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월 242007
 

2. 희생


  주변의 친구들에게 지금 사귀는 이성과 결혼할 것인지 물어보면, 대개 꼭 결혼하겠다는 대답보다는 “잘 모르겠다” 부터 “미쳤니? 때가 되면 언젠가 헤어지겠지.” 정도의 시큰둥한 대답을 듣기 쉽다. 결혼이 결코 사랑의 결실이나 종착점이 될 수는 없기 때문에 그런 대답은 일견 타당할지도 모른다. 그러나 나는 나를 비롯한 우리 또래 대다수가, 이런 그럴듯한 이유를 핑계로 사랑을 계속해나가는데 필수적인 “희생”을 쓰레기통에 던져버렸다고 생각한다. 법으로 두 사람에게 성실의 의무와 책임을 규정짓는 결혼제도에 대한 동경과 걱정, 이 묘한 감정은 나이가 들어감에 따라 더욱 증폭되는 것만 같다. 그리고 많은 사람들이 그런 감정을 회피하기 일쑤이다. 게다가 골치아프게 그런 생각에 사로잡히는 것보다는 그저 현재에 충실하라는 말은 언제나 잘 먹힌다. ‘과거는 묻지마세요, 더불어 미래도. 오늘은 당신을 사랑하지만 내일은 아닐 수도 있으니까요.’
 
  한치 앞을 내다보기 힘들만큼 모든 것이 휘몰아 변하는 이 복잡한 첨단의 세계에 살면서, 내 감정 하나 지켜가지 못한다는 게 크게 문제시될 것도 없어보이지만, 한층 성숙한 사랑을 원하는 나는, 이제서야 처음으로 희생을 진지하게 고려해본다. 비록 단 한 사람과 평생을 함께 할 자신이 없어도, 사랑한다면 기꺼이 감수해야할 수고로움을 고작 “발목 잡혔다”, “코 꿰었네” 따위의 망언으로 내뱉던 지난날 나의 과오를 깊이 반성한다. 친구들에게는 더더욱 미안하다. 시덥잖은 술자리에 한번 빠졌기로서니, 여자에 눈이 멀어 의리를 져 버린다는 둥 세계는 넓고 할 일은 많은데 앞날이 창창한 니가 솔직히 좀 아깝다느니, 이런 개소리는 장난으로라도 해서는 안 되었다.
 
  또 하나 흔한 얘기로, 밥벌이도 시원찮을 판국에 무슨 연애질이냐는 제법 어른스러운 척 재는 말도 있다. 이런 손해보지 않으려는 태도가 사랑의 위기에 봉착했을 때, 우리로 하여금 사랑을 쉽게 포기하게 만든다. 불현듯 찾아오는 권태의 늪과 상대의 재발견을 비롯한 여러 사랑의 빨간불에서, 고작 자기계발이니, 서로를 위해서 헤어지는게 낫겠다는 말을 핑계로 사랑의 약속을 깨버리는 것처럼 어리석은 일도 없다. 이런 행태를 잘 알고 있는 똑똑한 친구들은 아예 사랑의 맹세 따윈 애시당초 하지도 않는다. 돌아보면 그런 이유로 연애 관뒀다는 놈 치고 치열하게 사는 것도 또 못 봤다. 사랑의 힘power of love을 얕보고, 힘에 대한 사랑love of power에만 집착하는 것은 잘못이다. 성공性功해야 성공成功한다고 자고로 음양이 조화를 이루어야 만사가 형통하는 법 일지도, 훗.
 
  오늘날 ‘조강지처糟糠之妻’, ‘죽마고우竹馬故友’와 같은 말은 국어시험에나 나오게 됐다는 사실이 못내 아쉽다. 누구나 한번 쯤 그런 환상을 가져보긴한다. 어릴 때 만난 사람과 함께 알콩달콩 일평생, 죽어서도 영원한 사랑을 하고 싶다는 그런 생각. 쌀겨로 끼니를 이을만큼 가난한 시절, 사소한 버릇조차 놓치지 않을만큼 오랜 시간을 함께한 소중한 사람을, 사랑을 지켜가고 싶다는 생각. 이제 생각에 그치지 말고 좀 노력해야겠다. 늘 결혼을 전제로 사귀겠다는 부담스런 자세라기보다는 더러는 짜증나고 싫은 일도 좀더 묵직한 마음으로 감내하겠다는 생각이다. 예를들면 내가 싫어하는 가수를 좋아한다거나 아침 수업에 자주 지각한다해서, 사소한 감정의 촉발에 그칠 것을 “진짜 최악이다, 어떻게 그런 애를 좋아할 수 있지” , “그렇게 게을러터져서 어떡하냐, 등록금이 아깝지도 않냐” 와 같은 실언을 해서, 어떻게 그런 말을 할 수 있냐느니 우리 다시 생각해봐야겠다드니 하는 소릴 듣고서 속 까맣게 태우고, 머리에 쥐나고 덜덜덜 하는 것도 좀 줄여야겠다. 관계의 상호성을 생각하면, 나만의 일방적인 희생이 사랑을 지탱해주진 못하기에 그렇게 시도때도 없이 헤어지자는 사람과는 더 관계를 지속할 이유도 없지만, 잠시 생각할 시간이 필요하니 당분간 연락하지말자는 사람을 한시도 차분히 놓아두지 못한다면 나 또한 그닥 좋은 남자라고 할 수 없을 것이다.
 
