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 쾌락 (섹스, 성적쾌락)
행복이란 상당히 모호한 개념이어서 좀처럼 주관적, 상대적인 감옥으로부터 쉽게 탈출하지 못하고 있다. 삶의 목적은 행복하기 위함이라고 답하는 것은 싱거운 대답이며 행복이란 무어냐는 다음 물음을 동반할 뿐이다. 마찬가지로 ‘사랑’이 행복과 어떤 관련이 있는지는 분명하지 않지만, 행복하기 위해서 사랑한다는 말은 심심찮게 들을 수 있다. 그리고 사랑한다는 건 어떤 것인지 모두가 동의하는 명료한 답을 구하지 못하고 있기에 이런 식의 논의는 결국 언어의 함정에서 빙빙 맴돈다.
섹스. 나는 성적 결합을 남녀간의 사랑에서 빠져서는 안 될 핵심적인 요소라고 생각한다. 섹스라면 누구 못지 않게 좋아하는 나의 밝힘증 때문에라도 섹스는 내게 중요한 문제이다. 행복이 무엇인지는 모르겠지만 욕망의 충족에서 오는 유쾌하고 즐거운 감정을 원한다면, 우리는 쾌락을 추구해야한다. 그리고 정신과 육체는 분리되어있지 않기 때문에, 서로 사랑한다는 것은 서로 섹스를 통해 쾌락에 젖는 것을 포함한다. 이는 비록 서로 섹스한다는 것이 언제나 서로 사랑한다는 것을 뜻하는 것이 아니며, 서로 사랑하면서도 섹스를 하지 않을 수 있다는 점에서 현실 속 사랑에 관한 완전한 설명이 될 수 없다. 하지만 적어도 말장난을 뛰어넘는 구체적인 느낌으로서 사랑을 환원시킬 수 있다는 것은 충분히 의미있다고 생각한다. 몸은 솔직하고, 몸은 기억하고 있다는 말도 있지 않은가. 성적 쾌락에 관한 논의에 보이는 우리 사회의 후진성은 논외로 하고, 몇 가지 중요한 문제를 되새겨본다. 우선 사랑과 섹스의 관계에 대한 진실은 무엇이고 나는 어떤 자세로 사랑에 임해야할까.
사랑은 감정이고 섹스는 행위라면, 감정의 촉발이 반드시 행위로 이어지는 것이 아니며 행위가 언제나 감정을 일으키진 못하기 때문에 둘 사이에 결정적인 관련성이 있다고 볼 수 없다. 섹스는 섹스고 사랑은 사랑이다. 오늘날 비교적 자유로워진 성문화는 그런 의미에서 긍정적이다. 쾌락을 긍정하고, 사적 생활의 영역에서 그 쾌락을 충족시킬 자유는 보장되어야한다. 물론 비판도 적지 않다. 범람하는 음란물 등 저급한 문화가 윤리를 위협하고 있다느니, 성매매와 다를 바 없는 일회성 만남은 결국 인간을 성적 대상으로만 보는 그릇된 인간관을 낳고 있다는 따가운 시선은 쾌락을 좇는 이들에게 언제나 브레이크가 되어줄 것이다.
나는, 하고 싶다. 마음을 완전히 빼앗긴이상 그녀를 가만둘 수 없다. 그녀를 만지고, 느끼고, 내 숨소리를 들려줄 것이다, 그녀도 나를 느끼도록, 말로 채 전하지 못한 내 마음을 알 수 있게, 끌어안을 것이다, 서로가 최고의 기분을 만끽할 수 있게. 그리고 이게 내 사랑의 방식이지만, 상대방에게 내 것을 강요할 순 없기에 섹스 없는 사랑만을 원하는 여자라면 나는 이별을 심각하게 고려할지도 모른다. 내가 그녀를 얼마나 사랑하는지 확신이 없는 경우, 그리고 보다 중요한 건 그녀 자신이 나를 사랑하는지, 몸을 허락해도 될런지 확신이 없는 경우에, 그녀는 거절할 것이다. 그렇다면 기다릴 것이다, 참을 수 없을 때 까지.
애인의 순결을 지켜주는 대신 내 성욕은 다른 여자를 통해 배설한다거나, 여러 여자를 고루 사랑해야겠다, 한 여자만을 사랑하되 단지 오늘밤에만 사랑하겠다는 태도 등은 단호히 배격해야겠다. 이런 태도들을 진지하게 용인하겠다는 여성은 거의 없다. 이제는 연락도 닿지 않는–아마 죽지 않았을까–, 쾌락지상주의를 견지하는 극소수의 여성들을 제외하고는 난 그런 사람을 본 적이 없다. 설령 그런 상대를 만난다하더라도, “과연 쾌락의 끝은 어디인가?” 하는 물음 이외에도 삶 속엔 흥미진진한 일이 많다. 다른 호기심을 충족시키고 싶다면, 양기를 탕진하고 빼빼 말라서 죽고 싶지 않다면, 쉽지 않을지언정 어느 선에서는 멈추어야만 한다.
