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월 092006
 



 生의 의미에 모자람이 없도록-이사카 코타로,<사신(死神) 치바>를 읽고


<소개>


사신이 무언지 몰라서, 처음에는 무슨 사무라이 얘기나 되겠거니 했다. 사신(死神)은 인간이 아니다. 대충 저승사자 비스무리 한 건데, 또 약간 다르다. 사신의 임무는 사람이 죽기전에 일주일 전에 파견되어, 죽음의 대상자가 죽어도 되는지 조사하는 것이다. 그리고 그 조사라는 것도 사실상 죽지 말아야 할 특별한 이유가 있는지 확인하는 것에 지나지 않는다. 묻지 않으면 거의 가르쳐주는 게 없는 불성실한 정보부로부터 대상자의 인적사항을 파악하고, 상황에 맞추어 인간의 겉모습을 한 채로 대상자에게 접근하여 대화를 나누는 것으로 임무를 수행한다. 그리고 일주일째 되는 날(죽는 날)이 오기 전에 조사를 마친 후 상부에 전화를 걸어 대상자의 죽음에 대해 왠만하면 “가(可)” 또는 “보류”를 보고하면 된다. 사신이 죽어도 된다고 보고하고 정해진 죽는 날이 오지 않았는데 대상자가 죽는 일은 없다.


사신은 (왜인지 모르지만) 음악을 듣는 걸 비정상적으로 좋아하고, 인간이 아니기 때문에 잠을 안 자도 되고, 맛을 느끼지 못한다. 일을 하면서 인간 세계에 대해서 학습해가기 때문에, 인간과 대화의 포커스가 미묘하게 빗나가는 경우가 많다. 그리고 죽을 사람이 살고 있는 시대가 각기 다르므로 일을 한 건씩 처리할때마다 시간을 넘나들기도 한다. 또 하나 중요한 것, 맨손으로 사람과 접촉하면 그 사람은 즉시 잠시 기절하고 수명이 1년 단축된다.


대략 이렇게나 많은 독특한 설정으로 인해, 소설은 우리의 기대를 져버리지 않으면서 매번 뒤통수를 때리는 식의 유쾌함을 보여준다. 독자가 조심스럽게, 하지만 자연스레 떠올리는 장면을 살짝 비껴가면서, 위에 나열한 또는 무언가 독특한 설정을 제시해서 “아- 맞다!” 감탄하게 만드는, 제대로 만든 엔터테인먼트 소설이다. 소설은 “치바”라는 사신을 주인공으로, 치바가 임무를 수행하는 각기다른 여섯개의 작은 이야기로 짜여있다. <치바는 정확하다>, <치바와 후지타 형님>, <산장 살인사건>, <연애 상담사 치바>, <살인 용의자와 동행하다>, <치바 vs 노파>. 가볍고 빠른 전개 가운데 금새 읽고 책을 덮을 무렵에는 여섯가지 이야기가 묘하게 연결되어 있음을 깨닫게 된다. TV 오락프로그램의 반전드라마를 보는 듯한 이 재미가 생각보다 쏠쏠하다. 광고도 많이 때리는 만큼 아마 잘 팔릴 듯 하다.


<죽음을 맞이하는 태도>


어떤 소설이든간에, 그리고 이 책 역시 그저 가볍게 읽고 지나쳐도 그만이다. 하지만 죽음을 소재로 하는 만큼 삶에 대한 짧지만 인상적인 메시지를, 얻고자한다면 얼마간 끌어 낼 수도 있는 법이다. 책 저변에 깔린 죽음에 대한 생각은 간단히 요약할 수 있다. “인간의 죽음에는 특별한 의미나 가치도 없다. 거꾸로말해 누구의 죽음이나 같은 의미와 가치를 지닌다.” 이는 인간이 아닌 사신의 입장에서 볼 적에 지극히 자연스러운 일이다, 우리가 더럽고 귀찮은 파리를 죽일 때, 파리 개체 하나에 특별한 의미를 부여하지 않는 것 처럼. 저자는 이런 치바의 눈을 통해 인간 군상들의 죽음을 맞이하는 각기다른 태도를 보여줌으로써, 삶과 죽음에 대한 메시지를 전달한다.


