심리학에 대한 오해 1 – 나는 어떤 사람일까요?
– 심리학 만세
“어머, 심리학과이시면 제 성격이 어떤지 아시겠네요.”, “지금 제 마음이 어떤 거 같아요? 나중에 저 좀 상담해주세요.”, “사람 보는 눈이 정확하시겠어요.”, “아, 저도 프로이트 좋아해요!”, “왠지 무섭네요, 싸이코 알죠? 이중인격이나 피해망상이나 그런 거요, 그럼 실제로 그런 사람 보셨어요?”, “심리학 책 재밌지요, 설득의 심리학, 유쾌한 심리학, 저도 좋아해요, 심리학”, “혹시 최면도 배우나요? 한방에 뿅가는, 레드, 썬!”
미팅이나 소개팅 자리에서 아니아니 그저 흔한 자기소개에서, 전공을 밝힐 때마다 쏟아져나오는 일련의 대답들을 들을 때마다 나는 기분이 좋아지곤 한다. 심리학에 관심이 있다는 사람이 많아 기쁘다. 하지만 안타깝게도 그들이 생각하는 심리학의 대부분은 사이비 과학이나, 이미 현대 심리학의 작업 현장을 떠나간 철 지난 이야기에 기초를 두고 있는 것 같아 안타까울 때가 많다.
심리학은 인간의 마음과 행동에 관해 연구하는 학문이고, 분트(Wundt)에 의해 심리학실험실이 설치된 이후로 대략 120여년의 짧은 역사를 가지고 있다. 주 관심사에 따라 생물심리학, 인지심리학(이하 ‘심리학’ 생략), 사회, 발달, 성격, 이상, 상담 등의 전통 분과로 나뉜다. 응용범위가 넓어 교육심리학, 범죄, 광고 등 뭐든 뒤에 ‘-심리학’만 붙이면 될 정도로 소재가 광범위하다. 가짓수를 줄여 인간에 대한 입장 차이에 따라 나눈다면 행동주의–자극에 대한 반응을 관찰해 객관적 연구가 가능하다–, 인본주의–인간의 욕구와 감정에 대한 존중을 바탕에 깔고 이에 따른 마음과 행동을 연구–, 인지구조주의–인간은 복잡정교한 시스템이며 외부세계와 상호작용한다– 등으로 요약된다….(략)
이런 식의 심리학개론서, 그것도 앞부분에 실린 설명으로는 과학과 비과학에 대한 이해, 심리학의 연구방법과 한계, 현대 심리학의 현주소에 대한 이해를 기대하기 힘들다. 차라리 몇 가지 물음에 대한 직접적인 대답을 통해 많은 오해가 해소될 수 있으리라 생각한다.
<나는 어떤 사람일까요? / 당신의 마음은 며느리도 모른다오>
철학자가 돗자리를 펴는 게 아니듯, 심리학자도 고작 몇마디 주고 받거나 단편적인 심리테스트를 통해서는 당신에 대해 절대 진실한 설명을 해줄 수 없다. 심심풀이 땅콩을 넘어서는 순간부터는 죄다 사기일 뿐이다. 왜 그럴까.
1. 우선 연구가 부족하기 때문에 그렇다. 그리고 변명을 하자면 심리학이 어렵기 때문이다. 모든 사람에게 통용되는 보편적인 사실을 발견하기란 결코 쉬운 일이 아니다. 한 사람에게 적용되는 사실이 다른 어떤 사람에게는 적용되지 않을 수 있다는 귀납법의 한계에서 자유로울 수 없다. 나아가 내성법이라는 측면에서도 취약하기 그지없다. 자신의 내면 상태를 자신이 고민하고 분석해서 얻어낸 결론에 대해, “자기 자신에 대해서는 자신이 가장 잘 알겠지.” 하고 손을 놓아버린다면 굳이 학문을 할 필요가 없을 것이다. 하지만 재밌게도 심리학을 연구하는 것은 인간이고, 연구의 대상도 인간이다. 이런 근본문제를 안고 있는 이상 현대의 심리학이 방법적으로 과학적 세련함과 통계의 마법으로 무장하였다하더라도, 우리에게 제공하는 진실한 지식이라곤 “당신이 무진장 특이한 사람이 아니라면 왠만하면 당신은 대충 이런 사람일 것이다.” 라는 참고자료에 지나지 않는다. 슬프다. (심리학을 주제로 썼지만 이는 사회과학에 공통적으로 해당한다.)
