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월 252006
 

바다 밑의 장난전화 2006-09-25 09:11:31

“여보세요?”

나는 대답하지 않는다. 처음엔 원래 그렇다. 이렇게 대답을 안했을 때 반응은 갈라지기 때문이다. 크게 두 가지. 반응 하는가, 하지 않는가. 나는 내가 반응하지 않고도 나오는 반응을 듣는 것이 즐겁다. 그것은 홀로 쏟아져 나오는 것이다. 내가 굳이 끄집어 내지 않아도 되는 것이다. 나는 거지가 아니다. 내가 구걸해서 그들의 언어의 지갑에 담긴 반응들을 끄집어 낼 필요는 없다. 나는 다만, 가만히 있으면 된다. 그렇게 그 반응을 기다리는 것이다. 만약 반응이 없다면? 끊으면 그만이다. 이렇게 깔끔할 수가. 뭐하는 짓이냐고 혹자는 타이를지 모르겠지만, 이것은 순전히 받은 녀석의 잘못이다. *23#. 발신번호 표시제한인 것을 뻔히 알면서 받는 사람들은 대체 뭐하는 작자들인가. 나는 알 수가 없다. 어쨌거나 잘된 일이다. 무작위로 추첨된 번호로 전화를 거는 것 뿐. 받는 것은 상대방의 이야기니까. 무얼 하다 받는지도 알 수 없는 노릇이다. 별로 알고 싶지도 않고.

한참을 대답하지 않자, 저쪽에서도 반응을 하지 않는다. 이렇게 되면 대결이다. 겨루기다. 누가 먼저 이 침묵을 못 참고 반응 하는가. 행여 저 반대편의 사람은 자기가 아는 누군가를 상상하고 있는지도 모를 일이다. 나처럼 단순한 힘겨루기가 아니고, 생각나는 사람이 있어서 가만히 있는 것일 지도 모른다. 실제로 나는 그런 경우를 많이 겪어 봤다. 내가 대답을 안 하고 있으면 가끔 낯 설은 이름을 부르는 저편이 있었다. 아마도 헤어진 지 몇 달, 혹은 몇 해가 된 옛 연인이거나 친구이겠지. 수화기 반대편의 사람은 그렇게 함부로 추측을 하고 바보짓을 하는 것이다. 지금 내가 통화하는 사람도 그런 바보짓을 저지를지도 모른다. 그럼 나는 전에 했던 것처럼. 그냥 웃어주고 끊어야지. 알쏭달쏭한 물음표만 남긴 채. 뚜뚜 거리는 수화기만을 저편에 남겨둔 채.

비가 내린다. 굳이 날씨 탓을 하지 않더라도, 나는 밖에 잘 나가지 않는다. 밖에 나가는 것은 할일이 없는 짓이다. 차라리 안에 있는 것은 많은 일들을 만들어 낸다. 굳이 밖에 나가 일들을 구걸하지 않아도 태어나는 것들이 이 안에 있다. 사람은 누구나 잠재된 사건들을 안고 있는 법이다. 그런데 구태여, 나가서 약속을 만들고, 사람을 만나고, 무언가를 하고 하는 행위들을 한다니. 그것은 정말 쓸데없는 일이다. 사건의 에너지를 100으로 본다면, 어떤 식으로 수행하든 그 100을 채울 수 있다는 것이다. 결과는 똑같은데 그 방법을 달리해야 할 이유는 없다. 게다가, 이 안에 있더라도 나는 얼마든지 100을 채울 수 있는 수만가지의 방법을 만들어 낼 수 있다. 이를테면, 오늘 나는 물구나무 선 채로 30분을 있었다. 이런 엄청난 사건을 일으킨 것은 나 장본인이다. 그 안에서도 자의를 벗어난 것들은 있기 마련이다. 마치 바깥처럼. 예를 들어 파리가 날아와 물구나무 선 내 몸에 앉아 무게를 더한다던가, 선풍기 바람 때문에 꼿꼿이 선 내 몸이 흔들린다던가 하는, 그런 타의성 짙은 사건들. 그러니까, 나는 자의도 있고 타의도 있고, 어차피 결과론 적으로 똑같은 사건이 일어나는 이 안에서 사람들이 목매다는 바깥과 같은 인생의 쾌감을 즐기고 있는 셈이다. 갖혀 있다구? 그건 옳지 않다. 나는 스스로 여기에 있는 것이다. 내가 모를 리 없다. 내가 여기 있는 것이, 타의라면, 내가 모를 리 없다.

상대는 계속 대답을 하지 않는다. 생각나는 사람이 너무 많은 것일까. 그래서, 섣불리 누구 한명의 이름을 부르기가 힘겨운 것일까. 아니면, 나와 똑같은 힘겨루기를 하고 있는 것일까. 하기야, 전화비가 나가는 쪽은 내 쪽이다. 이것은 어쩔 수 없는 원칙이다. 즉, 힘겨루기에 핸디캡을 갖고 있는 셈이다 나는. 저쪽 편은 자동으로 유리한 거점을 차지하고 있다. 물론 이러한 논리는 상대편이 ‘힘겨루기’를 하고 있을 때에 적용되는 논리겠지만.

잠시 후, 지친 듯 한숨을 쉬며 상대는 수화기를 내려놓아 버렸다. 달카닥. 그렇다. 달카닥. 굳게 닫힌다. 잠시 뚫리는 상대방과의 구멍이 닫힌다. 하지만 상관없다. 내가 이런 말을 한다고 해서, 우울하다는 것은 아니다. 단지 이것은 장난전화일 뿐이고, 그만큼의 ‘가벼움’을 담고 있을 뿐이니까. 이렇게 쿨한 것이 어디 있나. 그쪽이 싫으니 관둔 것일 뿐이고, 처음부터 나는 전화비 외에 잃을 것이 없었다. 전화비쯤은, 나의 얼마간의 쾌락을 위해 희생해 줄 수 있다.

상대방이 전화를 내려놓았으니, 나도 전화를 내려놓는다. 뚜뚜 거리는 신호음은 쿨한 연결도 될 수 없다. 다만 어떤 하나의 자각일 뿐이니까. 그런 것을 계속 듣고 있을 필요는 없다. 나는 시선을 돌려 비 내리는 창밖을 본다. 아니 수화기를 들고 있을 때도 창밖을 보고 있었으니, 다시 원위치의 시선으로 돌아온 셈이다. 하긴. 그런 것은 별 상관이 없다. 내가 어느 곳을 보고 있었는지 따위의 문제는, 마치 내가 장난 전화를 걸때 010으로 할지 02로 할지, 031로 할지 019로 할지 011로 할지 선택하는 문제와 별반 다를 게 없다.

비싼 요금에도 불구하고 대부분 핸드폰에 장난 전화를 거는 이유는 받을 가능성이 높기 때문이고, 회사가 아닌 개인이 받을 가능성이 높기 때문이고, 가정주부 보다는 학생이 받을 가능성이 높기 때문이다. 어차피 서로의 신분을 밝히고 노는 통화는 아니지만, 아니, 엄밀히 말해 거리가 멀지만, 설령 그렇다 하더라도 상대 하고 싶은 사람과 그렇지 않은 사람은 구분되기 마련이니까. 나라고 해서 아무나 장난을 쳐주는 게 아니다. 오히려 나는, 사람들을 선택해서 통화하는, 이를테면 군림자. 왕의 위치에 있는 것이니까, 내가 상대하기 싫은 녀석들을 받아 줄 필요는 없다. 목소리가 마음에 안 들면 즉시 끊어버리면 된다. 누가 장난전화를 걸었는지는 중요하지 않다. 마음에 안 드는 녀석이 먼저 끊어 버릴 뿐이다.

