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간을 인정하지 못하겠다는 종민님의 고백에 공감한다. 사랑도 그와 같다. 교제 기간과 사랑의 깊이 사이에 정적인(+) 상관관계가 있을 법도 하지만, 사람들의 사랑 경험을 들어보면 그렇지 않은 경우가 많다. 여행지에서 운명처럼 우연히 만나서 내 일정을 팽개쳐버리고 아낌없이 잘 해줬다는 사람은 그 짧지만 강렬한 사랑이 두고두고 잊지 못할 “깊은” 사랑의 경험이다. 반면 유치원 때부터 알던 친구와 10년이 넘도록 사귀었지만, 여전히 친구인지 연인인지 헷갈린다며 깊이는 커녕 이런게 과연 “사랑”인지 고민하는 사람도 있다. 이는 아마 사랑의 “깊이”를 개개인이 어떻게 정의하고 느끼느냐에 따라 결과가 판이하게 다를 수 있는 문제이다.
그렇지만 많은 이들이 공감하는 한 가지 기준을 꼽으라면 또 생각나는 게 있긴 하다.
— “너 걔랑 잤니?” (女) , “했냐?” (男) — 연애한다는 사람에게 으레 던져지는(그래서 짜증도 나는) 다름아닌,
섹스(sex), 성 관계의 여부이다.
물론 상대방을 잘 이해하고 배려하며 오래 사귀었지만 성 관계는 맺지 않았다는 자랑스런 커플이 나서서 섹스로부터 시작한 사랑, 심지어 원 나잇 스탠드를 예로 들며, 그럼 걔들 보다 내 사랑의 깊이가 얕냐며 항의하면 딱히 드릴 말씀이 없다. 어쩜 그만큼 어려운 문제이니까. 그래도 이 기준은 꽤 유효하다. 동정을 지키면 쪽 팔리니 성매매를 해서라도 싸질러야하는 저급한 남성들과 달리, 이 남자라면 괜찮겠다는 확신(그게 감정적이든 어떻든) 없이는 쉽게 몸을 허락하지 않는 여성들을 생각하면 그렇다. 혹여 본질적으로 한 사람이 다른 사람보다 더 많이 사랑할 수 밖에 없다하더라도, 어쨌거나 사랑은 “관계”를 벗어날 수 없으니, 남자든 여자든 둘 중 하나만 진지하게 빠져들어가도 우리는 그 사랑을 감히 얕다고 볼 수 없다.
이런 가운데 육체적 사랑만이 진짜 사랑이라 외치며 벌써 오랫동안 고독한 싸움을 해 온 마광수의 소설은, 그의 독특한 성적취향에 공감하지 못하더라도 그저 좋아할 수 밖에 없었다. 그의 최근 소설들이 그렇듯 <권태> 역시 마치 작가 자신의 실제 경험담으로 혼동할 수 있을 만큼, 마광수 판박이 대학교수가 주인공으로 등장한다. 주인공은 홍대 앞 클럽 하렘을 연상시키는 나이트클럽 ‘하렘’에서 진정한 마조히스트 ‘희수’를 만나고, 그녀의 집으로 가서 열댓살밖에 안 되는 ‘미니’까지 합세해서 주말동안 질펀하게 놀아난다. 그리고 마광수는 그 가운데 자신의 관능적 상상력을 일체의 자기검열없이 솔직하게 펼쳐놓는다. 여자의 화장하는 과정이라든지 야한 옷차림 하나하나를 세밀하게 묘사한 것도 놀랍지만, 흔히들 떠올리는 채찍질이나 ‘주인-노예’와 같은 단순한 호칭의 수준을 넘어선 과감한 사도-마조히즘 행위의 묘사가 눈길을 끈다. 가슴이나 음부에 피어싱, 도그(dog)플레이, 스캇(scat)같은 더티플레이까지도, 내가 야설 문학에 심취하기 이전에 이미 출판됐다니! (<권태>는 1990년에 출판된 마광수 최초의 장편소설이다.)
더욱이 문학작품, 또는 예술작품에는 반드시 ‘사상성’이 있어야 하고, 두고 두고 독자의 가슴속에 파고드는 어떤 메시지를 내포하고 있어야한다고 믿는 이들이 우위를 차지하는 세상에서 마광수의 자리는 크게 빛난다.
// 서른 살 전후까지 ‘사랑’에 대한 낭만적인 기대와 희망에 부풀어 다분히 정신주의적이고 플라토닉한 사랑에 중점을 두고 있었다.
