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게임 시작 전
0. 높은 진입장벽을 세우다
사이버 강의실에서 조를 짜서 조별 과제를 수행하라는 조교님의 공지사항을 보았을 때는 몇몇 조는 벌써 탐색할 사이트도 정해서 휴게실에 올려놓은 상태였다. 싸이월드, 피망, 세이클럽은 이미 선점당했고, 그렇다면 남은 사이트들은 ‘리니지’와 ‘A3’라는 게임 사이트였다. 조원들 중 누구도 두 게임 사이트를 즐겨찾는 사람들이 없는 것을 알고, 기민하지 못했음을 후회하며, 그래도 ’리니지‘가 더 유명하니 이거라도 남아있을 때 하자는 울며 겨자먹기 심정으로 사이트를 선정하게 되었다.
갈수록 태산이라고 선정 그 후가 더 문제였다. 선정된 사이트를 탐색을 해서 얼른 조교님들과 미팅을 해야 하는데, 탐색은 커녕, 시도도 하지 못하고(또는 안하고) 있었다. 프로그램을 설치를 해야 리니지를 할 수 있기 때문이었다. 첫 번째 산의 등장이었다. 가령 싸이월드는 엔간하면 다들 가입이 되어 있으니 따로 채찍질을 하지 않아도 ‘저절로’ 탐색이 되는 곳이었지만, 리니지는 ‘설치’ 라는 적극적인 과정을 통하지 않으면 그 문을 열 수가 없었다.
그리고 처음에 유료 사이트는 어떻게 탐색하냐는 질문이 제기되었을때 업체 측과 협의해서 계정을 무료로 제공하게 될 것이라고 했던 조교님의 말 덕분에, 유료 계정은 언제 받을 수 있나 기다리게 되었다. 두둥- 두 번째 산 등장. 대체 유료 계정은 언제 나오냐고, 이래 가지고선 우리는 언제 탐색을 해서 조미팅을 하냐고 투덜투덜 댔었다. 사실 리니지에서는 가입을 하면 3일동안 무료로 체험해 볼 수 있는 계정을 제공해준다.(그림 1) 우리는 그 사실을 알고 있었다. 그러나 유료 계정은 제공해준다고 이미 공지가 된 사실이었고, 그것은 ‘과제’를 수행하지 않는 것이 아니라 수행하지 ‘못하는’ 것이라는 우리의 주장에 좋은 핑계가 되었다.
자, 드디어 유료 계정도 제공되었다. 이제 넘어야 할 산은 없나? 그럴리 없지. 결정적으로 엄청나게 높은 산이 기다리고 있었다. 프로그램을 설치(그림 2)를 하려고 하는데, 이게 도통 컴퓨터에 깔리질 않는 것이다. 압축된 파일을 받는 것 까진 좋았다. 이제 압축을 풀기(그림3) 위해 두 번 클릭을 하면 윈집 창이 뜨는데 이게 도무지 진행될 줄을 모르는 것이다. 상태 표시줄을 나타내는 파란색 줄이 왼쪽 구석에서 벗어날 줄을 모르고 계속 지지부진 하고 있었다. 이런 식으로 조원 1명만 빼고는 모두 설치를 못 하고 있었다. 설치를 한 조원 1명이 다른 식으로 압축을 한 파일을 보내줘서 겨우 압축을 다 푸는데 성공했다. 어라, 근데 이번엔 설치하는 도중 파일 하나가 모자라다고 하네? 설치 실패를 했다고?! 이런!!! 뿐만 아니라 컴퓨터 사양이 뒷받침이 안되서 못 깔고 있다는 조원도 있었다.
그리고 조원들의 게임에 대한 전반적인 인식도 장애물이었다. 평소 게임을 즐겨하지 않으니 게임에 대한 인상은 신문이나 방송에서 얻은 것이 전부. 특히 매체에서는 아이템 현금 거래, 아이템 도둑질 등의 게임과 관련된 부정적인 사건을 자주 전해줬으니 게임 폐인은 그닥 좋지 않은 사람들이라는 생각이 지배적이었다. 할 일 안하고 쓸데없이 게임에만 몰두하고 있네, 정도.
