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도 프로이트 좋아해요- / 아- 네, 그런데요?>
프로이트는 정말 유명하다. 정규교과과정 중 국어시간, ‘문학의 즐거움’이라는 단원명 아래, “현실법칙의 억압 때문에 숨어있던 무의식적 욕망이 발현, 해소되는 장으로서의 ‘문학’을 배웠거나 주입당했거나, 공감했거나 졸았든 간에, 아마 학생들은 ‘무의식’적으로 프로이트를 받아들였던 것 같다. 많은 이들이 프로이트가 심리학자라는 걸 알지만, 동시에 심리학자라면 프로이트말고 달리 떠오르는 사람이 없는 형편이다. 심리학의 역사가 아직 짧고, 프로이트가 심리학보다 유명한 탓이라지만 아무래도 대중의 인식이 지나치게 편중됐다는 느낌을 지울 수 없다. 나는 프로이트는 분명 위대한 업적을 남긴 심리학자임에 틀림없으나 이제는 무덤에 묻혀 때때로 참배를 받는 것으로 충분한 존재라고 생각한다.
마음 속에 있는 언행을 밖으로 내뿜지 못하고 꽁꽁 쌓아두는 사람, 나도 내가 왜 그런지 모르겠다는 사람이라면, 프로이트의 연구자세에 절로 박수를 보내게 된다. 그가 바로 ‘무의식’이라는 개념을 끌어와, ‘관찰에 드러나지 않는 것을 가정’하고 이를 통해 사람의 정신을 분석하는 심리학을 연구했기 때문이다. 그는 우선 ‘꿈’을 주목한다. 꿈꾼 경험에 비추어 보면, 우리가 수면 중 꾸는 꿈 속에서 만큼은 의식(각성)상태와 달리 일종의 자유와 환상이 허용되는 것만 같다. 그런데 프로이트가 보기에 이는 진짜 자유가 아니고 자유로 여겨지는 것 뿐이다. 각성된 의식생활 속에서는 가능하지 않은, 하지만 (존재하는) ‘사실’이 꿈 속에서 견뎌내지 못하고 분출되는 것이라는 게 그의 기본 가정이다. 즉 일상생활에서 –나아가 어린시절부터– 여러 이유로 억압당해온 소원과 욕구를 꿈 속에서 충족하는 것이라 보았다. 멋진 설명이다!
이러한 가설을 바탕으로 세워진 프로이트의 이론은 꽤 ‘과학적’인 입장을 견지한 것으로 보인다. 정신병에 대하여 ‘마녀사냥’ 수준을 넘어선 뒤라도 여전히 수용소에 가두고 ‘최면술’ 따위에 의존하는 것 외에 속수무책이었던 당시에는 더욱 그러했을 것이다. 그는 병증의 치료를 위해, 불안을 느끼게 하는 진심을 감추거나 시인하고 싶지 않는 사실을 사실대로 말하지 못하도록 억압하는 과정에 개입한 상징들을 알아낼 필요가 있다고 생각했다. 병에 대한 해답은 이미 환자가 가지고 있으며, 의사는 억압과정을 해명하고 환자 자신이 억압으로 인해 야기된 혼란 상태를 조정할 수 있도록 도움으로써 치료가 가능하다는 생각이다. 환자를 쇼파에 앉혀놓고 환자가 기억하고 있는 가장 과거의 기억에 관하여 묻거나 최근 꾸었던 꿈의 내용, 환자의 말투나 자세, 사소한 버릇을 조사 관찰, 기록했으니 그의 작업이 수량적 연구가 아닌 기술적(descriptive) 연구일지언정 함부로 ‘비과학’이라 내치는 것은 섣부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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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렇다면 과학과 사이비과학을 나누는 기준으로는 어떤 것들이 있을까. 그리고 프로이트에게 그 잣대를 적용한다면 어떨까. 자잘한 이견이야 있겠지만 오늘날 과학자들은 대체로 다음과 같은 기준에 동의한다. ‘반복가능성’, ‘측정가능성’, ‘경제성’, 덧붙여 ‘재활용성’, ‘통섭력’.
