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월 162001
 

친구 허승의 고교시절 희곡. 놀랍다…

질리베스

이 글에 등장하는 인물 중 몇은 다른 글에서 인용해 왔습니다. 그렇지만 그들이 전개하는 사상은 작가의 생각이니 현실과의 착각 주의하시기바랍니다.

이 글은 픽션이니 역사적 불일치가 있을 수 있습니다. 그 점 얗해해주시기 바랍니다.

허승 희곡 제1번: <질리베스>

방에서의 서(序)

낡고 자그마한 방, 젊은 작가가 글을 쓰고 있다.

젊은 작가 아~, 어떻게 하지. 죽일까? 살릴까? 춤을 추며 나오게 할까, 노래를 부르며 나오게 할까? 아아. 정말 그럴듯하게 꾸민 것보다는 나조차도 인정할 만큼 의미심장한 것이어야 해.

(늙지도 않았고, 어리지도 않은 한 남자가 왼쪽에서 등장)

남자 그래 다 해라. 꼴값 떤 다고 비웃어 줄 테니. 주제에 자기 꼴은 생각도 못하고 자기가 뭐 대작가인양 으스대는 폼이 역겹구나. 여기는 화장실도 없나? 토하고 싶은데.

젊은 작가 당신은 누군데 그런 말을 하는 거요. 왜 그런 독설로 여린 나의 가슴을 찢어 놓는 거요. 가슴이 답답하고 눈물이 다 나올 것만 갔소..

남자 나는 평론가는 아니오. 예술가는 더더욱 아니고. 그저 짧은 지식을 갖고 있는 지식인이라고 하면 되겠군.

젊은 작가 대체 무슨 권리로 내게 그런 악독한 말을 하는 것이오. 조금 전까지만 해도 충만 해있던 내 용기가 지금은 당신의 등장에 놀라 저만큼 물러나 있소. 당신이 떠나도 아마 내게 돌아오지는 않을 것이오.

남자 나는 단지 아무 것도 아닌 그저 새파란 것이 온갖 폼을 내가며 기교를 부려가며 대작가인양 흉내내는 것이 못마땅할 뿐이야. 실로 역겹다고. 그렇게 글을 쓰려면 좀더 유명해지고 난 다음에 하라고.

젊은 작가 닥쳐 이 멍청한 작자야! 시도와 실패 없이 그 어느 누가 유명해질 수 있으며, 고뇌와 깨달음 없이 그 어느 누가 대작가가 될 수 있나! 대체 말도 안 되는 그 독설로 얼마나 많이 꿈에 충만한 청년의 날개를 분질렀느냐? 용기와 자신감이 필요한 사람들에게 쓰디쓴 좌절의 잔을 안겼느냐?

남자 입 닥쳐라!

잚은 작가 너는 진정 글을 보기는 하는 거냐? 원고의 표지에 적혀 있는 이름만을 보는 거는 아니냐? 글이 아니라 글자만 보는 거는 아니냐? 아니면 눈높이를 조절하는 능력은 물론이거니와 아량과 너그러움을 시베리아에서 잃어버린 것은 아니냐?

남자 ………….

젊은 작가 분통이 터진다.

남자 생각해보니 네 말이 맞다. 다시는 나의 헛된 독설로 젊은이가 상처받지 않도록 혀를 뽑아 버리마.

젊은 작가 그러면…… 저는 다시는 조잡한 글을 쓰지 않도록 두 손을 잘라 버리죠.

남자 두 손을 자르면 조잡한 글이야 쓰지 않겠지만, 대작, 명작도 쓸 수 없으니 내버려둬라. 네게 필요한 것은 두 손을 자르는 행위가 아니라 머리와 가슴을 발전시키는 일이다.

(남자, 혀를 뽑아 버린다. 피가 낭자 한다.)

젊은 작가 아! 나의 몸부림이 가엾은 남자의 혀를 뽑아 버렸구나. 더 이상은 아름다운 미사여구도 감성적인 수식어도 생각이 안 난다.

남자 (부정확한 발음으로)일일구를 불러 줘.

젊은 작가 오 가여워라. 저 고통스러워하는 모습. 안됐구나. 나는 저 남자의 말대로 좀더 연구나 해야겠구나.

남자 아아아아~(죽는다.)

제1막 1장

폴란드 국왕의 성, 어느 방 앞의 로비.

왕, 시녀1 2, 몇 명의 관리들이 초조하게 서성거림

아직 이냐? 아직 이야?

시녀1 아직 방안에서는 소식이 없습니다. 왕비께서는 가엾게도 신음만 토하고 계십니다. 전의를 비롯하여 모두들 애쓰고 계십니다. 걱정하지 마십시오.

나도 알고 있다. 그렇지만 나의 첫 번째 적자의 탄생이다. 어찌 걱정이 안되겠나? 오 나의 아들, 미래의 왕, 나라의 기둥, 맥거트 왔느냐.

(맥거트 오른 쪽에서 등장)

맥거트 저를 사랑하시는 것의 갑절로 당신을 존경하는 아들입니다. 대왕폐하, 왕비마마께서는 어떻십니까? 장차 저의 동생이 될 인물도 말입니다.

그게 이 모양이다. 아직도 기다리던 울음소리대신 저 방안에는 왕비의 신음과 비명소리로 가득 차 있다. 방이 비명소리로 가득 찬만큼 내 가슴은 걱정과 우려로 가득 찬다.

맥거트 위대한 인물의 탄생은 항상 극적인 법이죠. 너무 걱정하지 마십시오. 벌써 이런 일은 8번이나 겪어 보시고 9번째로 겪으시는 거잖습니까. 제 목을 걸고 맹세하건대 잘못될 일은 절대 없을 겁니다. 걱정은 제 목에 걸어두십시오.

그렇게 말하니 내 마음이 한결 편하구나. 역시 믿음직한 나라의 보배구나.

맥거트 대왕 폐하. 황공하오나 저는 이만 물러가겠습니다. 저의 어머니께서 편찮으십니다. 심상치 않으니 제가 옆에 있어야 할 듯합니다.(맥거트 오른 쪽으로 퇴장)

(방백)역시 믿음직해.

(비1,2,3,4, 왕자 1,2,3, 공주 1,2,3,4, 오른 쪽에서 등장)

모두 존경하는 대왕폐하 평안하신 지요.

나의 사랑스런 피붙이 들이구나. 왕비가 어쩌니 아이가 어쩌니 하는 인사말은 생략하자. 만나는 사람마다 물어대니 일국의 왕으로서 굉장히 짜증나는 일이구나. 내가 원하는 것은 인사말이 아니라 새 생명의 울음소리다. 걱정하지 말라는 소리도 그만 두어라. 너희들은 어떤 말로도 나를 위로할 수 없을 것이니.

(모두들 한 쪽에 서있고, 왕은 한참동안 무대의 끝에서 끝까지 서성인다.)

(한참 후 노블리스 오른 쪽에서 등장)

아! 왕의 친구 노블리스, 왔구려. 왜이리 늦었소. 그대가 내 옆에 없으니 한없이 허전하였소. 그대가 나의 오른쪽에 든든히 서있어야 뭐든지 마음이 놓이오. 전쟁을 하든 무엇을 하든 말이야.

노블리스 아 폴란드의 아버지이신 국왕이시여. 늦은 저의 죄를 용서하십시오. 그리고 대왕께서는,

아아, 물론 용서하고 말고, 그리고 우리사이에 형식적인 인사는 필요 없지. 우리는 친구아닌가.

노블리스 황공하옵니다. 그런데 이리로 오는 도중에 맥거트 태자를 만났사옵니다.

맥거트?

노블리스 태자의 어머니이신 비께서는 몹시 편찮으셨는데 지금은 그 병세가 한층 악화되어 사경을 헤매고 계시다옵니다. 태자께서는 왕께서 전의와 함께 와주시길 바라고 계십니다.

아니, 비가 지금 몹시 아프단 말이지. 이거 정말 걱정에 걱정이군. 맥거트가 괴롭겠어. 하지만 나도 이 자리를 떠나지 못하고 전의도 왕비 곁을 떠날 수는 없어. 하지만 나머지 중 가장 뛰어난 궁의를 보내도록 하지.

(왕 시녀2에게 지시한다. 시녀2 오른 쪽으로 퇴장)

노블리스 괜찮을 까요?

나에게는 이쪽이 더 중요하군. 그런데 노블리스, 자네 생각에 장차 태어날 아이가 왕자일 것 같나, 공주일 것 같나?

노블리스 아마 왕자일 것입니다. 제 예감이 맞는다면 말입니다.

나는 자네를 알고 지낸 후 자네 예감이 틀린 적은 본적이 없네. 노르웨이와의 싸움에서도, 프랑스와의 싸움에서도, 이탈리아와의 싸움에서도 말일세. 그래서 말인데 왕자가 태어나면 꼭 그 아이의 선생이 되어주게. 자네야말로 폴란드 제일의 남자이자, 전사이자, 학자이자, 선생이 아닌가.

노블리스 저를 믿으시고 그런 말씀을 하신다면 저는 황공할 따름입니다.

다시 한참 후

(울음소리)

노블리스 들었나.

노블리스 예. 확실히 들었습니다.

모두들 폐하, 저희들도 들었습니다.

(넋이 나간 듯이)태어났구나. 내어났어.

(시녀3이 왼쪽에서 급히 등장)

시녀3 폐하, 여기서도 울음소리가 들릴 만큼 건강한 왕자님이십니다.

모두들 와아!

(시녀2 오른쪽에서 급히 등장)

시녀2 (숨을 몰아쉬며, 울먹이며)헉헉, 폐하, 폐하 마마께서 숨을 거두셨습니다.

제1막 2장

며칠 후 왕의 방. 왕과 노블리스가 마주 앉아 있다.

내가 자네를 급히 부른 것은 긴히 할 말이 있어서네.

노블리스 예에.

할 말이란 두 가진데, 그 하나는 아이의 이름이지.

노블리스 아, 그 점이라면 생각해두었습니다.

역시 나의 친구야. 폴란드 국왕의 아들답고, 노블리스의 제자답고, 장차 이나라 제일의 청년다우며, 꽃보다 아름다워질 외모만큼 아름답고, 북극의 빙산만큼 강한 이름이어야 하네.

노블리스 아, 그런 수식어와는 전혀 다른 것입니다마는….. 제가 생각해둔 이름은 질리베스입니다.

너무 나약해 보이는 이름이 아닌가.

노블리스 ‘진리를 추구한다’는 뜻입니다.

그런 의미가, 듣고 보니 그럴 듯한 이름이군. 그래 노블리스 자네가 지은 이름이니 어련하겠나. 그걸로 정하지. 그리고 두 번째는 아이의 생명과 관계된 건데……

노블리스 그 점도 생각해두었습니다. 폐하께서 태자를 낳으신 분의 죽음을 소홀히 했을 뿐만 아니라 태자께서는 본디 야망이 크고 욕심이 많으신 분이시라 왕자님의 존재를 탐탁지 않아 하실 겁니다.

아아! 그대는 진정 현인이다. 그래, 그대에게는 무슨 대안이 있는가?

노블리스 태자께서 왕자님을 꺼려하시는 것은 왕자님의 왕위계승의 정당성입니다.

그래.

노블리스 폐하께서 나라안 가장 이름 있는 예언자를 부르시옵소서.

그 다음에는.

노블리스 예언자에게 거짓 예언을 하도록 하시는 겁니다. 왕자님 자신은 물론이거니와 그 자손에게도 왕위의 운명은 없다는 예언 말입니다. 그리고는 왕자께서 장성하셨을 때 이 말을 해주시면 지금 태자폐하의 왕위를 이으실 수 있으실 겁니다.

오오! 진정 그대는 나의 보배다. 좀더 구체적인 계획을 짜도록 하세. 그리고 왕비에게는 비밀로 하지. 여자들은 입이 가볍고 수다스러워서 자기 아들이 고통받는 것을 보면 입을 열어버릴 걸세. 차라리 모르는게 나아.

제2막 1장

17년 후

궁성, 질리베스의 방. 질리베스

질리베스 아, 여자여, 그대는 욕망이요, 남자는 야망이라. 시선을 쫓지 못하는 여자는 타락하고, 시선을 쫓지 못하는 남자는 몰락하리. 아침에 눈을 뜨면 보이는 곳은 궁전이나 나는 식객 같은 몸. 더 이상 절망하지 않는 법이 더 시급한 것일까? 아니면 운명을 개척하는 것이 더 중요한 것일까? (노크소리) 누군지 모르겠지만 들어오십시오. 언제나 식객의 방은 문이 열려있지요. 내겐 열쇠는 물론 문을 잠글 권리조차 없다오.

(노블리스 등장)

노블리스 사랑스런 왕자님. 왜 그런 소릴 하십니까.

질리베스 (방백)아아 나의 정신적 지주. 스승님이구나. (큰소리로)아아, 선생님, 오늘도 오셨군요.

노블리스 저는 매일 오지요. 지난 17년 동안 왕자님을 보지 않은 날은 아마 한 손으로 셀 수 있을 걸요. 자자, 학문의 길은 험난하고, 예술의 길은 멉니다. 날짜를 세고 있을 시간은 귀중한 무언가를 배울 수 있는 시간이기도 하지요. 시간은 쓰기 나름이니까요. 어서 공부합시다.

질리베스 오늘은 또 무얼 배우지. 그대는 날 가르칠 권리는 있는가? 나는 자네에게 배울 권리는 있는가? 그대는 진리를 아는가? 진리를 전수한다고 확신하는가? 진리라면, 이런 내가 진리를 배울 자격이 있는가?

노블리스 저는 왕자님께 철학을 가르친 기억은 없는데요.

질리베스 물론 나도 배운 적은 없어. 해본 적도 없고, 이건 그냥 말장난이야.

노블리스 고민은 왕자님이 하십시오. 고통은 제가 느끼겠습니다.