그리고, 게임 자체도 재미가 없다, 그래서 별로 하고 싶지 않다, 더더군다나 과제로 하려니 더 하기 싫다, 이런 불평을 조교님들과의 미팅 자리에서 늘어놓기 일쑤였다.
* 게임 시작
1. Level 5가 되기까지
“오오, 이거 흥미진진한데! 분위기 탔어!”
그러나 이러한 우리, 나아가 사람들의 일반적인 편견과 진입장벽에도 불구하고 리니지는 누적사용자수가 1000만명에 달하고, 실제전체사용자수 120만명 이상, 평균동시접속자수 12만명 (2002년 말 추정)에 이르는 거대 게임으로 자리잡고 있다. 또 MMORPG
(MMORPG : Massively Multi-player Online Role Playing Game, 즉 무척 많은 사용자가 플레이 할 수 있는 온라인 롤플레잉 게임을 말하는 것. 원래 RPG는 한명 혹은 TRPG처럼 몇 명의 사용자들이 모여서 하는 게임이었으나 인터넷의 발달로 많은 사람들이 동시에 즐길 수 있는 개념이 도입되면서 등장한 신조어. 대표적인 게임으로 국내의 리니지, 바람의 나라, 외국의 울티마온라인이 있다.)
라는 게임 장르의 특성상 게임 내 가상공간 속에서는 현실 사회와 유사한 정치, 경제활동 등이 현실과는 조금 다른 방식으로 이루어지고 있다. 따라서 우리는 진입장벽을 똟고 가상 공간 속에서 드러나는 사람들의 행동과 심리를 파악하러 게임 세계 속에 진입했다.
게임을 시작하기 위해서 먼저 게임 세계 속의 또 다른 ‘나’를 만드는 과정이 필수적이다. 우리가 만든 것은 남성 다크엘프 캐릭터, 여성 다크엘프 캐릭터와 남성 기사, 여성 기사였다. 이 처음 선택의 단지 겉모습뿐만 아니라 앞으로 게임 세계에서 할 수 있는 일과도 직결되는 문제이기 때문에 신중해야 한다는 생각도 들었다. 하지만 게임 세계에서 내가 원하는 내 모습을 고르는 것일 뿐이고, 정 마음에 들지 않으면 3개 까지 다른 캐릭터를 만들 수 있다는 생각에 진지하게 캐릭터별 유-불리를 꼼꼼히 따지며 고민할 필요가 없었다. 흥미로웠던 것은 우리 조 내부에서도 실제의 성별과 캐릭터의 성별이 다르게 나타났고, 그것이 게임을 하는 와중에서 어느 누구도 겉모습이 여자캐릭터라고 사용자도 당연히 여자일 것이라는 생각을 하지 않는다는 것이었다. 온라인 게임 세계 내부에서는 이미 이러한 불일치가 일반적으로 인정되고 있는 것이었다.
그렇게 캐릭터를 만들어서 게임 세상 속에 처음 발을 디뎠을 때, 첫 느낌은 당혹감이었다. 수많은 사람들과 수많은 말풍선들로 가득 찬 화면에서, 리니지의 인기를 실감하는 즉시 그들이 대화를 하고 있지 않고 아이템 판매 광고를 하고 있다는(그림 4) 사실에 놀랐다.
모르는 아이템 이름들이 화면을 뒤엎는 상황에서 혹 누군가 우리의 말을 들어줄까 얘기를 걸어봐도 묵묵부답. 우리는 거기서 정확히 ‘소외감’, 가상 세계 속에서의 외로움을 느꼈다. 물론 어떤 방식으로든지 다른 게이머들과 이야기를 공유하고 소통하기 위해 여러 가지로 자기 표현을 해도 모자랄 판국에 우리는 아이디도 자기 메일 아이디와 같은 ‘next4977’, ‘deathnile’, ‘Nainiya’ 등으로 지어놓았으니 잘 될 리가 만무이다. (다른 게이머들이 우리를 정확히 부르기 위해서는 한/영 키를 눌러야하므로, 대개의 경우 그냥 ‘님’으로 통한다.)