  결과가 좋으면 물론 좋다. 그러나 과정이 좋으면 조낸 좋다. 만고불변의 연애철칙이 있다면, 그것은 “너 자신을 알라.” 라고 한다. 자기 분수를 알고, 그에 걸맞는 상대와 사랑해야 행복하다는 지론이다. 실제로 연애혼보다 중매혼의 이혼률이 적은 것도 이같은 사실의 반영이라는 추측도 있다. 그렇지만 서로를 위해 더욱 좋은 사람이 되겠다는 마음은 얼마나 아름다운가. 나의 연인은 꼭 나 자신과 같이 소중하다. 그녀를 위해 더욱 열심히 꿈을 향해 정진하고, 몸짱이 되고, 그녀가 기뻐하고 나도 좋고, 이런 마법같은 사랑의 힘이 발휘되기 위해서는 그 이면에 놓인 희생을 끌어안아야 한다. 이미 이룰만큼 이룬 사람, 이미 몸짱인 사람만 찾아 헤맨다고해서 끝내주는 반려자를 만날 것이라는 착각을 버려야한다. 흔히들 만남을 거듭할수록 경험이 쌓여 다음번엔 필시 좀더 좋은 사람을 만나게 될 거라는 착각을 하는데, 이는 논리적으로나 실제로나 전혀 근거가 없다. 누구나 비슷한 또래에서 흔히 비전도 없고 찌질해보이기 마련이고 시간이 흐르면 역시 비슷한 정도로 다같이 세련되어지고 원숙해지기 마련이다.
 
  잠재자질이 엿보이는 좋은 돌을 구해 절차탁마하여 보석으로 만들어보는 건 어떨까, 나의 그녀도, 그녀의 나도. 그렇게 서로 참고 견디며 절차탁마. 새로운 사랑을 준비하는 지금, 다시금 마음에 새겨본다. 아낌없이 주자고, 꼭 없는 놈이 주는 걸 그렇게 아까워하더라고.
 
 
 
 
   
   
   
덧1. 남자친구를 군대에 보내놓고 기다리는 수고로움을 견딜 바에야, 이미 전역한 남자를 사귀겠다는 생각이나
     내년에 어학연수나 교환학생으로 외국에 갈 여자애랑 사귈 바에야, 이미 졸업한 여자를 사귀겠다는 생각이나
     생각해보니 좀 재수없어서. (뭐 사귈 수도 있는데, 이걸 무슨 대학입시나 자격증시험합격 마냥 잔뜩 벼르고 있다니, 신발, 예비역이나 졸업예정자나 참 뱃겨먹기 좋다는 점에서 안습.)
    
     (이러면서 말은 누구한테도 지지 않죠. “아저씨랑 사귀어주는 게 어디야!”, “쭈글쭈글 할망구랑 사귀는 게 어디야!”
      이런 4가지 없는 소리로 항변하는-)
          


덧2. 연애혼보다 중매혼의 이혼률이 적은 이유는, 서로 조건이 더 잘 부합하기 때문이라기 보다는, 아마도 중매혼의 경우가 부부갈등에 좀더 이성적이고 신중하게 대처할 수 있기 때문일 것입니다. 연애혼의 경우, 갈등의 원인을 주로 “사랑이 식었어!” 처럼 관계의 내적인 부분에서 찾는 경향이 강한 한편, 중매혼의 경우 원래 서로가 남남이었고 서로 사랑하지 않았다는 사실을 쉽게 상기하며, 서로의 입장 차이에서 원인을 발견하고 양보하는 경향이 있기 때문이라고 하더군요. 결국 결혼은 중매혼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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