정작 나는 핸드폰이 없다. 핸드폰은 필요가 없다. 걸려오는 것이란 없다. 나도 한때 있었는데, 그 언젠가부터 핸드폰은 싸늘하게 식어버렸다. 그러니까 그게… 개기일식이 일어나던 날이던가. 달이 구멍에 빠지던 날…아니다. 그렇게 거창한 날 죽어 버렸을 리가 없다. 하지만 도통 생각이 나지 않는다. 그 언젠가부터 내 핸드폰이 죽어버렸을까. 싸늘한 시신이 되어버렸을까. 돌이켜보면, 생각이 나지 않지만, 어떤 무언가의 힘이 크게 작용했던 것 같기도 하고, 내가 폭삭 그 안에 담겨있던 것 같기도 하고, 그것이 없어질 즈음, 그것과 함께 내가 폭삭 모든 것을 다 버린 것 같기도 하다. 중요한 것은, 중요한 것이 생각나지 않는다는 것이다. 포인트는 없어졌다. 무엇인지는 모르겠지만, 핸드폰이 죽었을 때, 그때 나도 이처럼 혼자 살게 된 것 같다. 그렇구나, 나는 지금 혼자 살고 있다.

가끔 불안한 것은 엄습해 오는 어둠이다. 편한 것들은 많다. 어둠도 때때로 편하다. 갑자기 진격해 오는 순간들만을 제외하면, 나만의 숨소리가 잡아먹고 있는 어둠이 자궁속의 양수처럼 편안하다. 그러나, 이따금 거꾸로, 어둠이 나의 숨소리를 잡아먹는 때가 있다. 그것은 아마도 나의 탓일 것이다. 어둠은 가만히 있다. 진격한다고 말했지만, 실제로 진격해 오는 적이란 없었다. 어둠은 가만히 내리는 것이다. 밤과 함께, 정해진 규칙에 다라서 내리는 것이다. 급작스런 진격이란 존재하지 않는다. 그러니까 어쩌면, 어둠의 진격이 내가 만들어내는 무엇일 런지도 모르겠다. 이런 것들이 혼자 살아서 그렇다고는 생각하지 않는다. 어둠은 혼자 사는 사람이건 함께 사는 사람이건, 깔려있는 것들이니까. 그 안에서도 진격해 오는 어둠이란 것이 만들어지는 것은 뻔한 일일 테니까. 나는 나 만에 대해 한정된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가끔은 간밤에 TV가 필요하다. 그러나 TV는 없다. 나에겐 컴퓨터다. 컴퓨터는 TV조차 먹어버렸다. 동영상들로 어느새 탈바꿈한 TV의 프로그램들은, 손쉽게 얻을 수 있는 자그마한 보물들이다. 그러나, 키고 끄는 것은 어렵다. 컴퓨터는 그 점에서 나쁘다. 얼마 전에 갑자기 화가 나고 울음이 밀려와 컴퓨터를 때렸던 것은, 그 나쁜 이유 때문인지도 모른다. 그때 나는 모니터를 부숴먹었고, 그 이후로는 모니터가 없는 컴퓨터일 뿐이다. 모니터 없는 컴퓨터는 아무것도 되지 않는다. 윙윙거리는 소음기일 뿐이다. 나는 그런 것을 바라지 않는다. 그런데도 가끔 켜 놓을 때가 있다. 왜 그런지는 모르겠다.

나는 하루에 두 번, 장난전화를 한다. 더 많이 했으면 좋겠지만, 전화비가 많이 나온다. 전화비가 많이 나오면 과외를 더 많이 해야 한다. 나는 그런 것을 바라지 않는다. 쓸모없는 지식의 복습. 전수. 대물림. 만남. 지식을 위한 만남이라니! 내가 가치 없다고 생각하는 얼마 되지 않는 것들 중의 하나다. 쓸모없는 지식을 전달하는 행위는 쓸모없는 전달행위다. 그러니까, 쓸모없는 것을 하는 행위는 쓸모없는 것인데, 나는, 밥값과 전화비, 방값을 위해 과외를 해야 한다. 억지로 억지로 얻은 것은, 두 사람의 과외다. 두 사람은 각각 존재한다. 같이 있는 것이 아니다.
 밥을 많이 먹지는 않기 때문에, 돈을 지불하고 나면 돈이 조금 남는다. 밥값은 전화비보다 조금 더 많이 나온다. 그렇다고 장난전화가 밥보다 가치가 떨어진다는 산술은 아니다.

내가 가르치는 과외라는 것은, 엄밀히 말해 학문의 전달이 아니다. 나는 그런 것을 가르치고 있으나 그렇지 않다. 이것은 다만, 목표이자, 수단일 뿐이다. 학생이라 불리는 녀석들에 입에 머리에 쑤셔 넣어서, 나불나불 거리게 만들어주고, 마침내는 또 하나의 과외선생을 만들어 주기 위한 만남이다. 나는 녀석들에게 학문을 가르친 적이 없다. 녀석들은 내가 가르쳐준 것들을 훌륭히 배워서 대학에 가고, 과외선생이 될 것이다. 과외선생들은 넘쳐날 것이다. 그러면 과외선생을 가르치는 과외선생이 또 나올 것이다. 그때 내가 그 윗 계열에 설 수 있을지는 모르겠다. 사실 관심 밖이다. 나는 밥과 방과, 전화가 있으면 된다. 컴퓨터도 있으면 좋겠지만, 모니터를 부서뜨린 지금 그것은 무리다. 어차피 소비를 100으로 봤을 때, 저금을 하는 행위는 시간의 차이일 뿐, 똑같으니까, 그런 쓸모없는 짓을 하고 싶지도 않다. 시간차 공격을 구태여 할 필요는 없다. 저금을 한다는 것은 전화를 더 조금해야 한다는 뜻이다. 100을 두고 생각하면, 그럴 필요가 없다.


선생님. 선생님은 학교 안다니죠. 휴학했죠. 그럼 뭐해요. 과외 안할 때는 뭐하고 살아요? 선생님 집은 몇 평이에요? 가족들은 같이 살아요? 혼자 있으면 뭐해요? 재밌는 일 있어요? 책 같은 건 안 봐요? 어떻게 하면 선생님처럼 그 대학에 갈 수 있어요? 얼마나 노력한 거에요? 선생님은 왜 휴대폰이 없어요? 선생님한테 전화하기 불편하단 말예요. 그러고보니 선생님한테 전화하면 왜 안받는 적이 없어요? 선생님 어디 안나가요? 그러고 보니 얼굴이 항상 창백하네.


만남이란 귀찮다. 쓸데없는 것들을 물어본다. 어차피 관여하지도 않을 거면서, 아니, 행여 관여한다고 해도, 쏙 들어갔다가 쏙 나올 거면서, 그 자리의 빈틈을 메우지도 않고 그냥 나가버릴 거면서, 인간들은 너무들 만난다. 너무나 만나고 만나서 그 구멍에 누가 있었는지 조차 모르고 이 구멍 저 구멍에 이 사람 저 사람을 끼워 넣다 뺐다가 한다. 나는 그러고 싶지 않다. 나는 구멍을 만들고 싶지 않다. 누군가가 들어온다는 것은 구멍을 파서 안내해야 한다는 거다. 나는 안내하고 싶지 않다. 그것은 구걸 하는 행위다. 기필코 뚫고 들어오는 이란 없다. 내가 구걸을 하지 않으면, 조금의 구걸이라도 하지 않으면, 적어도, 삽이라도 건내주지 않으면, 나의 구멍은 뚫어지지 않는다. 나는 구걸하고 싶지 않다. 학생이란 귀찮다. 그런 것도 모르고 계속 쿡쿡 찔러댄다. 한 가지 다행인 것은, 사람이 단순해서, 어느 정도의 무관심만 보여도, 안으로 들어오려 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내가 구걸하지 않으면, 파일 구멍도 없다. 그러니 나는 구걸하지 않는다. 언제부턴가 그렇게 정해버렸다. 나에게 구멍 같은 것은 없다.