‘반복가능성’은 다른 사람이 독립적으로 같은 연구를 수행해도 같은 현상이 나타나야한다는 것을 말한다. 현상에 관한 가설 및 해석, 이론을 만들었을 경우 이는 새로운 분석과 실험을 통해 거듭 입증되어야 한다. 그래서 통제가 용이한 연구실에서 물질을 대상으로 행한 실험과는 달리 프로이트의 이론은 ‘반복가능성’에 태생적 한계를 갖는다. 많은 정신분석학자들에 의하여 아무리 방대한 량의 데이타를 쌓았다하더라도, 각 데이터는 서로에게 독립적일 뿐이다. 상담자와 내담자의 역동적인 상호작용 가운데 얻어진 기록물은 각각 해 당사자의 해 문제에는 의미있어도 단일한 사실을 증명하는 다수의 증거가 될 수 없다. 녹음된 목소리를 틀어주지 않는 이상 어떤 뛰어난 연구자도 매번 같은 목소리와 느낌을 전달할 수 없고, 내담자 역시 상담자가 자신의 첫사랑과 닮았다느니, 털이 너무 많아 혐오스럽다느니 하는 얼토당토않은 이유로, 무의식의 세계를 저도 모르게 펼쳐보이긴 커녕 한층 더 방어적이 될 가능성마저 존재한다. ‘훌륭한 상담자들이라면 결국 같은 결과가 반복된다’라는 말은 억지스럽다. 전문가가 하든 내가 하든, 아무것도 모르는 어린애가 해보든, 동일한 여건이 보장되고 (변인통제), 동일한 결과를 얻을 수 있어야, 우리는 그것을 사실로 받아들일 수 있다. 그리고 이렇게 확보된 ‘보편성’은 누군가가 그 사실에 공감하지 못하고 거부할지라도 여전히 그에게 마저 적용된다는 점에서 매우 강력하다. 공감하고 믿는 자에게 구원을 가져다 준다는 이유로 ‘과학적’이라 할 순 없는 것 아닌가.
‘측정가능성’의 측면도 사정은 같다. 결과를 누구나 인정할 수 있는 척도로 측정할 수 없다면 그 결과를 일반화 할 도리가 없다. 결국 ‘척도’라는 것은 조금 전 제시한 ‘반복가능성’을 내포하고, 프로이트는 마찬가지로 무기력할 뿐이다. 물론 다양한 환자들에 대한 수많은 조사기록을 일관된 기준을 세워 수량적 자료로 변환하고 이를 토대로 한 통계 분석을 통해 인간의 보편적 “경향성”을 밝혀낼 수는 있겠다. 예를들어 어떤 증상을 보이는 사람은 대체로 어떤 과거를 갖는 경향이 있다라든지 하는 식의 유용한 정보. 이는 특정 과거가 현재의 병증에 대한 원인이 된다는 인과해석에는 불충분하지만 그것만으로도 우리는 어설픈 ‘예측성’을 얻을 수 있으니 충분한 가치가 있다. 하지만 프로이트는 고집스럽게도 숙련된 노老의사의 치료경험과 직관에 의존하고 만다. 쌓아둔 자료를 가지고 마음껏 재구성해서 새로운 개념을 제시하고, 다시 그에 걸맞는 사례를 들어 적용한다는 것은 어쩜 추리소설의 작가가 치밀한 플롯을 구성하는 작업과 크게 다르지 않은 것 같다. 픽션(fiction). 이것이 대문호(大文豪) 프로이트가 오늘날 처라리 문학시간에 자주 회자되는 이유이다.