질리베스 그렇게 할 수 있다면 고민까지 떠넘기고 싶네. 나의 운명엔 ‘그 것’대신 ‘고민’이 있네.

노블리스 (방백)왕자님의 고민을 믿어야 할 사람은 맥거트 태자뿐입니다.

질리베스 오늘의 과목은 뭐지.

노블리스 정치입니다.

질리베스 아! 정치. 정치는 중요한 거야. 국가의 여부를 결정할 뿐 아니라 더 나아가 국민의 생존여부까지 결정하지. 정치는 매우 중요해. 정말 배울만한 가치가 있어. 나를 제외하고 말이야. 나에게 필요없는 공부를 하느니 정원을 거닐며 원기를 회복하는 게 나을 듯 싶네. (그대로 퇴장)

노블리스 아아! 슬프구나 예전엔 저러치 않으셨는데 점점 더 고민이 많아지시는 군. 옆에서 보는 내가 다 안타깝다니까. 하루빨리 왕자께서 빛을 찾으시길.

정원. 무성한 풀과 나무, 꽃.

질리베스 이제야 고개를 드니 하늘이 보이는 구나. 궁전의 천장이 보일 떄는 정말 죽을 맛이었어. 하늘은 만인 위에 푸르르니, 기구한 나의 운명도 대수롭지 않은 듯 해지는 구나. (꽃봉오리를 꺾으며)꽃봉오리야, 너도 꽃을 활짝 필 운명이 아니었나보다. 초록이 동색이라 하는데 네가 거울같이 느껴진다.

(아우델리아 등장)

아우델리아 오빠. 여기서 뭐하는 거죠.

질리베스 나의 사랑스런 동생이구나. 나의 하나뿐인 혈육.

아우델리아 무슨 그런 무서운 말을 하는 거예요.

질리베스 나를 낳으신 분은 나의 아버지이기보다는 폴란드의 아버지이길 택했고, 나를 기르신 분은 나의 어머니이기 보다 폴란드의 아버지의 여자이길 원했다. 너야말로 나를 가장 아끼고 나도 너를 가장 아끼니 우리야말로 진정한 혈육이 아니겠느냐.

아우델리아 그런 말씀 하지마세요. 그 두 분이야말로 당신들의 자녀를 진정 아낀답니다. 꽃을 보고 계셨군요. 꽃보다 아름다운 분이. 제가 노래를 불러드리죠.

(노래)지독한 외로움에 쩔쩔매본 사람은 알게되지 음 알게되지

그 슬픔에 굴하지 않고 비켜서지 않으며

어느 결에 반짝이는 꽃눈을 닫고

우렁 우렁 잎들을 키우는 사랑이야말로

짙푸른 숲이 되고 산이 되어 메아리로 남는다는 것을

누가 뭐래도 사람이 꽃보다 아름다워

이 모든 외로움 이겨낸 바로 그 사람

누가 뭐래도 사람이 꽃보다 아름다워

노래의 온기를 품고사는 바로 당신

바로 우리 우린 참사람

질리베스 너의 그 너그러운 마음이 목석같은 내심장도 스폰지같이 부드럽게 만드는구나. 고맙다. 멋진 노래였어. 그리고 나도 노력하마. 그 두 분을 사랑하도록.

아우델리아 그런데 이른 아침부터 여기서 뭐하시는 거예요. 오빠는 노블리스님과 같이 계셔야 하잖아요.

질리베스 고독한 남자가 하늘을 찾는 이유가 둘이겠느냐? 폴란드 제일인자의 적자가 발악해도 소용없는 것이, 오늘, 내일 하는 늙은이의 말 한두 마디면 끝난다. 대로에서 황금마차를 타고 수많은 민중들의 환호 속에서 들은 말일지라도, 시골 화장실에서 들으면 끝이 난다.

아우델리아 알 수 없는 말만 해댄다고 노블리스에게 이르겠어요. 헤헤, 농담이여요. 그런데 오빠에게 줄게 있어요. (주머니를 뒤지면서) 이거는 이전부터 오빠에게 줄려고 벼르던 건데…… (주머니에서 옥구슬이 줄줄이 이어진 목걸이를 꺼낸다) 자, 여기요. 이교도 상인이 갔고 온 거여요. 특이하죠. 이게 옥이란 건데. 저 멀리 동방에서 만든 거래요. 여기는 제 이름과 오빠이름도 적혀 있어요. 구슬하나에 철자가 하나씩 적혀있지요. (질리베스 목걸이를 건네 받는다.) 저는 예법을 수업하러 가는 길이었어요. 그럼 안녕.

(아우델리아 등장한 반대편으로 퇴장)

질리베스 고맙기도 하지. 저 아이를 바라보면 근심이 가시지만 다시 뒤돌아서면 이마에 내 천(川)자를 그리지 않을 수 없구나. 아아 이 얼마나 기구한 운명인가. 적자로 태어나서도 아버지, 어머니, 형도 믿을 수 없을 뿐만 아니라 미래조차 믿을 수 없다니. 저 동쪽 홍씨의 서자라도 나를 따라갈 순 없을 테다. 구름아 날아가라! 하늘아 무너져라! 저주받은 나의 운명을 안고!

(노블리스 아우델리아가 퇴장한 쪽에서 등장)

노블리스 아무리 생각해도 왕자님의 목소리는 너무 큽니다.

질리베스 (방백)깜짝이야. 누가 들었을 줄은 꿈에도 몰랐어. 주의해야겠군. 하지만 다행히 노블리스야. 그라면 못들을 것도 없지. (노블리스에게)그런 말로 엿들은 죄가 무마될 거라고 생각하십니까 선생님.

노블리스 엿들은 것은 결코 아닙니다. 제 심장에 걸어도 좋습니다. 오십 보전에서부터 왕자님의 말소리가 들렸습니다. 운명이란 믿을게 못되죠. 특히 늙은이가 대중 앞에서 하는 저주는요. 운명이란 편의대로 만들고 바꾸고 지우고 하는 거랍니다.

질리베스 그렇다면 나의 운명을 먼저 지워다오.

노블리스 제 생각에는 왕자님의 운명은 앞으로 얼마동안은 그 어떤 화려한 운명보다도 더 좋은 운명이라고 생각합니다. 바꾸려면 기다리십시오.

질리베스 말도 안 되는 소리인가? 참말인가?

노블리스 참말입니다.

질리베스 그렇다면 나는 그냥 이렇게 살다죽을 재목이라는 소리렸다.

노블리스 (정색을 하며)절대 아닙니다. 왕자님은 제가 안 그 누구보다 뛰어나십니다. 그 어떤 면에서도 그 누구에게도 뒤지지 않습니다. 왕자님은 영웅의 재목입니다.

질리베스 (방백)그런 말을 들으면 내 가슴은 찢어진다오.

노블리스 다만 아직은 왕자님의 운명이 훌륭한 갑옷이자 방패라는 말입니다.

질리베스 (듣지 않고서)아아 나를 위로하려 애쓰지 말게. 이 상황에서는 고통이 나의 쾌락이지요. 그럼 안녕히 가십시오.(질리베스 퇴장)

제2막 2장

궁전의 로비. 맥거트가 오른쪽에서 홀로 등장. 늙은 왕이 왼쪽에서 4명의 하인과 등장

오오, 맥거트냐? 그래. 요즘 어떻게 지내느냐?

맥거트 보시는 바와 같습니다. 이러저러 시간만 죽이고 있지요.

그 무슨 바보 같은 짓이냐? 너는 장차 나를 이어 왕이 될 몸. 왕은 아무나 하는 것이 아니다. 국가를 보존할 능력과 국가와 국왕을 믿는 국민을 실망시키지 말아야할 의무가 있다. 국가란 국민의 필요에 의해 형성된 것이다. 국민에게 도움을 못 주는 국가란 필요 없는 것이다. 국가와 국민을 위하여, 미래의 국왕이시여 준비를 하시오.

맥거트 지당하신 말씀이십니다.

그래 필요한 것이 있으면 언제든지 말해라. 나의 아들과 미래의 왕을 위해 할 수 있는 것은 무엇이든지 하마.(왕 오른쪽으로 퇴장)

맥거트 흥, 그래 필요한 것이 있다. 바로 당신의 목숨이지. 무던히도 오래 사시는 군. 지금쯤이면 삶이 지겨울 때도 되었는데 저 왕은 그렇지도 않은가 봐. 저 정정함을 봐서는 몇 년은 더 살 것 같은데 난 벌써 40대가 가까워 온,

(이 때 오른편에서 질리베스 등장)

질리베스 안녕하신가요.

맥거트 안녕하신가요? 너는 일국의 태자에게 그 불손한 태도가 다 뭐냐? 좀더 예법 공부를 해야겠다. 노블리스는 대체 무얼 가르치는 거냐? 진정 필요한 예법이나 도덕은 뒷전이고 너에게는 전혀 쓸모 없는 병법이나 정치를 가르치는 것은 아니냐?

질리베스 태양은 시간을 아는 데보다는 빛과 열을 얻는데 더 많은 도움을 주죠.

맥거트 무슨 엉뚱한 소리냐? 그러고 보니 요즘 소문에 네가 미쳐버렸다는 얘기가 있다. 네 생각은 어떻냐?

질리베스 글쎄요… 진정 미치지 않은 사람은 미치지 않았다고 할테고, 미친 사람은 자기보고 미쳤다고 안 하니, 미친 사람과 미치지 않은 사람은 같은 취급을 받죠. 바보와 천재를 빼고 말입니다. 소문이 사람을 미치게 하는 겁니다.

맥거트 오, 그것은 올바른 대답이구나. 내가 보기에는 미치지 않은 듯하다.

질리베스 아쉽습니까?

맥거트 (화를 내며)닥쳐! (방백)사실 조금은 아쉽지만, 너 같은 녀석은 미치지 않아도 하나도 겁날게 없지. 오히려 다행이야. 그런 저주받은 운명에도 불구하고 민중들의 인기가 상당하거든. 저 녀석에게 일이생기면 내가 비난을 받을지도 몰라.

질리베스 당신은 미래의 폐하이시니 분부가 있으시면 뭐든지 명하십시오.

맥거트 그래?

질리베스 그러면 저도 뭐든지 미래에 이행하겠습니다.

맥거트 (다시 화를 내며)나를 놀리는 거냐! 썩 꺼져라. 아니, 아니, 너를 퇴장시키느니 내가 퇴장하는게 빠르겠구나. (관객들에게)저 녀석이 어느 쪽에서 왔죠? 아 오른쪽이요. (질리베스에게)너와 마주치고 싶지 않구나.

(오른쪽으로 퇴장)

질리베스 (방백)뭐, 왕이 너무 오래 살아. 위험한 놈이군. 국정에 대한 희망보다는 왕위에 대한 드러운 야망으로 가득 차있어. 너 같은 놈이 왕이 된다면 폴란드가 편치 못할 거다. 그렇지만 나는 한낱 인간, 그의 운명이 왕이라면 나에게는 그를 막을 힘이 없지. (큰소리로)에이! 국왕의 적자로 태어나 왕이 못되느니 사람이나 돼야겠다. 그래 사람이나.

제3막 1장

한달 뒤. 왕의 방. 왕과 왕비 나란히 앉아있다. 맥거트. 시녀들과 하인들.

(시녀1등장)

아직 이냐? 아직도 그대로야?

시녀1 (쉰 목소리로)전혀 문을 열 생각도 안 하시는 듯합니다. 제가 왕자님의 방문 앞에서 1시간 째 문을 두드리고 왕자님을 간곡히 불러서 지금 손은 퉁퉁 붓고 찢어질 판이고, 또 목은 들으시는 대로 쉬었습니다. 왕자님께서 약간의 감정을 가지고 계시다면 이렇게 처량한 저희들을 외면하실 리가 없습니다.

닥쳐라! 너의 정성이 부족한 탓이지. 왕자의 감정이 메마른 탓이 아니니라.

왕비 그래, 왕자는 방안에서 무엇을 하고 있는 듯하냐? 뭔가 변화는 있느냐?

시녀1 그 전과 같습니다. 뭘 하시는 지 통 모르겠습니다. 가끔씩, 그러니까 한 10분, 20분 사이로 들리는 함성과 울음소리. 그 정도입니다.

맥거트 질리베스에게 광증이 있었다는 얘기는 얼마 전부터 있었습니다. 그렇지만 제가 그를 만나본 바로는 그 광증은 그맘때 항상 있는 방황입니다. 그 뿐입니다.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닌 단순한 방황, 그 뿐이죠. 그러니 방황에 몸을 망치진 못할 겁니다. 그리고 곧 그 방황은 끝날 겁니다. 운명을 인정한다면요.

왕비 (방백)못된 놈. 나의 아들이 있어야 할 곳에 서있는 놈. 예언자가 네가 아니라 나의 아들에게 저주했다면 나는 너에게 저주를 하리. 이 세상 가장 지혜로운 자의 손에 죽어라! 하고.

그렇게 단순히 말할게 아니잖느냐? 너는 불쌍한 너의 아우가 걱정도 안 되느냐?

맥거트 아니 그게 아닙니다. 저라고 왜 걱정이 안 되겠습니까? 단지 곧 괜찮아질 거라는 말이죠. (아우델리아 등장) 오, 아름아운 아우델리아야, 왔느냐. 이탈리아 여행은 벌써 끝마쳤느냐?

아우델리아 (무시하고)어머니, 아버지, 오빠는 어찌됐죠. 오빠가 방안에 틀어박힌 채 식음을 전폐한다는 소식을 듣고 모든 일정을 무시하고 달려왔습니다. 국경에서 직접 마중 나온 이탈리아 왕을 만났지만 다시 되돌아왔습니다.

사랑스런 아우델리아. 아무래도 좋다. 네 오빠 때문에 내가 늙는구나. 네가 한번 만나보렴.

