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월 182007
 

#1

언젠가부터 내겐 컴퓨터를 끄지 않는 습관이 생겼다.
정확히 언제부터인지, 무슨 이유에서인지, 그닥 신경쓰지 않았고, 뭐 대수롭다고, 그런 식으로 생각하곤 했다.
며칠씩 자리를 비워야할 상황이라면 그래도, 꺼두어도 좋을텐데, 언제나 컴퓨터의 전원은 on 상태.

붙잡을 수 없는 사람을 오랜 시간동안 마음 속 깊이 간직하다보면 아득해지는 순간이 있다.
어느 날 잠에서 깨어 일어났는데, 문득 갑자기 이 세상의 모든 것이 다르게 보이는 그런 순간
그러니까 내가 지금껏 본 것들이 정말 내가 본 것이 맞는지.
가슴 속에 간직한 풍경이, 그리고 그 풍경 속에 실제로 내가 존재하고 있었던 것인지.
모든 것들이 의심쩍고, 뒤엉켜 머릿속에서 그리고 가슴속에서 엉망이 되어버리는 그런 순간이 있다.
그럴적엔 그녀를 향한 나의 마음도 의심을 하게 된다, 슬프게도, 과연 내가 정말 그녀를 사랑하긴 한 걸까.
그 감정은 사랑이었을까 정말. 이런 식의 생각들.

어느 날 이유없이 그녀를 향한 나의 마음이 off 되는 것이 두렵고 슬프고 아프고, 또 많이 괴로워서.
한 번 꺼버리게 되면 그런 순간들과 추억이 다시는 돌아오지 않을 것만 같아서.
컴퓨터를 끈다면, 다시는 켜지지 않을지도 모른다는 막연한 불안감이 엄습해올 것 같아서.

그렇다고해도
설령 내가 컴퓨터를 켜 둔다 한들, 컴퓨터가 아파할 리는 만무하겠지만.
그녀를 향한 마음의 전원을 끄지 않아서 그녀가 아파하게 된다면, 그건 …..니까.

이제, 돌아보는 가슴이 너무나 아파, 나는 그냥 울며 잊어야겠다.
컴퓨터를 꺼야 할 시간이다.

———from xhine’s blog “truly madly deeply” http://xhine.egloos.com/page/5

할 일이 많든 적든, 방에서 나가든 들어오든 늘 컴퓨터를 켜두는 버릇이 있는 나도
이제 컴퓨터를 꺼야 할 시간이라는 말이 참 마음에 와 닿는다.
서버 운영이네, 급할 때 원격접속이네. 이런 거 사실 다 핑계. 호스팅이 훨씬 싸고 안정적인데.

혼자 있는 방에서는 늘 함께 해주는 컴퓨터.
이 바보같은 기계덩어리가
매순간 내가 뱉어낸 생각,  기억의 편린이며 지난 추억들을 죄다 알고 있는 것만 같다.

언제부턴가 나는 내 컴퓨터를 포맷, 리셋 하지 않는다.
바탕화면, 내 문서, 하드디스크 여기저기에 흩뿌려진 잡다한 사진과 영상, 텍스트를 정리하지도 않는다.

그저 내버려둔다. 다시 열어보지 않을지라도.

가만 돌아보면, 그렇게 사진이나 동영상, 일기로 일상을 남기기를 좋아했던 내가
이제 그런 짓을 단순한 강박으로 치부해버리기 시작한 것도
이렇게 컴퓨터를 끄지 않는 마음에서 비롯된 것일지도 모르겠다.


이제 꺼야할 시간인데.
지워야할 시간인데.

정말 내 마음도 off 될 까봐. 그럼 영영 돌아오지 않을까봐 두렵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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