이론의 ‘경제성’이라면 조금 경쟁력이 있지 않을까하는 생각도 든다. ‘단순한 것이 진리다’, 오캄의 면도날처럼 우리는 가장 많은 정보를 가장 적은 노력으로 이끌어 내는, 가장 심플하면서도 아름다운 형태의 진실을 원한다. 단지 감정적으로, 미적으로 원할 뿐 아니라 가치의 우열을 따져도 그렇다. ‘밥을 굶었고 돈이 있고 평소 군것질을 좋아하는 군바리는 짬밥이 맛이 없는 경우에, PX에 간다’ 라는 걸 연구결과라고 내놓는 건 조금 낯 부끄러운 일이다. 그런 건 안 봐도 비디오, 내 동생도 안다. ‘군바리는 언제나 PX에 간다’. 단순한 이 문장이 사실이라면 얼마나 강력하고 유용한 정보겠는가! 이런 의미에서 프로이트의 이론은 말쑥하고 (사실이라면) 강력하기까지 하다. “내 속엔 내가 너무도 많아-♬” 본능에 충실한 id, 도덕규칙을 따르는 착한 superego, 그 사이에서 갈팡질팡하는 현실의 ego. 그리고 꿈틀대는 생의 활력, 성적 에너지 libido 까지. 거침없이 쏟아지는 이런 몇가지 개념만으로도 인간 삶의 모든 질곡을 설명하는 데 모자람이 없을 지경이다.
안타까운 것은 현대 심리학에서는 프로이트의 이론만큼이나 경제적이면서 앞의 두 기준도 충족시키는 연구가 활발히 이루어지고 있다는 사실이다. 오늘날 ‘무의식’은 더이상 측정불가의 영역에만 남아있지 않다. 간접적 방법으로, 의식 한계 수준의 자극을 준 다음 자극여부에 따라 결과가 달라짐을 보임으로써 무의식의 영향에 대한 측정이 가능하다. 가령 이런 식이다. 사람이 도저히 인식할 수 없는 속도로 몇 밀리세컨드, 극히 잠깐 동안 화면에 먹을 것을 보여주고, 무엇을 보았는지 묻는다. 물론 정답을 제대로 맞추지 못하고, 수많은 참가자들의 답안은 무작위로 분포한다. 그러나 이에 이어서 “나는 ____ 을 산다” 와 같은 문장의 빈 칸을 완성하는 과제를 주면 재밌게도 음식 자극에 노출된 사람들은 빈 칸에 ‘음식’을 채워넣는다는 통계적 결과를 얻게 된다. 이를테면 암묵기억implicit memory, 습관화habituating과 같은 간편한 개념으로도, 굳이 유아시절 ‘구강기’– 입으로 성적 만족을 얻는 시기– 때 욕구 충족이 적절히 이뤄지지 못해 지금 당신이 손가락을 물어뜯는 거라고 설명하는 것보다 훨씬 경제적이고 깔끔한 설명이 가능한 것이다. 게다가 기술의 발달에 힘입어 아예 fMRI로 직접 고해상도 뇌 사진을 촬영할 수도 있다. 자극에 따른 뇌의 활성화 영역, 잠이 든 후, 즉 의식이 없는 상태의 뇌 사진을 확인함에 따라 겉으로 드러나지 않는 ‘무의식’의 실체도 조금씩 벗겨지고 있는 실정이다.
시간이 갈수록 그 중요성이 부각되고 있는 ‘재활용성’과 ‘통섭력’의 차원에서 보면 ‘자아’와 관련한 성격심리학의 연구와 ‘꿈’에 대한 인지신경과학의 성과를 주목하게 된다. 최고의 과학이란 다양한 방향으로 후속 연구와 발견을 자극하고, 거듭 재인용 됨으로써 본래의 원칙과 이론의 진위를 끊임없이 시험하는 ‘재활용성’을 가져야 한다. 프로이트의 id, ego, superego의 개념과 비견할 자기확인이론self-verification theory를 소개해본다.