쓸모없는 지식만을 간단하게 전수해 주고, 집에 돌아와, 저녁을 먹고 나서, 장난전화를 건다. 나의 하루 일과가 여기서 또 흥분의 상태로 달아오른다. 어떤 목소리가 받을까, 누가 받건 간에, 이것은 전혀 부담이 되지 않는다. 그 사람은 내가 누군지 모른다. 받기도 전에, 이 전화가 부담이라면 받지 않을테니까. 어차피 장난전화를 하는 나로서는 잃을 것이 없다. 나는 부담을 주고 싶지 않다. 구걸하기도 싫고, 부담을 주고 싶지도 않다. 그러니까, 장난전화는 탁월한 것이다.

뚜르르르. 뚜르르르
찰칵

“여보세요?”

가끔은 그리운 것들이 있다. 정확하게 말하자면 인물들이다. 그러니까 것이라는 말은 틀리다. 그러나 그리운 것이라고 말하는 이유는 따로 있다. 과거에 속해있는 인물들의 얼굴은 잘 생각나지 않는다. 때로는 구멍속으로 비집고 들어왔었던 사람들. 그 구멍이 메워지면서 그들의 얼굴도 함께 함몰되어 버린 것일까. 막연하게 생각나는 것들은, 그저 막연한 것일 뿐이지, 특정한 그리움이라 칭 할 수 없는 것이다. 그러니 나는 그리운 것들이라고 해아겠다. 그것은 불특정의, 이야기니까. 어떠한 인물도, 어떠한 특정함도 될 수 없는 ‘것’이라는 표현이 알맞다.
“여보세요?”
두 번째 반응이다. 여자의 목소리는 이상하다는 듯이 울려퍼진다. 이번에도 대답이 없다면 장난전화로 간주하고 끊어버리겠다는 의지가 역력한 목소리다. 그러나, 이 사람은 나를 향해, 구걸하지 않는 나를 향해 두 번의 물음을 날렸으므로, 나는 관대함으로 대답을 해줘야할 필요성이 있다. 불쌍한 사람아, 너는 내게 대답을 구걸하고 있는 것이다. 나는 윗선에 서서 대답을 해준다.
“잘 지냈어?”
“네? ….누구…세요?”
알 턱이 없다. 나또한 금시초문의 목소리다. 나는 매번 생애 태어나 처음 듣는 목소리들을 듣는다. 아마 나처럼 많은 커뮤니케이션을 가진 사람은 세상에 없을 것이다. 나는 뿌듯하다. 지금 이 순간 또 하나의 커뮤니케이션이 이루어진다.
“잘 지냈냐구”
나는 또 한 번 말한다. 아직도 모르겠냐는 어투를 담는다. 나야 나. 나라구. 네가 잘 아는 사람이야. 혼자 살고 있는 나. 나라구. 너 나 알잖아. 모르니? 아니야. 알고 있을걸.
“아..”
여자의 목소리는 갑작스레 웃음을 띈 장난끼로 넘친다. 누군지 알듯 말듯 한데, 어떤 녀석이 지금 나한테 이런 장난을 치는거야. 싱겁기는. 이라고 말하는 듯한 어투다.
“영현이야?”
특정인의 이름이 나온다. 나는 물론 누군지 모른다. 그러나 상대방에게는 어떤 하나의 추억으로 자리잡은 이름일 것이다. 지금 그렇게 말하는 그녀의 가슴속에서는 어떤 구멍 안에서 떠오르는 얼굴이 있을 것이다. 그 떠오름은 때로 가슴 아플 수도, 혹은 기분 좋을 수도 있다. 어떤 구멍 안에서 잠자고 있던 것이 나온다는 것은 항상 그렇다. 거북이가 구멍 밖으로 목을 내밀 때, 그 바깥은 초록 바다가 될 수도, 사자의 입 앞이 될 수도 있다. 물론 그것은 외부의 상황때문만이 아니고, 구멍 안에 있는 것 자체가 그렇게 만들 수도 있다. 구멍 안에 있는 것은 때때로 날카로울 수도, 둥글 수도 있는 것이니까. 짐작해 보건데, 영현이란 사람은 둥근 사람일 것이다. 목소리엔 반가움이 역력하다.
“…”
나는 대답을 보류한다. 영현이 인 척 할까. 혹은 아니라고 말해 당황하게 할까. 고민한다. 나는 결정한다. 그리고 대화한다. 그러나 이것은 중요하지 않다. 그 이후에 일어난 대화들은 그저 일상일 뿐이다. 비슷비슷한 반응들. 아는 사람인가 했다가 구멍에 맞지 않는 것을 확인하면 휙 돌아선다. 거기서 내가 구걸 할 필요는 없다. 대화는 대부분 그렇게 끝난다. 그날도 그렇게 끝난다. 나는 나무늘보처럼 전화기를 느릿느릿 내려놓고 한참을 멍하니 누워있었다. 방금 무슨 대화가 오고갔는지는 모르겠지만, 심장이 벌떡대다가 고요해 진 것만은 느낄 수 있다.

상진아. 밥은 먹었어? 잘 지내고 있는 거지? 엄마는 걱정이다. 왜 나가 살겠다고 떼를 부려서.. 사서 고생이다 너도 참. 뭐 네가 하고 싶은 대로 해서 너 좋다면 할 수 없다만.. 혼자 사는 것도 뭔가 발전을 위한 방편이 되어야지.. 상진아. 듣고 있는 거냐? 그래 잔소리해서 미안하다. 그래도 상진아. 상처는 그런 걸로 해결되는게 아니야.

어머니는 가끔 전화를 한다. 나는 전화를 무조건 받는다. 어머니일 경우 끊어 버릴 때도 있고, 이렇게 잠잠히 듣는 경우도 있다. 대화는 굳이 할 필요가 없다. 엄마라면, 말하지 않아도 알 수 있을지 모른다. 굳이 말하면 어긋난 이야기가 터져 나올지도 모른다. 그러나, 상처 이야기는 어리석다. 그것은 엄마의 실수다. 나에겐 상처가 없다. 나에겐 구멍이 없다. 들어왔던 것은 모두 나가고, 이미 메워져 있다. 지금 안에 들어와 있는 사람은 없다. 그러니 구멍도 없다. 행여 안에 누군가 있다면, 내가 메운 그 땅 안에서 함몰되어 죽어가고 있을 것이다. 아. 그게 아마도 함몰된 얼굴들의 그리움인가보다. 그러나 그것은 상처가 아니다. 상처는 아픈 거니까.

혼자 떠드는 것은 힘들다. 어머니는 그래. 잘 지내라 하며 수화기를 내려놓는다. 가끔 내가 대답하는 날이면 신이 나서 이야기를 하는데,
그렇다고 해서 내가 딱히 신이 나게 대답했다는 것은 아니다.


잘 봐라. 이게 코사인 그래프야. 싸인 그래프는 이거고.
선생님은 재미없어요.
…. 그런 말은 소용이 없어. 지금 너와 나는 오로지 이걸 배우기 위해 만나고 있는 거야
좀더 재미있게 해주세요. 다른 과외선생님들은요, 농담도 하고 뭐 첫사랑 이야기도 하고, 술 먹고 뻗은 이야기도 하고 그런다던데. 너무 공부만 하지 말고요.

내게 어느 정도 적응 되었다고 생각했던 녀석인데, 오늘따라 칭얼거림이 심하다. 가끔 이럴 때, 무언가의 이야기를 꺼내고 싶은 충동을 받는다. 나에게 뭔가를 달라고 칭얼대는 것. 그러나 내가 그 무언가를 주게 된다면, 그것은 또 하나의 빈틈을 만들어 낼 것이다. 더욱이, 나에게는 녀석이 원하는 이야기들이 없다.

