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일상
나는 일상과 괴리된 사랑은 가급적 피하고자 한다. 여기서 일상이라함은 상당히 다양한 의미를 내포한다. 쉽게는 흔히 ‘조건’이라는 말로 일축되는 돈, 외모, 학력, 건강, 신분, 가용시간 등을 의미하기도 하고, 한편으로는 연애당사자 각각이 중심이 되어 구축한 일체의 관념적/실질적 세계를 뜻하기도 한다. ‘조건’에 대해서도 흔히들 야박한 현실논리일 뿐이라고 폄하하기 일쑤이지만, 나는 외려 ‘순수’를 팔아먹는 행태가 싫어서이기도 하고, 서로 원하는 조건이 부합하면 그만큼 ‘진실한’ 감정도 더 잘 싹튼다는 생각이기에 대충 접는다. 그보다는 역시 연애 당사자들 각각이 갖고 있는 서로 다른 일상세계에 초점을 맞춰 고민하게 된다.
비루한 일상은 언제나 우리를 낙담시켜, 우리로 하여금 굴절된 사랑을 선택하게 만드는 것 같다. 일상과의 거리두기가 일상화된 사람들은, 자신의 사랑에도 거리를 두고 이상적인 방향으로 사랑을 빚어낸다. 특정 연예인에 대한 신적 숭배와 짝사랑, 끝이 난 사랑에 대한 일방적인 집착과 외사랑이 이에 다름아니다. 자의식이 지나치게 강한 이들의 세계는 그 범위와 영향력에 있어 미치지 않는 곳이 없고, 사랑의 대상과 사랑, 사랑을 하는 자기자신도 예외가 아니다. 대개의 사람들이 자신의 행위에 너그럽고, 자신이 다른 사람과 비슷하다는 사실을 쉽게 수긍하지만 이들은 자기 자신의 세계에서 뿐만아니라 실세계(real world)에서 자신의 비중을 과대평가하기 때문에, 다른 사람의 세계에는 발을 들여놓지 않으려 하며, 이해하고 공감하기보다는 어떤 식으로든 재단하여 자신의 세계에 편입시키려 한다.
결국 이들의 사랑은 서로 다른 세계에 살며, 닿을 수 없는 것이 되버린다는 점에서 불행하다. 사랑은 학문도 예술도 아니다. 자신과 상대방의 관계를 제 아무리 날카로운 잣대로 분석하고, 간절한 감정을 가장 극적인 수사와 기법으로 표현해내더라도, 자신의 천박함을 드러내고 심지어 자해를 무릎쓰더라도, 어디까지나 자기에에 지나지 않으니 안타까울 뿐이다.
사랑은 무엇보다도 우선 일상이 되어야 한다. 손을 대지 않고 코를 풀기란 힘든 법이다. 우리는 서로의 일상을 침범해야만한다. 현실에서 직접 부딪혀보아야 한다. 내가 한 대를 때렸으면, 상대방에게도 때릴 기회를 주기도 하고, 서로의 상처를 어르며 함께 웃고 함께 밥먹고, 놀 수 있어야 한다. 일방통행의 사랑의 노래는, 사실 의미없는 폭력일 뿐이다, 상대가 내 일거수일투족, 내 글 뿐만 아니라 내 감정을 죄다 읽을 수 있다고 한다면 얼마나 섬뜩하겠는가. 자주 만나고 소통함으로써 상대의 세계를 직시하는 것은 일상,세계의 공유차원에서 관계의 진전에 필수적일 뿐더러, 경우에 따라서 관계의 지속여부를 판단할 수 있는 시험지가 된다. 혹 상대로부터 명백한 거절의 입장을 전달받았을 때에는, 이별을 염두해두고, 준비하지 않으면 안 된다.
나는 “사랑하기 때문에 헤어진다”는 말은 거짓이라고, 결코 이해할 수도, 하기도 싫은 말이라고 오랫동안 생각해왔다. 그러나 그녀의 그런 말은 어쩜, 이제 더 이상 나의 일상과 그녀의 일상이 만나는 것을 원치 않는다는 것을 뜻할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든다. 그녀에게 강요된 나의 일상을 더는 견딜 수 없기 때문일까. 그녀도 동의하는 정치적 올바름을 이유로 집에 바래다주지 않거나해서 양성평등을 강요하는 나의 행동이 도리어 그녀에게 폭력이 됐을지도 모른다. 아니 그보다는 그녀의 입장이라면 무엇이든 이해할 수 있고, 그녀의 말이라면 어떤 것이든 따르겠다는, 얼척없는 나의 태도에 완전히 지쳐버렸을 가능성이 크다. 결국 나의 사랑은 위대한 나의 일상의 심장부로써, 주요부품으로서, 자동차의 엔진과 같이 그녀를 배속시킨 것에 지나지 않은 것이다! 사랑하기 위해서 내 일상을 그녀에게 강요하면서, 나로 인하여 변화한 그녀의 일상은 언제나 그녀가 원한 것이라 오해한다. 한편 사랑받기 위해서, 그녀가 원치도 않은 내 일상의 변화를 혼자서 실행하고, 그녀에게 미소짓는다. 무얼 더 원하냐고, 니가 원하는 건 뭐든 할 수 있다고, 너는 나의 여신이라고.
사랑을 주고 받을 줄 모르는 이런 바보같은 모습, 실상 그녀의 세계란 내게 아무런 의미가 없다는 사실을, 이제 정확히 깨달았다.
어머니로 하여금 자기 발을 씻게 한 효자가 어리둥절해하는 사람들에게 건넨, “그게 어머니 당신이 원하시는 거니까요.”라고 대답한 옛날이야기가 새삼 떠오른다.
일상은 비루하고 그녀도 나도 결점투성의 인간이다. 그런데 내가 빚어낸 이상적인 사랑은 다만 나의 장난감일 뿐이다. 왜 나는 좀더 솔직하고 명랑하지 못한가. 난 너의 그런 태도가 마음에 안 든다고, 난 니가 그렇게 에둘러말하면 잘 못 알아먹겠다고. 왜 그녀에게 화를 내지 않았을까. 여자들이 나쁜 남자를 좋아하는 것은 다 이유가 있을 것이다. 그런데 돌아보면 나는 어떻게든 그녀가 화나지 않도록 조심했던 것만 같다. 이제 그녀가 화를 냈으면 좋겠다. 내 컨디션이 좋지 않은 날엔 그녀에게 이유없는 짜증도 부릴 것이다. 마찬가지로 그녀 역시 착한 내게 짜증낼까봐, 입에 자물쇠를 채워버리고 사라져버리거나 돌아눕기보다는 내게 좀더 마음껏 꼬장을 부렸으면 좋겠다. 그러면 나는 문을 쾅 닫아버리고 핸드폰도 배터리를 뺀 채 던져버리겠지. 일상은 그래서 재미있지 않을까.
싸우지 않고 쉬운 길을 택하는 사람들은 비겁하다. 서로를 온전히 지킨다는 그럴싸한 명분을 내세워, 혼자만의 사랑을 키워가는 것은 용서받을 수 없다. 내가 뭘 잘못했는지 도통 모르겠다며, 우울함에 빠져 돌아선 그녀의 뒷모습을 보고, 그저 돌아선 채 아무것도 할 수 없었던, 하지 않았던 나의 어리석음이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