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월 082003
 





“진실”의 사전적 개념
– 진실과 진리는 다른 뜻의 단어일까? 영어로는 모두 truth 라는 것에 주목했다.

<국어사전>

진실(眞實)[명사][하다형 형용사] 거짓이 없이 바르고 참됨. 참1.
  ¶  진실한 사람.

진리(眞理)[질―][명사]
1.참된 도리. 바른 이치.
  ¶  진리를 깨닫다.
2.어떤 명제가 사실과 일치하거나 논리의 법칙에 맞는 것.
3.언제나, 또는 누구에게나 타당하다고 인정되는 인식의 내용. 참1.

<백과사전 – 철학 – 철학일반>
진리 [ 眞理 ,  truth ]
– 허위(虛僞)와 함께 그 어느 것인가가 명제 또는 판단에 부착하는 성질.

  일반적으로 ‘S는 P이다’라고 표기되는 명제 또는 판단, 예컨대 ‘인간은 식물이다’ ‘이 꽃은 흰색이다’ 등은 반드시 참[眞]이든지 거짓이든지 둘 중의 하나이다. 참인 명제의 파악 또는 참인 판단이 지식이고, 지식은 참이기 때문에 지식이 되는 것이므로, 진리는 인식에 관한 초월적인 가치이며, 지성(知性)이 노리는 목적으로서의 초월적인 대상이다.

  진리의 기준이 무엇인가에 대하여는 여러 가지 설(說)이 있다. 전통적인 형이상학에서는 ‘사고(思考)와 존재의 합치(adaequatio rei et intellectus)’가 진리라고 하였다. 그리스어의 altheia(진리)의 의미는 본래 ‘은폐되지 않은 것, 드러나 있는 것’이라고 생각된다. 즉, 진리라는 것은 존재 그 자체의 모습이 드러난 것이고, 그와 같이 존재 그 자체를 드러나게 하는 것, 또는 존재의 진실상(眞實相)이 그곳에 드러나게 되는 장소가 이성(理性)이라고 생각된다. 이와 같이 진리를 존재 그 자체에 관하여 논할 때 그것을 존재론적 진리(存在論的眞理)라고 한다.

  이에 반하여, 진리가 지성(知性)의 분석과 종합 작용인 판단에 관하여 논해질 때 그것을 인식론적 진리(認識論的眞理)라고 한다. 중세에는, 여러 가지 진리가 유일한 진리인 신(神)에 기인하는 것으로 간주되었다. 신의 진리는 사물을 창조하는 진리이다. 따라서, 이것은 존재의 참[眞]에 관계를 맺고서 성립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존재의 참이 그것에 관계를 맺고서 성립하는 것으로 되었다. 지성이 지성 외부에 있는 존재에 어떻게 해서 도달할 수 있는 것일까 하는 물음에 의해서 회의론(懷疑論)이 생겨난다. 고르기아스나 고대 회의파에서는, 거기에서 진리의 인식은 불가능하다는 결론이 도출(導出)되었다. 프로타고라스에게서는 ‘진리란 각자에게 그렇게 생각되는 것이다’라고 하는 상대주의가 생겨났다. 이것은 인간을 진리의 척도로 하는 점에서 ‘인간척도설(homo-mensura-theorie)’이라고 불린다. 회의론의 주장에 대해서 ‘만민(萬民)의 일치(consensus gentium)’가 진리의 기준으로서 주장된 적도 있었다. 지성은 지성의 외부에 있는 ‘물자체(物自體)’에는 도달할 수 없지만, 지성 내부에서 진위(眞僞)를 판별한다고 생각할 때 근대의 주관주의(主觀主義)가 생겨났다. 이 경우, I.칸트의 구성주의(構成主義)에서와 같이 진리의 기준은 관념의 명증성(明證性) 또는 지성의 법칙과의 정합성(整合性)에 놓여지고 지성 내의 기준이 진리의 기준이 된다. 또 진리의 기준을 지식의 유효성에 있다고 하는 프래그머티즘의 진리설도 주관주의의 한 형태이다.

철학사전을 찾아보니 진실이란 항목은 없고 ‘진리’는 있습니다.