초롱아귀를 알고 있어?
그 뭐, 바다 깊은데 사는 생선 아녜요?
그래. 초롱아귀는 심해에 사는 생물이야. 아무것도 보이지 않는 어둠 속에 살아. 그 어둠속에는 초롱아귀 뿐만 아니라 다른 것들도 살지. 초롱아귀가 육식인 걸 알고 있어?  생긴 모습을 보면 알겠지만, 그 추악한 입으로 녀석은 다른 물고기들을 잡아먹어. 입을 벌리고 와구와구 씹어 먹어. 온몸에 구멍을 내면서, 피를 뿜어대면서. 그런데 초롱아귀가 실은 그런 생물이 아니야. 플랑크톤만 먹고 살 수 있는 그런 생선이야. 나는 그렇게 생각해. 그런데, 왜 잡아먹을까. 왜, 초롱아귀는 다른 녀석들을 잡아먹을까. 초롱아귀는 그저 보고 싶은 거야. 다른 녀석들이. 이 캄캄한 어둠 속에서, 누가 나와 있을까. 찾아보고 싶어서, 빛을 밝혀. 빛은 빛이 아니야. 달랑거리는 하나의 치욕일 뿐이야. 녀석은 수치를 밝혀. 그리고 주변의 녀석들을 찾아. 보고 싶었을 뿐인데, 어느새 초롱아귀는 와구와구 씹고 있어. 내장이며, 눈알이며 다 씹어 먹어. 보고 싶었을 뿐인데. 씹어 먹는 거야.

내 눈이 이상한 건지, 녀석의 눈이 이상한건지, 나를 쳐다보는 녀석의 표정이 이상하다. 마치, ‘대체 무슨 이야기를 하는 거야’라는 표정이었다. 나는 갑작스레 부끄러워 져서는 괜히 야단을 치고 수업을 진행했다.

다음날, 학생의 부모로부터, 과외비를 송금해 줄 테니, 이제 오시지 않아도 좋다고 하는 전화가 왔다. 왜 그랬을까. 좋은 이야기를 해주었을 뿐이다 나는. 어쨌거나, 전화비의 일부로 쓰일 돈을 잃은 셈이 됐다. 이번 달은 그렇다 쳐도, 다음 달부터는 지속적인 생활비의 지불이 힘들 것이다. 아직 나에게는 그래도 한명의 학생이 남아있었다. 더욱이 다행인 것은, 우리나라에는 과외선생을 바라는 학생들이 무궁무진 하다는 것이었다.

방 안에서는 구름 같은 공기들이 떠다녔다. 내 위로 자욱하게 깔린 침묵의 존재들. 나는 그러한 것들을 참을 수가 없었다. 내가 택한 것이라 할지라도, 선택은 항상 옳은 것을 느끼게 하지는 않으니까. 나는 그저, 가치판단을 통한 선택을 했을 뿐이다. 어느 것을 선택하더라도 잃는 것은 있다. 다만 나에게는 구걸이라는 것이, 이런 침묵의 이야기들 보다 더 비참했을 뿐이었다. 그리고 남들은 잘 모르는 것 같지만, 이런 나의 가치판단은 아주 적절하다.

“여보세요”
대답을 하지 않는 것은 언젠가부터 정해진 철칙이다.
“아, 너구나”
가끔은, 이렇게 장난을 받아치는 경우도 있다. 장난전화인줄 알고 스스로도 장난을 치는 것이다. 이러한 경우 나는 화들짝 놀라 전화를 끊어 버리거나, 다시 맞받아쳐 싱거운 대화들을 하곤 한다. 싱거운 대화라고는 했지만 사실 이런 대화가 더 재미있는 것은 말할 필요도 없다. 알지도 못하는 인물들끼리 알지도 못하는 상황을 가정해서 역할극을 벌이는 것이다. 그렇게 된다면 설령 누군가 가슴속으로 들어와 품어진다고 할 지언정, 그 역할에 상응하는 녀석의 가슴에 구멍이 나는 일일 뿐이니까, 사실상 최고의 장난전화인 셈이다. 그래. 이건 장난전화니까. 장난에는 장난으로 받아치는 것이 올바른 커뮤니케이션이 되는 것일 터였다.
“전화 할 줄 알았어”
“내가 누군지 알아?”
“당연하지. 너는 치욕스러운 존재야. 어쩔 수 없는. 그래서 가만히 스스로를 품고만 있는”
누굴까. 이 여자는 누굴까. 수많은 장난전화 끝에 수많은 장난 대화들을 나누었지만 이런 이야기를 하는 사람은 처음이었다. 나는 펑퍼짐한 그 말에 어떤 대답도 할 수 없었다. 장난 자체로 받아들이기엔 뭔가가 힘겨웠다. 억눌려진 어떤 힘이 존재하는 것처럼, 나는 쉽게 입을 열 수 없었다. 나도 맞받아 쳐야 되는데. 그럼! 이라고 맞받아쳐야하는데, 그게 되지 않았다.
“네 이름과 얼굴은 모르지만, 네가 어떤 사람인줄은 알고 있어. 어때? 만날래?”
이야기는 점점 스스로 발전 해 나가고 있었다. 나는 정신을 차릴 수가 없었다. 마치 스트레이트는 아니더라도 잽 잽을 먹어 정신이 없는 것처럼 혼비백산 했다. 나는 수화기를 든 것이 마치 후회스러운 일이라도 되는 양, 이 사태를 처리할 방법을 찾지 못해 창피했다. 얼굴이 붉어지고 식은땀이 났다. 가슴은 쿵닥쿵닥, 아니지 쿵쾅쿵쾅 뛰고 있었다. 나는 철저하게 희롱당하고 있었다.
“왜 대답을 못해. 강남역으로 나와. 만남의 장소 알지? 모를려나? 거기 앉아있을게. 오늘 두시에. 거기서 보자”
명랑하게 스스로 약속을 정해버리는 그녀. 사태를 파악하지 못하는 동안 어느새 전화기에서는 뚜뚜뚜 하는 신호음이 들리고 있었다. 달칵 소리도 듣지 못했던 것 같은데. 언제 끊어버린 걸까. 아니 지금 이 사태에서 중요한 것은 종결된 시점이 어디인가가 아니고, 무슨 일이 일어났는가였다. 놀란 가슴을 진정 시키고 나는 차차 대화를 조목조목 짚어 보았다.
그러니까. 만나자는 말이었다. 생전 만나본적 없는 사람을, 장난전화로 잠깐 통화했다고, 나이가 몇 살인지도 모르고 이름이 뭔지도 모르는 사람을 만나겠다는 것 이렸다. 행여 나간다 치자. 나를 어떻게 알아 볼 수 있다는 말인가? 이 여자는 생각 할수록 웃기는 여자였다. 나는 푸하하 웃어제낀 뒤에 어이없다는 표정으로 전화기를 주목했다. 마치 그 전화기가 여자인양. 눈동자를 박아 넣었다. 방안의 건조하고도 축축한 공기가 찌르르 울렸다. 매미 소리가 들리고 있었다. 긴 세월 땅에 쳐 박혔던 그 매미들. 빌어먹을 매미들. 그냥 거기 있지 왜 나오고 난리야. 왜 나와서 오줌을 싸질러 대고, 왜 울어대고 난리야. 어차피 조금밖에 못살거면서, 밖에 나온들, 좋은 것도 별로 없는데. 왜 울어대냐고 시끄럽게. 나는 괜히 매미에게 화풀이를 했다. 창문에 붙은 게 매미였던가? 잘 모르겠다. 휙하고 날아가 버려서, 나는 잠시 스쳐가는 시선이었을 뿐이었다. 상관없다. 매미는 매미다.
그러나 나는 시계를 보고 있었다. 오전 11시였다.


귀찮다. 너무 많은 것들을 수반 한다 만남이란 것은. 나는 단지 그 여자를 만나기 위해 나왔을 뿐인데, 필요도 없는 사람들이 부대끼고 있는 이 현실이라니. 집에서 나와 강남역으로 가는 전철에서, 나에게는 아무런 상관없는 이들과 너무나도 많이 부딪혔다. 과외 하러 갈 때도 마찬가지지만 오늘 같은 경우는 더욱이 짜증이 났다. 왜 나왔어 너희는, 뭣 때문에 나왔냐구. 실실거리는 친구들끼리의 웃음이 눈에 띄인다. 전화하는 사람들. 팔짱끼고 자고 있는 연인들.

