담당교수 : 이상의
Ⅰ. 서론
현대 한국사회를 살아가는 우리들은 역사소설가나 역사를 소재로 한 프로그램의 기획자 등이 만들어 준 역사관에 큰 영향을 받고 있다. 학생들 역시 한 종류의 국사 국정교과서를 통한 왕조 중심의 사실 암기식 역사 학습에 익숙할 뿐 스스로 사료를 조사하며 판단하여 역사관을 정립하려는 노력은 드물었다. 이미 이 같은 역사의식의 부재는 현실 정치 및 사회 제 분야에서 많은 문제점을 낳고 있다.
본 사료 읽기 보고서에서는 암울했던 일제강점기에 활동했던 대표적인 지식인 이광수와 신채호의 글을 자료로 1920년대 한국의 상황을 되돌아보고자 한다. 단순히 “독립을 위해 노력했던 신채호, 친일로 돌아섰던 이광수” 라는 논평을 넘어서, 당대의 구체적인 현실상황과 각 인물의 배경을 종합하여 그들의 역사관, 가치관을 이해하고 비판하여 오늘날 우리의 올바른 역사의식을 도모함이 본 보고서의 목적이다.
이를 위해 본론에서는 일차적으로 조선혁명선언과 민족개조론을 요약 제시하고 두 글에 나타난 현실인식의 차이점을 밝혀본다. 또한 각각의 글에 나타난 이광수와 신채호의 역사관을 비교, 대조하여 당대 지식인의 역할상을 파악한다. 다음으로 당대 한국 사회의 현실과, 연속적인 역사의 흐름, 실제 역사적 결과를 염두하여 두 글을 비판해본다. 이로써 당시 필요했던 바람직한 지식인의 상을 새롭게 그려보고 이를 우리의 현실에 투영해본다.
Ⅱ. 본론
가. 조선혁명선언, 민족개조론 정리
1. 신채호, [조선혁명선언], 19231)
일제의 강도정치를 고발하고("강도 일본이 우리의 국호(國號)를 없이 하며 우리의 정권을 빼앗으며, 우리 생존의 필요조건을 다 박탈하였다.") 항일독립운동의 방법으로 무장투쟁을 강조한 반면 문화운동, 독립외교론을 철저히 비판했다.("문화는 산업과 문물의 발달한 총적(總積)을 가리키는 명사니, 경제 약탈 제도하에서 생존권이 박탈된 민족은 그 종족의 보존도 의문이거든, 하물며 문화발전의 가능성이 있으랴") 그리고 혁명은 민중혁명이라 규정하여 민족독립운동을 민중해방운동과 동일시했으며, 혁명의 방법으로서 민중봉기를 호소했다.("그러므로 우리 혁명의 제일보는 민중각오의 요구니라.") 한편 고유적 조선의 자유적 조선의, 민중적 경제의, 민중적 사회의, 민중적 문화의 조선을 건설하기 위해 이족 통치와 특권계급, 경제 약탈제도, 사회의 불평등, 노예적 문화․사상을 모두 파괴할 것을 주장했다. 폭력을 혁명의 유일한 무기라 선언하고 강도 일본의 통치를 타도하고 생활에 불합리한 일제의 제도를 개조해 이상적 조선을 건설할 것을 지향했다. ("민중은 우리 혁명의 대본영(大本營)이다. 폭력은 우리 혁명의 유일한 무기이다. 우리는 민중 속에 가서 민중과 손을 잡고 끊임없는 폭력 – 암살․파괴․폭동으로써, 강도 일본의 통치를 타도하고, 우리 생활에 불합리한 일체 제도를 개조하여, 인류로써 인류를 압박치 못하며, 사회로써 사회를 수탈하지 못하는 이상적 조선을 건설할지니라.")
