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월 082006
 




  책을 다 읽고 나니 “나는 자유인이다!”라고 철지난 TV광고에서 한 청년이 외쳤던 말이 떠오른다. 그러나 아쉽게도 나는 그렇게 외칠 수 없었다. 책을 통해 어떻게 하면  인간이 (현상학적으로) 진정 자유로워 질 수 있는지 다시금 고민했고, 또 어느 정도 알게 되었다. 그러나 역설적으로 나는 부자유의 삶을 선택하기로 결정했다.
 
  세상에 ‘나는 자유롭다.’라고 감히 말할 수 있는 사람이 얼마나 있을까? 그 위대한 인도의 간디마저도 성적 욕구에 허덕였다고 들었다.  굳이 동서고금의 ‘자유’를 논하지 않더라도, 우리는 ‘자유’에 관한 일상의 경험을 누구나 갖고 살기 마련이다. 시험이 끝난 날, 혹은 한가지 고민거리가 해결된 날이면 어김없이 스스로 자유인이라고 말하며 해방감에 도취되곤 했던 내 모습이 문득 그리워진다.
 
  이러한 체험을 반복한 나는, 책머리에 적혀있는 [선택의 굴레]라는 글을 읽으며 본격적으로 책에 빠져들기 시작했던 것 같다. “인생은 선택의 연속이며 우리는 참으로 [선택의 굴레]를 쓰고 이 땅을 살아가고 있다. ‘나에겐 이것과 저것 중에 하나를 택할 자유가 있다’ 라고 말할 수도 있겠지만, 이것은 지금과는 다른 새로운 가치(속박)를 택한 것에 지나지 않으며 그 새로운 선택 이후에는 또 다른(더 나은) 가치를 위한 선택이 기다리고 있을 뿐이다. 그에게 있어 진정한 자유의 순간이 있다면 그것은 새로이 선택한 가치로의 이행 직전의 극히 짧은 순간일 뿐이며, 이는 마치 말이 안장을 교환하는 순간의 잠깐의 기분전환 정도밖에 되지 않을 것이다.” 이것이 누구나 겪고 있듯 나 역시 늘 겪는 속박과, 해방감에 따른 자유에 대한 그르니에의 명쾌한 설명이다.
 
  책의 전체적인 논지의 전개에서 굉장히 논리적이고, 명쾌하고 속 시원함을 느끼면서도, 무언가 극을 달린다는 느낌을 받았다. 속박의 상태를 피하려 하지만 그럴수록 더욱 속박의 필요성을 느끼게 되고, 자신을 지배할 가치체계를 찾게 되는 인간의 모습을 보면서, 우리가 일생동안 선택의 굴레 속에서 결코 자유로울 수 없음은 분명한 사실이라는 생각이 든다. 그런데, “그렇다면 선택의 연속인 인생의 굴레 속에서 진정한 자유를 얻기 위해서는 어떻게 해야 하는가?” 에 대한 자연스런 물음에 대해, 작가가 제시한 답변은, 뜻 밖에도 도덕경을 인용한, “진정한 자유를 얻기 위해서는 먼저 모든 가치를 무시해야, 아니 동등하게 보아야 한다.” 였다.
  우리나라 사람들은 (아니 시골의 우리 조부모 내지 부모세대 정도?) 이미 노자처럼 사는 것이 몸에 약간씩 배어있기 때문인가? 아니면 교과서 등을 통해 노자를 많이 접했기 때문일까? 어쨌든 책의 제 3장 ‘무위’ 는 온통 노자에 대한 간단한 첫 소개와 그의 핵심 이야기로 가득 차 있었는데 프랑스 인이 노자를 말한다는 것이 조금 흥미로웠을 뿐이지 도무지 대단한 대답을 얻었다는 기분이 들지 않았다. (노자가 별 볼일 없다는 건 결코 아니지만)
 