왜 하필이면 강남역이었을까. 왜 하필 강남역으로 나를 불러내었을까. 사람은 지지리도 많았다. 득시글대는 뱀 구덩이처럼 사람들은 휘감기지 않으면서도 서로를 휘감고 둘러 싸여있었다. 세상에 그렇게 많은 인물들이라니. 얼굴들이라니. 서로의 얼굴들을 바라보며 그들은 하나 하나 기억해 낼 수 있을까. 오늘은 어떤 얼굴을 보았고, 어떤 사람들이 자신을 스쳐 지나갔는지 다 기억해 낼 수 있을까. 아니. 기억할 필요가 없지. 그래 필요가 없다. 그러면, 스쳐가는 사람들뿐만이 그러한 수모를 당해야 하는가. 잊혀지는. 없어져 버리는. 누군가의 가슴속에, 시선 속에 담겼다가 이내 사라지는 그러한 죽음을 맛봐야 하는걸까. 내 옆으로 지나가는 이 사람은. 모자를 비뚜루 쓰고 나시티를 입은 이 사람은, 내 안에서 또 죽게 될텐데. 그걸 알기나 하는 걸까. 수많은 사람들은 수많은 사람들의 가슴 속에 시선 속에서 새로 탄생했다가 이내 죽는다. 그러니까. 사실 낙태는 죄악도 아니다. 그렇게 싱겁게 끝나버리는 죽음은 어디서나 있는거니까. 실상 아무 죄악도 되지 않아. 그래 누군가가 죽어나가는것도 여기서는 당연한 거야. 어디서나, 죽게 되어있어. 그런데 굳이 가슴 속에 품어서, 저릿 저릿한 아픔들을 탄생시키고 기필코 기억해 내려 애쓴다는 것이 다 무엇이야. 나는 알 수가 없다. 죽은 사람은 죽은 사람인데, 굳이 기억 속에 남아야 하는 이유가 다 뭣이란 말인가.

만남의 광장 따위, 내가 알리가 없다. 그런 곳은 알기에는 내가 홀로 지낸지 너무 오래되었다. 그 전에는 알고 있었을까. 만남이 비릿하게 코를 쑤시던 그 언젠가에는 나도, 이런 곳에 앉아있었을까. 중요한 것은 그런 기억 따위, 어렴풋하게도 기억나지 않는 다는 것이다. 마치 함몰된 인물들의 얼굴처럼. 그러고 보니 며칠 전 과외를 그만두게 된 학생의 얼굴도 잊어버렸다. 그래. 함몰되어버렸다. 죽은 거다. 내 안에서 나는 또 살인을 저질렀다. 그나마 다행이다. 깊은 살인이 아니니까. 낙태에 불과하니까. 아직 하나의 개체로 자리 잡기 전에 서둘러 싹을 잘라버린 셈이야. 나는 합법적이다. 합법적인 수술에 성공했다. 항상 그래야지. 항상 그렇게 서둘러 싹을 잘라버리면, 그 다음에 오는 것이란, 싹이 없어진 자리. 그 자리는 아주 작으니까 눈치 채기 힘들다. 그런 것은 아주 바람직하다. 커지기 전에ㅡ 무엇이든 더 커지기 전에 없애 버리면, 눈치 채기 힘들다. ‘만남의 광장’도 그랬을는지 모른다. 내 마음 속에서 커지기 전에 없애 버린 것일 수도. 아니 그냥 없어져 버린 것일 수도. 아니면 애초에 없었는지도.

그러나 문제는, 그녀와 내가 알아볼 구실이 전혀 없다는 것이었다. 시각은 1시 55분. 나는 왜 이렇게 일찍 나와 버렸담. 실상 나는 그렇게 그녀를 만날 이유가 없다. 그녀가 불러내었다고 해서. 알지도 못하는 얼굴의 여자가, 나를 구걸했든 아니든 불러내었다고 해서 내가 응당 나가야 할 이유는 없었던 것인데. 여기 있는 거라는 거다. 근데 왜 일찍 나온거야. 이것은 불리하다. 그녀가 구걸해서 나와 준 셈인데 이렇게 일찍 나와 버리면, 내가 이 만남을 더 기대하는 셈이 된다. 그것은 안될 말이다. 나는 언제고 책임을 지지 않을 수 있도록 수동의 입장이 되어야 하니까. 수동의 입장에서도 능동을 취해야 하니까. 일의 시작은 수동으로, 그리고 그것을 결정짓는 것은 나의 몫으로. 그렇게 우위를 점거 하는 거다. 우위를 점거하는 것은 일을 편하게 만든다. 마음은 한결 가벼워진다.
어쨌거나 시간은 흘러가고 있었고, 우리는 서로를 알아볼 어떤 힌트도 가지고 있지 않았다. 제기랄 이 만남의 광장은 왜 이리 쓸데없이 크단 말이야. 이상한 가게들이나 붙어있고. 분수대도 쓸모없다. 운치를 위해, 만남의 장소를 티내기 위해 설치된 분수대가 시끄러웠다.
“오늘 두시에, 거기서 보자”
전화기로 똑똑히 들었던 음성이 울려 퍼졌다. 분수 소리에, 그 리듬에 맞춰서. 나는 슬슬 이 만남이 두려워 졌다. 두렵고 쓸모없어졌다. 아니, 쓸모없다고 생각했다. 시계를 보며 째깍대는 초침의 이동을 감지하는 순간순간들에도 떠날 것인가를 고민했다.

58분. 제기랄. 떠나야겠다. 나는 이 만남을 가질 필요가 없다.

“먼저 와있었네”
내 뒤에서 어떤 여자가 나를 툭 친다. 웃고 있는 얼굴. 역시나 전혀 모르는 얼굴이다.
“어? .. 아 죄송합니다.”
그녀일까. 얼굴이 붉어질 만큼 당황하는 사이, 서둘러 여자가 말을 바꾼다. 그리고는 황급히 저쪽으로 총총 사라져갔다. 그녀가 아니었던 걸까. 다른 사람일까. 다른 사람이라면 왜 나를 건드렸을까. 애인으로 착각했던 것일까. 왠지 나는 그 여자와의 접촉이 있고 나서, 발을 떼기가 힘들어 졌다. 가야 했다. 이 만남은 의미가 없었다. 장난전화는 장난 전화로 끝나야, 그래야 더욱 커지는 일을 막을 수 있는데. 나는 지금 일을 크게 벌이고 있었다. 만남이라니!!
나는 초조하게 시계를 바라보았다. 2시 1분. 이제 가야겠다. 시간이 지났는데도 기다리는 것은 먼저 와있는 것보다도 더욱 비굴하다. 비참하다. 제기랄. 나는 구걸하고 있는 셈이다. 시간이 흐를수록 더 많은 구걸을 하는 셈이다. 그것은 불리한 입장이다. 먼저 오는 것보다도 불리한 것이다. 먼저 온 것은 교통편의 실수라고 말할 수나 있지만, 그나마 타당성 있는 핑계거리가 존재하지만, 기다리는 것은 자신이 선택한 길이다. 나는 일을 크게 벌이고 있었다. 정말 가야 했다.

