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월 242009
 

2. 14. 토
  푹 자고 일어나서 집안일을 했다. 점심을 먹고 느긋하게 앉아 뭔가 한 너댓페이지쯤 읽고 나니 불현듯 날짜가 생각났다. 새로 사서 벽에 걸어둔 긴 세로 두루마리 달력을 봤다. 오늘은 밖에 나가지 말아야겠다.-_- 기억에 뭔가 약속이 있는 줄 알았는데 그게 언제 없어졌던가 하는 생각도 들었다. 원래 없었나. 아니 무언가 나갈 일이 있긴 있었는데…
  며칠 전부터 사람들과 발렌타인 얘기를 해왔다. 직접 만든 초콜렛을 줄 거라는 얘기, 공정무역으로 수입된 착한 초콜렛을 사야겠다는 말, 올해는 받을 일이 없다, 그래도 몇 개는 받는다, 엄마나 동생이 준다, 나는 줄 사람이 아빠밖에 없다… 다들 조금씩은 할 말이 있었다.   돌아보면 발렌타인에 좋은 추억이 꽤 있다. 나는 오래전부터 발렌타인데이와 화이트데이를 나누어 생각하지 않았기 때문에, 발렌타인데이에 나도 선물을 했었다. 그래도 화이트데이에 또 줘야하긴 하지-.-;  장삿 속이래도 좋은 날은 좋은 날이다. 새로운 연인들이 돈을 지르며 불타오르든 오래된 연인들이 소박하되 따뜻한 작은 선물을 주고 받든지.
  나는 그냥 몇 번 봤는데 예뻐서 내 스타일이서 마음에 들어서, 선뜻 초콜렛을 건네며 고백을 할 만한 사람이 아니다. 용기없음의 문제는 아닌 것 같다. 몇 안되는 연애를 통해 상대에게 상처줬던 일, 내가 받은 아픔 따위가 떠올라 섣부른 시작을 가로막는다는 느낌이 든다. 아니, 보다 정확히는, 하늘을 봐야 별을 따지. 상처가 두려워 사랑을 하지 못하는 건 어리석기에 나는 늘 용감하게 솔직한 마음을 토로하며 새 사랑을 시작해보지만, 결국 늘 상대에게 상처를 주고 끝나버리는 것 같아 내가 밉다. 아니, 그럼에도 나는 자기애가 심해 결국 이내 스스로를 긍정하고 말지만, 그래도, 내 여자의 행복함이 곧 나의 행복인 걸, 한 여자를 행복하게 해주고 싶은 욕심은 마치 어떤 종류의 정복욕이나 승부욕처럼 나를 강하게 사로잡는다. 덜 무모하고 열정이 좀 무뎌졌을지언정 여전히 제멋대로이고 집요한 건 변함이 없는 것 같아 걱정이다.

2. 15. 일
  내일 수강신청을 학교에서 할 요량으로, 연구실 열쇠를 가지러 학교에 갔다. 휴일에도 나온 장래형과 경미누나가 나를 보고 놀랐다. 열쇠를 받아 복사하러 학교주변을 한 바퀴 돌았지만 예상대로 일요일에 문을 연 곳은 없었다. 그렇지만 산책을 한껏 즐겼다. 걷는 걸 좋아한다. 요즘은 꽤 먼 거리를 오래 걷는 것도 짧게 느껴진다. 날씨는 정말 추웠다. 하지만 걷다보면 발에 열이 나고, 손은 주머니에 찔러넣고 줄곧 걸으면 옷 안쪽에서는 열기가 느껴진다. 몸은 달아올랐는데 얼굴에 스치는 매서운 칼바람, 옷깃사이로 목 사이로 몸을 찌르는 차가운 공기, 이런 것이 겨울에 걷는 즐거움이다.