왕비 너라면 질리베스도 마음을 열게다.

(아우델리아 퇴장)

맥거트 그렇지만 직접 국경까지 마중 나온 이탈리아 왕을 바람맞혔다는 것은 못마땅하군요. 이탈리아와 우리의 우호가 다시 틀어질 수도 있어요. 이래서야 원. 바보같이……

젖비린내 나는 이탈리아 왕은 아무래도 좋다. 나에게는 질리베스가 더 중요해. 아우델리아는 잘 결정한 거야.

맥거트 (방백)폴란드에는 바보뿐이군.

질리베스의 방 앞. 시녀들이 서있다.

시녀2 아우델리아 공주님. 왕자께서 며칠 째 방안에 틀어박혀 계십니다. 식사는 물론 물조차도 들이지 못하게 합니다.

아우델리아 아아, 안타까워라. 가엾은 우리 오빠. (방문을 두드리며)오빠, 오빠, 오빠가 사랑하고, 오빠를 사랑하는 아우델리아예요. 오빠 문 좀 열어주세요. 저는 오빠의 소식을 듣고 애가 타서 국경에서 이곳까지 단숨에 달려 왔답니다. 젊고 멋진 이탈리아 왕도 내버려두고요.

시녀3 글쎄 도무지 말을 듣지 않아요. 어제는 창문으로 병사셋과 광대를 밧줄에 매달아 보냈는데, 글쎄 어디서 난 기운인지, 악마의 힘을 빌었는지, 며칠 굶은 몸으로 그들을 맞아 싸워서 창문으로 4명을 떨어뜨렸다니까요. 다행히 죽은 사람은 없었지요.

아우델리아 (계속 방문을 두드리며)아아, 오빠 제발 문을 열어줘요. 오빠가 무엇 때문에 괴로워하는지 저는 짐작으로 알 수밖에 없고, 또한 오빠의 고통을 덜어줄 수도 없어요. 그렇지만 확실한 것은 오빠가 그러시면 그럴수록 저는 갑절로 괴롭다는 거예요. 거짓이 아니예요. 설마 이 아우델리아가 오빠에게 거짓말을 하겠어요. 지금 저는 오빠의 문을 두드리고 있지만 사실은 저의 이 가슴을 두드리는 거랍니다. 오빠 제발 얼굴을 보여 주세요. (운다.)

시녀2 글쎄 소용이 없다니까요.

(이 때 방문이 열리면서 질리베스 나온다.)

질리베스 아우델리아야 미안하다. 그만 울어라. 나는 와인이나 마시고 싶다. (퇴장)

로비. 오른쪽에서 질리베스 등장.

질리베스 오~, 아~, 여기구나. 내가 며칠 전 여기서 왕이 못 될 바에야 사람이나 되자고 맹세했던 곳. 사람이나 되자고. 그 사람이나. 참 웃기고 있었군 ‘사람이나’라니, ‘이나’라니. 아 씻지 못할 망언을 했구나. 저주받은 운명아. 저주받을 인생아! 내가 이 자리를 다시 찾은 것은 그 운명과 인생에서 저주를 풀기 위해서다. 난 지금까지 운명이라는 목걸이에 매여진 채 말뚝 주위를 사납게 쏘아 다닌 한 마리 개였다. 그래 개다. 운명의 굴레를 못 벗어나고 언젠가는 말뚝에 휘감겨 질식사하고 말 걔였다. 그렇지만 이제는….. (큰소리로 외친다.)지금부터는 나는 사람이 되겠다. 다시는 목을 메이지 않도록 사람이 되겠다. 그 위대하다는, 그 아름답다는 사람. 그 사람이 되겠다. 이제 진리를 찾아가자. 진리가 없는 곳으로 진리를 찾아가자. (작은 소리로)사람이 오기 전에 어서 궁성을 빠져나가야지. 이미 방에는 편지도 써있다. 모두들 나를 이해해주길 비는 수밖에. 이건 가출이 아니라 출가이니까.

(질리베스 등장한 쪽으로 퇴장.)

제3막 2장

근교의 농촌. 질리베스, 농부 여럿, 여염집 여자들. 농가

질리베스 아아! 드디어 빠져 나왔구나. 대체 무엇을 위하여 저 곳은 그리도 두텁더냐? 성이란 무엇이건대 지킬 것은 무엇이며, 막을 것은 무엇이냐? 아라비아의 사막이라도 저렇게 삼엄하지는 않으리라. 그곳에 살벌함은 있을지언정 적어도 살기는 없다. 무기도 없다. (주위를 둘러보며) 아, 얼마나 그리워했던 정경이더냐. 땀 흘려 일한 만큼, 그 이상도 그 이하도 바라지 않는 농민은 얼마나 아름다운가. 사철 마옷과 옥수수 수프만으로도 만족할 줄 아는 아낙들은 얼마나 사랑스러운가. 나도 저들의 틈바구니에 슬쩍 끼고 싶다. 저 퇴비를 싫은 달구지를 뒤에서 밀어주고 싶다. (고개를 저으며)그러나 그럴 순 없다. 나의 이 더럽혀진 몸으로 순수한 저들의 사이에 낄 수는 없다. 아직은 나에게 자격이 없다.

농부 (걱정스러운 듯이 질리베스를 훑어본다.)성에서 나오셨나요? 설마 벌써 세를 내라는 것은 아니겠지요. 아직 추수가 끝나려면 한 달은 더 있어야 한다구요. 저번에도 세라면서 저희 먹을 양식마저 가져가시지 않으셨습니까. 덕분에 저는 빚을 지게 되었고 악독한 고리대금업자는 소를 끌고 갔습니다. 이번 농사는 완전히 죽이라고요. 세를 낼래야 낼 수가 없습니다.

질리베스 아닙니다. 저는 성에 사는 사람이 아닙니다. 물론 성에 살아오지도 않았습니다. 성에서 나온 것은 더더욱 아닙니다. 세를 걷는 사람은 더더더욱아니고요. (방백)이것은 거짓이 아니야. 내가 17년 동안 있어왔던 곳은 개집이거든. ‘운명의 굴레’라는 이름의 개짐. (농부에게) 모르긴 몰라도 세란 국가로부터 받은 이익에 대한 대가입니다. 국가가 주는 것 없이 얻어가기만 한다면 그것은 낼 필요도 없을뿐더러, 이미 세도 아닙니다. 세란 국가를 배불리하는게 아니거든요.

농부 지당하신 말씀입니다. 그렇지만 한편으로는 책상 앞에 마주앉아 할 말이기도 하지요. 이렇게 들판에서 땀 흘려가며 곡물을 눈으로 보며 할 말은 아니란 말 입죠. 모든 것이 책상 앞에서 한 말대로 돌아간다면 제가 세를 무서워할 이유도 없죠. 청년님의 말씀대로 세를 거둔다면 저는 기꺼이 세를 내겠습니다. 세가 제 목숨이라도 아까워 할 필요도 없고, 억울할 것도 없지요. 그렇지만…… (한숨) 고통스러운 이 세상을 열심히 살고 하늘로의 구원을 받는 수밖에 없습니다.(농부 퇴장)

질리베스 이럴 수가. 저 안에서는 그렇게 동경해 왔고, 순수하다고 생각해왔던 농촌인데. 진리가 있을 거라고 믿어왔던 곳인데. 가슴 졸이는 불안과, 작은 것에 만족할 건덕지마저 없구나. 그들에게 남은 것이라고는 구원에 대한 희망뿐. (두 팔을 들어 보이며)아무튼 이 옷은 너무 비싸 보이는 군. (주위를 둘러보고) 나에게 낡은 옷을 줄 사람이 분명 있을 거야.(가까운 농가로 다가가서)똑똑똑 문 좀 열어 주십쇼. 밖에 사람이 와서 문을 두드립니다. 문이 부서질까봐 세게 두드리지 못해요. 빨리 나와주세요. 저는 나쁜 사람이 아니거든요. (잠시 후) 아아 (한참 후. 문이 빼꼼이 열린다. 질리베스가 문고리를 잡고 활짝 열려고 하자 안에서 문을 잡는다.) 아주머니 저는 나쁜 사람이 아닙니다. (간곡히, 정중히)제가 입고 있는 이 값비싼 옷을 드릴 테니 낡고 헌 옷 한 벌을 주시겠습니까? 결코 나쁜 말이 아닙니다.

아주머니 당신은 누구세요. 왜 그런 이상한 말을 하는 거죠.

질리베스 (방백)정말 곤란한 말을 하는 구나. 폴란드 국왕의 적자 질리베스 왕자였지만 지금은 진리를 찾아 떠돌아다닌다고 말해야 하나. 그렇다면 지금은 현재 무엇이라고 말해야 하나. (아주머니에게)그냥 떠돌입니다. 제발 옷을 바꿔 주십쇼.

아주머니 수상한 사람이군. (안에다 대고)얘들아 방으로 들어가라. (질리베스에게)나는 당신처럼 수상한 사람과는 말할 수 없어요.(문을 닫아버린다.)

질리베스 탄식하자. 아아아~. 누가 저 순한 이들을 의심의 눈초리로 만들었는가. 힘주어 치면 부서질 것 같은 문을 움켜쥐도록 만든 것은 또 무엇이더냐. 옷은 입고 있으면 헤어지고 낡아지는 법. 갈 길이나 서두르자. (퇴장)

제3막 3장

시내. 수많은 학교들이 늘어서 있다. 사이사이로 상점들. 많은 사람들이 왼쪽에서 오른쪽으로, 오른쪽에서 왼쪽으로 등장과 퇴장을 반복한다. 질리베스 등장.

질리베스 이 많은 학교들을 보라. 대단하군. 무언가를 배우려고 노력하는 사람들은 또한 어떻고…… 틀림없이 저들도 진리를 얻으려고 그러는 걸 거야. 학교가 이렇게 많으니 선생님들도 분명히 더 많겠군. 그 많은 선생님들 중 적어도 한 분은 진리를 알겠지.

(질리베스 왼편에서 뛰어오던 아이와 부딫힌다.)

학생 아야. 이렇게 복잡한 거리에서 우두커니 서서 뭐하자는 거예요, 정말. 난 바빠요. 곧 수업이 시작하거든요.

질리베스 학생이구나. 너는 무엇을 배우지.

학생 바보군요. 신학과 성경외에 뭐가 있겠습니까?

질리베스 신학과 성경? 그것뿐이냐. 철학은? 과학은? 의학은? 수학은? 문학은?

학생 그런 것은 믿음을 약화시키고, 의심만을 심어주죠. 하느님과 예수님은 그런걸 싫어해요. 저희에게는 믿음뿐이면 되거든요. 아무튼 저는 바빠요. (오른쪽으로 퇴장)

질리베스 이런. 믿음뿐이면 된다고. 나의 스승께서는 탐구하는 자세가 중요하다고 누누이 말씀 하셨어. 노블리스의 말이 틀릴 리가 없지. 마침 저기 교육자로 보이는 듯한 이가 지나가는구나. (교사를 붙잡으며) 질문이 있습니다.

교사 아니, 이런 길거리에서 질문이라니. 정말 뻔뻔한 녀석이군.

질리베스 예에! 교사에게 질문하는데 왜 뻔뻔하다는 거요.

교사 다른 사람들은 돈을 내고 학교까지 찾아와서 직접 수업을 듣는데 당신은 길거리에 우두커니 서 있다가 내가 지나갈 때를 노려 질문을 하니 그렇지. 아무튼 하고 싶은 질문을 해봐.

질리베스 혹시 진리를 아십니까?

교사 허! 정말 이상스런 놈이군. 성경은 읽어 봤는가?

질리베스 물론이지요.

교사 그렇다면 자네도 진리는 알 테야. 난 가보겠네.(퇴장)

질리베스 성경이 진리라고? 성경을 읽으면 진리를 깨닫는 다고? 그렇다면 이렇게 피비린내 나는 전쟁이 잃어날 필요도 없고, 서로의 목숨을 위협하는 범죄도 잃어날 필욛 없고, 농민들이 고리대금업자에게 소를 빼앗길 일도 없을 텐데. 분명 다른 뭔가가 있어. 마침 다른 교사가 지나가는 군. (다짜고짜)진리를 아십니까?

다른 교사1 성경이지요. (퇴장)

질리베스 다시 한 번 묻자. (다른 교사2에게 다짜고짜) 진리를 아십니까?

다른 교사2 성경이지요.

질리베스 (방백) 이런. 아마도 이들은 모두 신학 교사라서 그럴 거야. (교사에게)혹시 여기는 진리를 아는 사람은 없습니까? 아니, 아니, 철학 교사는 없습니까?

다른 교사2 철학이라뇨. 믿음이 곧 철학입니다. 믿음을 의심하는 죄악은 모두 산 속으로 쫓겨났지요. 혹시 정신을 믿으십니까? 희망을 바라십니까?

질리베스 물론이지요.

다른 교사2 이런! 자유로운 정신은 믿음을 버리고 자유의지를 믿을 우려가 있으며, 낙관적인 희망은 사람을 게으르게 합니다. 죄악 중 가장 큰 죄악이죠.

질리베스 살인보다도요.

다른 교사2 물론입니다. 왜냐하면 이것은 살인 중에서도 자기 자신은 물론 신의 존재까지도 부정해버리는 살인이기 때문입니다.

질리베스 그러면 진리를 구하기 위해서는 어떻게 해야 합니까?