2. 이광수, [민족개조론], <개벽>, 19222)
대략 네 부분으로 구성되어 있다. 첫째는 3.1운동 이후 조선 총독부에 의해 크게 선전된 독립불능론의 근거로, 한국 민족의 성격의 결함, 인종적 열악․저능을 ‘과학’등을 동원하여 제시하고, 한국민족이 식민지민으로 전락하고, 또 못사는 것은 일체 한국민족의 잘못이라고 지적한다. ("위 말한 나의 사론이 만일 정확하다 하면 조선민족 쇠퇴의 근본적 원인이 도덕적인 것이 더욱 분명하지 아니합니까. 곧 허위, 비사회적이기심, 나태, 무신, 겁나, 사회성의 결핍 – 이것이 조선민족으로 하여금 금일의 쇠퇴에 빠지게 한 근원이 아닙니까.") 둘째, 민족해방투쟁을 부정하고 독립운동자를 비난하고 독립운동의 무위를 강조함으로써 민족해방투쟁을 포기하도록 설득하려는 논조를 보인다. ("그네에게는 몽롱한 자각과 열렬한 성의가 있었으나 선견과 착실한 계획이 없었습니다. 그래서 “힘”을 기를 생각을 하지 못하고 “맘”만 있으면 일이 되는 줄 알아, 한갓 조급하고 한갓 소리를 크게 하였습니다.") 셋째. 모든 활동은 비정치적이어야 한다고 못박음으로써 일제의 통치 아래서 문화운동을 전개할 것을 주장하였다. (목적하는 사업이 상술한 바와 같이 덕체지 삼육의 교육적 사업의 범위에 한한 것인즉 아무 정치적 색채가 있을 리가 만무하고 또 있어서는 안 될 것이외다.") 넷째, 민족성 개조는 가능한가를 여러 가지로 따지고 수양동맹회를 만들 필요성을 역설하는 부분이다. ( ‘우선 나부터 개조하자’는 뜻을 가진 자들이 동맹을 지어 하나씩 둘씩 그러한 동맹원을 늘여 가면서 서로 척결이 되고 서로 도움이 되어 일면 자기의 개조를 완성하면서 일면 동맹원을 늘이는 것이외다.")
나. 인물 분석과 비판
앞선 두 글을 중심으로 당대를 대표하는 상반되는 두 지식인을 분석하고 비판한다.
신채호가 〈조선혁명선언〉을 기초하게 된 직접적인 동기는 의열단 요청으로 이루어진 것이었다. 그러나 이 문서는 단순히 의열단이라는 항일 폭력투쟁 단체의 강령이나 투쟁방법을 대변한 선언문으로 그 의미가 한정되는 것이 아니다. 일차적으로는 ‘선언적 강령’ 을 가지고 있지 못하였던 의열단에 신채호 자신의 무력급진론적인 투쟁 이념을 부여하고, 나아가 당시에 변모된 정세에 부응하여 민족독립운동의 새로운 방향을 모색하기 위해 이루어진 것이다. 신채호는 일찌기 국외로 망명하기 전에 민족주의 이론을 개진한 바 있으며, 그것은 한말에 대두된 개화사상과 민족자강론에 기초를 둔 것이었다. 그러나 망명 이후 경술국치를 당하여 그 시대의 정세와 식민지현실의 변모에 따라 그 이론과 실천면에서의 혁신이 필요하였던 것이다. 3․1운동 이후 급격히 대두된 사회주의․공산주의․무정부주의 등의 새로운 조류는 개화와 민족자강론으로 특징지워진 초기 민족주의 사상의 한계를 인식하는 계기가 되었다. 그리하여 그는 〈조선혁명선언〉을 통해 무력적민중혁명론이라는 후기 민족주의의 이론을 정립하게 된 것이다.
〈조선혁명선언〉은 민족독립운동의 주도적 담당 세력으로 민중의 역할을 강조하면서 그 실천방법도 임정의 독립노선인 외교론․준비론이 아니라 암살․파괴․폭동 등 폭력에 의한 독립투쟁전략을 내세우고 있다. 그가 민족독립운동의 방안과 담당계층으로 각기 ‘민중’ 과 ‘혁명’ 개념을 도입한 것은 신채호의 민족주의 사상이 새로운 전환점에 접어들었음을 시사해 주는 것이다. 즉 3․1운동 이후에 대두된 노동운동․농민운동은 때마침 유입되기 시작한 사회주의․무정부주의 등의 영향뿐 아니라 경제적 민족주의에 눈뜬 민중의 자발적 역량에 의해 전개된 것으로, 신채호는 이들 민중세력에 크게 주목하게 된다. 그리고 민중을 토대로 한 혁명의 성취를 위해서는 먼저 그들을 자각시키는 일이 필요함을 인식하게 된 것이다.