타인의 인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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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긍정적 | 부정적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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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기 | 긍정적 | | |
인식 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
| 부정적 | !모순! | |
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 (표가 너무 구려서 미안해요, 헷)
사람들은 시간과 공간, 보는 이 등에 따라 달라지는 ‘자아’사이의 차이를 만들지 않으려는 근본적인 동기, “자기 일관성self-consistency”을 갖고 있다. 많은 연구에 따르면 자기일관성이 높은 사람이 삶에 대한 주관적 만족도가 높은 경향이 있다. 그런가하면 한편으로는 더 나은 ‘자아’를 갖고자 하는 “자기향상욕self-enhancement” 역시 강력한 동기이다. 자기향상욕이 왕성한 사람이 행복을 느낀다는 결과 또한 당연하다. 그렇다면 위의 표에서 보듯 자기인식이 부정적인데, 타인의 인식이 긍정적인 경우를 살펴보자. 쉬운 예로 겉보기에는 외모도 수려하고 친구도 많아 다른사람에게 좋은 이미지로 기억되는 사람이, 정작 자기 자신은 자기비하와 패배주의에 빠져서 허덕이는 경우이다. 여기서 ‘자기일관성’과 ‘자기향상욕’사이의 긴장이 나타난다. 내가 보든 남이 보든 ‘부정적’이어서 ‘자기일관성’을 유지하는 편이 내가 보기엔 늘 부족하고 ‘부정적’인 모습이지만 적어도 남의 눈에는 ‘긍정적’인 편보다 낫다고 할 수 있을까? 쉽게 답을 내릴 수 없다. 아마도 다른 많은 요소들의 영향도 고려해야할 것 같다. 개인이 얼마나 성취지향적인지, 얼마나 외로음을 타는지에 따라 다를 수 있다. 어쨌든 중요한 것은 프로이트를 위시한 정신분석학의 ‘덩어리’진 모호한 개념과 비교하면, 구체적이고 환원적인 관점에서 보다 폭발적인 의문의 꼬리를 낳고 새로운 발견을 촉진한다. 환원주의의 맹점은 주의해야하겠지만, 환원의 노력없이 전체 그림에 대한 좋은 설명을 기대하기도 어렵다. 나무와 풀 각각의 이름조차 모르면서 숲 전체를 보고 그저 “울창하니 참 좋다.”는 말은 공허하다.
이렇게 볼 때 ‘꿈’에 관한 인지신경과학의 연구는 ‘통섭’의 생생한 현장이다. 다양한 현상들에 대한 여러 설명을 연결, 일치시킬 수 있을 때, 그 설명은 경쟁력이 있는, ‘통섭’력을 지닌 설명이라고 할 수 있다. ‘활성-종합 모델’ 가설에 따르면, 우리가 꾸는 꿈의 기제는 다음과 같다.
// 잠이든 상태에서는 감각 정보가 거의 입력되지 않기 때문에, 의식적 두뇌는 뇌간에서 시작된 충동들에 따라 내적으로 활성화 된다. 충동들이 만들어내는 혼란 속에서 의식적 두뇌는 정상적인 기능을 수행하려 애를 쓴다. 즉 다양한 이미지들을 앞뒤가 맞는 일관된 이야기속에 짜맞춰 넣으려 한다. 그러나 감각 정보의 순간적인 입력이 부족하다. 결국 의식적 두뇌는 감각적 실재와 연결되지 못한다. 자고 있을 때에는 몸의 움직임에 따라 생기는 자극이 없기 때문이다. 따라서 두뇌는 할 수 있는 한 최선을 다 한다. 즉, 판타지를 만들어낸다. // – 에드워드 윌슨, “통섭” 중에서 발췌
잠이 깨어있을 때 받아들인 정보를 정돈하고 통합하는 기능을 한다는 것은 익히 밝혀진 사실이다. 잠 안자고 공부하는 것은 벼락치기에는 유효할지 몰라도 장기적 학습의 측면에서 볼 때 치명적이다. 위의 ‘활성-종합 모델’은 이러한 사실과도 잘 부합한다. 결국 ‘꿈’은 프로이트가 말한 것 처럼 “뇌의 검열을 통과하는 숨겨진 기억과 야만적 감정의 산물”이 아니라 “뇌의 기억은행 속에 있는 정보를 재조직하고 편집하는 과정에서 나타나는 부수현상”일 뿐이다.
