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월 252000
 



* 無형식으로 떠오르는 생각을 손가는대로 적어 본다.



   나는 1983년에 혼인하신 父이강길, 母한선숙 두 분 사이의 장남으로 1984년 9월 1일 전북 군산시 동흥남동에서 태어났다. (물론 병원에 가서 낳아졌겠지만.)


   간난아기 시절 나는 유난히도 울음이 많았다고 들었다. 때문에 셋방살이를 하는데 주인집 할머니가 시끄럽다고 우리 가족을 쫓아낸 일도 있었다고 한다. 어린시절 나는 아버지의 직업이 세무공무원인 관계로 근 2년마다 한번씩은 이곳 저곳으로 근무지가 옮겨졌기 때문에 이사를 많이 하였다. 반곱슬머리에 책을 좋아하여 그림책이나 어린이용 동화책을 많이 읽었던 나는 가뜩이나 수줍음을 많이 타던 터에다 잦은 이사 때문에 더더욱 내성적인 성격을 띠게 되었고 친구도 많이 사귀지를 못하였다. 군산에서 태어나서 이리(지금의 익산)으로 또 다시 군산으로 다음에는 남원으로 다음으로 전주로 적을 옮기는 과정 가운데에 이 집 저 집 이 방 저 방을 옮기던 것 까지 더하면 얼마나 이사를 많이 하였을까!


   자기 자신이 간난아기 였을 때 겪었던 일을 기억하는 사람은 없다. 나의 유아기라고 하면 나는 남원에 살던 때가 생각이 난다. 잠시동안이나마 유치원을 다녀보았던 일, 집 앞으로 펼쳐진 넓은 논밭, 어머니를 도와 콩을 까는 것을 즐겨했던 것, 아침에 일어나 마루에 둔 깡통에 오줌을 누었던 일, 두 명의 친구 – 안집 여자애와 옆집의 지성이 – , 아버지의 자전거페달을 돌리고 놀다가 체인에 손가락이 끼었던 일, 동생 민재의 출생 등 많은 추억들이 남아있다.


   1989년, 근검절약하시고 열심히 일하신 우리 부모님 덕으로, 우리 가족은 마침내 전주시 덕진구 우아동에 위치한 우아아파트로 이사를 하게 된다. 내 나이로는 여섯 살적의 일이다. 부모님께서는 나의 성격이 매우 내성적이고 친구가 많이 없는 것을 걱정하여 아버지의 근무지 이동에도 불구하고 한 곳에서 자리를 잡자는 배려를 해주셨다. 이 때에 나는 한 통로에 사는 장호진을 처음 만나게 되어 오늘날까지 정을 쌓아오고 있다. 1991년 전주동신초등학교에 입학하기 전까지 나는 이모부께서 원장으로 계시는 동양웅변학원에 약 1년간 다니었다. 초등학교에 입학한 이후, 나는 초등학교 저학년 내내 학교에 가서는 책상에만 앉아있다가 집에오는 매우 내성적인 아이로 머물렀다. 그 사이에 수많은 책을 읽기는 하였지만. 초등학교 3학년 때 만난 매우 재밌고도 특이한(?) 담임 선생님의 도움과 함께 많은 친구들을 사귀고 같이 즐겁게 놀게 되어, (외사촌과 한 반이었다 – 현재 유일여고에 재학중인) 나의 성격은 조금씩 변화하게 되었다. 초등학교 저학년 시절, 나는 과학자를 꿈꿨었다.


   초등학교 4학년을 거쳐 상당히 많은 부분 변화한 나의 성격은 초등학교 5,6학년내내 같은 한 담임선생님과 생활하고 농구에 빠져 친구들과 매일 같이 뛰놀면서 180°바뀌었다. 다른 친구들을 이끌거나 나서지는 못하여도 실로 놀라운 변화였다. 초등학교 고학년 때 나는 장래희망에 컴퓨터 프로그래머라고 적어 넣었다. 선견지명을 지니신 훌륭하신 아버지 덕택으로 컴퓨터를 처음 접했을 때, 나는 7살 밖에 되지 않았었다. 터무니 없이 비싼 가격(190여만원으로 기억)에 구입했던 XT PC를 가지고서 초등학교 1학년~2학년 기간동안 컴퓨터학원에 나가 타자연습을 하였다. 지금 생각하면 그 때 컴퓨터 학원이 시내로 이사를 가버린 것이 못내 아쉬운 판이다. 줄곧 컴퓨터학원에 다녀왔더라면 지금의 갑절의 실력은 되었으랴. 학급 문고 편집과 함께 컴퓨터 게임에 심취해 있었던 나는 컴퓨터에 상당한 흥미를 느끼고서 그만큼 관련서적을 읽다 잠을 설치고, 친구들의 컴퓨터를 고쳐주면서 초등시절 꿈을 키웠다.