“올 줄 알았어”
발걸음을 떼려는 순간 누군가 와서 내 얼굴 앞에 섰다. 생기 넘치는 얼굴. 장난기 어린 미소. 생머리. 청바지. 흰색 레이스가 달린 반팔 티. 그것이 그녀의 첫 모습이었다. 나에게 와서, 그럴 줄 알았다는 듯. 첫 대사부터 나를 깔고 들어갔다. 나는 순식간에 바보가 되어버렸다. 혹시 그녀가 맞을까? 생판 다른 사람일지도 모른다. 그러나 여기서 내가 혹시 장난전화의 그녀가 맞느냐고 물어 볼 수도 없는 노릇이고, 행여 물어 본다면 자기 자신을 더욱 무덤 아래로 끌고 내려가는 일이 될 터였다. 따라서 나는 태연하고 싶었다. 그러나 잘 되지는 않았다.
“… 어떻게 알아봤..어?”
어색한 반말. 장난전화야 장난 전화니까 반말을 한다 치지만, 지금 내 앞의 그녀는 실제로 존재하는 하나의 개체였다. 붕 떠올랐다 사라지는 허구의 얼굴이 아니었다. 때문에, 반말을 하기는 힘들었지만, 상대방도 반말을 했다는 것을 알아차린 나는 나도 일단 반말을 깔아 놓아야 했다. 그래. 그것이 응당한 커뮤니케이션이었다.
“글쎄. 나는 너를 알고 있다니까”
알고 있다니. 함몰된 기억 속의 그 누군가라는 말인가? 글쎄. 그건 아닐 것이다. 아무리 함몰되었다고 해도 이렇게 생소할리 없다. 혹은 오랜 세월이 내가 아는 누군가를 지금의 얼굴로 바꾸어 놨다는 가정을 하더라도, 이 생소함은 정말 초면의 그것이었다. 아무리 만남에 대해 꺼리는 나지만 그 정도는 구분 할 수 있다. 그러나 이 여자는 나를 옛날부터 알고 있다는 눈빛이다. 그녀는 빙그레 웃었다. 미소 지었다. 라고 말하는 것이 딱 알맞을 그 웃음을.
“자, 가자.”
어딜? 나는 묻기도 전에 그녀의 손에 매달려 끌려갔다. 막무가내로 끌고 가는 그녀는 나보다 한발 앞장서 있었다. 어딜 가는지도, 왜 가는지도, 몰랐다. 심지어 지금 나를 끌고 가는 이 여자의 이름도, 성도, 나이도 몰랐다. 다만 가자니까 가야 했다. 뭔가 그런 것이 있었다. 나는 반항 할 수 있었으나 하지 않았다. 멈추어 서버렸으면 됐을 테지만 그러지 않았다. 뭔가 그런 것이 있었다.

“점심 먹었어?”
먹지 않았다. 시간은 2시였지만 나는 아직 점심을 먹지 않았다. 그러나 먹을 생각은 없었다. 굳이, 무언가를 먹어야 한다는 필요성도 느끼지 못했다. 그녀는 조금 다른 것 같았다.
“안 먹었나 본데? 왜 이렇게 꿀 먹은 벙어리야. 야, 점심먹자.”
의견은 무시된 체, 아니 암묵적으로 묵살된 체, 나는 또 끌려갔다. 우리가 들어간 곳은 2층짜리 퓨전 일식집이었다. 사람이 또 많구나. 2시인데도, 점심을 먹으려는 사람들이 많았다. 그러나 이번에는 잘 들어오지 않았다. 원래 사람들을 담아두지 않는 나이지만, 담아두지 않는 것과 담아두지 못하는 것에는 차이가 있었다.
2시에, 일식집 2층에 둘이서 앉았다. 그녀는 말없이 테이블 세팅을 다 해놓고, 주문까지 끝냈다. 나는 정신이 없었다. 무엇을 해야 할지. 몰랐다. 과외를 해줄까. 나는 문득 생각이 들었다. 지금 내가 할 수 있는 것은 그것이었다. 그것은 거리를 두고 할 수 있는 지금의 최선책이었다. 이대로 끌려 다니다가는 일이 커질 위험성이 다분했다. 물론, 내가 마음속의 싹을 스스로 잘라내 버리면 그만이지만, 그런 것은 쉽사리 이루지지 않는 것들이었다.
그녀는 알밥을 2개 시켰다.

날이 참 덥다
여기 괜찮지?
나는 너를 알아.
너는 너무 오랫동안 그 바다에 갇혀 있었어. 휩쓸려 그 우울한 흐름들에 춤추고, 외려, 너는 그러고 있구나. 근데 그거 아니? 그 바다는 없어.
그녀는 그렇게 말하고 밥을 쓱싹쓱싹 비볐다. 나는 잠자코 그녀가 하는 양을 바라보고 있었다.
이제, 그만해.
그러고 말하더니 알밥을 한 숟갈 소담히 떠 올렸다.
레몬빛 알알들이 밥위에서 야채와 함께 까르르 굴러다닌다. 어느 순간, 입속으로, 그녀의 입이 오물거려 톡톡거린다. 경쾌한 끼니. 소리들의 반란. 터지는 것들은 알들이다. 낙태인가? 아니다 이것은 식사다.
알았어? 좀 가벼우란 말이야.
밥에서 홀로 떨어져 나온 날치알 중 하나가 식탁위로 떨어졌다. 그녀는 유심히 알을 보더니 들어올려서 내 눈앞에 대고 터뜨렸다. 소리는 들리지 않았으나. 웃음소리 같았다.
좀 가벼우라고. 날치처럼. 날아다니라구. 다시 가라앉더라도 좋으니까, 좀, 떠올라 보라구.
그러고는 집게손가락 구부러진 마디로 코밑을 슬쩍 훔친다. 슬그머니 웃는다. 까르르거리던 알들이 떠오른다.

포식이라. 알들은 그저 먹힌다. 그것은 하나의 수동이라니. 그럴거면 왜 나왔니. 하는 물음에, 그녀는 먹기 위해서 라는 답이라도 내리는 듯 맛있게 한 그릇을 먹었다. 나는 그녀가 먹는 동안 한마디도 하지 않고 그저 바라보고 있었다. 귀에 들어오는 목소리들은 왕왕거렸다. 음식점에서 나오는 음악소리는 들리지 않은지 오래였다. 주변 사람들의 잡담들도 모두다 음소거 된 것처럼 조용했다. 아니, 그런 잡음들은 모두 알알들이었다. 까르르 굴러다니는, 맑은 햇볕 같은 물속에서 굴러다니는, 뭉쳐져서 하나의 소리를 내는, 웃음소리를 내는 알알들이었다. 너무나 익숙한 소리들은 음소거 같았다.

“안 먹어?”
그녀는 그렇게 묻더니 한 숟갈을 쓱싹 잘 담아서 내 잎 쪽으로 향했다. 먹어주세요. 라고 하고 있는건가. 아니. 먹어야지. 먹는거다. 먹으면, 무엇이 달라질까. 가라앉을까? 떠오를까? 알들이 터져나가며 비명을 지를까 아니면 웃어제낄까? 비릿한 비웃음들이 혀에 남을까? 고소한 만족들이 입안을 맴돌까? 의문들 모르게 입을 벌렸다. 의문들에 답하는 알알들은, 모두 다 제각각이었다. 웃어제끼고, 비명지르고, 비릿하고, 고소했다.
나는 우물 우물 거렸다. 밥이 도저히 밥 같지가 않았다. 한 숟갈을 겨우 삼키고 나니, 더이상 먹을 생각이 나지 않았다. 도통 내 따귀를 때리는 것 같았다. 그녀를 쳐다보니 또 씨익 웃고 있었다.

“그럼, 잘 먹었어”
내가 한참을 먹지 않고 알들만 쳐다보고 있어서였을까. 그녀는 갑자기 그렇게 말하고는 일어났다.
“잘 지내. 알았지?”
그녀가 떠난 자리에 빌지가 놓여 있고, 나는 한참을 멍하니 있었다. 그녀는 갑작스레 사라져 버렸다.