  제1장을 통해서 개인의 존재와 자유가 무엇인지, 우리가 어떤 식으로 행동하고 있는지에 대해 몇 가지 이야기를 통해 철저하고 체계적으로 설명하는 것에 감탄했다. 또 2장에서는 ‘존재의 숙명’ 이라 하여, 자유는 보통 생각하는 것처럼 추상적인 개념만은 아니며, 결국 운명과 숙명에 대한 인간의 태도 때문에 자유를 추구하게 된다는 설명에는 공감을 한다. 문제는 짧은 분량의 제3장을 읽고 나면 상당히 허탈하다는 것이다. 어쩌면 입에 자주 오르내린다는 이유로 익숙해진 나머지 나는 ‘노자’의 道, 즉 진정한 자유의 길을 내 팽겨쳐두고 살아가는 것이 아닐까라는 불안함마저 들었다.
  다시 되뇌어보는 <도덕경>의 말은 언제나 강력한 유혹을 내뿜는다. 말 그대로 옮겨 ‘아무것도 하지 않는다.’ 얼마나 무책임하고, 달콤한 말인가. 물론 무위란 단순히 무기력이나 게으름과는 구별된다. 이른바 의지가 깃들인 적극적인 의미의 ‘아무것도 하지 않음’인 것이다. 좀더 정확히 표현하자면 ‘구태여(혹은 애써) 움직이지 않는다.’라고 한다. 나는 형식적으로, 논리적으로, 분명히 노자의 이야기처럼 생각하고, 행동하면 절대 자유의 경지에 도달할 수 있다는 것을 십분 이해한다. 그러나 과연 그게 그리 쉬운 일인가? 이렇게 보면 이 책이 가져다주는 철학적 화두는 ‘자유’에 관한 논의는 차치하고 어떻게 살아야 옳은지에 관한 문제에 있어서, (동양 철학이 주로 수양론적인 설명을 했던 반면 서양 철학에서는 무엇이 옳고 그른지에 대해 설명하려 했다는 사실, 그래서 이 책이) 동서양 철학의 조화를 꾀한 것? 이 아닐까 조심스레 짐작해본다.


  그렇다면 서양 철학자인 작가 조차도 노자의 道가 올바른 행함의 길이라고 밝히고 있는데, 그에 따라 과연 우리는, 자유를 얻기 위해서 얼마나 많은 것들을 포기해야 하고 또 얼마나 많은 수양을 해야 할까?
  심성이 비비꼬여 삐뚤어진 탓인지 몰라도, 자유를 얻기 위해 그렇게 해서 궁극적 행복의 경지에 이르기 위해서 노자의 수양론을 따른다는 것이 오히려 ‘자유에 관한 강한 욕망과 집착’이라는 생각이 든다. 현대를 살아가는 나는 이미 다른 사람과의 인위적인 관계없이는 연명하기조차 어려운 것이 현실이다. 그리고 그 속에서 여러 사람과 어울려 보대끼면서 삶 속 작은 일에서 행복을 느끼는 것이 가능하다. 그런데 사람들은 어떻게 하면 더 큰 행복을 얻을 것인지, 어떻게 하면 삶에 대한 고민이 없는 궁극의 자유, 아니 자유의 ‘느낌’에 이를 수 있는지를 계속해서 탐욕스럽게 추구한다. 예를 들어 TV에 가끔 나오는 도올의 노자 강의가 선풍적인 인기를 끌었던 것을 보면서 나는 이제는 ‘자유’나 ‘행복’마저도 부와 명예와 같은 경제적 재화가 되었다는 생각이 들었다. 이런 마당에 세속적인 욕망을 버리고, 가진 것을 포기하라는 말은 죽음을 앞둔 어르신이나 버릴 것이 많은 부자에게는 쉬운 말인 줄 몰라도 꿈 많은 젊은이, 치열한 현실을 살아가는 청장년에게는 실천하는 것 자체가 더 큰 고통이 아닐까?