그림 5. 각각의 캐릭터
그러나 우리가 절실히 알 수 있었던 것은 온라인 게임, 또 그 게임 세계는 결코 단일 사용자를 전폭적으로 배려하지 않는다는 점이다, 마치 현실의 세계가 평범한 한 사람만을 위해 존재하지 않는 것처럼. 특별히 수행해야 할 미션도 없고, 체계적인 도움말도 없이 아무것도 할 줄 모르는 채로 벌판에 내던져진 그야말로 현실의 고아나 무능력자와 같은 꼴이었다. 무엇을 어떻게 하든 캐릭터를 만들어가고 그 속에서 생활하는 것은 이용자의 몫일뿐, 게임 시스템에서는 “이렇게 하는 게 어때요?”식의 몇 줄짜리 팁을 제공하는 게 전부였다. (한 사람의 인생에 대해 이것저것 ‘충고’할 뿐 결국 정답도 없고 대신 살아주지도 않는 것과 동일한 느낌.)
물론 이에 대해서는 리니지 고수인 친구의 다른 설명도 있다. 리니지2가 나오고 다른 온라인 게임도 많은 상황에서 리니지1의 신규이용자 증가는 정체 상태라는 것이다. 자연히 게임 세계에서도 현실 세계와 유사하게 빈부격차가 나타나게 되고, 초보 사용자들이 쉽게 적응하기 어려울 정도의 기존 사용자들의 집단성, 그들만이 공유한 이야기가 이미 존재하고 있는 것이다. 마치 좁은 땅과 한정된 자원 속에서 인구밀도가 높아 경쟁이 심화된 대한민국이 공식적으로 이민을 받지 않는다는 점, 그 와중에 이주노동자나 외국인에 대한 편견과 차별 등의 ‘집단배타성’이 심한 것과 유사한 현상인 것이다.
화면에 존재하는 여러 버튼들을 직접 눌러가며 그 기능을 하나씩 알아가고, 화면상의 캐릭터를 목적없이 여기저기로 옮겨가는 따분한 상황에서 다른 게이머의 등장은 굉장히 반가운 일이었다. 혼자 하는 여행 중에 인적이 없는 낯선 곳에서 아는 사람도 아닌 그냥 ‘사람’을 만났다는 것 자체의 기쁨과 유사하다. 괜히 아는 척하고 대꾸하지 않아도 줄곧 뒤를 따라가는 행동 속에서 인간의 근원적 외로움이나 잘 모르는 상황에서의 ‘따라하기 심리’를 경험할 수 있었다.
그러다가 게임 세계 속의 나에게 있어서 크고 먼 미래에 대한 포부 따위가 아닌 당장 눈 앞의 해야할 일, 흥밋거리가 생겼으니 그것이 바로 “레벨 업”이었다. 초보 이용자들은 당장 몬스터를 상대하기에는 너무 약하기 때문에 일단 ‘허수아비’를 때리는 ‘수련’을 통해서 레벨업을 할 수 있다는 TIP 정보 창의 내용을 읽고 맵을 뒤져 허수아비가 박혀있는 곳으로 이동했다. 맞아도 비명도 지르지 않고 그 반대급부로 나를 공격하지도 않는 허수아비를 그저 계속해서 때리고 있노라면, 마치 매일 똑같은 일상생활을 경험하는 것처럼 매우 지루하고 의미 없는 경험이라는 생각도 들었다.
그러나 놀라운 점은 조금씩 경험치를 늘려서 그 게이지가 거의 꽉 찼을 때, 다음에 일어날 일에 대한 기대감이 대단했고, 결국 레벨 업을 하고 말았을 때 그 짜릿한 쾌감이 형용하기 어려울 정도였다는 것이다. 잘 모르는 세계 속에서 줄곧 회의감만 느끼고 지루해하기만 했던 직전까지의 내 모습과는 전혀 다른, 마치 현실의 내가 돈벼락과 같은 뜻밖의 행운을 얻은 것과 비슷한 느낌이 들었던 것이다. 전적으로 내 마음대로 – 마음대로 입히고, 움직이고, 공격하는 – 온전히 나의 통제 하에 놓여있는 화면 상의 또 다른 내가, 나의 꾸준한 노력에 의해 극적으로 발전하는 모습이 나에게는 그렇게 기쁜 일이었던 것이다.