그 때는 이상적 사랑에 대해 ‘정신과 육체가 조화된 사랑’이라 대충 얼버무리고 그게 가능하다고 믿었다, 나는 관능적 상상력과 실제적 현실 사이에 교묘히 양다리 걸치고 있었던 것이다. // (기억나는대로 인용, <권태>- 작가의 말)
솔직히 나도 마광수에게 전적으로 동의하진 않는다. 그의 최근 에세이집 <자유가 너희를 진리케 하리라> 를 읽어보아도, 어렸을 때 부터 약한 몸인데다 지금도 사면복권이야 됐지만 변변찮은, 힘(돈,권력,정력) 없는 노인네가 맘껏 섹스를 못해서 안달이 났다는 느낌을 지우기가 어렵기 때문이다. 유미(唯美)적 쾌락주의를 추구한다며, 권력자나 지식인들이 괜한 도덕주의자 행세하는 것을 관두고 보다 솔직히 관능적 판타지를 충족시킬 수 있다면 전쟁도 일어나지 않고 세계가 평화로워 질거라 말하는 건 다소 억지스럽기까지 하다. 하지만, 어쩜 그 지점에서 우리가 마광수를 쉽게 던져버리는 것이야말로 큰 실책이 아닐까.
앞서 늘어놓은 사설에서, 나는 흔히 사랑의 깊이를 재는 척도로 쓰이는, 게다가 꽤 유용한 것 같은 ‘섹스(sex)’의 문제를 꺼냈다. 그런데 돌이켜보면 그것은 기준으로서 적합여부를 심판받기도 전에, 아직도 금기(Taboo)에 갇혀 정당하게 자신을 드러내질 못하고 있다. 단순히 문자 그대로 보면, 아직도 인터넷의 많은 검색엔진에서 ‘섹스’ 또는 ‘sex’는 성인검색어나 금지어로 분류되는 실정이다. 아무리 예술영화를 만들어도 주연 여배우의 노출수위에만 관심을 보이는 사람들이, 공식적인 자리에서 성 문제로 논의 좀 해볼라치면 몇 마디 나아가지도 못해 얼굴을 붉히고 민망한 듯 삐죽거리며 웃는게 현실이다. 심지어 여성 수요자까지 고려한 대담한 기획과 치밀한 연출에 첨단 기술의 지원으로 초고화질의 양질 포르노를 순식간에 받아볼 수 있는 판국에, 우리의 성 교육은 “포르노는 나빠요, 잘못된 성 의식을 갖게 되어요, 성은 성스럽고 고귀한 겁니다.” 식의 구성애 아줌마를 벗어나질 못하고 있다. 왜 일까? 아마도 더 이야기했다간 금기에 걸려들지 모르므로, 요즘처럼 언어적 성폭력에 예민할 때에는 아예 함구하는 게 나으므로. (참고(링크): 포르노에 대한 책마을의 논의)
그래서, 우리는, 사귀는 사이가 아닌 이상, 연예인이 아닌 이상, 그냥 눈 앞의 여자에게 귀엽다고 얘기할 수는 있을 망정, “너 진짜 섹시해!” 라고 차마 말하지 못하는 건 가? 주말 뿐 아니라 평일에도 모텔에 방 잡기가 갈수록 힘들어지는 이 마당에, 나 이거 참 원!
섹스 금기시하면서 섹스 밝히는 사회에서 사는 게, 섹스 좋아하는 나는 가끔 넌더리가 난다. 이제야 겨우 한국판 섹스앤더시티라는 시트콤이 주목을 받는다는데, 보다시피 우리 마 선생님은 벌써 멀찌감치 가 계신다. 그리고 모든 장르의 예술가들에게 ‘상상력의 자유’와 ‘상징적 판타지의 자유’가 부여되길 희망한다는 그의 고독한 행보는 여전히 힘겨워보인다.
이제, <길게 기른 손톱과 15센티이상의 높은 굽의 하이힐>에 집착하는, 원로 페티시스트(fetishist) 마광수에게 “품격없는 포르노다”, “너무 퇴폐적이고 여성비하적이다.” 라는 말로 지긋지긋한 도덕주의자처럼 굴 것이 아니라, 그저 긴 손톱을 봐서는 도무지 안 꼴린다고 솔직히 고백할 때도 되지 않았을까. 차라리 거유(巨乳)가 롤리타는 안 되겠니?, 아님 코스츔(costume)플레이도 좀 써달라고 부탁하는 게 낫지 않을까. 야밤에 소라즈가이드 같은 데 들어가서 모니터로 야설을 탐독하는 고달픔을 아는 사람들은, 좀 떳떳하고 편안하게 자신의 성적 판타지에 맞는 출판된 글을 읽고 싶다는 소박한 희망이 있다. 아무래도 우리 사회에선 그게 결코 소박해보이진 않다만!
그의 최근 에세이집 < 진리가 너희를 자유케 하리라> 를 읽어보아도…
자유가 너희를 진리케 하리라 아닌가요 ㅋㅋ
오!! 적절한 지적이십니다. 수정했습니다. 저도 모르게 그만ㅋ
굉장히 많은 후배들이 이 글을 참고하러 들어오는데 댓글이 없군요. 저도 다른 분들이 쓴 서평을 읽고 싶은데…
물론 저는 마 교수님 강의 과제로 이 글을 적은 것은 아니었지만…
자기 서평/보고서를 공개하고 서로 주고 받고 소통하는 일은 갈수록 드물어지고…
그마저도 유료 다운로드 사이트에 업로드해서 몇백원씩 가져가려는 세태가 조금은 아쉬운 요즘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