   초등학교 시절의 내용 중에서 빠뜨린 것이 있다면, 하루도 빠뜨리지 않고 6년간 일기를 썼던 것이다. 독서를 많이 하고 일기를 많이 써서 글 쓰는 실력이 상당히 좋았었다. 이 시절을 돌아보았을 때, 나의 맹점은 아마도 친구를 좀 가려사귄다고 해야할까. 겁이 많았고 사실 성격이 많이 변하였다고는 했어도 먼저 접근하여 관계를 리드하기보다는 동참하고 끌려가주는 분위기였다고 해야하나. 여하튼 친구에게 솔직한 마음을 터놓는다거나 하지를 못하였다. 과제물에서만큼은 자신의 생각을 떳떳이 발표하였지만은 같은 반의 여자애들에게는 눈길조차 주는 것이, 말 한마디 하는 것이 수줍었던 것 같다. 거짓된 말을 꾸며서 하기도 많이 했고, 나를 위해서 다른 친구를 이용한다거나 신체여건과 건강이 과히 좋지 않으면서 반 대표로 농구시합에 나간다거나 했던, 지금 생각하면 좀 창피스럽고 우스운 일들이 아련하다.


   음, 우아아파트에 살던 나는 초등학교 졸업후, 자연히 거주지에서 가까운 전주기린중학교에 입학한다. 매우 떨리는 마음으로, 겁을 잔뜩 먹고서 동네 친구 몇몇이랑 항상 등하교길을 같이 하기도 하였다. 초등학교 때와는 달리 숙제가 매우 많아지고, 성적관리도 꽤나 달라진 판국에 차차 적응해 나감에 따라서 성적도 덩달아 올라갔고 장학생으로 선발되었다. 내가 중학교 시절에 가장 요점으로 생각하는 것은, 1학년 7월에 조금 늦게나마 인터넷과 PC통신을 처음 접하게 된 것이다. 학교에서 적극 가입을 권하고 저렴한 가격으로 PC통신서비스를 이용하게 해주었던 것인데 이로 인해 나의 컴퓨터 실력이 하루가 지나고 나면 두배 이상 진전하는 그런 계기가 되었다고 해야하나. 온라인상에서 나는 수많은 프로그램들을 구해서 사용해보기도 하였고, 채팅에 흠뻑 빠져있다가는 컴퓨터를 무척이나 잘하는 형을 만나 같이 컴퓨터 동호회를 만들어 운영도 하고… 컴퓨터 실력에 그치는 문제가 아니라 심지어는 여지껏은 좁았던 나의 인간관계와 사고의 폭을 퍽 늘려버렸다고 본다. 동호회내에서 많은 사람들을 접하게 되고, 지역/나이/성별에 관계없이 많은 사람들을 사귀고 만나는 가운데서 내 자신을 발견하고 무언가 합리적인 생각이 꿈틀거려온 것 같다. (가상공간속에서 자아정체성에 대한 시험은 재밌기도 하다. 익명성을 이용한 자기위장, 역할극을 해 보았는가?)