레벨 업의 경험은 곧 게임에 대한 재미와 몰입으로 이어졌고, 우리는 보다 적극적으로 게엠의 여러 구조에 대해 호기심을 갖고 반응하였다. 아이템 현금 거래, 아이템 도둑질 등과 같은 부정적 시각을 그저 막연히 가지고 있었지만 실제로 게임을 해 보며 무슨 아이템인지 그 용도와 사용 방법은 어떤 것인지 전혀 모름에도 불구하고 단지 화면 상에 널려있는 그 아이템들을 마우스로 클릭하면 ‘또 다른 내’가 그것을 주워 갖는 모습 자체가 흥미로웠다. 마치 고물상이 된 기분으로, 줍는 것이 다 내 것이라는 생각에 들떠 지도의 곳곳을 돌아다니며 아이템을 획득했던 것이다.
그와 더불어 1에서 2로, 2에서 3으로 레벨이 오를수록 늘어가는 자신감과 내 캐릭터의 능력, 행동가능성은 결국 리니지에 몰입하는 사람들의 심리가 이런 것이 아닐까 하는 추측까지 하게 만들었다.
(레벨 : 레벨은 게임 상의 캐릭터의 능력을 보여주는 대표적인 수치이다. 레벨을 보면 대략 그 캐릭터의 체력, 마법력, 공격력을 짐작할 수 있다. 일반적으로 레벨을 높이기 위해서 ‘경험치’ 개념을 사용하는데, 경험치는 몬스터를 잡거나 마법을 사용할 때마다 경험치가 조금씩 올라가 요구되는 양에 도달하면 레벨이 한 단계 올라간다. 리니지에서 한 단계의 레벨 업을 위해 요구되는 경험치의 총량은 현재의 레벨에 도달하기 까지 쌓아온 모든 경험치의 양과 같다. 점점 레벨 업이 어려워지는 것은 이 때문이다.)
2. 그리고, Level 10이 되다.
“쳇바퀴 도는 일상… 대체 고지는 어디인게냐!!”
허수아비 공략을 마치고, 실제 몹들과의 전투를 앞두고 느꼈던 감정은 아마도 새로운 전투에의 기대감 혹은 환상이었던 듯 하다. 게임을 반복경험하면서 게임세계를 읽는 눈이 어느 정도 생기게 되었는데, 그것은 눈 앞에 보이는 것들도 제대로 인식하지 못하던 초보 게이머의 어려움에 비한다면 장족의 발전이었다. 단조로운 역할수행(허수아비 공략)을 벗어나 실감나는 전투를 벌이고 게이머들과도 조금씩 알아가야겠다는 막연한 생각을 안고 레벨 올리기에 박차를 가하기 시작하는 시점이었다.
레벨이 상승함에 따라 HP가 증가하였고, 늘어난 HP는 확실히 전투에서의 승률을 높여 주었다. 또한 사냥터를 어슬렁 거리다가 쓸 만한 아이템(투구, 갑옷, 방패 등)을 주워 착용하면 방어력이 높아져서(게임상에서는 숫자가 낮아질수록 방어력이 상승한다) 전투시 손실을 줄일 수 있다는 사실도 알게 되었고, 빨간물약이 전투과정시 치료제의 역할을 한다는 것도 알게 되었다. 경험을 통해 리니지 공간 속에서 하나 둘 씩 정보를 알아가고, 강해진다는 느낌은 꽤 쏠쏠한 재미를 주었다.
그런데, 레벨이 높아질수록 레벨을 하나 올리기까지 걸리는 시간이 너무 오래 걸리기 시작했다. 허수아비를 클릭하고 드래그한 후 10분 정도만 기다리면 됐던 레벨업 소요시간이 레벨이 높아지자, 말 그대로 노가다의 작업으로 변한 것이다. 게다가 HP와 방어력은 높아졌지만 실제 전투에서 이길 수 있는 몹들(지친렛맨, 고블린, 오크 등)의 수는 한정되어 있었고, 조금만 덩치 큰 적수를 만나면 신나게 공략당하기 일쑤였다. 처음에는 성취감과 희열을 안겨주었던 몹을 사냥하는 과정이 이제는 반복적이고 의례적인 과정으로 변해 갔던 것이다.