신채호의〈조선혁명선언〉이 갖고 있는 의의는 크게 두가지로 요약될 수 있다. 하나는 신채호의 후기 민족독립사상을 집약․표출하고 있다는 점, 다른 하나는 1920년대 민족독립운동의 새로운 단계를 반영한 독립 선언이라는 점이다. 신채호는 전기의 민족주의에서 후기의 아나키즘에 이르기까지 사상적 변화와 발전의 양상을 보여준 인물이다. 좌우의 이념 대립 속에서 아나키즘을 대안으로 택한 것으로 보는 견해도 있다. 그러나 그의 사상 전체를 관통하고 있는 것은 강인한 독립사상과 주체의식이다. 그 때문에 그의 역사서술에서 단군을 지나치게 미화하는 등 실증성이 떨어진다는 비판도 받고 있다.
2. 이광수6)
이광수는 조선 민족이 살 길은 민족의 개조를 통한 우등 민족으로의 도약이라고 하면서 많은 논설을 썼다. 그러나 적자생존과 우열승패의 진화론의 입장에서 도덕성을 개조해서 민족을 갱생할 수 있다고 말하는 것은 역사와 현실을 낭만적으로 인식하고 있었음을 보여주는 부분이다. 정신적,인격 완성이 미진한 11세의 나이에 고아가 되고, 동학당, 진보회를 거쳐 친일성격의 단체에 속한뒤 친일 성격의 환경에서 성장하면서도 민족에 대한 사랑을 갖고 있었다는 것이 그의 성장 배경이다. 이광수 역시 조선의 식민지적 현실을 직시하고 있으면서 그 질곡에서 벗어나려 했으며 바로 그 이유 때문에 민족을 개조해야 한다고 주장했던 것이기는 하다. 마음과 몸을 다하여 나라 일에 이바지한다는 선각자 의식은 끝내 그를 친일로 내몰았던 걸쇠였다.
‘천황폐하께서는 조선백성을 본래 일본민족과 꼭 같으신 인자하심으로 대하시는 줄을 깨닫지 못하였었고, 또 일본민족이 조선사람에 대하여서 동포의 정과 의를 가지려 하는 것을 느끼지 못하였었다. 그래서 일본 나라를 내 나라로 생각하는 감정이 솟지 못하였다. (중략) 만일 그 때부터 그 청년들이 우리는 천황의 적자요 일본 나라의 신민이라는 자각과 감격을 가졌던들 조선사람은 더 많은 진보와 행복을 얻었을 것이다.’에서 볼 수 있듯 조선 민족이 조선 백성으로 바뀌며 동시에 일본 민족의 구성원이 되는 것이다.
민족을 절대화시킬 때, 무엇이든 민족 중심으로 생각하려 할 때, 그래서 민족이 아닌 어떤 것도 생각할 수 없는 단계에 이르렀기 때문에 이광수는 아이러니하게도 천황제 파시즘에 빠져들었던 것이다. 민족주의란 자 민족의 번영과 이익을 위하는 주의인데, 일제의 강점 역시 일본 민족의 이익을 위한 것이라 이해하고 사회진화론의 바탕에서 우리 민족의 패배를 인정하는 것이다. 물론 〈민족개조론〉을 쓰던 시기와 식민지 말기 그가 본격적인 친일행각을 벌일 때와의 시대적 간극은 상당하다. 그러나 그의 신념은 변했다기 보다는 민족이라는 개념이 변함으로써 조선 민족의 자주독립에서 일본 민족의 승리로 자연스레 옮겨간 것으로 보인다. 하지만 상황론으로 그의 행위가 정당화 될 수는 없으며, 그가 우리 근대사의 치욕적 존재임은 부정할 수 없는 사실이다.
다. 당대 지식인의 분열상7)
조선혁명선언에서 이미 신채호의 비판을 통해 지식인의 분열상은 드러나있다. 구체적으로 이승만의 외교론, 안창호의 준비론, 실력양성론, 이광수의 자치론, 그리고 이동휘, 신채호, 신숙 등의 무장항쟁론이 그것이다. 3.1. 운동의 도화선이 되었다는 도쿄 유학생들의 2.8. 독립선언서를 기초한 사람이 이광수이고, 서재필이 독립신문에 “버터와 브레드로 식단을 바꾸자”라고 적었다는 사실, 신채호가 임시정부를 탈퇴하고 무정부주의 활동을 하면서 좌우익에게서 모두 외면당했다는 사실들은 이들의 사상이나 행동이 드러나는 결과만을 가지고 단편적으로 해석될 수는 없다는 점을 보여주는 예이다. 모순돼 보이는 이러한 사실들의 이해를 위해서는 개화와 신문명에 대한 지식인들의 태도, 민족주의 사학과 독립운동의 전개 양상을 종합적으로 검토해야 할 것이다.