2. 16. 월
  일찍 등교, 물리적 거리가 가까운 곳에서 수강신청을 해야한다. 왠지 내 나이에, 내 짬에도 수강신청을 걱정해야 한다는 것이 잠깐 성가시게 느껴졌다. 뭐 나보다 고학번이지만 저학년도 많은데. 웹인터페이스설계, 심리검사법을 제외한 다른 과목들을 모두 넣었다. 간만에 하는 거라 긴장을 했지만 난 늘 잘 한다. 이것보다 더 어려운 설/추석 열차표 예매도 성공하는 편인데 딱히 어려울 것도 없다. 매크로도 돌릴 수 있는데 잠깐 해보다가 귀찮아서 관두었다. 남은 것은 금요일에 해도 충분하다.
  생물학과 수업인 신경생물학은 그 쪽 치열한 여학생들 등쌀에 무시무시한 학점경쟁이나 시험이 기다리는 수업이다. 걔들도 수업을 전부 녹음해서 다시 받아적고 달달 외워 시험을 치르는데, 엄연히 인문계 출신인 내가 조금이라도 게을리 임해서는 안 될 빡센 수업이 될 것이다.
  논리철학은 무엇을 하게 될 지 정확히 감이 안 잡히는 수업이다. 일단 선우환 선생님 수업을 한 번 듣고 싶다는 생각이 더 클 뿐이고, 근데 난 선행과목 논리학 안 들었고… 첫 수업도 듣고 직접 만나서 물어봐야겠다.
  선형대수. 나는 수학공부를 좀 해야한다. 그런 점에서 선형대수는 가장 만만한 필수과목 중 하나라고 모두들 추천하고 있다. 숙제로 수학문제 풀어서 내는 것도 오랜만일듯하다.
  성과인간관계는 꽤 오래 전부터 관심을 갖고 있던 교양수업이다. 그간 너무 전공에만 열을 올려왔다는 생각도 든다. 이제 훌륭한 성심리학자인 홍성묵 교수님이 강의를 하지 않는다는 점이 안타깝지만 교수가 바뀌었어도 수업은 괜찮지 않을까하는 짐작을 하고 있다. 양성평등을 주제로 지나치게 사회, 정치적인 접근에만 치우치는 수업이 아니었으면 좋겠다. 나는 사회학 수업을 듣고자하는 게 아니다. 사실 내가 페미니즘을 좀 제대로 공부해야 할 필요는 있다. 잘 알지도 못하면서 건방진 글 (지루한 페미니즘에 대한 반성 http://kinpain.com/2 )을 써제끼다 호되게 까였던 기억도 있다. 그래도 어떡해, 지루한 건 지루한 걸.
  사실 이번 학기의  핵심은 요가 재수강이다. -_-; 지금으로부터 무려 6년 전에 사귀던 여자가 같이 요가 듣자고 해놓고 수강신청실패했고 나 혼자 체교과 쭉쭉이 여자애들 무더기 등쌀 속에서 남자 수강생 몇 명과 고행을 거듭하다가 결국 C+ ㅜㅜ  1학점짜리 재수강하는게 무슨 의미가 있냐는 애들이 있다. 야, 대학이 학점 따려고 다니는 거냐. 나에게 요가는 늘 마음 속에 그리는 이상적인 운동이다. 예전보다도 훨씬 뻣뻣해진 몸을 풀어줄 그런 수업. 어떤 과목도 절대 재수강은 없다! 라는 내 원칙도 요가에 대해서는 예외다.
  윤개초딩한테서 초코렛을 받았다. 이런 깍두기 초코렛 따위. 어쨌든 고맙다.
 
  귀국 후 처음으로 회사 사람들을 만났다. 회사를 관둔지 꽤 된 내가 딱히 낄 자리는 아니었지만 옥차님이 함께 가자해서 오랜만에 인사도 할 겸. 온레이드는 이제 글로벌서비스도 시작했고 국내서비스도 접속자 수가 상당하다. 회사도 옮겼고 직원 수도 많이 늘었다. 내가 있을 때보다 양적으로나 질적으로 점점 발전하는 회사 소식을 접할 때마다 괜히 마음이 좋아진다. 이래서 인맥을 통해 일 할 사람을 찾는 건지도 모르겠다. 애사심이 남 다르기 때문이다. 새로 시작한 연애에 줄곧 싱글벙글인 형도 있었고 무슨 차를 얼마주고 사야할지 고민하는 형도 있었다. 꽤 인기있는 웹툰 낢- 그리는 여자애랑 소개팅한 얘기, 중고차/신차 가격 얘기, 피아노 과외를 받다가 선생이랑 사귀게 된 얘기, 금값 얘기, 환율 얘기, 공대생이 여자랑 의사소통을 할 때 주의해야할 점 등으로 화기애애하게 떠들썩하다가 회사 향후 정책과 관련한 주요 안건을 논의했다. 그 때 부터 나는 가만 듣고 있었다. HTML로 갈 것인가, 플래시를 새로 만드냐, 플렉스로 하냐 하는 문제를 놓고 개발 비용 (주로 시간) 과 기대효과를 함께 고려하여 결정해야했다. 정책 결정은 하나의 분기점과 같아서 늘 조심스럽기 마련인 듯 하다. 중국 애들도 후발 경쟁업체로 마구 따라오고 있다는데 우리는 물량과 속도전에서 크게 뒤지지 않으며 특색있는 기술로 승부를 보아야만 한다.  플로우게임즈 건을 생각하다보면 문득 김구글이랑 같이 하는 내 일은 너무 쉬운 게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든다.

