혹시 행복에 대해 공부하면 불행해질까?
– Stumbling on Happiness 를 읽고
이 책을 읽은 사람들의 반응은 주로 두 가지로 요약되는 것 같다. 모든 책이 그렇듯 긍정적인 반응과 부정적인 반응. 그리고 약간은 다른 이 두 반응으로부터 나는 적어도 나에게 적용되는 행복에 관한 하나의 경고문을 얻게 되었다. 그것을 소개하기 전에 먼저 두 반응들을 살펴보자.
우선 분석적이고 논리적인 사고에 익숙한, 비교적 지적인 사람들은 대체로 이 책을 매우 긍정적으로 평가한다. 어쩌면 주관적 안녕감을 수강했을지도 모르는 그들은, 오랜 세월 동안 과학의 관심을 받지 못했던 “행복”이라는 주제가 수많은 멋진 실험을 통해 체계적으로 그 본질을 드러내고 있다는 것에 열광한다. 그들은 또한 우리의 뇌가 행복을 예측할 때 저지르는 여러 오류들을 저자의 설명대로 현실주의, 현재주의, 합리화로 나누어 이해하고, 공감한다. 그리고는 원래 이 책의 목적이 행복해질 수 있는 방법을 제공하는데 있지 않았으며, 그럼에도 불구하고, 자기 자신은 큰 교훈을 얻었다고 말한다. 예를 들면 “우리의 판단이 틀릴 가능성이 높으니 경험자나 다른 사람에게 물어보고, 그걸 따라야겠다.” 라든지, “미래의 행복에 대한 기대감에 지나치게 매몰되지 않고 가급적 멀리 떨어뜨려놓고 조망하는 습관을 가져야겠다.” 와 같이 책 내용에 부합하는 상식적인 교훈들이 그것이다.
한편 책에 대한 다른 반응은 이 책을 통해 행복의 비밀을 깨닫고 더 행복해지기를 막연히 기대했던, 어쩌면 이미 행복한 사람들로부터 나오는 반응이다. 그들은 책 속에서 끊임없이 반복적으로 소개되는 비슷한 실험들이 솔직히 지루했다고 말한다. 과학적 심리학이 전혀 관심사가 아니며, 이미 베스트셀러인 “Flow”, “Frame”, “The geography of thought” 등을 통해 그마저도 충분히 익숙했던 독자의 경우에는, 더더욱 구체적인 새로운 사실을 꼼꼼히 읽으려 하지 않고 대략 어떤 요지인지 알겠다고 말한다. 이러한 두 번째 반응을 보이는 유형의 사람들은 보통 독후감을 쓰는 것도 귀찮아하는 것 같다. 그런데 간혹 드물게 발견할 수 있는 책에 대한 촌평이 흥미롭다. “심리학에 관심있거나 행복이라는 개념을 파헤치는 데 관심이 있는 분은 이 책을 읽어보세요. 재미있습니다. 하지만 그저 행복하고 싶으신 분들은 이 책을 덮고 가족과 산책이나 하며 웃고 이야기하세요.”
어쩜 같은 책을 읽고도 이렇게나 다른 반응들이 나올까? 이것이 바로 주관적 경험의 독특성을 잘 보여주는 것이지만 지금 나는 그것에 대해 말하려는 것은 아니다. 또, 책에 대한 감상을 이러한 두 반응으로 단순히 “분류”하려는 것은 더더욱 아니다. 나의 증폭된 궁금증은 바로 “이 책을 통해 내가 갖고 있는 행복 예측의 오류를 알게 되는 것이 나에게 과연 도움이 되는 것일까? 혹시 더 불행해지거나, 약간 저질의 행복론lay theory에 빠지지 않을까?” 는 것이다. 전공을 끔찍하게 사랑하는 나는 실험이나 연구를 살펴보는 것이 흥미로웠던 동시에 강의를 통해서 이미 거의 알거나 예측할 수 있는 내용을 다시 읽는다는 점에서는 따분했다. 즉, 위의 두 반응을 거의 모두 느끼고 공감할 수 있었다. 그런데 한편으로 뭔가 잘못되고 있다는 느낌을 받았다. 그것은 바로 내가 바이런적 불행Byronic unhappiness – 구체적인 원인이 없는 불행 – 에 빠지는 듯한 느낌이었다!
내가 가장 좋아하는 철학자인 버트런드 러셀은 그의 저서 “행복의 정복”에서 바로 이런 이유없는 불행에 빠진 모습을 다음과 같이 통찰력있게 묘사하고 있다.
“요즘 흔히 접하게 되는 사고방식 중 하나는 과거 여러 시대에 사람들이 관심을 갖고 열정을 쏟았던 것들을 죽 훑어본 뒤에 이 세상에는 삶의 보람으로 삼을 만한 것이 더 이상 남아있지 않다고 생각하는 사람을 현명하게 여기는 것이다. 역사상 다른 많은 시대에도 이런 생각을 하는 사람들이 많았다. 이렇게 생각하는 사람이야말로 참으로 불행한 사람이다. 하지만 그들은 자신들의 불행을 자랑거리로 여기고 불행의 원인을 우주의 본질로 돌려버린다. 그리고 이런 태도야 말로 지식인에게 어울리는 유일한 이성적 태도라고 생각한다.