다른 교사2 성경을 읽는 것 외에 얼마나 더 진리를 원하십니까? 성경을 외십시오. 그리고 믿으십시오. 그래도 의심이 나면 성경을 가지고 신학적으로 접근하십시오. 성경에 거짓은 없습니다. 그래도 정 안되면 그 유명한 (요하네스 스코투스)에리우게나를 쫓아 산으로 도망가십시오. 이건 정말 당신을 걱정해서 하는 말이오.(퇴장)

질리베스 이럴 수가. 믿음이라니. 카톨릭은 분명 좋은 종교다. 예수 또한 훌륭한 성인이다. 그렇지만…… 이런 맹목적인 믿음이라니. 과연 예수의 말에 부합되는 것일까? 예수라면 자신을 의심하는 사람을 쫓아냈을까? (퇴장)

제3막 4장

산중(山中). 오두막이 있고, 의자에 노인이 앉아있다. 질리베스 오른쪽에서 등장.

질리베스 이상한 노인이군. 이런 산골에서 오두막을 짓고 홀로 살다니.

예언자 젊은이인가? 오랜만에 보는 사람이군. 젊은이는 더더욱 그러고.

질리베스 안녕하십니까?

예언자 먼저 인사를 하는 사람은 더더욱 처음이야. 자네는 누구인가?

질리베스 진리를 찾기 위해 노력하는 사람입니다.

예언자 그렇다면 나는 진리를 미리 말하려고 노력하는 사람이라네.

질리베스 (방백)하! 드디어 진리에 가까운 사람을 만났구나. 아아! 너무 기쁘다. 이 얼마나 반가운 일인가? 너무 기뻐서 진정 되지가 않는다. 심장은 숨을 쉬라고 있는 것인데 쓸데없이 두근거린다. (예언자에게)그렇다면 거짓이어도 좋습니다. 진리를 말해주시옵소서.

예언자 (한참 동안 질리베스를 쳐다본다.)아아~ 누구지?

질리베스 왜 그러십니까? 그렇게 빤히 쳐다보면 전 어떻게 합니까?

예언자 알겠다! 네가 누군지 생각났어.

질리베스 저를 아십니까?

예언자 물론 알지. 하지만…… 어쨌든 귀한 옥체를 버리고 왜 이런 산중까지 왔는가?

질리베스 과연 나를 아는구나. (예언자에게)아까 말하지 않았습니까? 진리를 구하려고 한다고. 빨리 진리를 전해 주세요.

예언자 아아 살아생전에 너를 다시 보아버리고 말았구나. 더군다나 너의 이 고생스런 모습을…… 나는 더 이상 예언자가 아니다. 나는 단순한 공갈꾼에 불과하다. 정말 슬프도다. 그때는 왕의 부탁으로 마지못한 듯이 했지만, 노인의 식견으로 그만 두어야 했어. 나는 이제, 아니, 원래 쓸모 없는 노인에 불과해, (혀를 깨문다.)

질리베스 아니! 왜 그러십니까! 이봐요! 입에서 피가 흘러. 정신차리세요. (오두막을 살핀다.) 약은 고사하고 붕대도 없다.

예언자 (부정확한 발음으로)내 죗값은 내가 갚는다. 그러나 죽기 전에 네게 해줄 말이 있다.

질리베스 무엇입니까?

예언자 (부정확한 발음으로 힘겨운 듯이) 너는 왕이 되어야할 운명이다.(죽는다.)

질리베스 와인이 오두막에 있다고요? 아 죽었구나. 그러나 내가 왜 이럴까? 나를 아는 노인의 죽음보다도 진리에 가까운 자의 죽음이 더 아쉽구나. (갑자기) 혹시 오두막에 있다는 와인이 힌트일지도 모른다. (오두막을 다시 뒤진다.) 오두막에는 와인 따위는 없다. 죽기전에 한다는 말이 거짓말이라니. 난 진리일 줄 알았는데. 진리는 거짓이라는 뜻일까?(반대편으로 퇴장)

제3막 5장

가운데를 가르는 커다란 계곡. 양쪽을 잇는 다리가 있다. 다리의 입구마다 두 사람씩 서있다. 왼편에는 높은 고개가 있다. 질리베스 오른쪽에서 등장.

질리베스 이야! 거대한 계곡이다. 저 건너편의 고개는 어떻고. 저기 아스라이 보이는 거대한 산 봉오리는 정말 어마어마하구나. 자연은 정말 대단해. 탄성이 절로 나오는 구나. 정말 멋져. 이럴 때는 노래가 절로 나오지.

(노래)저 산은 네게 우지마라 우지마라하고

발아래 젖은 계곡 첩첩 산중

저 산은 네게 잊으라 잊어버리라하고

내 가슴을 쓸어 내리네

아, 그러나 한줄기 바람처럼 살다가고파

이산 저산 눈물 구름 몰고 다니며 태양을 찾는 바람처럼

저 산은 내게 내려가라 내려가라하네

지친 내 어깨를 떠미네

강도1 저 녀석은 노래부른다. 지 처지도 모르나봐. 몇 분 후의 자기 미래를 바라볼 수 있다면 한가히 노래 부를 때가 아니겠지.

강도2 키키키, 크크크, 허허허, 하하하.

질리베스 아니, 나의 처지를 잘 알고 있소. 그러니 노래를 불렀지.

강도1 이봐, 당신은 행색이 그게 뭐요. 아무튼 돈은 있나?

질리베스 그건 왜 묻지?

강도2 당신 이 길을 안 건널 꺼요?

질리베스 물론 건너야지.

강도1 반드시 건너야 하나?

질리베스 물론이지. 온 길을 되돌아 갈 순 없으니까.

강도1 왜 건너려고 하는데?

질리베스 진리를 구하려고.

강도2 그러면 꼭 건너야겠네.

질리베스 뭘 아는군. 물론 꼭 건너야지.

강도1 그러면 통행료를 내야지.

질리베스 (방백)오라. 이제야 알겠다. 이 녀석들은 강도구나. (큰소리로) 이 다리는 누가 지은 거요?

강도2 그야 물론. 국가에서 지은 거지. 나라 말이야. 위대한 폴란드.

질리베스 나라가 대관절 무엇이기에 이 엄청난 계곡에 이 거대한 다리를 어떻게 놓았소?

강도2 그야 물론. 국민에게 거둔 세금과 노동력을 사용했겠지.

질리베스 당신의 말은 참이요?

강도2 내가 거짓을 말할 리 있나. 이 말이 거짓이라면 나는 이 계곡 아래로 뛰어 들겠어.

질리베스 나는 폴란드의 국민이요. 고로 이 다리는 내 소유요. 나는 이 다리를 지날 권리가 있소. 안 그래도 괴로우니 날 내버려두시오.

(질리베스 두 명의 강도 사이로 지나치려한다. 강도1 질리베스를 붙잡으며)

강도1 이봐 네 말이 맞아. 그렇지만 원리대로 네가 이 다리를 지나면 우리가 왜 굳이 강도겠나. 옳은 것도 힘으로 몰아 붙이니 강도지. 있는 것을 다 내놔.

질리베스 그건 당신 말이 맞소. 그러나 나의 행색을 보시오. 나의 옷은 몇 달째 이렇소. 왜냐면 떠돌이이기 때문이지. 도시에 있을 때는 빌어서 먹고, 산에 와서는 동물을 잡아먹었소. 그런 내가 어디 돈이 있겠소.

강도2 뒤져서 나오면 너 죽는다. 1그램에 다섯대다.(옷을 뒤진다.)

질리베스 (방백)비참한 생활을 하면서도 지켜온 물건이 하나있다. 그렇지만 너희 따위에게 줄 수는 없다. (강도에게)아니 됐어요. 저는 이 다리를 건너지 않겠어요.

강도2 네가 건너지 않는 다고 보내주면 우리가 강도냐?

질리베스 (방백)그래, 설사 보내준다고 해도 그냥 갈 수는 없지. 저 녀석들을 남겨두면 또다시 선량한 백성들이 피해를 입는다.

강도1 (목걸이를 꺼내며)아! 여기 뭐가 있다. 목걸이군 꽤 값이 나가겠는데.

강도2 어림잡아 300그램은 되겠어. 그러면 몇 대냐? 으~ 그러니까, 300곱하기 5는……

질리베스 (칼을 꺼내며)이 바보들! 품안의 목걸이는 찾아내면서, 허리춤의 보검은 왜 못 찾느냐!

강도2 값비싸 보이는 검이다. 저것은 1.5킬로는 되겠는데.

강도1 지금 그게 문제가 아니잖어.(칼을 뽑는다.)

(질리베스 강도 둘과 싸운다. 금방 이긴다. 강도들은 칼을 놓치고 넘어진다.)

강도2 살려줘…… 아니 죽여라. 비록 강도였지만 칼을 잡았던 사내다.

강도1 ……..

질리베스 (방백)저들이 아무리 이 우주에 백해무익하다 할지라도 생명이다. 그 자체로 소중한 생명. 분명 저들에게는 저들을 나을 때 아파했던 어머니가 계실 거다. 그것보다 내 손에 피를 묻힐 수가 없다.

강도2 뭐하느냐? 아까는 잘도 칼을 휘두르더만.

질리베스 진리를 아십니까?

강도들 모른다.

질리베스 제가 진리를 왜 구하는지는 아십니까?

강도들 모른다.

질리베스 왜 사시는지는 아십니까?

강도들 모른다.

질리베스 인간다운 삶을 아십니까?

강도들 모른다.

질리베스 행복은 아십니까?

강도들 모른다.

질리베스 알고싶으십니까?

강도들 물론이다.

질리베스 꼭 알고 싶으십니까?

강도들 물론이다.

강도1 대답을 얻는데 강도였다는 약점이 있다면, 내 손에 묻은 피를 지우기 위해 양손을 잘라도 좋다.

강도2 그들을 협박했던 내 혀를 잘라도 좋다.

질리베스 정말 알고 싶죠?

강도들 그렇다니까?

질리베스 그 중 무엇을 알고 싶으십니까?

강도들 행복이다.

질리베스 그렇다면 저와 함께 찾으러 갑시다.

(강도들 질리베스의 뒤를 따라 다리를 건넌다.)

(다리 끝에서 두 강도를 만난다.)

강도3 멈춰라.

강도4 땅에 발을 딛고 싶으면 돈을 내놔라.

질리베스 후훗. 정말 웃기는 세상이야. 싫다. 돈이 없다.

강도3 그렇다면 땅은 고사하고, 계곡에 쳐박히게 해주마.

(다리의 줄을 끊을 듯 위협을 한다.)

강도1 잠깐! 멈춰라! 이봐 나를 모르겠나?

강도4 아니 자네가 왜 거기있나?

강도3 아니 로자아닌가?

로자(강도1) 잠깐 할 얘기가 있네.

강도3 4 뭔데?

로자 이리로 와봐. (한켠에서 셋이 이야기를 한다. 로자 다시 질리베스에게 와서는) 저 둘도 같이 가기로 했네.

질리베스 이름이 로자군요. 그런데 어떻게……

로자 건너편에서 자네가 한 대로 했지.

(모두들 고개를 건넌다. 고개 도중에 강도 둘이 숨어 있다가 나온다.)

강도6 이봐. 젊은이. 숨기고 있는 것을 모두 내놔. 너에게 결정권은 없다.

질리베스 크크큭, 가관이군.

강도4 잠깐만. 나야, 나라고 한센.

강도5 멈춰봐. 저 사람은 한센이 분명해.

한센(강도4) 할 얘기가 있어. (한 켠에서 셋이 이야기 한다. 로자에게) 저들도 같이 길을 가기로 했네.

로자 아니, 저들도. 대체 어떻게 했나.

한센 자네가 쓴 방법을 썼지.

로자 그렇군. (질리베스에게)이들은 모두 수도승들이었다네. 그렇지만 신에게 실망하고, 성경에 절망하고, 신학에 허망해져 이 꼴이 된 거네.

질리베스 그렇군요. 모두들 나름대로의 생각이 있었군요. 하지만 아무리 절망하고 바닥으로 떨어졌다고해도 선량한 사람에게 피해를 주는 것은 안되죠.

한센 우리도 후회하네. 이 놈의 목구멍이 무엇인지. 먹고살려고 하니…… 내가 에리우게나가 있는 철학학교를 아네.

질리베스 어디죠?

강도2 프랑스까지 가야하네.

질리베스 프랑스를 찾는 것은 진리를 찾는 것보다 훨씬 간편하죠.

(모두 왼편으로 퇴장.)

제4막 1장

폐허. 질리베스, 로자(강도1), 로제(강도2), 맥시스(강도3), 한센(강도4), 밸코우(강도5), 레도스(강도6) 등장

질리베스 이런. 폐허가 된지 얼마 지나지 않았다. 철학학교는 불타고 없어진 모양이야. 이게 바로 교회의 횡포로군. 종교는 종교일 때 비로소 빛을 발하는 거야. 종교란 삶이 힘겨운 사람들에게 믿음과 희망을 주는 거여야 해. 그 이상도 그 이하도 안돼. 종교가 정치적인 수단으로 사용되고, 사람들의 마음을 잠식하니 이런 폐해가 생기지.

맥시스 그러면 철학학교는 사라진 건가?

한센 시체는 한 구도 없어. 죽진 않았다는 건가, 청소를 잘 했다는 건가.

로자 언제나 그렇듯이 체포되었을 거야. “믿음을 거부하는 자는 화형이다.”를 외치며 공개 처형할걸.

밸코우 우리에게는 예수가 없구나. 교황만이 있을 뿐이야.

레도스 저기는 불꽃도 꺼지지 않았어.

(철학도 등장)

철학도 이보시오. 당신들은 누구요. 행색을 보니 정부사람은 아닌 듯하군, 병사는 더더욱 아니고.

질리베스 당신은 이곳의 학생이오.

철학도 아니요.

질리베스 그렇다면 당신은 누구요.

철학도 학생이었던 사람이지.

맥시스 장난하냐?

철학도 이곳에선 문법도 가르쳤었단 말이오.

질리베스 당신은 어찌 여기 있소.

철학도 선생님과 나는 사실 이탈리아를 여행하고 왔었소. 그러고 보니 이 지경이야. 규모를 너무 확장시킨 것이 원인이지. 근데 낯선 사람이 우르르 왔다길래 동정을 엿보러 왔지.