2. 17 화
  아무래도 황이 또 뻗은 것 같다는 불길한 예감이 든다. 학교에 안 왔고 연락도 안 된다. 어제 옥사마랑 나한테 쏘려고 벼르고 있었는데 나란히 회사사람들을 만나러가는 바람에 삐졌나 싶기도 하다.
  부지런히 국제처와 과사무실, 학적과를 뛰어다니며 교환학기에 받은 학점인정을 마쳤다.경험보고서와 홍보보고서를 작성해야만 일을 처리해준다기에, 순식간에 발로 써서 가져갔다. 보고서는 이렇게 초날림으로 써낼 수 있는데 감성 가득한 문학적 에세이는 왜 그리 한두줄 쓰는 것도 어려운지 모르겠다. 누구 말처럼 내가 감성이 메말라서 그런건가. 휴.  유럽의 30 ECTS 는 반토막인 15학점이 인정된다. 놀기만 한 것 같은데 공짜로 15학점이 생기다니 놀랄 노 자다. 전부 전공이나 필수이수학점이랑은 전혀 관련없는 일반선택 과목들이다.
  학교 도처에서 오리엔테이션이 진행중이다. 동기사랑 나라사랑을 외치며 기차놀이를 하는 모습, 08학번 앞에서 엎드려 팔굽혀펴기를 하며 낑낑대는 여학생, 존대말로 꾸지람을 듣고 단체로 함성을 지르며 분주한 아이들, 건물 앞 탁 트인 공간에서 빙 둘러서서 선배들의 귀여운 율동을 보며 응원을 따라 배우는 모습… 내 동생보다도 어린 09 새내기들이 너무나 귀엽다. 좀 시끄러우면 어때?




2. 18. 수
  예상대로 황은 어제 새벽 응급실에 갔었다. 따라서 랩미팅에 불참. 랩미팅 후 Chong 이 주재하는 업무회의가 길어졌다. 나 또한 뛰어난 컴퓨터 활용능력(?)을 바탕으로 무언가 임무를 부여받은 것 같아 기분이 좋았다. 업무를 분장하는 것, 일을 자기가 다 하지 않고 다른 사람들에게 잘 나누어주는 것, 이런 것이 정말 리더가 잘 해야하는, 중요한 일이라는 생각을 다시금 확인했다. 내가 할 일은 별로 없어 보이지만 이번 프로젝트가 잘 되었으면 좋겠다. 안 되면 마는 거긴 하지만, 새 학기 시작을 앞두고 다들 무척이나 바빠보인다.

  피매 쪽은 담당자 변경 인사차 메일을 보내놓았지만 아직 반응이 없다. 모심 쪽 컨택도 운영자가 딱히 반응이 없는 상태이다. 무응답이 가장 괴롭다. 그래도 일은 착착 진행중에 있다. 이번 달에는 참 이상하게도 가만히 앉아있어도 여기저기서 돈이 쏠쏠하게 들어오는데 그만큼 쓰는 돈도 많다. 다음달에는 수입은 그대로되 지출만 줄어든다면!!! 옷 한벌 사입지도 않는데 돈이 다 어디로 새는지 쯧.

