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월 072006
 

금각사는 절 이름이다. 금각사는 소설의 배경이자, 주인공에게 가장 아름답고 절대적인 존재이다, 그리고 바로 그렇기 때문에 파괴욕의 대상이 된다. 소설은 이런 금각사를 키워드로 하여 문학적으로 가히 완벽한 구성을 갖춘 것 같다. 소년의 자기고백적인 회고를 꽤 담담한 필치로 풀어가는 것이, 독자로 하여금 소년의 마음 속에 이는 폭풍과 같은 갈등을 보다 생생하게 느낄 수 있게 해 준다. 


모든 기대는 어긋나기 마련이라 했던가. 잡지에 소개된 게임을 기다리고 기다리다 마침내 구입하여 플레이했을 때, 게임의 스토리라인과 캐릭터 설정, 혹은 세계관에만 매료됐던 나는 조작성과 인터페이스, 오락성에 있어서 실망하고 슬며시 방 한쪽 구석에 게임을 숨겨놓은 적이 많다. 그렇지만 다른 누군가가, (특히 게임을 사 주신 아버지가) 게임에 관해 묻는다면, 나는 오랜 기다림의 시간동안 보여온 나의 태도를 순식간에 바꾸어버리는 실없는 놈이 되지 않기 위해서라도 거짓말을 하게 된다. 정말 재밌다고, 최고라고. 그리고 이런 거짓말은 머지않아 실제 그 게임과는 다른, 상상의 게임을 플레이하는 것으로 이어진다. 나는 존재하지 않는 게임을 상상하고, 있지도 않은 플레이 경험을 꾸며내 친구들에게 소개하기도 한다. 마침내 그 상상의 존재가 나의 삶을 통제하는 데 이른다. 나는 현실과 상상의 차이를 좁히기 위해서, 상상의 게임을 직접 만들어내겠다는 생각도 하고, 게임은 무용하고 해롭다며 모든 게임을 처분하고, 접어버릴 생각도 하게 된다.


마찬가지로 승려인 아버지의 영향으로 어렸을 때부터 ‘금각사’를 한없이 이상화하고 동경해 온 주인공이 마침내 죽음을 앞둔 아버지와의 여행에서 금각사를 실제로 보았을 때, 당연하게도, 환상은 깨어져버린다. 곧이어 아버지가 죽고, 소년은 아버지의 동기가 주지로 있는 금각사에 도제로 맡겨진다. 찢어지게 가난한 집안형편과 병약한 아버지가 보는 앞에서 친척어른과 결합하는 어머니, 그런 어머니와 떨어져지내는 것은 소년에게 다행스러운 일이며, 소년의 어머니에 대한 감정은 증오나 복수조차 아닐만큼 싸늘하다. 그런 소년이기에 아름답기는 커녕 고작 낡은 절에 불과한 금각사를 상상 속에서 끊임없이 가장 아름다운 것으로 만들어 자신을 세뇌시키고, 마침내 현실의 금각사를 보면서도 아름다움을 느낄 수 있게 된 것은 어쩌면 필연적일지도 모른다. 말더듬이로 주위의 놀림을 당하며 끊임없이 내면에 천착하는 소년의 성격도 이를 충실히 뒷받침해준다. 게다가 그는 금각사에서 일상을 보내며, 어머니의 격려처럼 열심히 수련해서 금각사의 주지가 되어야한다는 압박감을 안고 있다.


이런 소년이 절에서 보내 준 대학에 다니며 만나게 된, 안짱다리 가시와기를 통해 인생과 예술, 세계관의 변화와 갈등을 겪게 된다. 자신이 말더듬이라는 약점을 가진 것 처럼 안짱다리라는 치명적인 약점을 지닌 가시와기는, 그러나 자신의 단점을 그 자체로 삶의 조건이자 이유, 목적, 이상, 삶 그 자체로 보고있다는 점에서, 소년의 마음을 뒤흔든다. 가시와기에 따르면 존재의 불안이란 자신의 충분히 존재해 있지 않다는 사치스런 불만에서 싹트는 것에 불과하고, 따라서 그에게 불안은 실로 존재하지 않는 것이다. 가시와기가 동정을 깨버리고, 숱한 여자와 놀아나면서 그녀들에게서 돈을 뜯어내고, 사랑의 상처를 남기는 생활 등은 소년에게 일종의 동경의 대상이자 성장의 생장점이 된다. 하지만 소년은 여자와 자지 못한다. 중요한 순간마다 금각사가 떠올라 그를 발기불능으로 만들기 때문이다.


