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세계의 역사에 관하여, 겉으로 드러난 (후대에 전해져오는) 언행과 사건, 유물 — 이것들은 아마도 정치/사회적 역학관계에 따른 산물이겠지만 — 그 이상의 사상의 역사에 인과성을 부여하고 싶지 않다. 내게 사상의 역사는 통시적이기 보다는 공시적이고, 배우고 익히는 타자라기보다는 인간 종에 내재된 폭넓은 성향 그 자체이다. 아마 이런 생각은 이성적 판단 이전에, 철없는 나의 생떼스런 고집에서 기인한 것 같다.
고교시절, 지기지우와 나는 입시공부는 젖혀두고 늘상 사변적인 노가리에 열중했는데, 둘다 동서양철학사는 쥐뿔도 모르면서, — 심지어 윤리교과서의 개허접한 사상사 언급조차도 차라리 외웠다 — 떠오르는대로 수다를 떨었다. 돌아보면 자유와 공리주의논의에 인식론을 짬뽕시킨 듯한, 우주론;’각 개인이 하나의 우주를 갖고 있고, 그런 우주들이 겹쳐지고, 서로 영향을 주고 받으며 확대/축소된다는 식의 우리 나름의 세계관’을 무슨 대단한 논문이라도 작성하는 것처럼 휘갈겼다. 교회나 성당에 고작 여학생을 꼬시러 가끔 갔던 나는, 기숙사에서 녀석과 신실한 신자 친구들과 함께 날을 세워가며 얘기했다. 그런 경험이 누구에게나 꽤 공통적이라는 걸 그때까진 잘 몰랐다. 생각의 꼬리에 꼬리를 물며 신과 인간에 대하여, 불가지론과 무신론 사이에서 헤매었지만 그 땐 내 생각에 ‘불가지론’이나 ‘무신론’이라는 이름표를 달줄은 몰랐다. 반항기 완전충전의 내 눈에 세상은 너무 지저분하기만 했고, 더 나은 세상을 만드는 것이 사람의 힘으로 가능한건지, 이 모든 건 진보하는 것인지, 변화의 힘은 어디에 있는지, 모든 것이 결정돼있는데 우리가 모를 뿐인 것인지 아는 것은 정말 중요한 문제가 됐다.
그러니까 꼭 그 맘때 학생들의 자연스런 철학적 관심을 키워주고, 공부를 계속할 수 있도록 돕는 교육이 이 땅에는 없다. 나는 틈틈이 인터넷을 후비고 몇몇 개론서를 뒤적이는 것으로, 불씨만 겨우 살려갈 뿐 지적 발전은 미미했다. 다만 내가 던지는 질문들이, 우주론 따위의 허접한 아이디어가, 수많은 선배들에 의해 이미 꽤 상세하고 체계적으로 정리된 바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됐을 뿐이다. 그런 류의 지적충격은 늘상 내가 외톨이가 아니라는 기쁨과 동시에, 나만의 비밀을 들킨 것 같은 찝찝함과 불쾌함을 안겨주곤 했다. 철학과 진학을 꿈꾸던 고삐리인 내게 이미 대학의 단물을 다 빨았다는 예비역+복학생+고시생 선배는 조언했다. –우리나라에서 철학을 공부한다는 건, 그 수많은 과거의 저작들을 죄다 읽고 검토하고 해석하는 작업일 뿐이다. 아님 현재 잘 나가는 외국 철학자의 생각을 통번역해서 수입해오던지, 동양철학/한국철학을 잘 포장해서 현재의 정치사회적 문제에 보조를 맞추어 시의적절하게, 보편성보다는 문화적 특수성에 기대어 수출하는 거라고.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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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철학적 사유와 상상력, ‘철학함’이 철학지식보다 언제나 선행한다는 떼쓰기.