그리고 이런 상황을 타개할 수 있는 방법이 시간을 들여 레벨을 올리는 것 혹은 돈을 들여 아이템이나 아데나를 구입하는 수 밖에 없다는 사실은 좌절감을 더해 주었다. 게임공간에서 상호의사소통을 할 수 있을 것이라는 막연한 기대는 몇 번의 거절과 욕설, 무시당함의 경험을 통하여 서서히 사라지고, 능력이 어느 정도 될 때까지는 그냥 혼자서 모든 일을 해결해야 겠다는 생각이 들기 시작한 것도 이 시점이다.
MMORPG라는 게임의 형태는 일종의 가상사회를 의미한다고 배웠다. 즉, 게임 세계 역시 물리적 실체는 없지만, 일종의 사회이기에 온라인 게임이라는 환경이 제공하는 맥락은 개인에 따라 다르게 규정되고, 개인은 자신만의 이야기 구조를 만들어가게 되는 것이다. 이러한 과정은 개인이 사이버 세계에서 또 다른 자아를 구성해 가는 방법이다.
리니지라는 공간 속에서 우리 조원들이 꿈꾼 이야기도 다들 상이했다. 여타의 3D게임에서 느낄 수 있는 스펙타클한 전투 장면을 꿈꾼 조원도 있었고, 아이템 장사로 현실에서 돈을 벌어보고자 하는 조원도 있었다. 그러나 공통적으로 게임 내의 개인들과 상호작용을 한다거나 미래를 알 수 없는 모험을 펼치기보다는 안정된 기반 속에서 주인공이 되고자 하는 욕구가 강했다. (이는 시간적 제약이라는 현실적 어려움과 함께 개인의 라이프스타일이 반영된 결과인 듯 하다.) 그러나 반복되는 전투의 과정과 내가 원하는 스토리를 구성할 수 있는 능력치의 한계(게임에의 통제감이 차츰 감소하는 과정 속에서)는 게임에의 효용을 감소시켰다.
전투에서의 쾌감, 아이템 습득의 즐거움, 점점 올라가는 레벨 등은 게임공간에서 강화요인으로 작용하여 반복적인 행동을 추동시킨다. 그러나 이와는 반대로 단조로운 일상과 현실적 반전의 어려움 속에서 느껴지는 양가감정은 자기 효능감과 통제감의 수준을 떨어뜨려 게임과 부적 감정들을 상호연합, 조건화하게 된다. 이러한 일련의 과정들은 리니지라는 맥락이 제공하는 환경단서로서의 측면이라고 볼 수 있다.
그런데 환경단서를 해석해내는 조원들의 태도가 게임의 이야기를 만드는 중요한 인자로 작용했다. 15년 동안 사설감옥에 감금되어 사회적 교류가 불가능했던 ‘올드보이’의 최민식의 이미지처럼 우리 조원들은 주인공이 되지 못할 바에는 스스로를 고립시키는 고독한 사무라이가 되기를 바랬던 것이다.
레벨 10이 되는 순간 엔씨소프트에서 친절하게 제공했던 경고문이 떠오른다. ‘레벨 10부터는 캐릭터가 전투과정중 죽게 될 경우, 경험치가 감소하게 되니, 주의하십시오.’ 사이버 세상에서 살아간다는 것, 이거 보통 노력을 요하는 게 아니다. 나의 환상은 어느 정도의 물적조건이 갖춰져야만 실현될 것인가?
3. Level 5 vs Level 10 (표로 비교)
흑기사에겐 죽임을 당함. / 지지부진한 능력 성장에 지루함.
능력 발휘에 자신감. / 지침.
4. 게임 속 경험 vs 현실 경험
레벨 5가 된후 전투 경험을 통해 레벨 10까지 올라가는 과정에서 우리가 곧잘 느낀 어려움과 지루함은 결국,
1) 게이머가 목표 레벨을 설정하지 않았고,
2) 나의 능력이 어느 정도인지 가늠하기 쉽지 않으며,
3) 가늠의 방법은 몹들은 공격, 죽이는 것인데, 이때 죽일 수 있는 몹의 종류가 레벨 4, 5와 그닥 다르지 않은, 한정적이었기 때문이었다고 생각한다.