돌아오는 길은 오후의 햇살이 비치고 있었다. 건대입구역으로 가는 철교에서 전철은 햇볕을 받으며 달렸다. 햇볕들은 강물처럼 흘러가는 것들이라, 흐르다가 전철 문들에 부딪혀 막히고, 내게 그림자를 드리우기도 하고, 때로는 햇살을 가만히 비추기도 하고, 혹은 다른 창문으로 반사되기도 했다. 그림자. 빛. 그림자. 빛. 전철들은 무심히 달렸다. 아니 혹은 무심하지 아니 했을 수도 있다. 그것은 전철의 몫이니까. 내가 알 수 없는 노릇이니까. 아니 어쩌면ㅡ 전철은 전철 그대로이고, 내가 빛과 그림자, 빛과 그림자를 만끽 했는지도 모르겠다. 날치라.
젖은 날개로 날아올라, 햇볕들 속에서 파다닥 거리며 날고, 다시 잠수. 바다는 태양으로 부터 생기고, 태양은 바다가 있기 때문에 찬란해 보이니까. 그러니까 내가 가르치던 과학 교재를 보면, 대기 순환이 이루어 지기위해서는 바다와 태양이 불가분의 관계이니까. 날치는 날치고 바다는 바다고 태양은 태양인데, 전철이라고 다를 게 무엇인가.

집에 돌아와서도 그녀의 얼굴이 자꾸만 아른거렸다.
‘알았어? 가벼우라구’
음성들도 붕 떠올랐다가 가라앉았다. 그런 반복들은 심장으로 전이되었다. 리듬처럼 울려퍼지는 박동. 왜 그 에너지가 그리로 갔는지는 모를 일이었다. 다만. 나는 기억해 내려고 애쓰는게 아니고, 기억이 나고 있었다. 그 에너지는 자의가 아니었다. 타의였다. 아니. 타의라고? 타의라고 하기엔 이상했다. 나의 몫이었다. 순전히. 나의 몫. 그녀가 이렇게 만들었다고 치기에는 억울했다. 나는 그런 피동의 대상이 되고 싶지 않았다.

밤이 되자, 나는 그녀의 목소리를 다시 듣고 싶었다. 홀로 지쳐가는 공기들 속에서 방안은 흐물거렸다. 먼 발치의 태동마저, 꽃봉오리가 터지는 움직임들도, 달빛이 거대하게 웅웅거리며 움직이는 그 것도, 그저 나에겐 하나의 숨소리 같았다. 하루, 한 순간의 초침 같은, 그런. 나는 숨을 쉬었다. 그런 것들은 지금 필요 없는 에너지였다. 필요 없는 에너지라니. 모든 에너지는 100으로 치환 될 수 있다. 그런 계산법은 타당하다. 그런데 쓸모없는 에너지라니. 필요 없다니. 더 나은 무언가가 있다는 말인가.
그랬다. 나는 전화를 걸고 싶었다. 그녀에게. 그리고 나는 그 순간, 깨달았다. 장난전화가 오로지 무작위 추첨을 통해서만 이루어진다는 것을. 따라서 나에게는 번호를 기억할 어떤 단서도 존재하지 않는다는 것을 알았다. 그래서, 그녀는 함몰 되어야 했는데, 그것이 운명이었는데, 오히려 함몰되는 것은 그날의 밤이었다. 붕괴되는 밤은 자꾸만 가슴속으로 쳐들어오고 뻥 뻥 터져서 잠을 이루지 못하게 방해했다. 결코 그것은 내 잘못이 아니었다.


그날 밤. 수몰되었던 선박들은 떠올랐다. 심해의 깊은 곳에서 잠자던 유람선이며 유조선이며, 고기잡이배 어선이며, 모두 떠올랐다. 초롱아귀들이 삼삼오오 모여 빛을 비추어 그 낚시대로 선박들을 건져 올렸다. 바다 바깥으론 태양이 있었고, 날치들은 날고 있었다. 때때로 물에 잠기는 것들 주변으로 떠올려진 선박들이 변함없이 머물러 있었다. 언젠가 다시 수몰 될 그날에도 날치는 또 날아올라야 할 것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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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가 칼럼에 올리는 모든 글은 픽션입니다. 오해하지 말아주세요~



바다 밑에서 장난전화를 한 까닭 – PS. 입선 소감 2006-09-25 10:12:44


그 무렵 나는 철저한 외로움을 갈구하고 있었다. 대부분의 군인들이 그러 하듯이, 이등병에서 일병으로 넘어와 이제 슬슬 군생활에 적응 했다 싶은 그 즈음에는, 바깥생활과의 격리가 더욱 심하게 느껴지기 나름이다. 나 또한 예외가 될 수 없었다. 나는 이등병 때 이 사람 저 사람에게서 받던 편지를 한통도 받지 못하게 되었고, 여자친구와 헤어진지도 어느새 4,5개월 째에 접어들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그것은 실로 격리였다. 나에게는 바깥 생활이 어느새 지금과는 너무도 다른 생활로 떨어지고 있었다. 그 전까지만 하더라도 나는 ‘바깥사람’인 것처럼 살고 있었는데, 현실과 환상의 괴리감이 어느새 벌어지고 있었으니까. 그것은 쉽게 메워지지 않는 것들이었다. 요정의 숲에 들어갔던 꼬마가, 다시 마을로 돌아와 보니 알던 사람들이 모두다 죽어버린 뒤였다는 동화처럼, 내가 알던 모든 이들은 죽어버린 것만 같았다. 이따금 연락이 되거나 숙아를 나가게 되면, 모두들 알 수 없는 머리스타일과 소식들로 나를 반겨주었고, 내가 알던 이들은 어디론가 숨어버린 것 같았기 때문이었다.
 이 터울 생활에서 이런 단절의 생활을 피해 갈 수 있는 방법은 오로지 연락뿐이었다. 연락이란 두 가지 방법이었다. 편지와 전화. 이 먼 거리의 격차를 줄일 수 있는 방법은, 그 것들 뿐이었다. 그러나 그것들도 호락 호락 하지는 않았다. 편지와 전화라는 것은 부담이라는 것을 매개체로 했다. 편지를 쓰면 으레 답장을 기대해야 했고, 전화를 하면 즐거운 통화를 기대해야 했으니까. 그것은 상대방으로 하여금 부담을 씌우는 일이었다. 나는 그러고 싶지 않았다. 어째서? 내가 무슨 잘못이 있다고?
 그렇다. 생각해 보면 그것은 단순한 나의 우울일 뿐이었다. 하지만 그때 나에게는 절실함이었다. 전화를 하면 받지 않는 몇몇 녀석들, 받는다 해도 가히 허례허식이라 칭할 만한 대화가 오가는 전화 통화. 쓰고 나면 처절해지는 편지. 나의 진심을 드러내는 것만 같은, 치부스러운 그런 편지. 그런 것들이 다 무슨 소용이람. 나는 바깥의 녀석들이 부러우면서도 미웠다. 나도 너희들과 똑같은 사람 중에 한명이었어. 나도 너희들 같았는데, 의무라는 미명하에 여기에 와서. 왜 외로움에 벌벌 떨고, 그것을 너희에게 짐 지워야 하는 걸까. 내가 무슨 죄가 있기에. 나도 너희들 중 하나였는데, 거기서 쏙 빠져나와서 너희는 다수가 되고, 나는 홀로가 되고. 그렇게 너희는 변함이 없는 다수로 남고, 나는 홀로 빠져나와 괴리감을 느끼고. 너희는 내가 없어도 즐거우니까 상관 없지만. 나도 즐겁고 싶은데. 그런거 안될까. 그런 것을 위해서는 구걸을 해야했다. 나는 구차해지고 있었다. 날이 갈수록.그래서, 연락하고 싶은데 연락을 하면 안 될 것 같았고, 실제로 ‘전화하지 말아야지’하며 몇 주간은 가족을 제외한 다른 대상을 향해 전화기를 들지 않기도 했다. 그러나 그런 것은 이내 무너져 내리고 말았다. 나는 외로웠고, 그들을 찾고 싶었으니까.

초롱아귀의 고백

                       김  지  민

빛들 모두 잠잠한 바다란 곳이 있어.
그 방향 조차 알 수 없는 벽 속 사이사이를
조그만 지느러미 내가 헤엄쳐 다니는거야.

아무것도 보이지 않는 속이야.
차라리 그런 것이 나아, 때로는
차라리 장님이 나을 때가 있어,
그런데 때로 나는
오직 하나의 내 어둠을 참지 못하고,
덜렁거리는 치욕을 밝혀 네들을 찾는거야.