로제 그러면 에우리게나 선생은 무사하오.

철학도 무사하다마다.

리베 우리를 안내해주시오.

철학도 선생님은 더 이상 제자는 받으시질 않으실 걸요.

로자 (짐짓 큰소리로) 결정 여부는 선생님이 하실 테요. 당신은 안내나 하시오.

철학도 흥, 따라오시오.

(모두 퇴장)

제4막 2장

천막들. 소수의 사람들이 분주히 움직이며 각각 맡은 일을 한다.

철학도를 따라 질리베스와 여섯사람 등장.

철학도 선생님은 어디계시나?

다른 철학도 선생님 천막안에 계시지 어디계시겠어.

철학도 학교를 노르웨이부근으로 옮길 계획이랍니다. 들어오세요. (앞장서서 한 천막으로 들어간다.)

제4막 3장

천막 안. 에우리게나로 보이는 노인이 명상 중. 철학도를 따라 모두들 등장.

철학도 선생님은 명상 중이십니다. 이럴 때는 건들면 안되죠. 혼나는 게 문제가 아니라 엄청난 발견이 왔다갔다하니까요.

(여덟 명 모두 기다린다. 한참 후)

에우리게나 아아. 결국은 머리를 복잡하게 하고 말았어. 다시 차근차근 생각하지 않으면 실마리를 잡아도 풀지 못해. 철학적 발견이란 결국 지식의 활용이거든.

철학도 선생님.

에우리게나 누구냐?

철학도 모두들 지망생입니다.

에우리게나 그들은 알겠다. 그들 말고 너 말이다.

철학도 선생님을 존경하는 선생님의 제자지요.

에우리게나 그렇지만 나는 너에게 손님을 1시간이나 기다리게 하라고 가르친 적은 없다.

철학도 선생님이 명상을 할 때는 가만히 기다리라고 배웠습니다.

에우리게나 반만 배웠구나.

철학도 나머지 반은 다시 배우도록 하죠.

에우리게나 그러려무나. 제자를 내칠 순 없으니. (질리베스 등에게)아무튼 그대들은 내 제자가 되고 싶다고.

모두들

에우리게나 찾고자 하는 것이 무엇이냐?

질리베스 진리이옵니다.

나머지 행복이옵니다.

에우리게나 껄껄걸, 행복을 나에게 배우겠다고? 그건 배우고 말 것도 없는 간단한 건데. 아무튼 못 가르칠 것도 없지.

철학도 선생님. 이렇게 제자들을 무턱대고 받으시면 금방 소문이 퍼져, 여기저기서 제자로 받아달라고 아우성을 치며 잦아오고, 또 금방 들키고 말 겁니다.

에우리게나 도망 다니는 수밖에 없어. 이왕 찾아온 사람을 쫓아 낼 수는 없으니. 아무튼 너는 진리를 배우겠다고. 크크크 진리라. 진리를 배우겠다고. 나도 진리는 몰라.

질리베스 (실망한듯이)예에~

에우리게나 진리를 찾는 철학은 수백, 수천 년 전에 유행했지. 지금은 진리와 본질에 대한 철학은 쇠퇴하고, 행위에 대한 철학이 성행한다네. 내가 말을 잘못한 듯 하네. 성행이라니. 철학자체가 쇠퇴하고 억압받는데……

질리베스 그나마 행위에 대한 철학이 이어진다는 뜻인가요?

에우리게나 개념이 달라. 그것보다는 철학의 세태가 진리와 본질에서 행위 쪽으로 기울어졌다는 뜻이지.

질리베스 그러면 어떡해야죠.

에우리게나 스스로 깨달아야지. 어떡하겠어. 진리는 어딘가에 있는 게 아니야. 어느 곳에나 있지. 어쩌면 우리가 이미 알고 있을지도 몰라. 그게 진리라는 것을 깨닫지 못했을 뿐일지도 모르지. 어쩌면 확인할 방법이 없을지도 몰라. 확실한 것은 이 세상은 진리한마디로 정의하기엔 너무 복잡하다는 거지. 내가 확언하는 바인데 이 세상을 함축하는 진리란 없다.

질리베스 ……

에우리게나 네 머릿속에서 진리를 찾아내 봐. 끊임없는 명상과 사고를 통해 찬찬히 끌어낼 수도 있고, 갑자기 어떤 계기를 받아 깨달을 수도 있어. 마음에 드는 쪽을 고르는 것은 아니야. 후자가 아무리 갑자기 깨닫는다고 해도 끊임없이 명상과 사고를 해야하는 거야.

질리베스 명상과 사고가 지식의 활용이라면 그 지식을 제게 주십쇼.

에우리게나 어렵지 않지. 그걸 받아들이느냐, 버리느냐, 분석하느냐, 개조하느냐는 너의 재량이다. 그런데 진리가 뭔 줄 알고 찾으려고 하느냐.

질리베스 모르니 찾는 거죠.

에우리게나 진리의 개념과 정의, 혹은 이데아라도 있을 게 아니냐? 그러니 찾는 거지.

질리베스 그렇군요. 그렇지만 생각해보지 않았어요.

에우리게나 지금 생각해봐. 자격 시험이다.

질리베스 끙끙 (잠시 후) 저는 진리란 이 우주에서, 그 어느 경우에도 통용되는 법칙이라고 생각합니다.

에우리게나 그럴 듯하군. 진리를 정의했다면 그건 두 가지 경우다. 하나는 진리가 아니거나. 하나는 진리에 가까워졌다는 것…… 이 세상은 인간에 의해 존재한다. 행복, 사랑, 분노 같은 개념은 물론이거니와 꽃, 풀, 나무 같은 것도 인간의 지식과 정의에 의해 존재하지. 진리도 마찬가지일 거라고 생각하나?

질리베스 (머뭇머뭇)진리만은 인간의 존재를 초월하여 인간이 사라져도 여전히 적용될 것만 같습니다.

에우리게나 확신하지 못하는 군. 괜찮아. 아직 젊으니까? 오류와 실수를 거듭하는 것이야말로 진정 공부지. 우선은 확신을 하게나. 나중에 수정을 한다고 해도 비난할 사람은 없어. 비난한다면 그 사람이 바보인 거야.

질리베스 예.

에우리게나 이 세상을 공시적인 시점에서 본다면 절대성과 특수성, 일반성과 상대성으로 나눌 수 있다. 그 중 하나이자 나머지만큼 중요한 것은 상대성과 일반성이다. 그것들이 뭔지 아나.

질리베스 대충.

에우리게나 “뜨겁다. 차다.”라는 인간의 감각은 물론, “크다. 작다”라는 성질, “A는 B다”라는 정의조차도 적용된다네. 사람들이 아무리 나를 못생겼다고 해도, 헤파이스토스는 나보고 못생겼다고 하지 않겠지. 자네가 아무리 잘생겼다고 해도, 나르시스는 자네를 비웃을 지도 몰라. 그러니까 “에우리게나는 못생겼다.”라는 문장은 몇 가지 성분이 추가되지 않는 한 완벽한 사실은 될 수 없는 거야. 그렇지만 사람들의 일반적인 관점에서 거짓은 아니지.

질리베스 어떤 의미의 상대성과 일반성인지, 알겠습니다.

에우리게나 그것들에서 제일 중요한 두 가지를 말해보게.

질리베스 지금요?

에우리게나 이것은 자격 시험이라니까?

질리베스 (한참 후)기준과 조건입니다.

에우리게나 나에게 배울 만 하다.

(막 내린다.)

제5막 1장

3년 후. 학교. 에우리게나. 질리베스. 여섯사람(옛 도적)과 약간의 철학도.

에우리게나 이제 가봐라.

질리베스 그 동안 고마웠습니다.

에우리게나 너에게는 수험생이 공부하듯 전력을 다해 가르쳤다. 덕분에 3년만에 지식은 모두 습득했다. 나머지는 너의 몫이다. 당부할 것은 느슨해지지 말되 휴식을 소홀히 하지 말라는 거다.

질리베스 명심하겠습니다.

에우리게나 이 세상은 모순 덩어리다. 현실이 모순이라 하여 좌절하거나 절망하지 말아라…… 우리의 관계는 물론이고, 네 스스로도 모순이니까.

질리베스 저 스스로도요.

에우리게나 물론이지. 셰익스피어와 괴테는 너보다 후대 사람이지만, 그들이 존재했기에 네가 이 시점에 존재한다. 내가 그들을 말하는 것조차 모순이지. 사실은 우리를 조종하는 신의 덕분이지만……

질리베스 어리둥절할 따름입니다.

여섯사람 잘 가시오. 구세주여.

질리베스 부디 행복을 얻으십시오.

에우리게나 이 녀석들은 멀었어. “만족”이라는 그 두 글자를 배우지 못해 이리도 쩔쩔 매거든. 행복은 머리로는 배우지 못해. 가슴으로 절실히 깨달아야 해.

레도스 알겠습니다마는 이곳은 송별장입니다. 꾸중은 아우를 보낸 다음 해주십쇼.

로자 (질리베스에게)궁금해서 묻는 것인데 만약 진리를 깨닫는 다면 그 다음엔 어떡할 테요.

질리베스 진리를 깨닫는 것, 그 자체로도 이미 충분하고도 남을 만큼 의미 있는 것입니다. 그 후를 생각해본적은 없습니다. 그렇지마는 만약 알아낸다면, 그리고 그것이 가엾은 민초들을 도울 수 있다면…… 전파하겠습니다.

에우리게나 말처럼 되지는 않을 거다. 어쨌든 되다되다 안되면 좀더 많은 지식을 위해 동방으로 가는 것도 좋다. 그곳의 학문은 상상을 초월하거든.

질리베스 명심하겠습니다. 하지만 굳이 저를 떠나보내는 이유는 모르겠습니다.

에우리게나 곧 알게되겠지.

여섯사람 아무튼 잘 가게. 구세주여.

질리베스 안녕히……….(퇴장)

여섯사람 갔군요.

에우리게나 너희도 곧 떠날 때가 올 거다. 하지만 너희는 배우고 갈 거야.

맥시스 말만 들어도 기쁩니다.

(모두 퇴장)

제5막 2장

산중. 갈림길. 질리베스 왼쪽에서 등장.

질리베스 갈림길이구나. (무대 뒤편을 향하여) 이쪽은 오슬로구나. 제법 훌륭한 도시라고 하더군. 한번도 가본 적은 없지만, 가보고 싶은 생각도 든다. 위대한 현인이자 예언자가 산다는 소리도 있다. 그렇지만, 아직 난 젊다. 언제라도 갈 수 있지. 실은 폴란드에 가보고 싶다. 그 왕관은 지금 생각해도 구역질이 나지만 누가 뭐해도 폴란드는 나의 조국이요, 바르샤바는 나의 고향이다. (오른쪽을 향하여) 이쪽은 유럽 본토구나.

(오른쪽으로 퇴장)

제6막 1장

바르샤바. 시내. 많은 상점들과 사람들. 질리베스 왼쪽에서 등장.

질리베스 후~. 드디어 바르샤바다. 이 곳까지 쉬지 않고 말을 달린 것을 생각하니 소름이 돋는다. 아무튼 눈물은 왜 쓸데없이 외출하려하느냐! 결국에 나의 손등에 묻을 것을 말이야. (주위를 천천히 둘러보며) 4년 동안 분위기가 꽤 변했구나. 사람들이 더 바쁘지만 활기차지는 않은 듯하다. 내가 변한 것인가?

(이 때 왼쪽에서부터 화려한 행렬이 시작한다. 한참동안 화려한 행렬이 이어지며, 오른쪽으로 사라진다.)

질리베스 누구지? 어느 나라의 왕이나 되나보구나. (구경하던 행인을 붙잡고) 저 행렬의 주인공이 누군지 아십니까?

행인1 아니, 당신은 겨울잠 자다 나왔소? 프랑스의 늙은 왕 아니잖소.

질리베스 프랑스 왕이 왜 바르샤바에?

행인1 결혼하기 위해서지.

질리베스 누구와요?

행인1 이것 참 바보로군.

질리베스 4년 동안 멀리 아주 멀리 갔다와서 소식이 하나도 없습니다.

행인1 그럼 내가 전반적으로 설명해주지. (목을 가다듬고) 헴, 헴, 3년 전에 신성 로마 제국과 폴란드 사이에 전쟁이 일어났어. 단연 강국인 로마제국이 군사력으로 압도해 와서 수도 근처까지 단숨에 치고 들어왔지.

질리베스 잠깐만요. 끼여들어서 죄송합니다만 전쟁은 왜 일어났죠.

행인1 글쎄……

행인2 (끼여들면서) 내가 알아요, 악독한 폴란드 왕은 아우델리아 공주를 가장 비싼 값에 팔려고 혈안이 되어있었오.

질리베스 악독한 폴란드왕이요? 왕은 공주를 사랑했던 것으로 아는데.

행인2 무슨 소리요. 왕은 그 훌륭한 질리베스 왕자가 자살한 후 배다른 남동생들을 차례대로 쫓아내고, 여동생들은 다른 나라에 팔아왔었소. 그런데 사랑이라니.

질리베스 질리베스 왕자가 자살을 해요? 그리고 왕이 맥거트요?

행인2 그렇소. 질리베스 왕자는 광증에 못 이겨 성을 빠져 나와 스스로 목숨을 끊었다고 전해집니다. 온몸을 불살라서 말이죠. 아무튼 다시 이야기를 시작하지. 그런데 로마제국의 왕이 군사력을 배경으로 아우델리아를 무상으로 요구해왔소.

질리베스 무상이라니, 듣기 거북하오.

행인2 그러자 폴란드 왕은 대가로 바이에른 지방의 일부를 요구했소. 당연히 로마제국의 황제는 거절을 했고, 그 아름다운 아우델리아 공주만을 요구했지. 역시 맥거트 왕도 거절했소. 이에 화가 난 로마의 황제는 군사를 일으킨 거요.