  오며 가며 오티 진행중인 08 반 후배들을 마주친다. 좀 민망하기도 하지만 자랑스럽게 생각해야겠다. 인사를 해주는 후배, 심지어 08학번이 있다는 건 그만큼 내가 반에 최소한의 애정을 여지껏 보여왔다는 증거가 된다. 이런저런 일로 바쁘더라도 올해도 뻘쭘함을 극복하고 내가 할 수 있는 만큼의 성의표시는 꼭 하리라 다짐한다. 갈수록 우울해지는 대학문화를 멈추는데 눈꼽만큼이라도 힘을 보태야하지 않나 싶다. “늙어서 할 일이 없어서 한참 어린 후배들을 만나러가느냐, 니 일이나 잘 챙겨라, 한참 어린 여자애들한테 딴 맘 품는 거 아니냐 이런 도둑놈.” 이런 식의 비난을 하는 사람들이 싫다. 저런 얘기나 쉽게 내뱉으며 대학의 인간관계는 너무 휘발적이라며 빈정거리는 태도는 어쩌면 본인이 새내기였을 때 받았던 내리사랑에 대한 배신이 아닐까. 지금까지도 새터에 꼬박꼬박 따라가는 영인이형을 비롯한 선배들이 존경스럽다. 내가 잘 하고 있는 게 없지만, 그래도 부족함과 전혀 없음의 차이는 엄청나다는 것을 잊지 않으려고 한다. 가까운 학번은 물론이고 저 멀리 9x 선배들이 내게 베풀어줬던 걸 나는 지금도 기억한다.




2. 19. 목
  오전에는 방에서 매트랩 숙제에 열을 올렸다. 여전히 어려운 범위는 아니라서 금방 끝낼 수 있었다. 그리고 검색어 관련 작업도 끝마쳤다. 두현이가 좋아했다.
  황도 말끔하게 돌아왔다. 죽음의 문턱을 자꾸 경험하고 있는 친구에게 내가 줄 수 있는 도움은 딱히 없다. 녀석은 변하지 않는 것을 추구해야겠다는 다짐을 하게 됐다는 말이나 종교가 필요하다. 신부가 되어야겠다. 등의 말을 해댔다. 더러는 시덥잖은 말이기도 했지만 정신적으로도 많이 외로워하고 괴로워하는 게 분명하다.
  선형대수와 신경생물학 교재를 무상대여해주는 백야에게 밥을 사기로 했다. 심지어 필기도 제공해준다고 한다. 같은 선생님의 수업이라 큰 도움이 될 것 같다. 내가 대가로 약속한 밥2회 술2회 이용권 중에서 백야는 오늘은 밥1회 술1회를 사용했고 장래형과 옥차님도 동행했다. 맥주와 오꼬노미야끼와 국수를 먹고 이과두주와 양꼬치를 먹었다. 이거 왠지 영화 멤버랑 동일했다. 앞으로 함께 할 시간이 많은 사람들이다. 나는 어딜가나 개성이 뚜렷해 특이하다는 소리를 많이 듣는 편이었지만 이 곳에서는 제법 평범한 축에 드는 것 같다. 그만큼 한명한명이 무척이나 독특한 사람들, 그런 점이 마음에 든다.  비는 부슬부슬오고 술이 약간 아쉬웠지만 더 마시지 않았다. 스크류바를 빨며 늘 그렇든 걸어서 귀가. 집에 캔맥주를 안 사온 건 잘한 일이다.




2. 20. 금
  바쁜 일 없이 시간은 빨리 흘렀다. 못 넣었던 과목들을 모두 성공적으로 수강신청했다. 읽을 논문들을 이것저것 출력하며 연구실에 공유된 음악파일도 복사했다. 나는 다른 사람들이 좋다고 모아놓은 음악을 통째로 복사해놓고 Random 재생하는 걸 좋아한다. 이제 갖고 있는 음악파일 용량이 80G 에 가까워졌다. 제목도 가수도 모르지만 흘러나오는 음악은 모두 내 지인이 좋아하고 추천하는 음악이라는 것이 좋다. 음악을 잘 모르지만 좋은 음악이겠거니. 가끔 어떤 음악은 내 귀를 사로잡기도 한다.
  황 생일이 내일인데 모르고 있었다. 생일 축하의 기념으로 황이랑 한 팀으로 밴드를 하는 인범이형을 만나 초밥을 사줬다. 정종도 한 주전자 했다. 간만에 간 집이지만 값도 싸고 늘 만족스럽다. 인범이형이 새로 지었다는 닉네임 오셔네이드가 웃겼다. 형이 술만 먹으면 한다는 과거사도 처음들으니 재밌었다. 분명 형은 재능있는 작곡가였고 유재하가요제도 1차는 됐었고, 드림팩토리에 성제형 밑으로 작곡을 하러도 갔었는데… 끝은 안타까웠다. 그리고 이제 황이랑 같이 꺼진 불씨를 되살리려한다. 음악없이 살 수 없는 친구들이니 좋은 음악 했으면 좋겠다. 성제형이 좀 도와주었으면 좋겠다는 생각도 든다. 우리는 술을 마시며 인범이형이 쓰고 있는 “손톱” 첫 부분 멜로디를 가지고 줄곧 고민했다. 나도 생각나는대로 몇 개 흥얼거려주었는데 아, 작곡은 정말 힘들다. 뭘 하든 뭔가 어떤 곡이랑 비슷한 것도 같으니 도무지 쉽게 정할 수가 없다. 나는 나중에 마케팅을 잘 해주겠다 호사를 부렸다.