지적인 수준에서 그들에게 다소 못 미치는 사람들은 불행을 자랑하는 그들의 태도를 보고 그 진실성을 의심한다. 즉 불행을 즐기고 있는 사람은 결코 불행하지 않다고 생각하는 것이다. 하지만 이러한 견해는 너무 단순하다. 물론 불행한 사람들은 자신을 우월하고 통찰력 있는 존재라고 여기며 이러한 자부심에서 약간이나마 보상을 얻는다. 그러나 그 정도의 보상으로는 행복의 상실감을 충분히 메울 수 없다. ”
– Bertrand Russell, The Conquest of Happiness (1930)
행복에 대한 연구를 많이 알면 알수록, 이 책을 통해 인간의 오류를 알게 되고, 그럼에도 그 오류에서 빠져나오기가 어렵다는 것을 알게 될수록, 나는 그다지 행복하지 않은 지금 당장의 감정에 집중하게 된다. 지금 불행한 사람이 미래에도 대체로 불행하고, 지금 행복한 사람이 미래에도 대체로 행복할 거라는 것을 알 때, 나는 나를 돌아보게 되고 행복에 대한 이성적이고 과학적인 사실에 기초하여 나를 불행한 사람으로 만드는 것을 나도 모르게 즐기게 된다. 물론 책을 읽고, 생각에 잠기고 글을 쓰는 것은 내가 좋아하는 일이고, 그것이 나를 어느 정도는 행복하게 해준다. 그리고 경쟁적인 한국의 문화 속에서 나는 동시에 내가 이런 행복에 대한 과학적 진실을 알고 있다는 것을 굉장히 자랑스러워하고 우월한 존재라고 느끼는 것 같다. “행복에 걸려 비틀거리다”를 안 읽어서 불행할 리는 없겠지만, 불행하면서 이 책과 같은 것을 읽지도 않아서 자기가 왜 불행한지도 모르는 사람은 얼마나 불행할까? 이런 우스운 질문을 던지며 마치 방어적인 낙관주의defensive optimism 처럼 순간적으로 이런 저질의 행복론에 빠져들고 마는 것이다.
공부를, 특히 심리학을 공부하고 있거나 계속 공부할 예정이라면 이와 같은 바이런적 불행의 덫을 조심해야하지 않을까? 이것이 바로 내가 이 책을 통해, 정확히는 이 책을 읽는 것으로부터 얻게 된 가장 큰 교훈이다. 나뿐만 아니라 많은 심리학 전공생들이 정적인 감정을 많이 경험할 수 있는 신나는 사건이나 모임에 참석하는 편이 더 행복할 수 있는 방법이라는 것 또한 분명한 사실이라는 것을 알면서도, 유독 “나는 외향적이지 않아. 외향적인 애들이 행복하다는데.” 와 같은 사실에 더 주목한다. 역시 확신편향confirmation bias이 나타나고 있는 것이다.
다시 앞의 상이한 두 반응을 돌아보면 역설적으로 그 둘은 의식적으로 서로 교차될 필요가 있다. 즉, 이 책에 대해 감탄하며 뻔할 뻔자인 교훈과 소감을 적어내는 사람일수록, 책은 적당히 읽고 어서 밖에 나가서 친구들과 노는 편이 나을 것 같다. 어떤 사건에 대한 행복감을 예측하는 데 보다 정확한 스킬을 사용할 수 있는 이들에게는 불행히도 “어떤 사건” 자체가 적다. 따라서 건수를 만들어 내는 것이 현명한 전략이다. 반면 후자의 반응을 보이는 이들은 좀더 정교한 일독을 통해, 기대 이하의 불행감에도 의연히 맞설 수 있도록 행복에 관한 진실을 알 필요가 있을 것이다. 그런데 이 두 반응을 어느 정도 모두 경험할 수 있다고 말하면서 애늙은이 같은 태도로 적당한 행복감– 사실은 불행감에 젖어있는 사람에게는 행복을 위한, 무슨 행동적인, 구체적인 해답이 있을까?
수많은 해결책이 각각의 개인에 따라 다양하게 존재하겠지만, 그런 종류의 사람들이라면, 나는 역시 Russell의 충고에 귀 기울여 전혀 평소 자기와 같지 않은 사람이 되어보는 색다른 경험을 추구하고, 신체적인 자극– 잘 먹고 충분히 자는 것, 땀 흘려 운동을 하는 것이 필요하다고 생각한다. 이 세상에는 할 만한 일이 하나도 없다는 생각 때문에 고민하는 모든 재능있는 젊은이들에게 나는 이렇게 충고하겠다. 세상으로 나가라. 해적도 되어보고, 보르네오의 왕도 되어보고, 소련의 노동자도 되어보라. 기본적인 신체적 욕구를 충족시키기 위해서 모든 에너지를 쏟아야 하는 생활을 해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