그러려 한 것이 아닌데도 네들을 먹어치워.
그리웠을 뿐인데 그리웠을 뿐인데,
과거, 빛의 바다가 드리웠던 네들의 그림자.
그리웠을 뿐인데 그리웠을 뿐인데,
네들을 먹어치워.
그러고 나면, 또,
반가운 네들의 얼굴 하나하나 어두워져
오히려 영원으로 굳어지는 심해가 있어.

그럴때면 차라리 장님이 나을 때가 있어
차라리 장님이 나을 때가 있어.
달랑거리는 눈부신 치욕이 없는 것이
나을 때가 있어.
그리웠을 뿐인데, 그리웠을 뿐인데,
네들을 먹어치워서. 네들을 먹어치워서.

                           -詩 전문(06. 4. 28)

그렇게 나는 컴컴한 바다 밑에서 홀로 생활 하는 초롱아귀 같았다. 분명히 내 가까이에는 녀석들이 있는 것 같은데, 내가 부끄러운 치욕을 밝히지 않으면 녀석들이 보이지 않았다. 구걸과 구걸을 해서 녀석들을 찾아야만, 녀석들이 보였고, 마침내 보고나면 나는 나의 외로움을 이기지 못해 녀석들을 먹어치우곤 했다. 그렇게 나는 나의 외로움을 짐 지우고, 부담스러워지고 있었다. 그래서 나는 철저히 외로워 지고 싶었다. 내가 먼저 찾지 않아도 녀석들이 나를 찾도록, 나를 먼저 찾아서 내가 구걸하지 않도록, 내가 치욕스러운 존재가 아닐 수 있도록 하게 만들고 싶었다. 만약 그들이 나를 찾지 않는다면, 그래 까짓거 외로워지리라. 어차피 모든 일은 100으로 돌아가니까. 똑같은 거다. 하고 생각했다.
 그리고 상상했다. 제대 이후에, 자취를 하며 모든 연락을 끊고 홀로 살아가는 모습을. 나는 먼저 연락 하지 않고 연락 받는 수동의 입장이 되리라. 그래서 수동으로 시작해 마침내는 주체로서 끝나는 나의 모습을 보여주고 싶었다. 굳이 치욕스럽지 않아도 살아갈 수 있는 사회적 존재란 것은 없는 것일까.

 그러다가 장난전화가 생각이 났다. 어렸을 때 참 많이 했던 장난전화. 그러고 보니 장난전화란 것은 참 부담되지 않는 것이구나. 가격 부담만 제외 한다면야. 상대방에게도 내게도, 참 부담되지 않는 것이구나. 그래 단어 조차도 ‘장난’전화지 않은가. 부담은 장난으로 얼마든지 환원될 수 있는 에너지였던 것이다.
 여거저기 장난 전화를 치다가 갑자기 어떤 누군가가 맞장난을 쳐서 만나자고 하면 재밌겠다. 문득 이런 생각도 들었다.

 생각해 보면, 그런 사상이 주욱 이어지는 가운데, 나는 점차 밝아지고 있었던 것 같다. 우울함을 비집고 나와 기필코 밝아지겠다고 노력하고 있었던 것 같다. 오히려 우울함은 억지의 에너지로 자리매김하고 있었으니까. 정확히 언제부터였는지는 모르겠다. 다만 나는 더 이상 우울海에서 허덕이고 싶지 않은 마음뿐이었다.
 우울해라고? 그렇구나. 바다였구나. 초롱아귀가 사는 바다는 우울해 였어. 나는 거기서 나와야 겠다. 그러나 어떻게? 초롱아귀가 어떻게 바다를 나올 수 있단 말이지? 그러다 보니 날치가 생각이 났다. 바다에서 뛰어나와 태양을 쬐는 날치. 나는 날치가 되어야 했다. 설령 날개가 힘이 떨어져 다시 우울해에 들어가더라도 나올 수 있는, 연신 퍼덕퍼덕 하고 날아다닐 수 있는 날치. 그런 날치의 경쾌함이 필요했다. 마치 날치의 알과 같은 톡톡거리는 경쾌함 말이다. 내가 좋아하는 강남역 아소산의 날치알밥도 떠올랐다. 아 그래. 그렇구나. 날치가 되자.


날치가 되겠어

                        김  지  민
 
톡톡 튀는 앙큼스러운 알에서 태어날
치가 되겠어 은색의 총체로 빛나는 그
비늘 비늘들의 생의 의식을. 저릿하도록 차갑고 어둔 바다에서
스스로 튕겨져 올라 푸드득 날
치가 되겠어
습하고 짜운 내 바다의 내음들 밝은 태양에 내밀어 말려
살 찌우겠어

날치가 되겠어
내 비 뿌린 바다
그 지 뿌린 심연 우짖는 파도
치는 어느 날 진저리
치는 지느러미
내 심장의 표면으로 떠올라 더는
갖히지 않을거야 나는
강하게 튀어올라 차갑고 하나하나 저릿한 바다
방울들 떨쳐 낼거야 나는 네가 싫다 바다
너무 커져버린 바다. 너를 잃고 새
차게 날아갈거야.

그 밤. 외려 태양이 비추는 푸스름한 바다의 날
치가 되겠어. 그 위를 뛰쳐 나는.

                         -詩 전문(06. 6. 7)


갇히지 말자. 더 이상 내가 만들어낸 우울함에 갇히지 말자. 그건 내가 만들어낸 허구의 바다일 뿐이니까. 내 심장이 만들어낸 바다에 있을 필요는 없지. 이젠 태양으로 나아가자.

 

….

그것이 내가 바다 밑에서 장난 전화를 한 까닭의 전부이다. 소설의 전부이다.

나는 입선을 했다. 사실 더 많은 기대를 했던 것이 사실이다. 처음 소설을 제출하던 때의 겸손함, 아니 올바른 자각은 어디론가 날아가 버리고, 발표가 될 즈음해서 나는 엄청난 건방을 떨고 있었다. 적어도 가작이상의 수상을 하리라 하고 내심 기대하고 있었으니까. 하지만 지금 생각해 보면 입선도 참 고마운 것 같다는 생각이 든다. 상금과 여러 명예를 생각한다면야 아쉬운 것이 사실이지만. 내가 이 소설을 쓸 때 들였던 노력에 비하면 입선도 고마울 노릇이다. 이틀 만에 뚝딱 써버리고 퇴고도 한번 하지 않은 이 소설이 입선 까지나 하다니.

 내가 맨 처음 제출하던 때에, 과연 이 소설이 병영문학상 취지에 맞을 것인가에 대한 고찰이 많았다. 알다시피 병영이란 터울은 꽤나 많은 목적성을 요구하기 때문에, 이렇게 우울하고 병영과는 전혀 관련 없는 이야기가 심사위원들에게 먹힐까 의문이었다. 그러다 내린 나의 논리는 그것이었다. 만약 나의 글쓰기가, 나의 감성이, 내가 건방을 떨 만큼의 가치가 있다면, 그만큼의 임팩트를 가질 수 있다면, 나는 반드시 소재의 호불호를 떠나서 반드시 수상할 수 있으리라. 그것이 나의 건방진 논리였다.
 결과는 아시다시피 입선에서 끝나고 말았다. 나는 나의 한계를 느낄 수 있었다. 그리고 한계는 끝이 아니라는 것도 알고 있다. 한계를 뛰어 넘어야 더 높은 계단이 존재 하다는 것을 알고 있다.

 처음에는 병영문학상에 대한 불만을 토로했지만, 역시나 결론은 그것이다. 임팩트. 나는 더욱 크나큰 임팩트를 소유하고 싶다. 입선의 임팩트가 아닌 최우수의 임팩트로 거듭나리라.
 언젠가는.


사족. 응원해주신, 그리고 글을 읽어주시고 평해주신 모든 분들께 참말 감사의 말씀 올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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