2. 21. 토
  부모님이 상경하셨다. 내 생활을 순시하러 오신건가! 다행히 나는 꽤 집안일을 잘 하고 살고 있다. 동생도 마침 외박을 썼나보다. 밥을 안쳐놓고 터미널에 마중을 나갔다. 평소에 전혀하지 않는 큰 아들 노릇을 가끔 꼭 해야할 때는 빠뜨리지않고 잘 하는 것이 내 생존방식이다. 네 식구가 옥탑방에서 모처럼 즐거운 점심을 먹었다. 최고급 한우와 딸기, 오렌지, 여러 밑반찬… 오오, 내가 밥을 잘 해먹으니 엄마도 꽤 다른 대접을 해주는구나!  혼자 살아도 전자레인지와 진공청소기(허접한 것 말고 큰 것)는 꼭 있어야하는 것 같다. 아버지가 직접 따신 산딸기로 담근 산딸기주의 맛은 지난 해 내가 맛을 본 초특급 와인에 뒤지지 않는 듯 했다.
  동생이 친구를 둘이나 데려왔지만 고기는 모자라지 않았다. 다들 배불리먹고 동생들은 놀러나가고 나는 부모님을 모시고 워낭소리를 보러 갔다. 내 방에서 걸어다닐 거리의 메가박스에 부모님을 모시고 외출하는 기분은 남달랐다. 워낭소리에는 우리 친할머니와 똑같이 생활하는 할아버지가 나온다는 걸 나는 알고 있었다. 아버지도 어디선가 미리 정보를 접하셨는지 평소 영화관에 거의 가지 않는 분이심에도 이충렬 PD에 대한 얘기를 하시며 영화를 기다렸다. 다큐멘터리 매니아인 아버지와 아주 잘 어울리는 영화. 눈물이 많은 나는 또 살짝 눈시울을 적셨다. 이제 치매까지 얻으신 아흔살이 넘은 우리 할머니가 떠올라 더욱 마음이 뭉클했다. 다른 사람들이 영화를 어떻게 봤는지도 궁금하다.
  영화가 끝난 후 부모님과 감상을 채 나누기도 전에 나는 미리 잡아놓은 약속들을 이행하러 서둘러 가야했다. 홍대에서 7시 공연인데 6시 50분에 영화가 끝나다니, 빡센 시간이다. 택시를 타고 도착한 홍대 KT전화국 근처 작은 클럽에서는 막 공연이 시작됐다. 지인이 PD이고 친구가 사회자인데, 이 둘을 포함해 또 다른 친구가 전부 무대에 서 노래를 하는 터라 가까운데 살면서 꼭 잠깐 시간을 내서 가고자 했었다. 작년에도 했었는데 우는애의 열창을 동영상으로 찍어두지 못해 아쉬웠다. 올해도 또 카메라를 안들고가서 못 찍었다. 제작진이 촬영한 거라도 달라고 해야할까보다. 별고기는 여자임에도 파워풀한 랩을 썩 잘 소화했고, 김PD는 늘 평타를 쳤고, 우는애. 우는 애가 정말 공연 전체에서 최고였던 것 같다. 동석이랑 선이, 제레 말고 다른 책마을 친구들은 안 보였다.
  공연을 다 보지 못하고 켄순이가 신촌에 와서 나가야했다. 프라잉팬이라는 내게 새로운 닭집에 결국 갔고, 켄순이 바람에 따라 또 양꼬치를 먹었다. 월요일에 볼 건데 아무튼 녀석이 일단 신촌왔으니. 새로운 직장생활에 대한 얘기를 들었다.
  술은 별로 안 마셨는데 배는 불렀고, 양꼬치 냄새와 함께 걸어서 방에 돌아왔을 때, 주무시는 부모님과 컴퓨터게임에 몰입한 동생의 모습이 정겨웠다. 이런 익숙치않은 모습이 이렇게 평안해보일줄이야!