  철학자는 해법을 제시해주는 사람이 아니라는 것을 새샘 확인하고 만다. 다만 삶에 대한 많은 얘깃거리, 고민거리를 제공해 줄 뿐이다. 부족하게나마 내 나름의 행복관? 자유관? 따위를 몇 마디나마 정리하게 된 건 보람있는 일이다.
  현상학적 자유가 ‘뭔가로부터 속박을 당하고 있는 상태에서 그것으로부터 벗어나려하는 상황’에서 느낄 수 있는 것이라면 대체 무엇이 나를 그리 속박 하길래 나는 자유를 원할까라는 고민을 할 수 있다. 그에 대한 나의 답은 차라리 부자유를 택하라는 궤변이다. 자신의 선택이라면 (하지만 강요된 선택이라면? 어쨌든!) 내 자신을 속박하고 있는 그 무엇도 큰 의미가 없어질 것이라는 생각에서이다. 그러니까 나는 부자유하지더라도, 그것이 내가 의지를 가지고 적극적으로 선택한 부자유라는 것이다. 역설적으로 그 편이 오히려 자유로 인한 행복의 문제에 얽매이지 않는 더 자유로운 상태가 아닐까? 우리의 삶, 그 실존을 그대로 받아들이는 용기에서 비로소 자유가 샘솟는 것 아닌가? 물론 삶의 과정 속에서 그러한 부자유의 기준선은 — 강요된 선택이므로 부자유한 것 or 선택한 부자유이므로 자유로운 것 — 계속해서 고민거리가 될 것이다. 그러나 그것은 문제가 아니다. 나는 반성이 필요없는 삶은 오히려 행복한 삶이 아니라고 생각한다. 순간순간의 행복을 느끼면서도 죽을 때까지 고민하며 사는 것이 올바른 삶이라고 믿기 때문이다.
 
  책을 덮은 지금, 또다시 여러 가지 의문점이 생기기 시작한다. 노자의 말, ‘의지를 갖고 적극적으로 가치를 인식하지 않고, 아무것도 하지 않는 것’과 나의 결론, ‘의지를 가지고 적극적으로 부자유의 상태를 매번 선택하는 것’ 사이의 차이는 뭘까? 그 차이이, 행복의 차이는 큰 것인가? 아니 단지 관점의 차이에 불가한가? 상보적일 수는 없는가? 아니, 이 모든 게 자기기만일 뿐인가?
 
  사랑, 우정, 이해관계, 그 밖의 모든 이름 지어진 것들을 포기하고 어디론가 아는 사람도 아는 거리도 없고, 챙겨야 할 일도 간섭하는 사람도 없는 낯선 곳으로 훌쩍 여행을 떠난다면, 노자가 말하는 자유를 직접 체험하는 기회가 생길지도 모르겠다. 아아- 그러나 그건 너무나 머나먼 이야기인 것만 같다. 나는 법정 스님의 ‘무소유’마저도 뽀대난다는 이유로 ‘소유’하고 싶은 속물이기에.
 

*  새로 생긴 의문들은 천천히, 앞으로 천천히 생각해보고, 또 이 책 역시 몇 년이 지난 뒤에 다시 한번 읽어봐야겠습니다.


* 다시 읽어보니 이거 완전 개인적인 궤변 노가리가 됐네요, 내공 부족이 드러납니다. 청하씨와 승일씨 말고 다른 분들도 ‘자유’에 관하여 써 주셨습니다. 희석 씨와 계영 씨 그리고 밑에 현호 씨의 글 등드르등. 또 기대해볼랍니다.


* 현상학적 자유와 객관적인 자유, 그 고리에 관한 생각이 쉬 정리가 되질 않네요. 승일 씨가 양자역학을 통한 객관적인 자유를 입증하는 데 무게를 두는 이유가, 그것이 (무너져만 가는) 현상학적 자유를 지탱해 줄 수 있다는 생각에서 일까요?


청하 씨는 객관적 자유가 없다하더라도, 현상학적 자유는 ‘의지’와 ‘느낌’이라는 별도의 문제로 보아야한다는 입장인가요? 연역논리라는 예리한 칼로 단 번에 객관적 자유를 증명해버린다면, 자칫 인간의 ‘자유’를 둘러싼 귀납적 연구, 이를 통해 높일 수 있는 인간행동의 ‘예측가능성’에 장애물이 될 수 있다는 염려를 하시는 걸까요. 두 분의 계속되는 논의에 깊은 관심과 경의를 표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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