행인1 (끼여들며)그 다음은 내가 알고 있소. 아까 말한 대로 로마의 군대가 바르샤바 근처까지 왔지. 왕은 이 나라 저 나라에 구조를 요청했어. 그 중 구조에 응한 것은 프랑스와 이탈리아뿐이었어. 다른 나라는 로마의 힘이 무서웠던 거지. 그러고 보면 이탈리아의 왕은 참 용감도 하지. 어떻게 로마에 군대를 파견할 생각을 했을까?

행인2 그 부분은 내가 알지만 이따가 얘기해 주지.

행인1 그래. 그렇게 이탈리아는 로마의 배후를 공격하는 한편 많은 물자를 지원해 주었고, 프랑스는 많은 금괴와 군대를 빌려줬지. 잘 들으라고 빌려준 거야. 전쟁은 결국 로마의 퇴각으로 끝났어. 이탈리아는 강한 나라가 아니기에 얼른 로마에 대한 방어를 준비했고, 프랑스는 다시 많은 돈을 빌려줬어. 3년 기한으로 말이야. 그런데 그 망할 놈의 왕은 정치, 경제에 대해 깡통이야. 우리로부터 그렇게 세금을 짜내도 빛을 갚을 엄두가 나지 않는 거야. 오죽하면 작년에는 굶어죽는 사람이 줄을 있겠어. 먹고사는 것은 장의사뿐이었다고. 그래서 왕은 원금과 이자를 포함하여 늙은 프랑스 왕의 첩으로 아우델리아를 파는 거지.

질리베스 첩이요?

행인1 그래, 첩. 아우델리아 공주가 폴란드에서 제일 귀한 것인데 말이야. 그래서 팔리는 지도 모르지.

행인2 얘기가 다 끝났나. 그럼 내가 한마디하지. 이탈리아 왕은 사실 아우델리아 공주를 진심으로 사랑한다네. 4년 전에 국경에서 어린 공주에게 바람맞은 적이 있지. 우리는 모두 이탈리아에게 보복을 당할 거라고 생각했는데 결혼도 안한 젊은 왕은 공주에게 반한 거야. 편지도 수십 통을 썼다는군. 작년에는 아우델리아 공주에게 청혼을 했어. 편지로 말이야. 공주는 역시 편지로 승낙을 표했는데. 그 놈의 맥거트 왕이 반대를 하는 거야. 아버지도 오빠도 없는 공주에게는 망할 왕의 말은 절대적이지.

질리베스 (방백)용서할 수 없다! 맥거트 네가 아버지의 죽음을 그토록 바래서 얻은 왕위가 고작 그것이더냐. 쓸데없는 전쟁을 일으키고, 외교는 두었다 무엇에 쓰려느냐? 3년 동안 빛 하나 갚지 못하고, 정치와 경제는 대체 수프를 끓이려고 배웠느냐? 조국과 국민과 나의 동생에 맹세하마. 너를 가만두지 않으리라. (행인에게)그래. 결혼식은 어디서 하나요? 프랑스인가요? 폴란드인가요? 또 언제 하나요?

행인1 정확히 일주일 후에 공주를 데리고 폴란드를 떠날 모양이야.

질리베스 그밖에 다른 소식은 없습니까? 지난 3년간 말이에요.

행인2 가장 큰 손실은 폴란드의 영웅, 노블리스가 쫓겨난 거요.

질리베스 (매우 크게)뭐!

행인1 아이고 깜짝이야. 그 분이 이교도라지 뭐야.

질리베스 (방백)아! 나의 스승이. 그 분만큼 식견 있고, 지혜로우며, 폴란드에 도움이 되는 자가 한 사람이라도 있다면, 내가 이렇게 노여워하지 않으리라. 아! 아우델리아의 비극만큼이나 슬픈 일이다. 내가 비참히 살해된다해도 이렇게 슬프진 않으리라. 아아! 아우델리아와 노블리스의 일이 겹치니 걷잡을 수 없는 분노가 차 오른다. 3년간 빛을 보지 못한 칼은 맥거트를 위해 녹슬지 않은거이리라. 아 어지럽다. 현기증이 느껴진다. 이것이 또 다른 스승이 말하던 현실의 모순인가? (행인들에게)감사합니다. 저는 이만 가봐야겠어요.

행인1 여염집 처자처럼 수다를 떤 것이 부끄럽지만 즐거웠네.

행인2 마지막으로 이건 소문인데….. 에이 말하지 말아야 겠구나. 괜히 혼란만 더해주니.

함께 잘 가시오. 젊은이. (각각 반대편으로 퇴장)

질리베스 나도 머물 곳을 찾아야겠구나. (오른쪽으로 퇴장)

제6막 2장

빈민가. 여기저기 사람들이 쓰러져있다. 굶어 죽은 시체도 한 구 있다. 우는 아이들과 노는 아이들이 있다. 질리베스 왼쪽에서 등장. 아이들. 질리베스를 둘러싼다.

아이들1 돈 좀 주세요.

아이들2 빵 좀 주세요.

아이들3 제발 아무거라도 주세요. 죽고 말 거예요.

질리베스 이런. 이 무슨 처참한 꼴이람. 얘들아 나도 너희들에게 줄 것이 아무 것도 없단다. 미안하지만 나를 놓아주렴.

아이들1 돈 좀 주세요.

아이들2 빵 좀 주세요.

아이들3 제발 아무거라도 주세요. 저희들을 모른척 지나치지 마세요.

질리베스 아아, 이 길을 지나가야만 하는 나의 앞날이 고통스럽다. 내가 떠날 적만 해도 이곳은 한적한 도시의 뒷골목이었다. 그렇지만 누가 이렇게 비참하게 만들었는가. 저 시체를 보라. 뼈 밖에 남지 않아 들개도 지나칠 정도다. 저 계단에 쓰러져있는 사람들은 비참할 정도다. 약간의 음식이 생기면 모두 아이들에게 줘버리고 자신은 저렇게 죽어간다. 아니! 저기, 저기, 저 여자는 나오지도 않는 젓을 쥐어짜며 우는 갓난아기의 입에 댄다. 아이는 이제 막 난 이빨로 제 어미의 젓꼭지를 비틀어 짜고 있다. 고통에 겨운 저 어머니는 젓꼭지의 아픔 따위는 느끼지도 못한다. 비참. 아비규환. 맥거트야 너는 이 거리를 아느냐? 고통에 겨운 아이들과 부모들이 있는 이 거리를 아느냐? 안다면 스스로 숨쉬지는 못하리라. (칼집에서 진주구슬, 루비, 사파이어를 뽑아 모두 아이들에게 하나씩 준다.) 이 화려하던 칼장식도 이제는 약간의 모양이 조각되어있는 쇳덩어리에 불과하다. 그렇지만 나에게는 쓸데없는 저 보석들과 함께 가책을 이곳에 버리고 간다면 오히려 나에게는 득이다.

(오른쪽으로 퇴장)

제6막 3장

밤. 근교의 농촌, 농가가 세채있다. 질리베스 왼쪽에서 등장

질리베스 어느새 이렇게 어두워 졌구나. 보이는 것은 땅의 세 개 불과 하늘의 수많은 별. 다시 낭만적이던 그 때로 돌아가는 듯 하구나. 아우델리아와 노블리스님도 생각나고.

(노래)내별은 어느 걸까 저 꼬마별이겠지

내가 잠이 들면은 저 별도 잠을 잘까

아침에 일어나면 또 사라져 있겠지

그래도 밤이 오면은 날 찾아올 꺼야

내 이름을 알려줄까

벼개맡에 써 놓겠어 네 이름을 알려다오

눈 내릴 때 보내줘

아! 이제는 피곤하구나. 정겨운 농가에서 하룻밤 묵도록 빌어보자. (첫번째 집 문을 두드리며) 계십니까? 지친 나그네입니다. 하룻밤 묵을 수 있을까요? 하룻밤의 침대와 약간의 빵과 물이면 됩니다.

여자의 목소리 벌써 두 번째 이상한 거지구나. (큰소리로) 썩 꺼져요. 당신에게 줄 음식은 물론이고 방도 빌려드릴 수 없어요. 나에게서 아량을 구하는 것보다 왕에게 나라의 여유를 되찾아 오는 게 빠를 걸요.

질리베스 아아! 이제 농촌이 정겹지 않구나. 농민이 흙의 여유를 잃어버리면 농민에 대한 존경은 남을 망정, 그들에 대한 사랑은 식어 버리고 말지. (두 번째 집에 대고 문을 두드리며) 여보시오. 계십니까? 저는 떠도는 선량한 나그네입니다.

(문이 열린다.)

부인 들어오세요.

질리베스 감사합니다.

부인 여기 앉으시지요. (못마땅한 듯이) 그런데 꼴이 그게 뭡니까? 남의 집에 방문하는 예의가 아니잖아요. 우선 따뜻한 차를 드시겠어요. (차를 준비하며, 잠시 후) 예수를 믿으십니까?

질리베스 믿다니요. 예수는 사람입니다. 깨달음이 있었던 사람이요. 그를 존경할 따름입니다.

부인 (몹시 크게)뭐라고요! (보통으로) 두 번째 원수군요. 당신은 예수를 믿지 않으니 나의 원수입니다. 그렇지만 예수께서는 원수를 사랑하라하셨고, 당신을 돕는다면 천국은 한 걸음 더 다가오지요.

질리베스 부인, 당신이 지금 나를 돕는 이유가 그것입니까? 예수의 말과 천국에 대한 욕망. 그 뿐입니까? 나에 대한 사랑은 고사하고, 동정조차 없습니까?

부인 흥, 별꼴이군요. 마음 같아서는 당신을 당장 쫓아내고 싶어요. 그렇지만 참는 겁니다. 좀 전에도 당신 같은 미친놈이 찾아와서 속을 뒤집어 놓고 갔어요. 제발 저를 건들지 마세요. 예수의 이름으로 겨우겨우 참고 있으니까요.

질리베스 아아! 슬프구나. 나는 예수의 말과 천국의 힘을 빌어 도움을 받는다. (크게 한번 몸부림치고는 다시) 사람들이 선행을 함에 있어서 지옥이 무서워서라든가 예수의 말을 따르기 위해서라면 그것은 세 살 짜리 어린아이가 매가 무서워 엄마 말을 듣는 것과 다를 바가 없다. 매가 무서워서 쟁기를 끄는 소와 같다. 아아 기구하도다. 세상이여! 예수는 사람들에게 행위를 전파하기 전에 이웃을 사랑하는 법을 가르쳤어야 했어. “네 이웃을 사랑하라.”하고 말하기 전에 이웃을 사랑하는 마음을 만들어 줘야 했다. 내가 옳다. (부인에게) 사랑은커녕 동정도 들어있지 않은 차는 마시지 않겠소, 방도 필요없소. (집을 나간다.)

부인 미친놈. 교회에 고발해 버리겠어!

질리베스 하아. 사람들은 근본적인 것을 잃어버렸다. 이웃을 왜 사랑해야 하는지도 모른 채 사랑하란다고 이웃을 사랑하는 척 한다. 공부는 또 어떤가? 무언가를 얻기 위해, 나에게 도움이 되는 지식을 습득하고 자신을 발전시켜 이루고자 하는 목표에 도달하기 위하여 공부하고 대학에 들어가는 것인데. 사람들은 잃어버렸다. 대학에 들어가기 위해 밤새가며 공부한다. 대학에는 또 왜 가는가? 좋은 일자리를 얻기 위해서? 말도 안 된다. 좀 더 심오한 학문을 익히기 위해서다. 좀 더 많이 알기 위해서다. 좀 더 깊은 지식을 얻기 위해서다. 그런데 나의 조국은 어찌 됐는가? 학도들은 그렇게 안자 미친 듯이 공부하며 좀더 훌륭한 입시제도 만들어지길 바라고만 있다. 하하하! 제도가 바뀐들 뭐하나. 여전히 대학 가기 위한 공부는 계속되고, 학문에 대한 동경은 여전히 없다. 오로지 대학만을 위해 하는 맹목적인 공부에 쏟는 노력과 정열을 좀더 유용하고 실질적인 곳에 쏟으면 우리나라가 어찌 부강해지지 않으리. 그러나 과연 학생들이 대학이 아니라면 그만큼 고생을 할까? 가슴 아픈 현실. 이것이 나의 스승이 말한 현실의 모순인가! 나는 지칠 대로 지쳤다. (세번째 집의 문을 두드리며, 힘없는 목소리로)계십니까? 안 계셔도 좋습니다. 땅을 베개삼아 하늘을 이불삼아 자본적이 한 두 번이 아니거든요. 진주보다도 더 곱다던 아침이슬에 잠을 깬 적도 물론 한두번이 아닙니다. 풀잎마다 아침이슬이 맺힐 때 제 설움도 알알이 맺힌답니다. 하지만 그 설움은 동산에 오르는 걸로는 해결이 안되죠. 근본적인 뿌리를 캐내야 합니다. 설움의 뿌리. 설움의 뿌리는 바로 모순이라는 놈이죠. 그렇지만 제게는 힘이 없습니다. 진리에 대한 열망이 차지하고 있던 자리에는 건너편 뱃사공에 대한 증오가 차지했습니다. 안녕히…….

(문이 열린다.)

필레몬 넋두리는 잘 들었습니다. 들어오시죠. 저희는 늙은이 둘이 살지마는 방이 많답니다. 벌써 한 방은 다른 손님이 차지하고 있어요. (들어간다.)

제6막 4장

바우키스와 필레몬의 집. 바우키스, 필레몬, 질리베스

필레몬 남편은 지금 불을 더욱 뜨겁게 지피고 있어요. 이런 가여워라. 옷은 다 헐고, 머리는 헝클어지고 얼굴은 핼쑥하네요.