2. 22 일
  네 식구가 함께 살 때 늘 그랬던, 마구마구 늘어지는 편안한 일요일의 전형이 재현됐다. 이런게 단지 함께만 있어도 금방 되살아난다. 주말에 종종 세 부자가 목욕탕 간 것 정도만 빼고 엄마가 챙겨주시는 아침을 맛있게 먹고 TV를 보며 뒹구는 걸 똑같이 했다. 어머니의 된장국. 팥죽. 쇠고기국…! 점심에는 동생을 위해서 문근영이 선전하는 게살몽땅 피자를 시켜줬다. 엄마도 은근히 피자를 한 번씩 먹는 걸 좋아하지만, 아버지가 잘 안 드셔서 먹을 기회가 적은 눈치다. 엄마는 딸이 없어서 안 됐다. 내 방 구석바구니에 박힌 헤어세럼, 에센스, 또 무슨 침실용 향수 같은 것에 엄마가 관심을 보이기에 전부 드렸다. 아마 내가 머리가 길 때 사서 좀 쓰던 거였나. 향수는 내가 별로 좋아하지 않지만 예전에 교수님 댁에 잠깐 살다 짐을 뺄 때 딸려온 것 같다. 스웨덴에서 가져온 크리스마스용 생강과자 한 곽도 드렸다. 나나 내 동생 둘 중에 누군가가 딸 노릇을 하면 좋겠지만, 둘다 아들이라 아들이 갖는 한계는 분명히 있는 것 같다. 엄마와 함께 적극적으로 needs를 창출해내고 그걸 마침내는 함께 충족시키며 즐길 수가 없다. 오늘처럼 나는 단지 내게 요구되는 큰 아들 역할로서, 뭐든 엄마 눈에 보이는 게 엄마 마음에 좀 들어뵈면 “엄마 다 갖고 가!” 라고 툭 말하든지 사 드리든지 하는 게 전부인지도 모른다.
  엄마가 인사동에 가고자하셔서 점심 먹고 모두가 나섰다. 동생은 바로 복귀를 해야하니 군복으로 갈아입었다. 가족들과 함께 인사동을 온 건 나도 처음이라 참 신선한 기분이 들었다. 구석구석 천천히 구경하기보다는 대충 크게 훑고 지나가는 식으로 산책을 했다. 지하철역까지 동생과 부모님을 배웅하고 집에 돌아오니 마음이 허전했다. 식구들이 있는 동안에 못했던 할 일들을 처리해야하지만, 내일까지는 계속 정신이 없을 계획이다.
  저녁 때 마침내 호댕이 부산에서 KTX를 타고 서울에 도착했다. 곧 미국으로 유학가는 호댕을 나는 귀국 후 처음으로 만났고, 엄마가 갖다 주신 밑반찬으로 저녁을 차려줬다. 내일이 비자 인터뷰란다. 내일은 돈충이 애들과 간만에 또 다 만나서 간단히 호댕 환송회를 열 것이다. 그 전에 내일은 황과 옥차형, 승일이혀, 승, 우는애 등 또 많은 내 친구들의 졸업식이 있다.