– 사상의 역사를 하나의 경향, 유행으로 파악하는 건 대중의 생활사, 미시사를 배제한 영웅사관의 편협함처럼 나같은 꼬마 개똥철학자를 비롯한 힘없는 사람들의 생각을 마치 원래 존재하지도 않았다가 한 가지 사상의 극점에서 전환, 파생, 발전된 것으로 간주하는 듯하여 몹시 싫다. //
물론 이제는 아무것도 모르는 채 창조하는 것보단 혹독한 훈련으로 갖춰진 기본기가 창조의 밑거름이 된다는 걸 안다. 과연 하늘아래 새로운 게 있을까냔 고민에도 일견 공감한다. 보르헤스의 작품과 해체작업의 최전선을 보면서, 엉뚱하게도 나는 텍스트를 넣고 특정 사상적, 정치적 입장을 선택하면, 새로운 글로 재구성해주는 컴퓨터프로그램을 만들면 좋겠다는 생각을 했다. 기술적으로 어렵다면 일단 비슷한 경향의 글을 한데 묶을 수 있는 카테고라이징 프로그램이라도 만들면 검색에 유용하겠다. 텍스트가 저자의 손을 떠나고 해석은 또 독자의 몫이라지만, 그런 수많은 독자의 해석도 네트워크망을 통해 취합해서 정리할 수 있으니까. (실제 요즘 검색엔진의 수준은 이런 방향으로 놀랄만큼 발전해가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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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게 있어서, 고대 그리스의 철학자 탈레스는 만물의 본질을 ‘물’로 봤던 얼척없는 선배가 아니라, 세계의 물질적 기초와 자연의 통일성에 관한 생각을 했다는 점에서 아인슈타인과 같이 느껴지고, 공감이 간다. 플라톤도 그렇다. 사람의 인지 과정에 대한 이론 중 크게 배치되는 두 가지 입장이 있다. top down theory 와 bottom up theory 가 그것인데 (아- 우리말 용어가 생각이 안나요), top down theory 에 따르면, 우리는 사물을 지각할 때 머릿 속에 있는 그 사물의 원형이나 개념을 기초로 형태를 재구성한다. 애매한 그림을 보여주고 무엇으로 보이느냐 묻는다든지, 누구나 토끼로 인식할 수 있는 사진을 조금씩 변형/훼손시켜가며 언제까지 토끼로 보는지 조사하는 방법으로 토끼의 핵심속성을 파악하는 등의 작업이 가능하다. 이러하니 플라톤의 이데아론이 그저 지루한 동굴이야기에 그칠리가 없다. (참고로 bottom up theory는 우리가 점, 선, 면, 색과 같은 지각의 기본단위–실제로 우리의 시세포가 그렇다– 를 바탕으로 전체형태를 재구성해낸다는 입장)
포스트모더니즘과 해체의 유희는 그 옛날 소피스트들과 상통하지 않을까. 사적 이익만을 위해 변론술을 악용하지만 않는다면, 개인주의와 자유주의를 신봉하는 나에게 지적유희는 진심으로 바라고, 바라고 또 바라는 것 중 하나이다. 그러나 희석 씨의 말씀; 로고스중심주의의 문제, 이성의 다른 이성으로의 대체, ‘개박살’ 견해에는 동의할 수 없다. 그것은 대체와 개박살이기보다는 도구의 발전, 시야의 확대로 보는 것이 옳지 않을까. 아리스토텔레스가 현재 우리와 함께 살면서도 우리가 기억하는 아리스토텔레스와 같을 수는 없을 것이다.
솔직히 나의 편견일지는 몰라도, 희석씨가 늘 언급하시는 ‘해체주의’는 재미는 있지만, 현실과는 상당히 괴리감이 있다고 생각한다. 예로 학벌 논의와 텍스트, 그 권력구조를 해체하여도 현실적으로 무어가 달라지는지 잘 모르겠다. 모두가 그렇게 맹신하고 따라야만 할 것 같은 원칙이, 사실 그리 대단한 것이 아니라는 것을 보이는 시도, 그 이상의 의의가 있을까. 냉소주의적인 태도로 모든 단단한 것들을 비웃는다더라도 그것이 문학적대리만족, 심리적안녕감을 주는 것에 그친다면, 현실은 우리의 바람대로 변화하기 보다는 오히려 정체할 것이다. 혹여 지적허영을 채우는 독이 되지 않을까 두렵기도 하다. 마르크스이론을 넘어서지 못하는 건 포스트모더니스트들의 시도가 철저하기 못하기 때문이 아니라 (철저하다면 그것 또한 자기모순이 아닐까), 그들 역시 마르크스적 한계에 묶이고 말기 때문이다. 속된 말로 배가 불러야 ‘놀’ 수 있는 것이니까. 게다가 고집스런 로고스주의 철학보다는 이런들 어떠하리 저런들 어떠하리의 철학이라면 훨씬 둥글둥글 부드럽게 살아갈 수 있을테니까. 영역가르기는 무용하다 생각하지만, 철학적 논의의 기본전제를 거부하면서 철학의 영역에 남아있길 바라는 건 지나친 욕심이다. 차라리 솔직하게 예술로 간판을 바꾸면 깔끔하지 않나.
9월 06200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