2. 하지만 더욱 슬픈 이유는 따로 있다. “Barnum effect”라 불리는 사실을 밝혀낸 유명한 실험이 있다. 다음 지문을 읽어 보자.
// 당신에게는 외향적이고 활달한 면과 내성적이고 조용한 면이 공존하고 있습니다. 당장 커다란 걱정도 없지만 지금의 상태에 그저 만족할 수만은 없다고 생각하는 경향이 있군요. 여러모로 고민을 해보지만 명쾌한 답은 쉽게 나오질 않습니다. 당신은 너무 많은 사람이 모여 시끌벅적하고 번잡한 것이 싫습니다. 하지만 그런 당신도 혼자있는 시간에는 외로움을 느끼네요. 사실 당신은 기본적으로 사람을 좋아합니다…….//
이 지문이 당신을 잘 설명해준다고 생각하는가? (조금전 직접 작성했다.) 실제 연구에 따르면 실험자는 모든 실험참가자에게 (성격을 묘사하는) 똑같은 글을 주어 읽히고 나서, 그 글이 참가자 자신의 성격을 정확히 맞추었는지를 물었다. 그리고 통계적으로 유의한 대다수의 사람들은 그 글이 자신의 성격과 일치한다고 판단했다. ‘혈액형별 성격’, ‘별자리별 운세’, ‘당신은 이런 유형’ 따위를 곧잘 믿어버리는 것은 대다수 인간이 가진 슬픈 속성인 것이다. 그리고 이는 자기자신에 대해 설명받고 싶은 인간의 본능에서 기인한다. 당신이 교실에서 친구들과 떠들고 있는 상황을 가정해보자. 교실 뒤편에서 또 한 무리의 친구들이 수다를 떨고 있다. 당신이 속한 무리의 이야기에 집중하고 있는 이상 떨어진 뒤쪽의 이야기의 내용은 전혀 들리지 않는다. 하지만 그들의 이야기 중에 문득 당신의 이름이 등장하는 순간, 당신은 그 소리를 듣는다, 신기하게도, 하지만 누구나 한번쯤 경험해보았을 법한 일. 칵테일 파티 현상(Cocktail party phenomenon)이라 불리는 이 현상은, 각 개인이 자아와 관련된 정보에 대한 관심이 지대함을 보여준다. 그리고 예에서와 같이 이는 의식차원을 넘어서 무의식차원에서도 그렇다. 인간의 온 감각기관들은 자신에 대한 정보를 상시적으로 지향하고(orient) 있다.
3. 게다가 당신은 당신이 원하는 사실만 선택한다. 당신 앞에 객관적인 방법으로 구성된 검사지나 실험프로그램이 놓여있어도, 당신은 그것을 한껏 망쳐놓고야 만다. 일본어투의 실험실 용어이지만 “요구특성”이라는 말이 있다. 이는 실험참가자가 실험의 의도를 알아채거나 짐작함으로 인해 실험결과에 미치는 영향을 일컫는 말이다. 누구나 한번쯤 해보았을 성격검사지에서 ‘나는 여럿이 보다 혼자있는 것이 좋다’라는 문항을 마주하고, ‘전혀 아니다’에서 ‘매우 그렇다’까지 늘어선 답안 중에 하나를 골라야 할 때 우리는 어렴풋이 그 문항이 성격의 내-외향성을 조사하는 것이라는 것을 알아챌 수 있고, 결국 입맛에 맞게 자신을 포장하고 방향으로 답을 고를 수 있게 된다. 그래서 그런 검사지에서는 늘 가능한 솔직하게, 생각을 많이하지 말고 빨리 답해달라고 부탁한다. (모든 성격검사가 무용한 것은 아니다. 요구특성을 감안해 지겹게도 많은 문항수와 거꾸로 묻기 등의 스킬을 갖고, 같은 검사를 받은 집단에서 당신이 어떤 쪽에 속하는 지 보여줄 만큼은 되니까)
연구자는 괴롭다. 요구특성의 문제에서, 협조적인 실험참가자는 실험자의 가설을 검증하는 데 도움이 되는 데이터를 의식적으로 제공해 줄 것이고, 방해꾼이라면 고의로 정반대의 결과를 내려 노력할 것이다. 어느 쪽이든 ‘진실’을 밝혀내려는 엄격한 작업을 망친다. 그리고 참가자 대부분이 ‘협조자’ 성향을 보이기에 바라던 실험결과를 얻고서도 그것을 의심해야 하는 연구자의 마음은 찢어진다.