이 점은 현실에서 우리가 어떤 역할, 일을 수행하는데 자주 느끼는 심리와 유사하다. 조원 중 한명의 경험을 들어보자.
작년 봄과 여름, 평소 자원 활동가로 참여하던 시민단체인 ‘문화연대’에서 주최한 콘서트를 기획할 일이 있었다. 자원 활동이니 당연히 무보수의 일이었지만, 해야할 일들은 기획단의 멤버인 이상 일반 기획인들과 다를 바가 없었다. 나를 포함한 기획단은 반이상이 자원활동가로 이루어졌으나 해야할 일들이 일정량 각자에게 주어지고, 또 기획단인 만큼 콘서트 전반을 운영하여야 하므로 통제권도 강했다.
한편 콘서트 20일 전, 당일날 관객 입장시 티켓팅과 관객 질서 유지를 담당하는 자원 활동가 스무명을 모집, 이틀의 교육 기간을 가졌다.
공연 당일날 막상 공연이 닥치고 나니 현장에서 발생하는 예기치 못한 문제들이 마구잡이로 발생하여 기획단들은 이리 뛰고 저리 뛰고 정신이 없었다. 반면, 스무명의 자원활동가들은 공연 시작 전 티켓팅 시에는 열심히 일했으나, 공연이 시작하자 자신들이 좋아하는 뮤지션을 보기 위해 자신들의 위치를 이탈하거나 삼삼오오 모여 수다를 떠는 등의 나태한 모습들을 보여 기획단의 속을 썩였다.
콘서트 평가를 하는 자리에서 가장 문제로 떠오른 것이 바로 이 점이었다. 봄 콘서트 이후 여름에 두 차례 더 예정이 되어 있고, 또 시민단체 여건상 전문 아르바이트생을 고용할 수 없기에 자원 활동가를 어떻게 하면 효율적으로 관리하느냐가 논의되었다. 이때 한 기획단원이 말하기를, “우리는 할일도 많고 책임도 분명해서, 왜 우리가 이 일을 하는지를 알고 일을 했지만, 그 사람들은 그렇지 못했다. 그들은 해야할 일이 있다고 크게 느끼지 못하였으며, 자리를 이탈했을때 기획단에서 제자리를 지키라고 경고해도, 그들이 책임을 다하고 있지 못하고 있으며 잘못을 저지르고 있단 느낌조차 못 얻는 듯 했다.” 라고 밝혔다.
다시 말해서, 일반적으로 사람은,
1) 자신의 책임의 범위가 얼마나 명확하고 구체적으로 정해져 있는지,
2) 자신이 해야할 일이 전체 일의 진행과정에서 중요한 비중을 차지하는지
가 역할 수행에 중요하며, 또 일정량 이상의 일이 주어져야 일을 열심히 한다.
게임 속 캐릭터 플레이에서도 비슷한 양상을 띠는 것을 볼 수 있었다. 앞에서 설명과 비교하는 표를 통해 밝혔다시피, (특히 우리와 같은 저레벨에다가 게임을 그닥 즐기지 않는 플레이어들의 경우)
1) 구체적인 목표 레벨이 정해져 있지 못하고,
2) 게임 중 아이템을 습득하거나 몹을 공격하는 플레이로는 리니지의 마을에서 두각을 나타내지 못하는 주변인에 머무르며, 혈맹 등을 맺어 관계상에서 중요 인물이 되기도 힘들고,
또, 다섯 레벨 정도 업되서는 몹을 죽일 수 있는 능력도 크게 늘어나지 않는 등, 게임 플레이어로서의 역할이 불분명한데다가 그 비중도 적기 때문에, 조원들은 계속 해서 게임에 흥미를 느낄 수 없었던 것이다.
5. 그렇다면 현실에서 역할 분담과 수행은 과연 어떻게?
지금까지는 리니지라는 공간 속에서 조원들이 ‘자신의 역할이 과소평가되었고, 이에 따라 자신을 주인공으로 하는 이야기를 구성할 수가 없었다’라는 분석에 기반하여 이를 현실 속에서의 동기부여 수준과 사회적 중요도가 낮은 역할과 비교하였다. 그럼 논의를 좀 더 확장시켜 현실에서의 역할 분담과 수행에 대한 여러 사회심리학적 연구들을 살펴본 후 이를 조원들의 사례에 접합시키는 작업을 수행하도록 하자. 먼저 역할이론이 무엇을 이야기하는지에 대한 기존의 연구자료를 살펴보겠다.
