 귀를 잘랐을까? 그러나 만약 눈을 도려냈으면 그의 많은 작품은 세상에 빛을 보지 못했을 것이다.
  비슷한 이유로 나는 평소 한치의 잘못도 허락치 않는 완벽주의자를 경계하는 편이다. 나는 자신의 치부를 드러낼 줄 아는, 자신의 천박함마저도 끌어안을 수 있는 사람을 사랑한다, 그런 사람이야말로 타인을 진실되게 사랑할 수 있다, 그런 사람이 되고 싶다.
 
  분노에 기인한 피의 숙청은 시스템의 노예가 되는 것과 다를 바 없다.
 
  다른 세계는 건강한 자아를 가진 사람에 의해서만 가능할 것이다.

  One Response to “사디즘과 마조히즘, 건강한 자아를 찾아서”

  1. 독서와 토론 목요일 1,2교시 이명현 교수. 모달과 같이 들으려고 노력중이다. ㅋㅋㅋ
    엠에센 주소 가르쳐줘. 난 wslm2071@hotmail.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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