인간에게 죽음이란 예고된 것이 아니며 언제든 불현듯 찾아올 수 있다. 누구나 뜻밖의 실수로 쉽게 죽음을 맞이할 수 있다. 그리고 이런 죽음에 대한 공포는 매우 근원적이고 강렬한 감정이어서 인간의 삶을 통제하기에 이른다. 모든 생명체는 태어나고 죽는다는 점에서 공평하다고 하지만, 사회적 인간의 입장에서 우리가 사는 사회는 태어나는 것이나 죽는 것, 그 어느 것도 결코 공평치않기 때문이다. 이는 누군가는 재벌의 자식으로 태어나고, 누군가는 돈이 없어 병원에도 못 가 죽고마는 평범한(!) 현실에서 쉽게 느낄 수 있는 문제이다. 그런데 그보다 더 근본적인 문제는 삶과 죽음의 불확실성과 특정 개인에게만 연거푸 가혹한 일이 생기곤하는, 인간의 가치나 의미, 감정과는 전혀 무관하게 작동하는 자연의 확률 법칙이다.


그래서, 마지막 이야기 <치바 vs 노파>에서 사신이 인간이 아님을 알아챈 노파가 죽음을 맞이하는 태도는 인상적이다. 노파는 온갖 불행이 겹친 사람을 두고, 담담하게 “그래서 지금 당신이 죽었나?” 하고 웃으며 묻는다. 이어서 “행복할지 불행할지는 죽기 전까지는 모르는 거라고, 살아있으면 무슨 일이 얼어날지 아무도 모르니까.” 라고 덧붙이는 노파는, 삶을 살며 일희일비할 필요없다는 그 시시한 ‘새옹지마’의 교훈을 전하는 셈이다. 그런데 이런 노파의 뻔한 말에는 왠지 무게가 실린다. 죽는 것은 두렵지만 더욱 괴로운 것은 주위사람들이 죽는 일이라며, 가장 최악인 것은 죽지않는 것이라고 말하는 노파는 이미 죽음에 대한 공포로부터 자유로운 사람이기에.


/ 오래 살면 살수록 주위 사람들이 죽어가요, 당연한 일이지만.
  자신이 죽는 것은 크게 두렵지 않아요, 아픈 건 싫지만. 미련이 남는 일도 없고…
  미련이 있을지도 모르지만, 그것까지 포함한 납득일지도 모르죠. /


그리고 미용사인 노파가 죽기 전 마지막으로 사신에게 부탁한 일을 통해, 노파는 사신은 그리고 보통 사람은 쉽게 이해할 수 없는 방식으로 삶을 정리한다. 마침내 인간이 죽음이나 삶에 특별한 의미가 없다고 생각하는 사신이 마침내 노파와의 내기에서 지게 되고, 사신의 눈 앞에도 맑게 갠 파란 하늘이 펼쳐진다.


아무래도 죽음은 너무나 멀리 떨어져있는 것만 같아, 그에 맞닿아있는 삶을 돌아보게된다. 결국 인간의 삶은 무의미할지 모른다. 그러나 노파의 삶은, 나의 삶은, 노파에게나 나에게나 언제나 흠뻑 의미있을 수가 있다. 흔히들 죽지 못해 사는 게 인생이다, 심지어 편안히 죽기 위해서 지금 열심히 사는 거라 얘기한다지만,


살자,


生의 의미에 모자람이 없도록.



——


PostScript ; 노파가 사신에게 부탁한 일과 그 결과는 일부러 뺐습니다. 스포일러가 되고 싶지 않아서- 사실 그러다 보니 좀 책 광고스러운 글이 된 듯.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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