그래서 소년은 금각사를 불태울 계획을 세운다. 소년이 영원한 아름다움으로 인식하고 있는 아름답지 않은 ‘금각사’를 떠올리며, 동시에 눈 앞에서 자신을 원하는 여자를 사랑할 수는 없다. 금각사를 불태워버린다면, 상상의 세계에 놓인 절대적인 아름다움은 현실의 아름답지 못한 금각사와 충돌하지 않을 것이다. 금각사의 아름다움에 관하여 자신이 거짓말을 하고 있다는 죄의식, 금각사를 떠올리는 것만으로 따라오는 무기력함과 자기소외, 도제로서의 자신의 일상과 아버지와 어머니의 기억은, 소년이 여자를 끌어안는 것을 불가능하게 만든다. 현실의 금각사가 사라진다면 이 모든 것을 해결할 수 있을까?


여기서 소설은 우리에게 인식과 행위를 둘러싼 고민을 던져준다. 세계의 변화는 인식에 달렸나, 행위에 달렸나? 금각사를 절대 미로 ‘인식’하고 있는 소년의 <인식의 오류>를 바로잡는다면, 굳이 금각사를 불태우지 않고서도, 신도들의 기부금으로 기방을 드나드는 추악한 노사가 주지로 있는, 추악한 현실의 금각사를 직시할 수 있게 된다. 소년은 굳이 금각사에 집착할 필요없이 도제 생활을 관두고 환속하여 새 삶을 꾸려갈 수 있을 것이다. 세계를 변모시키는 것이 ‘행위’에 있다고 본다면, 소년의 삶에 있어서 뗄레야 뗄 수 없는 ‘금각사’를 버리지 않은 채, 추악한 금각사만 태워 없앨 수 있다.


‘인식’의 포커스를 바꾸는 것이 모든 것을 해결해 줄 수는 없다. 우리가 발붙이고 있는 세상은 금각사가 아니기 때문에, 인식의 오류를 바로잡으려는 시도가 자칫 삶에 대한 방기가 되어버린다면 곤란하다. 상상 속에 놓인 최고로 멋진 게임을 현실과의 괴리를 이유로 포기해버리는 것은 굉장히 편리한 일이지만 결코 옳다고 볼 수 없다. 마찬가지로 잘못된 인식에서 비롯한 섣부른 ‘행위’ 역시 소년을 방화범으로 만들 뿐 이다. 오직 나만의 환상 속에 존재하는 지극히 개인적인 게임을 최고로 내세우는 것은, 다른 사람에게 플레이를 강요한다는 점에서 폭력이고 그 게임이 현실에 여전히 존재하지 않는다는 점에서 기만이다.


물론 인식과 행위를 반드시 분리시켜 생각할 수 있는 것은 분명 아니다. <지행일치, 아는만큼 행한다>라는 말의 반대편에는 <행동을 통해 알게 된다, 인식은 일종의 행위에 다름아니다>라는 입장이 있다. (실제로 정서에 관한 이론에는 이와 관련해 Cannon-Bard이론과 James-Lange이론이 있다.) 결국 무엇보다 중요한 것은 우리가 얼마나 순간적인 감정과 단편적인 경험에 매몰되지 않고, 참된 인식과 그에 비롯한 행위를 이끌어 낼 수 있느냐에 있다고 본다. 우리는 세계를 보다 정확히 인식하려 노력할 수 있을지 몰라도, 세계를 버릴 수는 없는 것이고, 버려서는 안 된다. 그리고 바로 그런 인식의 행위가 늘 구체적 삶의 행위로 연결될 수 있도록 노력해야 한다. 행위하지 않는 삶은 존재하지도 않지만, 우리가 올바른 신념에 따라 ‘행위’하지 않는다면, 언제까지고 다만 인식의 방에 갇혀 그저 발기불능을 해결할 수 있을 뿐, 사회적으로 옳은 삶에는 결코 다가갈 수 없다.



* James-Lange이론(교감신경계의 흥분을 통해 우리는 우리의 감정을 알게 된다. 우리가 도망치고 있기 때문에 두려운 것이다 식의 입장)
* Cannon-Bard이론(내적 감정의 추동이 신경계의 흥분과 행동으로 이어진다. 우리는 두렵기 때문에 도망친다. 식의 입장)



말더듬이 소년의 성장소설,
인식과 행위를 둘러싼 고민,
자유와 행동의 근거에 대한 섬세한 묘사와 예리한 통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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