질리베스 이런 몸을 집안에 들여 놓아주셔서 감사합니다. 모든 것을 두 분께 맡기겠습니다.

필레몬 저희 두 늙은이만 믿으세요. 하루고 이틀이고 정성들이여 귀한 손님을 대접하지요. 불 아래 보니 굉장히 잘생겼군요. 마치 헤르메스가 환생한 듯 싶어요. 옷 또한 헐었지만 굉장히 좋은 비단으로 만들었어요. 분명 고귀한 핏줄일 겁니다.

바우키스 여보. 지친 사람에게 잡담은 그만하고 어서 따뜻한 우유와 야채 수프를 드려요. 찬장에 보면 빵도 몇 조각 남아있을 거요. 허기진 배를 채울 때까지 아끼지 말고 드려요.

필레몬 당신 말이 맞아요. (음식을 준비한다.)

질리베스 진정 헤르메스가 된 기분입니다. 그렇지만 가엾게도 저는 그들처럼 두분에게 보답하지 못해요.

필레몬 별 말씀을 다하네요. 당신은 그 손으로 우리 집 문을 직접 두드린 엄연한 손님이어요. 베푸는 게 당연하지요. 우리는 당신을 사랑하니까요.

질리베스 이런 고마운 때가………

(어느 방문이 열리며 중년의 남자가 나온다,)

남자 누가 왔나요.

바우키스 당신처럼 또 다른 손님이 왔어요. 인사나 하세요. 서로 옆방을 쓰실 사이가 되었으니.

남자 반갑습니다. 처음뵙겠습니다.

질리베스 만나서 반갑습니다. (악수를 하다가)악!

모두들 왜 그러십니까?

질리베스 아닙니다. 이 분꼐서 갖추신 영웅다운 풍채가 놀라워서요.

필레몬 그래요. 우리집에는 영웅이 두 분이나 찾아왔어요.

질리베스 (방백)늙고 초췌해있지만 저분은 분명 4년 전의 노블리스 스승이시다. 분명해. 4년의 세월이 스승님이 나를 못 알아보게 할 수는 있어도, 내가 스승을 못 알아보게 하기에는 너무 짧다.

(식사가 모두 끝나고, 두 노부부와 노블리스는 방으로 들어간다. 질리베스는 노블리스를 따라 들어간다.)

노블리스의 방

노블리스 왜 그러십니까?

질리베스 폴란드를 사랑하며 걱정하는 사람끼리 말 좀 나눕시다.

노블리스 그렇다면 언제든 환영이지요.

질리베스 당신은 어리석고 악독한 맥거트 왕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노블리스 젊고 패기있는 왕이지요.

질리베스 (방백)나를 의심하는구나. (노여운 듯이)나 같으면 그 자식을 살려 두지 않겠습니다. 질리베스 왕자의 보검으로 심장을 찔러버리겠어요.

노블리스 진심이십니까?

질리베스 물론이지요. 그러나 사실 저는 그런 용기는 물론이거니와 능력도 없답니다. 병에 걸려서 얼마 살지 못하거든요. 심하게 움직이면 생명은 더욱 단축되어요.

노블리스 이런 가엾은 일이…… 어찌해야 할 바를 모르겠군요.

질리베스 잡초같은 인생. 언제 뽑히든지 상관없습니다마는, 내 죽기 전에 맥거트가 숨을 거두는 꼴을 본다며는. 아니 그를 죽일 사람이라도 만난다면……

노블리스 그렇다면 사실대로 말하지요. 사실 저는 며칠 뒤 왕궁에 숨어 들어가 왕을 죽일 생각입니다.

질리베스 아아아~ 이제야 편히 숨을 거두겠구나. 그렇지만 부탁이 하나 있습니다. 부디 부탁하는 바인데 제가 쓴 편지를 이탈리아의 왕에게 전해 주십시오.

노블리스 언제 말이요.

질리베스 내일 당장 이요.

노블리스 그건 안될 말이오. 아무리 당신이 죽어간다해도 폴란드도 죽어가며, 아우델리아도 죽어갑니다.

질리베스 (방백)그렇다면 내 신분을 밝히는 수밖에 없구나. (무릎꿇으며, 보통으로)스승님. 저는 질리베스입니다. 스승님의 제자. 죽었다고 착각하시는 제자입니다.

노블리스 무슨 소립니까?

질리베스 병이란 말은 거짓이고, 사실은 공부하다온 제자입니다. (검을 꺼내며)왕가의 문양이 찍힌 이 보검을 보십시오.

노블리스 (무릎꿇고, 눈물 흘리며)왕자님. 못 알아본 신의 죄를 용서하십쇼.

질리베스 스승님. 무슨 말씀이십니까. 용서라니요. 일어나십쇼. 제 얘기는 차차 해드릴 테니, 선생님부터 말씀해주세요. 그 동안 무슨 일이 있었는가.

노블리스 지금의 우리가 재회의 기쁨을 맛볼 여유조차 없다는 것이 한스럽습니다. 어떻게 된 거냐 하면, 왕자님꼐서 며칠만에 방을 나오신 후 사라지셨습니다. 그건 아시죠. 그 때 맥거트 태자가 편지 한 장을 가지고 나왔습니다. 거기엔 왕자님 자신이 운명을 저주하며 자살하겠다고 쓰여져 있었습니다. 고민의 흔적을 엿볼 수 있게 지웠다 쓴 자욱이 많더군요.

질리베스 맥거트놈이 위조한 흔적일 겁니다.

노블리스 왕국 전체가 울음바다가 되었습니다. 거기에다가 왕자님 체구의 불에탄 시체도 발견되었으니 확신할 수 밖예요.

질리베스 어쩌면, 그것도 야비한 맥거트의 잔인한 짓일지도 모릅니다.

노블리스 왕과 왕비님은 점차 쇠약해지셨고, 아우델리아 공주도 상념에 잠기셨습니다. 그 후 공주의 혼사관계로 전쟁이……

질리베스 그 부분은 저도 압니다.

노블리스 그러면 전쟁건은 생략하고, 전쟁직후 왕은 뜨거운 수프를 먹다가 피를 토하며 숨지셨어요. 거듭된 재앙에 쇠약해지신 탓이지요. 그리고 태자가 왕이 되었고, 이 꼴이랍니다. 나는 최대한 충성심을 발휘해 태자를 보필하려 했습니다. 태자를 옳은 길로 이끌기위해 간언도 수십차례 했습니다. 그렇지만 결국 이교도라는 누명으로 한 달 전 추방령이 내려졌어요. 그래서 이렇게 숨어사는 신세가 되었습니다.

질리베스 그렇군요. 이만 잡시다. 우리 둘 다 피곤하니까요. 내일 봅시다.

(질리베스 퇴장)

제6막 5장

다음날 아침. 노블리스의 방. 질리베스. 노블리스.

질리베스 오늘 당장. 이탈리아의 왕에게 이 편지를 보내 주십쇼. 이것은 칼집입니다. 칼집의 문양이 저의 신분을 증명할 겁니다. (편지와 칼집을 노블리스에게 건넨다.)

노블리스 그러면 여기는……..

질리베스 여기는 제가 알아서 하겠습니다.

노블리스 왕자님이라면 믿을 수 있죠. 편지는 저만 믿으십시오. 읽어보아도 됩니까?

질리베스 못 읽을 것도 없지요. 그러나 늑장을 부려서는 안됩니다. 말의 생명은 아까워하지 마십쇼. 수십만 폴란드 백성의 생명이 걸려있는 일이니까요. 그러면 부탁합니다. (노블리스 퇴장) 그러면 슬슬 나도 준비를 해볼까.(퇴장)

제7막 1장

사흘하고 또 사흘 후. 궁성 앞 성문. 문지기 둘이 지키고 있다. 질리베스, 와인을 가득 실은 짐마차를 몰고, 등장.

문지기1 멈춰라 누구냐? 신분을 밝혀라.

질리베스 오늘이 왕궁에 와인을 납품하는 날이라 와인을 싫어왔습니다.

문지기1 그렇다면 들어가도 좋다.

분지기2 잠깐만. 그렇지만 항상 보던 사람이 아니잖아.

질리베스 오늘은 주인께서 편찮으셔서 제가 일을 맡았습니다. 처음으로 맡는 큰일이라 주의하라고 당부를 귀가 닳도록 들었는걸요. 여기 혹시 문지기가 길을 막으면 건네주라고 한 편지가 있습니다. (편지를 건네준다.)

문지기2 (편지를 읽고 돌려주며)들어가도 좋다.

(질리베스 성문 안으로 퇴장)

성안. 정원. 짐마차를 끌고 질리베스 등장.

질리베스 (짐마차를 수풀에 숨기며)그래 여기라면 짐마차도 말도 들키지 않겠군. 나는 여기서 17년이나 살아서 속속들이 잘 알고 있지. 정원은 물론 미로같은 비밀 통로까지 말이야. (구석의 블록을 움직이니 비밀문이 열린다.) 자, 그럼 시작하자. (문안으로 퇴장)

제7막 2장

왕의 방. 맥거트 왕과 프랑스 왕

맥거트 동맹기간은 12년이 좋겠군요. (방백)12년 후면 아우델리아는 30이다. 그 때는 첩으로서의 가치가 없어진다. 12년 이상은 바라지 않아.

프랑스 왕 그 정도면 딱이지요.

맥거트 그러면 동맹건은 됐고. 어디, 지내기는 편하십니까?

프랑스 왕 아주 편안합니다. 따라온 1000명의 병사들조차 최고로 대접해 주시니 프랑스로 돌아가기 싫다고 하는 녀석도 있습니다. 허허허.

맥거트 베푸는 게 저의 낙이지요. 돌아가실 때는 병사들에게 모두 금화를 쥐어 보낼 작정입니다. 왕께서는 장미를 쥐시고요. 하하하.

프랑스 왕 좋지요. 허허허. 그럼 이만 가보도록 하지요.

맥거트 쉬십시오. 이따 정오의 만찬 잊지 마십시오. (프랑스 왕 퇴장) 흐, 저 늙은이 비위 맞추기도 힘들구나. 색이나 밝히는 주제에 깐깐해 가지고는. 하지만 사실. 아우델리아는 누굴 주기에는 그 아름다움이 아까워. 하지만 먹을 수 없는 떡이라고 버리면 아무 소용이 없어. 크크. 제 아비의 목숨조차 꺼트린 내가 무엇을 아까워하리. (책상 서랍에서 약병을 꺼낸다.) 이 가루약이지. 늙은이의 접시에 약간만 떨어트렸을 뿐인데도 효과는 만점이었어. 이제는 늙은 대비의 차례다. 하하 (퇴장)

(벽장이 열리며 질리베스 등장)

질리베스 (분을 억누르며)으윽, 악독한 놈. 잔인한 놈, 제 아비의 목숨을 빼앗은 녀석이 남의 어머니 목숨인들 갈등하겠느냐. 내 오늘 너를 기필코 살려두지 않으리라. 으아. 숨쉬는 것조차 힘들구나. 태양아! 눈이 있다면 산등성일 뛰어넘지 맣아라. (벽장으로 퇴장)

제7막 3장

정오. 식당. 맥거트, 왕비, 프랑스 왕, 프랑스 왕자, 아우델리아, 늙은 대비, 대신1,2, 기사1,2. 하녀와 하인들이 시중을 든다.

맥거트 대왕. 제가 폴란드에서 가장 유명한 요리사를 불렀습니다. 만족하실 겁니다.

프랑스 왕 기대됩니다.

프랑스 왕자 (에피타이저를 먹으며)저는 별미를 아주 좋아합니다. 특히 이국의 별미를요.

아우델리아 (방백) 탐욕에 가득 찬 저들을 보라. 점심식사 한끼에서조차 그 탐욕이 발동하는 구나. 입맛을 다시는 저 얼굴들을 보니 나는 식욕이 떨어진다. 그러나 저 돼지같은 맥거트의 호령이 무서우니 나가버릴 수도 없다. 어머니께서도 참으시니 나도 참자.

(하녀들이 수프를 갖고 나온다.)

맥거트 드디어 수프가 왔습니다. 이제 정식으로 식사를 시작하죠.

(모두들 스푼을 들고 수프를 먹으려 할 때, 문이 열리며 질리베스 등장.)

질리베스 나도 한 식구니 내 것도 대접해 주시오.

맥거트 누구냐! 경비는 무엇하느냐!

아우델리아 (방백)어디서 많이 본 듯한 얼굴이다. 그러나 몇 년동안 밖에 나가지 못한 내가 어찌 저런 남자를 만나봤겠는가.

대비 (방백)친근한 얼굴임에 틀림없다. 기억해 내라. 기억해 내지 않으면 안 될 얼굴인 것 같다. 어서 기억해라. 이 노망난 뇌덩어리야.

프랑스 왕 저 무례한 친구는 누구요?

맥거트 잘 모르겠습니다. 실례를 끼쳐 죄송합니다. (큰 소리로) 너는 대관절 누구이길래 경비를 헤치고 여기까지 왔는가! 반역자이냐? 썩 꺼져라!

질리베스 뭔가 착각하고 계시군요. 저는 아우델리아의 친오빠이며, 대비의 친아들인 질리베스입니다. 전왕의 적자이기도 하지요.

아우델리아 (탄성)아! 맞다. 오빠다.

대비 (방백)아~ 눈물만 난다.

맥거트 (당황하며)무슨 소리 너는 죽었다. 아니, 아니, 질리베스는 죽었다. 너는 누구냐?

질리베스 우리집에서 점심식사를 얻어먹는데 확인까지 해야하다니. 후~. 여기 이 보검은 나의 것이요. 여기 왕가의 문양이 보이시오. (소가죽으로 싼 보검을 보인다.)