* 진리
진리의 목적이 실재를 충실히 재구성하는 데 있다고 해도, 진리는 실재가 아니다. 실재가 정의상 인간으로부터 독립적인데 반해, 진리는 언제나 담론 또는 표상의 질서에 속하기 때문이다. 철학적 탐구의 본질적 부분이라고 할 수 있는 진리는 하나의 사실도 아니고, 하나의 소여(주어진 바의 사물)도 아니다. 진리는 적극적으로 탐구하여야 한다. 그래서 우리는 진리에 접근할 수 있는 조건과, 참된 판단의 규준에 관한 문제에 부딪친다. 또한 어떤 당위나 가치를 구성하기도 한다.

– 진리 탐구의 문제
진리 탐구는 철학적 반성의 핵심 부분이며, 그리스 철학에서 철학에 대한 정의도 진리를 통해 내려졌다. 플라톤의 철학은 진리 탐구에 관련되는 3중의 관념을 제시한다.
1) 이 탐구는 다음과 같은 의미를 가진다. 참된 진리에 도달하려는 인간의 노력은 성공할 수 있다. – 인간 이성과 인식능력의 긍정
2) 진리를 말한다는 것은 전혀 낯선 어떤 것을 말하는 것이 아니다. 이것이 소크라테스가 말한 산파술의 의미이다. 진리를 배우는 것은 빈 그릇을 채우는 것이 아니다. 그것은 자신의 밑바닥에서 진리를 재발견하는 것이다. – 상기의 개념, 레테의 강… 즉, 우리가 이미 알고 있었던 지식이나 사실을 바탕으로 잊혀진 것들을 재구성한 것이 진리라는 의미…
3) 진리는 항구성과 보편성을 통해서 정의되며, 이 점에서 의견들의 상대성이나 변덕과 혼동해서는 안 된다.

– 진리의 정의
13세기의 토마스 아퀴나스 이후, 사람들은 진리를 일종의 상응 또는 일치로서, 즉 정신과 실재의 일치로서 정의해왔다. 달리 말해 “눈이 내린다”는 명제는 실제 눈이 내릴 때에만 참인 것이다.
이 같은 정의는 하나의 중요한 결과를 가져온다. 즉, 진리는 실재의 성질이 아니라 언어의 성질인 것이다. ‘참’과 ‘거짓’은 사물이 아닌 명제에 적용되는 개념이다. 진리를 일치로 규정하는 것을 모든 사람들이 받아들이는 것은 아니다. 이 정의와 다른 정의들 가운데 대표적인 것은, 진리를 정합성에 의해 정의하는 경우이다. 이 정의에 따르면, 예를 들어 하나의 과학적 이론은 그것이 사실들에 일치할 때가 아니라, 그 이론을 구성하고 있는 명제들이 서로 정합적일 때, 즉 서로 양립할 수 있을 때 참이다. – 즉, 명제들 사이의 상호모순이 없고 일관적이어야 한다. –
그러나 이 정의는 문제가 있다. 어떤 이론을 구성하는 명제들이 정합적이어야 한다는 것은, 그 이론이 참이라는 사실의 필요조건이지 충분조건은 아니다. 우리의 개념들, 명제들이 서로 정합적이면서도 실재와는 모순될 수 있는 것이다.
그러나 진리 상응설이 충분히 만족스러운 것은 아니다. 한편으로는 상응이나 일치의 개념은 명제나 믿음이 상응해야 하는 그 사실이나 우리의 언어로부터 독립적이어야 함을 전제로 한다. 그러나 세계에 대해 말하려는 모든 시도는 이미 세계에 대한 하나의 해석이 아닌가? 다른 한편, 하나의 믿음이 사실들과 일치한다는 것은 무슨 뜻인가? 참된 사유는 실재의 충실한 복사물이라는 뜻인가, 아니면 실용주의자들이 주장하듯이 실재에 대해 효과적으로 행위할 수 있도록 해 준다는 뜻인가?
사유가 행위능력을 증가시킨다는 것은 분명한 사실이다. 그러나 실용주의는 진리의 규칙을 성공에 두고 있다는 점에서 문제가 있다. 진리의 규칙은 성공이 아닌 증명의 방법에서 찾아야 한다. 검증되지 않는 진리는 의미가 없다. (이하 생략)

내용출처 – ‘철학사전’ 이정우 옮김 1996 동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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