본 보고서에서 다루고 있는 1920년대는 3.1. 운동의 실패로 인해 많은 지식인들이 패배감에 사로잡혀 있었던 시기이다. 따라서 그 때까지 사회진화론의 영향 아래서 민족주의에 입각해 우리 민족의 승리를 갈망했던 지식인들이 각자의 처한 환경에 따라 분열하게 된 것은 아쉽지만 자연스러운 결과이기도 하다. 또한 사회주의, 무정부주의의 유입도 거세게 진행되었던 시기였다. 민족자본 하층과 소부르조아계급을 중심으로 한 자본주의적 발전을 지향한 민족주의 계열과 평등사회건설을 위한 노동, 농민 운동의 사회주의 계열의 분화가 시작되었다. 8)
앞서 살펴보았듯 신채호의 사회진화론은 양계초의 민족제국주의국가관의 영향을 받아 민중 민족주의로 발전하고 무정부주의 운동으로 발전해갔지만 이광수의 사회진화론은 지식의 한계를 극복하지 못하고 제국주의와 식민지 근대화의 방향으로 빠져버린 것이다. 9)
라. 바람직한 역할 모색
1920년대 한국의 현실은 암담했다. 최서해의 [홍염], 염상섭의 [만세전], 현진건의 [고향] 등의 문학작품을 통해서 모든 것을 수탈당하고 간도로 쫓겨나야 했던 우리 농민의 처지는 물론 그를 바라보는 무기력한 지식인의 모습을 쉽게 확인 할 수 있다. 방법은 달랐지만 모두 민족을 위하는 마음만은 가지고 있었다고 할 때 그들이 지식인으로서의 역할을 다하지 못한 것은 분명하다. 끔찍한 생활고에 시달리는 민중의 모습에 비할 때 지식인은 사회적 지도자로서 의견을 통합하고 구체적인 행동을 이끌어 내었어야 했다. 서로 다른 의견을 간행, 출판하고 강연하며 기본적인 생계유지가 어려운 민중에게 판단이나 선택을 요구하는 것은 소모적이고 억지스럽다. 민족 해방이나 독립과 같은 하나의 기준선을 설정하고 서로 논의을 해야하지 관계를 단절하는 것은 적절하지 않다.
특히 1927년 좌우익 세력이 합작하여 결성된 신간회가 발족한 지 4년만에 해산된 것은 유감스러운 일이다. 일부 민족주의 세력이 일제의 회유에 넘어가 ‘자치론’등을 주장하는 타협적 민족주의자가 되어버린 상황에서 절대 독립을 주장하는 비타협적 민족주의 세력과 사회주의 세력의 합류는 고무적인 일이었다. 그러나 사회주의 계열이 “신간회의 노선이 온건 개량화 함에 따라, 부르조아의 헤게모니를 극복하고 노동자 농민의 계급적 결속력과 전투적 의지를 고양하는 것이 어려워졌다”는 이유로 구형태의 신간회에서 노동자 농민의 독자성과 주도권을 확보할 수 있는 새로운 형태의 민족협동전선으로 전환하자며 -변증법적 자기발전- 신간회 해소를 결의한 것이다.10) 세력 대결 상황, 중앙집권적 조직, 기본 방향의 차이 등을 고려한다 하더라도 당면의 절박한 현실과 독립이라는 최우선의 목표 앞에서는 결속하는 것이 바람직했다.
Ⅲ. 결 론
1. 요약 정리
전체적으로 볼 때 1920년대 국내의 민족운동은 민족주의노선과 사회주의노선으로 나뉜다. 그 가운데 이광수 등의 민족주의 우파는 동요와 타협을 통해 친일로 전락했고 신채호 등의 좌파는 비타협적인 모습을 견지하였지만 민족의식이라는 관념적 요소에 크게 의존했다는 한계를 보여준다. 11)사회주의노선의 경우 민중의 현실을 보다 절실히 이해하고 투쟁을 적극 실천했지만 그 역시 이념적 배타성에 사로잡혔다는 한계를 지닌다. 물론 당시 민중이 극도로 궁핍했고, 무지했기 때문에 사회, 경제, 문화, 교육 등의 모든 분야의 개혁과 동시에 민중이 참여하는 독립투쟁을 전개하기란 어려웠다. 친일로 돌아섰던 지식인들이 절대로 용서될 수 없는 한편 나머지 지식인들도 그와 같은 복합적이고 통합적인 민족운동을 추진하지 못한 책임을 갖는다.