   여하튼, 시간은 흘려 흘러 중학교 2학년 때에는 내 자신에 대한 믿음과 자신감이 확고해지면서 뭐든지 즐거웠던 것 같다. 문제가 되는 부분에는 자꾸만 나서고 싶은 의욕이 생겨났고 컴퓨터실력도 꽤나 인정을 받아 마침내에는 학교내 컴퓨터를 돌보고 아예 있지도 않은 학교 홈페이지를 혼자서 만들기 시작했다. 사실 벼락치기식으로 시험이 돌아오면 공부를 하는 식이기는 하였지만 성적은 전교 1등을 두 번이나 하는 등 나로서도 놀라운 일들이 되풀이 되었다. 글을 쓰는 지금의 어투도 약간 그러한 감이 있는데, 이렇게 계속 잘 나가는 것 때문에 나는 상당한 자만심이나 오만함을 가지게 되었다. 여러 선생님들도 모두들 나를 인정해주셨으며 친구들도 그랬다. 집안에서도 나의 입김(감정에 호소하는 것이 아니라 나름대로 상당히 합리적이고 논리적인)은 세져만 갔다. 나는 더더욱 오만해졌다. 다른 사람에게는 비춰지지 않도록 언제나 겸손하려고 굽히려고 신경을 썼지만 그러면서 마음속으로는 다른 이의 의견을 무시하고 내가 뭐든 다 알고 뭐든 제대로 인 것 처럼 옹졸한 생각을 했다. 그러한 생각들을 바탕으로 선량했던 친구들이 몇몇씩 삐뚤어져나가고 비행을 저지르는 친구들을 보면서 사회비판적, 문제해결론적인 연설을 이 친구, 저 친구에게 막 떠들어대고 다녔었다.


   3학년이 되면서, 입시 스트레스도 많이 받게 되었다. 고등학교 진학의 문제로 많은 친구들과 더불어 3학년 학생들에게 그만큼 부담감이 주어졌다. 그러나 나는 그럴수록 더더욱 따로 놀았다.(마치 좋지 못한 교육제도에 나만은 뻐틴다는 생각이었던 것 같다) 학교홈페이지 완성에 박차를 기해가면서 정보부장 선생님께서 소개해주시는 각종 대회라는 대회에는 모조리 참가하여 크고 작은 상을 탄 것이 열서너개로 상금과 상품으로 ‘한 살림’ 차렸다고 할 만큼이었다.


   3학년 때 사건중에서 기억에 남는 것이 있다. 사건인 즉 이렇다. 정책적으로 모의고사 실시가 금지가 된 판에 학교측에서는 모의고사를 계획했고 누군가의 신고로 인하여 실시가 무산되었다. 그리고는 한 열흘이 지난후에 다시 살며시 모의고사를 실시하려다가 또 누군가의 신고로 무산되면서 모의고사를 실시하지 않는다는 교장선생님 명의 안내문이 각 학생들에게 전해졌다. 그러다가 다시 몇 일이 지나고 타 학교에서는 끝내 실시하지 못하고 학생들에게 그냥 배부한 시험지를 가지고 학교측에서는 내일 영어과 듣기평가가 실시된다며 컴퓨터용 수성사인펜을 준비하라는 꽤나 우스운 방법으로 학생들을 속여 다음날 모의고사를 실시하였다. 모의고사 실시까지의 일련의 우스꽝스러운 과정과 시험을 본다는 그 결과에 아이들은 경악했다. 타 학교에 배부한 시험지와 답안지 때문에 아이들은 이 반 저 반 답지를 보러 다니느라 혼란스러웠다. 와중에 휴대전화를 가지고 있는 누군가가 교육청에 바로 신고해버리는 일이 벌어졌다. 곧이어 교장선생님의 흥분한 목소리가 스피커를 타고 나왔다. 이 시험은 여러분의 실력향상을 위한 것이라고. 나는 그 날 전 답안지를 백지로 내버렸다. 그리고 나이가 지긋하신 담임선생님께 불려가서 얘기를 나누는데 나름대로의 생각을 말하였다. 다른 젊은 선생님들과도 얘기를 나누고… 음, 그 때 이후로 무언가 개똥같은 고집은 여전히 있으면서도 한층 더 성숙해졌다는 것을 느낀다. 사실 이렇게 말하는 내 자신이 더욱 우습기도 하지만. 그리고는 금새 중학교를 졸업해버렸다. 과학고등학교에 갈 까도 했지만 나름대로의 판단으로 뿌리치고 일반인문계고등학교에 지원하였고 지금의 자리에 있다. 중학교 겨울방학 때와 봄방학 때 그리고 고등학교에 입학하고 오늘이 되기까지 머릿속을 지났던 생각도 많겠지만 그게 어떠했고 뭐 했다는 나름대로의 판단과 반성을 하기에는 때가 너무 이른 것 같아 여기에서 나의 성장기를 마친다. 사실 몸이 조금 피곤하기도 하다.



2000. 2. 25 작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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