1) 기존 연구의 정리
역할이론에서는 사회와 개인의 집합점을 ‘역할’로 본다. 이러한 역할이론은 개인들간의 상호작용을 사회제도의 틀 속에서 이해하는 것이다. 다양한 유형의 인간관계에 있어서 기대들이 이루어지기 위해서는 역할담당자로서의 개인의 역할수행능력이 전제되고 있다. 우리들의 사회생활 대부분이 사실은 제도적 틀 속에서의 역할관계로 되어있다는 점에 대해서는 대체로 견해를 같이 하지만, 이러한 역할관계 현상을 이론적으로 개념화하는 문제에 있어서는 그 관심방향이 여러 갈래로 나누어지는데, 역할의 종류에 따라서 다음과 같은 분류방식이 취해지기도 한다.
첫째, 규정된 역할로서 지위에 있는 개인들의 기대에 개념적 강조가 주어질 때, 사회는 보다 분명한 규정들을 요구한다. 개인의 자아와 역할수행기능은 이러한 사회의 규정들을 충족시키기 위해 작용한다. 둘째, 주관적 역할로서, 모든 기대란 자아의 프리즘을 통해 매개되므로 결국 지위를 가진 개인에 의한 해석의 대상이 된다. 이 입장에서는 상호작용에서 개인들의 주관적 평가를 더욱 강조한다. 셋째, 시행된 역할로서 사회의 규정성이나 개인의 주관적 평가나 모두 결과적으로 행동에서 드러나므로 이 때 사회는 상호관련된 행동의 그물망으로 이해된다.
하지만 이렇게 분류된 역할들은 실제로는 따로따로 이루어지는 대신, 중첩적으로 나타나는 경우가 많다. 상호작용을 이와 같이 역할이론적으로만 볼 때, 개인이 가지고 있는 성격의 작용이나 상호작용이 이루어지고 있는 상황적 조건에 대한 충분한 설명이 이루어지기 어렵다. 이러한 약점을 극복하기 위해 랄프 터너(R.H.Turner)는 상징적 상호작용론과 역할이론을 하나의 개념적 틀로 통합시키려고 시도한 바 있다. 터너는 개인에게 자아개념의 출현이 상호작용과 사회의 기능작용을 촉진시킨다는 미드의 통찰력을 확대시켰다. 자아는 개인에게 역할들을 식별하고 그 중요도와 유의도에 따라서 그 역할을 배분하는 방법을 개인에게 제공해준다. 그런가 하면 자아는 행위자로 하여금 역할들을 가로지르는 하나의 정체성을 유지하게 하며, 그에 반대되는 상황에서는 저항을 하도록 가르치기도 한다.
따라서 사람들은 여러 가지로 다양하게 부여된 역할들을 자아에 통합시켜야만 행동할 수 있다. 이를 위해 개인적인 노력들을 기울여야 하는데, 터너는 다음과 같은 역할들이 자아와 통합될 가능성이 높다고 말한다. 좋게 평가할 수 있는 것, 잘 수행할 수 있는 것, 좋게 평가되고도 잘 수행해낼 수 있는 것, 가시적이며 보다 쉽게 타자에 의한 평가의 대상이 될 수 있는 것, 포괄적이고 사회적 맥락을 가로지르는 것, 개인적이고 주관적으로 규정된 혜택을 제공하는 것, 시간과 노력의 지출이 큰 것, 그것에 도달하려면 희생을 치러야 하는 것, 공적으로 수행되고 공적인 정당화가 필요한 것, 그리고 연장된 역할긴장이 있으며 그 긴장을 제거하고자 하는 노력이 필요한 것 등이 그것이다.
2) 분 석
개인은 환경이 제공하는 맥락에 더해 자신의 감정을 동기화하여 행동을 하게 된다. 즉, 행위시 개인은 자신의 느낌, 이해, 자아상 등을 고려하는 것이다. 사람들은 단지 사회적으로 혹은 경제적으로 가치 있다고 여겨지는 것들에 따라 행위하는 것이 아니라 집단생활에 참여함으로써 어떠한 사회정체감을 발견한다. 즉, 표현을 함으로써 자신의 일정한 이미지를 발전, 지속시킨다. 개인은 자기존중감과 자아효능감을 유지하고 고양시키기 위해 자신을 긍정적으로 보려고 노력하는 것이다.
