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쎄요. 그러니까 현실에서 해체의 시도를 해도 그렇다고 (위력이 없다고) 생각해요. 해체당한다해서 딱히 짜증날 건 없을 거 같아요. 그저 무시해버릴 수도 있는 문제이기 때문에요. 김기덕의 영화가 기분 나쁘면 안 보면 되는 것처럼 (실제로 그렇게 파묻히고 있죠) 해체의 텍스트, 문학도 소비되지 않으면 힘을 발휘할 수 없는 현실이 됐습니다. 저는 우리가 얼마든지 회의懷疑하고 비판할 수 있지만, 현실적 힘은 진실에의 접근에서 나온다고 믿습니다. 제가 과학적 진실을 추구하는 것은, 오늘날 진리가 단순히 사람들이 그것을 믿는지 여부에 따라 상대성을 보임에도 불구하고, 과학은 여전히, 단순히 그 상대성과 믿음에 우선하여 위력을 행사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양의학을 불신하는 누군가가 있더라도 그가 교통사고를 당하면 우리는 그를 첨단의 응급실로 데려갈 수 밖에 없습니다. 게다가 우리 시대 과학은 단순히 생산성의 확대에 기여하는 편리한 도구를 만드는 데 그치지 않고, 인간의 본성과 사유에 대한 탐구에 있어서 그간 철학이 해온 사변적 문답 이상의 작업을 본격화하고 있습니다. 이성, 진리의 불완전성과 결점에도 불구하고 이 시대 매 순간 인간은 최선을 다 할 수 있고, 다 해야합니다. 이런 맥락에서 데리다는 쉽게 범접할 수 없는 천재이지만, 제게 있어 그는 진리탐구와 사회적 실천에 지친 심신을 달래주는 예술적 효용에 그칠 뿐입니다. 인간에게 놀이는 필수적이고 해체주의는 현재 그 극단의 최고봉이 아닐까 합니다.
덧붙여 과거의 검토와 미래의 예견을 포함한 역사관은 희석 씨 말씀대로 E.H.Carr 까지는 쉽게 공감할 수 있고, 승일씨와 형주씨의 글을 통해, 형주씨 글 말미에 있는 “이상적 가치를 설정하고 그것을 지향하는 것은 꼭 필요합니다.” 에 관해서는 많은 생각을 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이기적인 인간의 본성을 긍정하는 것보다 너무도 당연한 듯한 그와 같은 상식에 의문을 제기” 하는 작업의 중요성에는 동의하지만, 단순히 인간본성에 관한 사실이, 지향점에 의해 가려지는 것 또한 문제가 되기 때문입니다. 제로베이스에 서서 옛날에 우리는 공동체적 가치를 공유했다고 외치는 것보다는, 인간이 비록 동물적인 탐욕스러움을 지녔다하더라도 이제 우리는 그것을 제재할 방안을 강구해야만 하며, 그렇게 서로 도와야만 살아남을 수 있다는 것이 더 지금 절실히 요청되는 것이라고 생각하거든요. 좀더 궁리하고 인간본성과 행복에 관한 잡생각을 써보고 싶어요.
10월 05200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