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월 062003
 




정말 클래식한 영화, <클래식>

  한마디로 잘 만들어진 동화 한편을 본 느낌이다. 황순원의 ‘소나기’, 알퐁스 도데의 ‘별’, 셰익스피어의 ‘로미오와 줄리엣’, 연애편지, 반딧불이, 삼각관계, 이루지 못한 사랑 등 익숙해서 이제 식상하다고 느껴지는 이야기들이 한데 섞인 아름다운 동화, 바로 이 영화 클래식이다.
 
 
  중요한 것은 자칫 ‘잡탕요리’가 되기 쉬운 이 영화가 적어도 내겐 맛깔스런 ‘퓨전요리’로 다가왔다는 사실이다. 이유가 뭘까, 어떤 점에서 나의 마음을 흔들어 놓았을까?
  이 영화는 의식적이건 무의식적이건 줄곧 내가 꿈꿔온 사랑의 원형을 보여준다. 현실에 존재하는 다양하고 복잡한 사랑의 뿌리, 가장 원초적인, 순수한 사랑의 형태, 상황이 옛날 책 속에서만이 아니라 눈 앞의 구체적인 영상 및 음성으로 소개된다는 것에 가슴이 벌렁거리는 걸 차마 피할 수 없었다. 어린시절 황순원의 소나기를 읽으면서 느꼈던 그 설레임, 그리고 결말의 안타까움이 영화를 보면서 조금이나마 해소됐다는 것도 퍽 인상깊다.

  느낌을 넘어서 영화를 좀더 곱씹어보면 글자 그대로의 “클래식”을 자꾸 떠올리게 된다. 기다림의 사랑. 감싸주는 사랑. 모든것을 바치는 사랑이 드물어진 세상은 “클래식=구식=버려야 할 것”식의 생각에서 비롯된 것은 아닐까? 순진과 순수가 놀림받는, 딱딱한 키보드와 1초를 다투는 즉시성의 시대에서 떨리는 가슴, 순수한 감정, 애련한 감수성은 여전히 생명력 있는 일종의 거대한 반발이다. 얼마 전 수업시간을 통해 읽었던 고전의 의미가 바로 이런 것이리라.
  60년대를 살았던 어머니의 적극적인 구애방식과 현대를 사는 딸의 소극적인 태도 역시 다소 뒤바뀐듯한 묘한 대조를 보이면서 구식을 넘어선 신선함을 보여준다.

  사실 영화 초반과 중반부까지의 경쾌한 진행에 비해 후반부의 ‘비극’은 그 정서가 쉽게 받아들여지기 어렵기는 했다. 하지만 ‘희극’이 가벼운 미소와 허탈한 웃음으로 지나갈 수 있어 비교적 큰 포용성을 가지는 것에 반해, 비극의 정서는 자칫 ‘신파’라고 불리기 쉬워 쉽게 전달하기 어려운 부분이 있다는 말에 공감한다.
 

  문득 나도 잠깐씩은 클래식 해지고 싶다는 생각이 든다. 벌써 이 감상문부터 최대한 클래식한 구조와 문장을 보이려 신경을 썼다. 곧 있을 어버이날에는 꼭 친필로 편지를 쓸 테다. 강제가 아닌 진실된 마음으로 종이 편지를. 이러한  생활 속의 클래식이, 만년필과 자전거를 통해 기다리던 소식을 전해주던 우체부 아저씨에 대한 경의이며 준하와 주희의 사랑에 감동할 하나의 자격이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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