2. 우리의 현실
이라크전을 둘러싼 국군파병 등의 전쟁지원에 관한 최근의 이슈를 보면 우리 사회의 단면을 알 수 있다. 반전, 세계평화를 외치는 진보진영과 개혁적 현실주의자들이 연일 인터넷 언론 등을 통해 논쟁을 벌이며 보수 진영을 비판하고, 보수 진영과 거대 보수 언론들은 또 나름의 목소리를 내고 있다. 그런데 논쟁의 과정 중에 발견되는 일부 메시지에서는 문제점이 발견된다. “아직도 구제불능의 보수언론 OO 신문을 읽는가?”, “급진세력, 현실감각이 없는 철부지”등에서 드러나는 상호 단절의 모습이다. 국익이라는 대전제 하에 최선의 정책 도출을 위해서 무수한 논쟁을 하되 상호 존중의 기본 자세를 갖추어 판을 깨지 않는 지성인의 태도가 필요하다. 머지않아 초점이 북핵 문제로 옮겨질 것이기에 더욱 중요하다. “반동, 부르주아들은 다 죽이자!"보다 더 중요한 문제가 놓여있는 것이다.
3. 본 보고서의 한계
민족개조론과 조선혁명선언이라는 두 글을 기초로 이광수와 신채호를 분석하고 대표적인 두 인물을 다시 1920년대 지식인의 모습에 대입시켰다는 데 근본적인 한계가 있다. 그리고 후반부에서 친일했던 지식인을 비난하는 전개를 피하기 위해 1920년대 이후 6.25.전쟁 종결 이전까지 중요한 문제였던 지식인 간의 이념대립을 주로 다루었지만 이는 전반부에서 이광수와 신채호가 아닌 사회주의 지식인의 글을 분석하지 못했다는 점에서 불완전하다. 또한 당대 지식인의 바람직한 역할을 모색하는 과정에서 분열상 비판과 결속 강조 외에 좀더 구체적인 자료가 뒷받침된 역할을 도출하지 못하였다.
Ⅳ. 참고문헌
이광수, 「민족개조론」,『춘원의 명작-민족개조론』(노양환 편), 우신사, 1993, 89-155p
신채호, 「조선혁명선언」,『한국사의 길잡이』(김무진, 박경안 편), 혜안, 1995, 261-273p
강만길, 『20세기 우리역사』,창작과비평, 1999, 제1강-12강
1) jaehong80, 「이광수의 민족개조론과 신채호의 조선혁명선언의 비교」, AgentSoft 2002, http://www.happycampus.com/report/view.hcam?no=1076959
2) 오태훈, 「[친일문학의 논리와 사상] 춘원 이광수<민족개조론> 어떻게 볼것인가」, AgentSoft, 2002, http://www.happycampus.com/report/view.hcam?no=1073259
2) 오태훈, 「[친일문학의 논리와 사상] 춘원 이광수<민족개조론> 어떻게 볼것인가」, AgentSoft, 2002, http://www.happycampus.com/report/view.hcam?no=1073259
3) 1)과 동일
4) 이창희, 「단재 신채호의 역사인식의 변천으로 보는 민족주의 사학의 전개」,『역사기행 3호』, ilovehistory.net, 2000
5) 이승환, 「신채호의 ‘동양전통과 근대화, 세계화’」,『동아일보-2000.02.14』
6) 2)와 동일
7) 박건호, 「고등학교국사수업자료」,http://www.guno.pe.kr/03classdata/classdata8_4.htm
8) 민족협동전선의 결성: 신간회, http://www.cue.ac.kr/%7Emoed/lecture/cho/hks111-3.htm
8) 민족협동전선의 결성: 신간회, http://www.cue.ac.kr/%7Emoed/lecture/cho/hks111-3.htm
9) 1)과 동일
10) 8)과 동일
11) 박찬승, 「국내 민족주의 좌․우파의 운동」,
11) 박찬승, 「국내 민족주의 좌․우파의 운동」,
http://cuvic.chungnam.ac.kr/%7Ephistory/articles/sasangsa/Hangil.ht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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