그래서 요구특성을 최소화하기 위해 연구자들은 참가자의 주관이 개입되기 어려운 생물학적 측정치를 실험의 종속측정치로 활용하는 것을 선호한다. 가령 ‘폭력적인 영화를 보면, 사람의 공격성이 증가한다’는 가설을 확인하기 위한 실험에서 실험참가자에게 폭력적인 영화를 보여준 뒤, ‘당신은 평소에 화를 잘 내는 편입니까?’ 와 같은 물음에 답하는 것으로 결과를 얻어낸다면, 그 결과는 요구특성에 의해 오염되었을 가능성이 높다. 그 보다는 맥박이나 동공크기의 변화가 뚜렷하게 나타나며 이런 생리적 데이터가 공격상황에서 그것과 일치하는 경향이 있음을 보이는 것이 보다 설득력이 있다.
요컨대 위의 제 문제를 검토해 볼 때, 우리가 스스로 “나는 누구인가. 어떤 사람인가.” 에 대한 답을 찾는 과정에서 사이비과학의 덫에 빠지는 것은 차라리 자연스러운 일일지도 모른다. 심리학자는 지금 내 앞에 앉은 당신이 구체적으로 어떤 사람인지, 왜 그런 사람이며, 곧이어 어떤 행동을 할 지 예측할 정도로 똑똑하지 못하다. 게다가 당신은 당신 자신에 대한 이야기라면 무엇이든 지대한 관심을 보이며 믿는 경향이 있고, 혹여 그 이야기 속에 당신과 관련이 없는 내용이 섞여 있다면 그 부분만 쏙 빼놓고 나머지 부분만을 보면서 옳다고 믿을 테니까.
부처가 이 모든 것을 꿰뚫어 일체유심一切唯心, 모든 것은 마음에서 비롯한다는 생각을 펼쳤는지는 모르겠다. 포커에서 로열 스트레이트 플래시가 나올 확률과 지금 내가 손에 쥔 패가 나올 확률이란 둘다 거의 같은 확률, 극히 희박한 것임에도, 우리는 로열 스트레이트 플래시에만 행운과 운명이라는 이름을 붙이고 좋아 날뛸 뿐이다. 칼 세이건은 이 광활한 우주에서 지금 이 시간, 이 공간에서 우리가 만나 서로 사랑하게 된 것에 감사한다고 했지만, 사실 별 관심이 없는 사람과 만나게 된 것도 꼭 그만큼 기막힌 인연이라는 사실을 우리는 인식하지 못한다. 물론 연구자들에겐 이 모든 것에 맞서, 아니 이런 약점들조차 중요한 주제로 삼아, 새 땅을 개척해가는 것이 숙명이겠지만. 그들은 이성으로 비관하고 역시 이성으로 낙관한다.
고로 이제 ‘심리’를 앞에 내걸고, 당신이 어떤 사람인지 함부로 묻고 답하는 모든 것에 대해 반사적인 의심의 눈초리를 날려주기를 바란다. 진실한 대답을 얻어낼 수 있는 “나는 어떤 사람일까요?” 라는 물음은 바로 거기서 시작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