단지 내 여자가 싫어한다는 이유만으로 이런 태도들을 배격하겠다는 것이 아니다. 곰곰 생각을 이어보면 나 자신의 삶으로서 용납할 수 없는, 그 이상의 이유를 찾을 수 있다. 우선 ‘솔직함’의 문제이다. 사랑의 힘은 위대해서 서로가 취향을 공유하고 서로를 변화시키기 마련이다. 비근한 예로 여자친구가 입은 짧은 치마를 나무라면서, 다른 여자의 노출에 침 흘리는 짓거리는 이미 많은 여성들이 두고두고 지탄해 온 해묵은 얘깃거리다. 아니, 왜? 섹시한 내 여자, 좋지 않은가? 이름도 모르는 여인네의 나체를 그리면서 짐승의 속내를 감추는 것 보다야 차라리 내 여자 때문에 꼴려서 길 걷기 불편한 것이 훨씬 아름다운 일이다. 그리고 딴 남자들에게 눈요깃거리가 되는 게 싫어서라는 핑계보다는 그녀를 지킬 자신이 없다거나 그녀가 나보다 돋보이는 게 싫다는 쪽이 솔직할 것이다. 여기저기 오입질하고 다니면서 그녀가 모르게만 하면 되겠거니, 나 역시 가끔 심심풀이로 하는 짓일 뿐이라고 생각하는 건 두말할 것도 없다. 이미 잠자리를 같이 한 사이라면, 이런 태도는 더욱더 버려야한다. 서로의 성적매력을 북돋아주어도 한번쯤 다른 사랑을 꿈꾸기 마련인데, 솔직하지 못함은 결국 권태에 빠졌을 때 관계의 청산을 택하게 만드는 주범이 된다. 요컨대 그럴 시간에는 솔직하고 부지런히 서로의 몸을 탐구하고 개발하는 게 관계 유지에 도움이 되는 것이다.
다음은 ‘쾌락의 질(質)’의 문제이다. 만약 내가 통제불능의 밝힘증에다가 흔한 유혹의 덫에 빠질만큼 허약하고 여자친구가 둔하디 둔하여 나의 어리석은 선택을 관리하지 못한다면, 또는 악랄한 내가 온갖 억지논리를 내세워 여자친구를 설득한 뒤 오입질을 하고 다닌다면, 그렇다면 나는 과연 무엇을 얻을 수 있는가. 쾌락? 쾌락, 사정射精 찰나에만 느끼는 저질의 쾌락을 얻을 것이다. 자신이 갖고 있는 욕정을 모두 분출하면 흥분된 육체만이 남고 욕정이란 본질은 사라진다. 그리고 곧장 나의 어리석은 행동을 후회하게 될 것이다. 나는 알고 있다. 낯선 이의 살갗에서 느낄 수 있는 까칠한 긴장감 + 도덕적, 윤리적 일탈행위의 스릴감 + 이색적인 행위의 신선함… 그 외 얼마든지의 쾌락총합은 결코, 서로를 잘 아는 내 연인과의 섹스가 가져다주는 쾌락을 능가하지 못한다는 것을 알고 있다. “우리가 소유하고자 하는 것은 단순한 육체가 아니라 의식에 의해 되살아는 육체다.” 라는 사르트르의 말도 있지 않은가. 사랑을 말하는 눈과 설레임, 온몸을 떠는 행복의 극치, 남김없이 다 태워버리고도 꺼질줄 모르는 열정, 품속깊이 전해오는 체온의 안정감을 과연 어디서 얻을 수 있을까.
내가 오입질에서 단지 저질의 쾌락만을 얻고 허무함의 공황에 빠진다면, 나의 그녀는 나를 용서하지 않더라도 나는 나를 용서하고서라도 그녀에 대한 나의 사랑을 지켜갈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만약 내가 자연스럽게 더 나은 쾌락을 추구함으로써 오입질의 상대와 조금씩 온전한 섹스를 하기 시작한다면, 나는 그녀와의 사랑을 등지고 다른 사람을 사랑한 나 자신을 결코 용서하지 못할 것이다. 남녀 가릴 것 없이, 몸만 줬을 뿐 마음은 주지 않았다는 해괴한 논리로 자신을 변호해서는 안 된다. 그건 기껏 한 두번이지 결국 몸가는 데 마음 따라가는 것이 자연의 섭리인 셈이다.
마침내 다음과 같은 섹스의 중요한 원칙에 이르게 된다.
<이상적인 섹스의 원칙> (어디선가 인용, 아시는 분 제보바람)
상대방이 흥분되어야 한다는 것, 그것도 단순히 흥분되는 것이 아니라 다른 상대방의 정욕을 인식함으로써 흥분되어야 한다는 것이 중요하다.
1. 상대방에 대한 정욕에 의해 자신이 지배되도록 놓아둘 것
2. 둘째 그 정욕은 상대방의 육체뿐 아니라 자신의 육체에 대한 정욕이어야 할 것
3. 그 두가지 정욕이 상대방의 정욕에 대한 교감에 의해 야기되어야 할 것