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 ‘일 포스티노’를 보기 전까지 은유에 대한 나의 생각은 정확히 고등학교 국어 시간에 다루었던 수사법의 수준에 머물러 있었다. “~같은”, “~처럼”이 쓰였으면 ‘직유’이고 단지 ‘내 마음은 호수요.”면 ‘은유’가 되는 단순무식의 단계에서, 은유를 잘 안다고 생각했다.
굳이 수사법으로 따지자면 주인공 마리오의 은유는 더 그럴싸한 말로 꾸며볼 마음이 들만큼 세련됨괴는 거리가 있는 유치한 느낌을 준다. 그러나 다소 지루했던 영화가 보여준 마리오의 일생에 걸친 변화는, 은유는 하나의 ‘세상을 보는 눈’이며 우리는 모두 은유의 세계에서 살아가고 있음을 시사해 준다.
시인 파블로 네루다의 싸인을 받기 위해 “이 책을 멋지게 만들어 주시겠습니까?”로 돌려 말하는 첫 부분의 사소한 사건이 영화가 끝난 지금은 굉장히 큰 의미로 다가온다. 은유를 배우고 은유로 표현된 세계에 눈을 뜨면서 사랑을 하고, 세계와 정치에 자연히 참여하게 된 마리오도, 시작은 그렇게 생활 속의 간단한 고민과 그 도중에 튀어나온 모호한 한 마디 였던 것이다.
시인의 위대함은 어떤 대상을 정확히 그려내는 데 있는 것이 아니라 말로는 다 할 수 없는 그 어떤 것, 마뜻이 계속 생성되는 그 어떤 말을 창조하는 데 있다. 은유로 표현한 것은 이미 화자의 처음 의도를 떠나 보다 넓은 세계를 펼쳐주는 의미있는 기능을 하게 되는 것이다. 마리오가 죽은 뒤의 네루다의 회상과 행동들이 이와 무관하지 않다.
문득 한용운의 시가 떠오른다. 단지 연애시로 생각할 수 있는 그의 시가 담고 있는, 또 내뿜고 있는 세계는 한 사람의 삶과 세계관 이상의 강력한 영향을 우리에게 주고 있지 않은가? 마리오나 네루다와 같이 의식적으로 은유로 점철되는 인생을 살기는 불가능하더라도, 자신이 은유의 세계 안에 살고 있음을 깨닫고 은유의 진정한 의미를 아는 것은 세계를 바르게 이해하기위한 중요한 기로가 될 수 있다. 영화 ‘일 포스티노’는 은유 속의 나를 발견케 해 준 소중한 경험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