모두들 (탄성)오~

맥거트 이런 사기꾼아! 그런 것은 돈만 있으면 시골의 대장간에서 만들 수 있다. 더 확실한 증거를 가지고 와서 우겨라!

질리베스 (옥 목걸이를 꺼내며)이것은 어떠오.

맥거트 괴상한 목걸이를 들고, 설치는 구나.

질리베스 아우델리아야 너는 알겠지. 이 목걸이 말이다. 동방에서 가지고온…… 구슬마다는 우리 둘의 철자가 새겨져 있단다.

아우델리아 (질리베스에게 안기며)오빠~ 무사했었군요.

질리베스 우리는 젊다. 시간은 많아. 밤새 울면서 이야기하자. 그렇지만 지금은 프랑스 왕을 모시고 식사하는 자리잖니. 점잔해져야지.

아우델리아 (맥거트에게)오빠가 맞아요. (하녀에게)식사를 더 준비하세요.

질리베스 (구석에서 의자를 하나 더 가지고와서 맥거트와 대비사이에 앉는다.) 같이 식사하고 싶습니다. 실례가 되겠지만 제 수프가 올떄까지 기다려주시겠습니까?

아우델리아와 대비 물론이고말고(요)

질리베스 여기 이 프랑스 왕은 어떻게 되시죠? 아우델리아의 시아버지 될 사람인가?

프랑스 왕 뭐라고! 이 무례한 놈.

맥거트 고정하시옵소서. 너는 당장 사과드려라. 아우델리아의 지아비가 되실 몸이다.

(아우델리아 눈물을 훔친다.)

질리베스 이런, 정말 죄송합니다. 저의 실수였습니다. 그렇지만 의외군요. 소문으로는 이탈리아 왕이 청혼을 했다는데…… 제가 아우델리아의 보호자라면 그쪽에 시집보내겠어요. 그쪽이 훨씬 젊고, 장래성이 있으며, 아직 미혼인데다가 아우델리아를 사랑하는 것이 확실하니까요.

프랑스 왕 아니 뭐라고! 정말 무례하기 짝이 없는 녀석이구나!

맥거트 고정하십쇼. 질리베스 이 놈! 너는 4년 동안 예법은 다 잊어버렸느냐? 4년 동안 건달이 다 되었구나.

질리베스 저기 왕자는 제 아비를 닮아 색을 밝히게 생겼군요. 커서 여러 여자 신세 망치게 하겠네요.

프랑스 왕자 네 이놈! 도저히 못 참겠다. 죽여 버리겠어. 나와서 칼을 뽑아라.

대비 왕자의 수프가 나왔어요. 모두들 진정하세요.

(하녀가 질리베스 앞에 수프를 놓고간다.)

맥거트 자자. 이제 듭시다.

(모두들 스푼을 들고 수프를 먹으려고 할 때)

질리베스 잠깐!

프랑스 왕자 저 건달녀석, 또 뭐냐.

맥거트 왜 그러느냐?

질리베스 이 성의 주인이신 대왕께서 식은 수프를 드셔서야 되겠습니까? 제 것과 바꾸지요.

맥거트 일리있는 말이다.

(수프를 서로 바꾼다. 모두들 스푼을 들고 수프를 먹으려고 할 때)

질리베스 잠깐!

프랑스 왕 도저히 못 참겠다. 내 저 녀석을 당장 죽여버리고 말테다.

맥거트 저와 아우델리아의 얼굴을 보고 제발 참으십시오. 이 자식! 또 뭐냐?

질리베스 이 자리의 제일 어른이신 대비께서 식은 수프를 드셔서야 되겠습니까? 대왕이시여, 대비와 수프를 바꾸실 아량이 있으신지요?

맥거트 (크게 놀라며)뭐, 뭐라고!

질리베스 (프랑스 왕에게)대왕이시여, 좀 전의 저의 무례를 용서하시고, 이 상황에 대해 지혜를 빌립니다. 젊은 맥거트 왕의 뜨거운 수프와 이 자리에서 가장 연로하신 대비의 식은 수프를 맞바꾸는 것 말입니다.

프랑스 왕 나야 찬성이오. 예로부터 노인을 공경하는 것은 좋은 일이었으니까?

질리베스 왕이시여 행하십시오.

맥거트 (당황하여)차, 차라리 모두, 뜨거운 수프로, 바꾸도록 하자.

프랑스 왕자 나는 저 건달의 출현으로 뱃가죽이 등에 붙었소. 여기서 더 기다리면 뛰쳐나가고 말겠소.

프랑스 왕 젊을 때는 식은 수프가 약이 되는 법이지. 늙은 나도 식은 수프를 거리낌없이 먹는다오.(수프를 한입 먹는다.)

맥거트 (당황하여)어… 저, 그 (질리베스에게)개자식! 갑자기 나타나 이런 횡포를 부리를 이유가 뭐냐! 죽여 버리겠다. (칼을 뽑고 달려들려 한다.)

질리베스 저 수프를 못 먹는 이유를 직접 당신의 입으로 말하시오. 어서! 저 수프에는 전왕이 마지막으로 드신 수프와 마찬가지로 독이 들어있다고 말이오!

모두들 (놀라며)뭐! 독이.

맥거트 네 이놈! (기사들에게) 녀석을 죽여라.

(기사들 질리베스에게 달려든다.)

질리베스 이보시오. 전왕의 가신이기도 했던 기사들이여. 지금 맥거트와 나는 왕 대 반역자의 관계가 아니라 조국과 국민과 동생과 아비의 원수 대 응징자의 관계요. 끼여들지 마시오. (기사들 멈춘다.) 맥거트 너나 이리와라.

(맥거트 질리베스에게 달려든다. 질리베스 보검으로 맞서 싸운다. 질리베스 승리한다. 맥거트 죽는다.)

질리베스 하아~ 하아~ 폭군은 죽었다.

(아우델리아와 대비 기뻐한다.)

질리베스 아우델리아의 보호자의 이름으로 말하건대 아우델리아는 늙은 프랑스 왕과 혼인하지 않소. 빚은 나중에 계산합시다.

프랑스 왕 이놈! 가만 두지 않겠다. (왕과 왕자 퇴장)

대비 얘야 살아있었구나. 또한 나를 살렸구나. 또한 아우델리아를 살렸구나. 또한 나라와 백성을 살렸구나.

아우델리아 (질리베스에게 안기며) 도무지 말이 안나와요.

질리베스 (아우델리아에게) 눈물은 이따가 흘리자꾸나. 저 늙은 여우같은 녀석이 어떻게 할지 짐작이 간다.

(잠시 후)

프랑스 왕의 목소리 질리베스는 들어라. 궁성은 프랑스의 용맹스런 1000명의 군사에게 포위되었다. 항복하고 나오너라. 그렇지 않다면 쑥대밭이 되리라.

(질리베스, 프랑스 왕이 보이는 발코니로 가서)

질리베스 어리석은 프랑스 왕아. 혹시 너의 군사들이 일당십의 용사들이냐? 아니면 이탈리아의 군사들이 열 명이서 프랑스군 하나를 못 당하는 바보냐?

프랑스 왕 무슨 뚱딴지같은 소리냐?

질리베스 그래. 네 뒤통수에 눈이 없으니 이해해주마. 그러나 고개는 장식이냐? 고개를 뒤로 돌려봐라.

(성벽안으로 노블리스와 이탈리아 왕이 이끄는 이탈리아군 10000명 등장)

제7막 4장

응접실. 질리베스. 노블리스. 대비. 아우델리아. 이탈리아 왕.

노블리스 왕자님의 공이 크셨습니다. 아니, 오로지 왕자님의 공입니다.

대비 훌륭했다. 얘야.

질리베스 그보다는 아우델리아의 일이 더욱 기쁩니다. 저는 이탈리아의 젊은 왕과 아우델리아가 혼사를 했으면 합니다.

이탈리아 왕 영광입니다.

아우델리아 (웃으며)오빠~

질리베스 왕이시여. 저의 처남이 되어주시겠습니까?

이탈리아 왕 영광일 따름입니다.

노블리스 축하드립니다. 폐하, 그리고 공주님. 그보다 우선 저는 왕자님께서 이 나라의 왕이 되셨으면 합니다.

질리베스 (고개를 저으며)나의 운명이 그걸 허락하지 않아요.

노블리스 이제야 왕자님께 고백할게 있습니다. 왕자님이 자살하셨다는 소식을 들었을 때는 저도 목숨을 끊어버리고 싶을 만큼 고통스러운 비밀이 있었습니다. 사실은 20여년전 왕자님이 태어나시고 얼마 안 되어서, 전왕께서 저를 부르셨습니다. 왕자님의 목숨이 맥거트에게 죽임을 당할까봐 불안하다고 말입니다. 저는 그래서 예언자를 불러 왕이 될 운명이 아니라는 거짓 예언을 시키도록 했죠. 맥거틀 안심시키기 위해서 말입니다. 그리고 장성하면 알려드릴 계획이었습니다.

모두들 (놀란다.)아니! 그런 비밀이.

대비 나에게 만이라도 알려주셨어야죠.

노블리스 대왕께서 굳이 비밀로 하라는 통에.

질리베스 개끈의 비밀은 밝혀졌습니다. 이미 제 속은 그걸 듣는다고 더 이상 시원해지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저는 탐구자의 길을 선택했거든요. 진리를 찾기 위해 동방으로 갈 예정입니다.

아우델리아 (놀란듯이)오빠~

(문지기가 들어오며)

문지기 아니 어떤 이상한 노인이 막무가내로 들어옵니다. 감히 손댈 수가 없어…, 앗 들어와 버렸다.

(에우리게나와 여섯사람 등장)

질리베스 아니! 스승님.

에우리게나 오랜말일세. 엄청난 일을 치뤘구나.

질리베스 스승님의 가르침대로 동방으로 떠날 예정입니다.

에우리게나 제자야. 이 시점에 너 하나가, 있는지 없는지, 찾을지 못 찾을지도 모르는 진리를 터득하기 위해 노력하는 게 더 필요하느냐, 너의 조국과 국민을 위해, 고통받는 민초를 위해, 나라를 일으키는 것이 더 필요하느냐? 너는 진리를 찾는다면 중생들을 위해 전파하겠다고 했다. 그렇지만 우선 생존의 문제가 걸려있는 백성들은 어떡하느냐? 그들에게 필요한 것이 진정 우주를 초월한 진리이더냐 한 조각의 빵이더냐? 너 하나가 성인이 되어 모든 것을 깨닫는 다해도 수많은 백성들을 무시한다면 그 것은 용서될 수가 없다.

질리베스 스승님의 말씀 잘 알겠습니다.

에우리게나 사실. 나는 너의 이름을 들었을 때부터 너의 신분을 알아챘느니라. 그래서 이 여섯 사람에게도, ‘만족’을 가르치지 않고, 정치, 경제, 외교를 가르쳤느니라. 이 여섯사람 개인의 행복보다도 수백만 유럽인의 행복이 더 가치있다고 우리들이 결정했다.

로자, 로제 저희는 정치가 전문입니다. 흐트러진 나라의 기강을 바로 잡겠습니다.

맥시스, 한센 저희는 경제가 전문입니다. 나라의 경제를 부흥시켜 백성들을 절대적 빈곤으로부터 해방시키겠습니다.

밸코우 저는 외교가 전문입니다. 많은 나라와 친교를 쌓아 적을 줄이고 우방을 늘리겠습니다.

레도스 저는 군사가 전문입니다. 프랑스와 신성 로마 제국을 상대할 자신이 있습니다.

에우리게나 이들을 대신으로 등용해보거라.

질리베스 스승님의 뜻을 받들겠습니다. 아득한 진리를 찾는 것보다도 더 의미 있는 생이 될 것입니다. 그리고 우선 왕의 첫 명으로 농촌의 바우키스와 필레몬 노부부를 국립 교회의 주인으로 임하겠습니다.

(막 내린다.)

방에서의 결(結)

낡고 자그마한 방. 가운데에서 늙은 작가가 있다.

늙은 작가 아아! 나는 이미 오래전에 나의 마음에 족쇄를 채우는 날카로운 독설로부터 해방되었다. 그래서 마음껏 부담 없이 글을 써 내려갔다. 평생동안 셀 수도 없을 만큼 많은 글을 썼다. 그렇지만, 아아! 고통스럽다. 그렇지만, 독설과 동시에 질책과 평가와 호평도 모두 사라졌다. 결국 나의 문학적 발전은 평생을 통틀어야 겨우 찾아볼 만큼 작다. 발전한 것이라고는 “읍니다”를 “습니다”로 쓰는 정도뿐이지. 나처럼 비극적인 작가가 다시는 이 땅에 없도록 하기 위하여 내게 없었지만, 필요했었던것들을 후배들에게 찾아주자.

(젊은 작가가 원고를 들고 등장)

젊은 작가 선생님, 선생님의 명성을 듣고 말씀을 구하고자 왔습니다. 이게 제가 쓴 글입니다. 읽어보고 말씀해 주십시오.

늙은 작가 (원고를 받아 읽는다.) 으음, 좋은 글이야. 주제도 아주 유쾌하고 통쾌하군. 그렇지만 너무 감상적이야.. 이맘때의 젊은이들은 항상 이런 이상과 감상에 빠지게 마련이지. 좋은 현상이야. 그렇지만 극단적으로 감상적인 글은 현실에서 멀어지고, 독자의 가슴에서도 멀어지지. 독자에게 공감을 줄 수가 없어. 작가의 소신도 중요하지만 그에 못지 않게 독자에 대한 배려도 중요한 거야.

젊은 작가 그 충고 명심하겠습니다. 정말 감사합니다. (원고를 받아들고 퇴장.)

늙은 작가 그래 그들에게 필요한 것은 자신감을 꺾지 않으면서도 잘못된 점은 지적해 줄 수 있는 노인의 경험과 지혜인 거야. 내가 할 일을 찾았구나.

(완전히 막이 내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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