2. 23. 월
  정장을 도무지 좋아하지 않기에 나는 변변한 정장 한 벌 가지고 있지 않다. 그래도 많은 친구들의 졸업식이니 동생의 정장을 챙겨입고 집을 나섰다. 졸업식장은 도떼기 시장 마냥 어수선하고 혼란스러웠다. 황은 최우등 졸업을 했다. 쩐수도 최우등 졸업이었는데 자리에는 없었다. 문과대 최우등 졸업생 두 명이 모두 내가 아는 사람이라는 게 뿌듯했다. 내가 받는 상도 아닌데 그냥 좋았다. 최우등 졸업은 일단 4.3 만점에 4.1 이 넘고 그 다음에 랭킹을 매겨서 주는 거라는데, 어쨌든 내가 받기는 틀렸다. 총장의 졸업사도 별로였다. 대학이 졸업식, 입학식의 의미를 잘 살리지 못하는 게 무언가 아쉽다. 다 열거치도 못할만큼 많은 지인들이 졸업했다. 우연찮게 많은 사람들의 졸업을 목격할 수 있었다
  옥차형이 준 고급 DSLR로 열심히 셔터를 눌러줬다. 단과대별 졸업식이 끝난 뒤에도 황이 최우등 졸업생으로 대학원 졸업식장에 불려가는 바람에 옥차형 가족은 따로 밥을 먹으러 갔다. 사진 찍는 사람들로 가득찬 교정을 빠져나가 황 가족들과 황의 다른 친구들 4명과 점심을 먹었다. 우리는 앉은 자리에서 소주를 여섯병 쯤 마셨고 친구의 친구로서 처음보는 사이들이 금새 막 말하는 사이로 친해졌다. 가족들이 떠나고 우리는 자리를 옮겨 맥주를 계속 마셨다. 각자 오백을 한 너댓번 마신 뒤에 나와서도 날이 밝았다. 기쁜 날이다. 단체로 PC방에 가서 스타를 하다가 나는 호댕 환송회에 가기 위해 빠졌다. 황과 친구들은 잠시 쉰 만큼 나와서 또 술을 좀 붓고 마침내는 클럽이나 나이트에 갈 듯 하다.
  오늘만큼은 한껏 놀 자격이 있다. 나는 황이 얼마나 열심히 대학을 다녔는지 잘 안다. 시험기간에 분당까지 오고가는 시간을 아끼려 가끔 내 방에 와서 공부를 할 때면, 나는 혼자 책상에 앉아 공부를 하다가도 잠깐 눈을 붙인 황을 정해진 시간에 꼭 깨워주었고, 그러면 녀석은 두말없이 일어나 추운 옥상에 나가 A4 뭉치를 들고서 시험 볼 내용을 직접 강의하듯 읊조리곤 했다. 나는 대충 A+ 나올만큼이면 됐다며 내가 많이 알아도 시험은 시험일 뿐이라고 자족했다면 녀석은 성적과 상관없이 모든 시험에서 자신이 1등이지 않으면 쉬 만족하지 않았다. 시험 공부에 끝이 어딨겠나. 그래도 나는 적당히 하고 잠을 잤지만 녀석은 잠 한숨 안 자고 쥐어짜내서 단 한 문제도 놓치지 않으려 애썼다. 시험을 잘 치르고 나서는 36시간씩 쳐 자고…   최우등졸업생은 좀 놀아도 된다. 딸랑 하루일테니까. 다만 몸이 저질이라서 건강이나 좀 걱정될 뿐이다.
 
  호댕과 옷시를 만나서 저녁으로 찜닭을 먹었다. 정오부터 달린 나는 상태가 완전치 못해서 저녁을 맛있게 먹지는 못했다. 호댕과 옷시는 간만에 보는 데도 자꾸 티격태격이었다. 옷시야 졸업 후 길다면 긴 백수생활을 거쳐 이제 직장생활을 열심히 하고 있는데, 사실 나도 그렇고 호댕도 그렇고 서운한 마음이야 좀 있다. 옷시는 확실히 많이 세련되어졌고 예뻐졌지만 우리는 그보다 옷시의 의리를 원하는 것 같았다. 아마도 오늘 다같이 모여 그런 게 풀리기도 하고, 뭐 그런 자리겠지.
  자리를 옮겨 켄순이 늦은 퇴근 후 도착하니 고향에 있는 양세만 빼고 다 모였다. 햇수로 십년 째 아는 친구들이니 일년에 한 두번만 이렇게 모여도 딱히 어색함이 없다. 우스개소리로 하던 얘기가 현실로, 우리는 정말 평생지기가 될 것이다. 직장인이 된 친구들은 직장 얘기를 들려줬고 막 떠날 호댕은 자기의 싱숭생숭한 마음을 얘기해줬다. 술이 좀 된 후에는 다들 친구들의 치부책이라도 쥐고 있는 것마냥 까대기 시작했다. 주로 있는 얘기 없는 얘기 지어내며 친구의 옛 연애사를 들춰내는 재미가 쏠쏠했다. 켄순이랑 나는 서울에서 지내며 따로 둘이서도 종종 만나 얘기를 나누기 때문에 우리가 서로 까대다가 제 무덤을 파는 경우가 많았다. -_-;
  당초 일찍 간다고 빼던 옷시가 늦게까지 함께 해줘서 더욱 의미있었던, ??번째 돈충이교 정기모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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