물론 여전히 의문은 남는다. 활성-종합 모델은 꿈의 내용에 대해서는 아무것도 말하지 않기 때문이다. 정신분석학의 주장처럼 꿈이 모두 중요한 의미를 지닌 것으로 해석 가능하진 않을 것 같지만, 그렇다고 완전히 무작위적이진 않은 것 같다. 아마도 그 사이 어딘가에 자리잡은 복잡한 원리가 있지 않을까 추측하게 된다. 그것은 프로이트는 아니라도 융 심리분석의 원형일 수도 있다. 융의 이론이 뇌과학을 통해 슈퍼컴퓨터의 무수한 시뮬레이션을 거쳐 입증될지도 모른다. 인류 문화 전반에 걸쳐 공통적으로 드러나는 인간행동양상을 신화에서 찾아내는 작업과 유전자에 기초한 후성규칙에서 찾는 작업은 점차 그 거리가 좁혀져 이제 겹쳐지기 시작했다. 이런게 통섭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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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리하면, 프로이트의 이론과 정신분석학이 전적으로 무용(無用)한 것은 아니다. 유용하다! 이들이 정신병 치료에 대한 충분조건이 아니라하더라도 여전히 심리분석없이는 치료를 시작하기조차 불가능한 경우가 대부분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 과학적 기반은 전술한 바와 같이 취약하다.더불어 행동, 발달, 인지, 신경과학으로 점철되는 현대 심리학 작업의 첨단에 덧씌워진 무고한 혐의와 오해는 벗겨져야한다. 스킬(skill)을 얻는 쪽은 되려 정신분석학적 입장의 상담가들이다. 좋은 상담자가 된다는 것은, 수없이 많은 임상경험과 훈련을 요구한다. 그리고나서도 환자와 궁합이 맞지 않으면 부득불 실패하기 마련이다. 보편적 진리, 아니면 그에 가깝게 다가서려는 노력은 그래서 매우 중요하다. 진실은 ‘소통’이나 ‘공감’에 앞서 있다. 정신병의 원인이 되는 뇌의 생리적 결함을 발견하고 고치는 작업은 환자의 공감에 기대지 않는다.
프로이트Freud(1856~1939), 그의 대표작 <꿈의 해석>,1900 으로 출판년도처럼 그야말로 20세기를 지배했다. 이 씹-쌔-기의 엿같은 시대배경의 덕을 좀 봤으리라. 세계대전도 있었고, 산업화도 한창이었고, 그런 낯선 환경이 낳은 정신병자도 증가했으니. 아니, 무엇보다도 성행위와 성적 억압에 대한 거리낌 없는 인정, 이것은 주효했고, 단연 최고다! 많은 사람들은 그것때문에 프로이트를 비난할지라도 나는 그 때문에라도 프로이트를 좋아한다. 하지만 좋아한다고 죽은 사람만 계속 붙들고 있는 건 어리석다. 프로이트가 살아있던 옛 시절에도 파블로프Pavlov와 스키너Skinner는 사람을 동물취급한다는 이유로 비난받았다. 지금도 그들은 생리학자, 행동주의 심리학자라고 호명될지언정, ‘정신분석학자’ 프로이트가 대중에게 ‘심리학자’의 대명사가 되는 것과 같은 영광은 결코 누리지 못한다. 이는 마치 가장 좋아하는 과학자를 꼽으라면 많은 사람들이 하나같이 뉴턴, 아인슈타인 정도를 꼽는 것과 같다. (황우석 박사가 빠지는 바람에 몇 명 안되는 숫자가 더 줄었다. 개인적으로 다윈을 좋아한다.)
그래서 지금은 21세기, 프로이트를 알고 기리되 그를 넘어서야한다, 그리고 일선에서는 이미 넘어섰다.
<나도 프로이트 좋아해요- / 네, 죽은지 꽤 됐어요. 성격은 고약했어도 훌륭한 분이셨는데…>
끝.
* 우리나라 사람들은 어찌나 의심이 많은건지. 무자격 의사가 많았던 탓인지, ‘상담’이 인기가 없습니다. 외국에서는 실연 후 괴로움을 호소하며 돈 내고 상담을 받고 평온을 되찾는 경우가 흔하지만, 한국에서 최고의 상담가는 ‘술’인 것 같더라고요. 완전 광기어린 사람에게는 여전히 심심찮게 ‘굿’을 해주는 것도 볼 수 있지요. 정신분석적 입장이든 행동치료의 입장이든 ‘이상심리학’, ‘상담심리학’ 역시 척박한 형편이어서 안타까워요. 중고교에 전문상담교사를 배치한다는 말이 있긴 하지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