사람들은 전체로서의 집단의 관점으로부터 자신의 행위를 고려하고 다른 사람의 입장을 통해 그들의 행위의 결과를 상상하기 때문에 사회조화를 이룰 수 있는 것이다.(규정된 역할) 그러나 그들은 또한 다른 사람을 고려하기에 앞서 자신에 몰두하고 자신의 이해에 따라 행동할 수 있다.(주관적 역할) 사람들은 사회공동체의 조직화된 생활에 협조함으로써 일정한 자아와 자긍심을 얻고 유지하면서 또한 보다 개인적인 수단을 통해 이러한 목적을 달성할 수도 있다.(시행된 역할)
현실에서의 역할 수행에는 위의 세 가지 개념이 혼재되어 있으며, 역할갈등과 역할긴장 등 여러 가지 불안요소를 경험할 때 다양하게 부여된 역할들을 자아에 통합시켜야만 행동할 수 있다. 역할을 자아에 통합시키는 작업에서 중요한 것은 자기통제감과 자기효능감이라는 요소이다. 즉, 개인은 어떠한 역할에 대하여 적절한 수준에서 동기부여를 하고, 그것을 자신이 통제할 수 있다는 확신을 가질 때 역할수행을 통하여 만족을 얻게 되는 것이다.
조원들이 느꼈던 자신들의 이야기가 제대로 풀려가지 않는다는 느낌은 현실공간에서 개인이 경험하는 감정과 유사하다. 동기에 대한 이론에서는 개인이 행위를 동기화할 때 성공가능성이 높다는 것 보다는 실패가능성이 낮다는 것이 더 결정적 인자로 작용한다고 밝히고 있다. 즉, 자신의 효능감을 유지하기 위한 방편으로 개인은 실패의 가능성 자체를 사전에 차단하려고 하며, 통제력이 발휘되지 않는 이유를 외적으로 귀인하게 되는 것이다. 즉, 조원들이 게임 상에서 자신의 역할이 미미함을 느끼고 이를 통제할 힘이 자신에게는 없다는 것을 느끼자, 이 상황을 외적으로 귀인(부족한 시간, 현실적 어려움 등)함으로써 자신의 자존감을 보존하고, 환상을 유지하려 한 것은 리니지가 제공하는 새로운 맥락이 현실의 맥락과 상당히 유사함을 인지하고 이를 회피하고자 하는 방어기제로서 볼 수 있다.
6. 우리가 아닌 고 레벨은 어떻게 역할 분담(혈맹)과 수행을 하는가?
그렇다면 겨우 레벨 10의 캐릭터와 레벨 50 이상의 고 레벨 캐릭터는 구체적으로 어떻게 다르게 게임을 하고 있을까? 어떤 다른 심리 상태를 보이고 있는 것일까? 혹시 우리가 게임을 잘못하고 있기 때문에 온라인 게임 세계를 있는 그대로 바라보지 못하고 있을 가능성도 배제할 수 없어서 리니지 고수를 직접 만나 경험담을 들어보고, 궁금한 것을 물어보았다. 연세대학교 공학계열의 백모군(20)과 소모군(20)은 흔쾌히 자신의 계정까지 빌려주면서 인터뷰에 적극적으로 임했다.
학창시절을 리니지와 함께 보내며 성장했다는 소군은 리니지는 5년 이상 지속되면서, 하나의 새로운 안정된 세상을 이루었다는 말로 시작했다. 그의 강조 중에서 인상 깊었던 것은 리니지 세계가 단지 현실 공간과 유사한 사이버 공간으로서 기능하면서 혼란 속의 세상이 아니라 매우 질서 있고 안정된 공간이라는 지적이었다. 리니지 세계는 오랜 기간을 통해 그 나름의 규칙과 함께 제작사의 이용자 의견 수렴 등의 여러 방법으로 이미 힘의 균형과 조화를 이루고 있다는 사실이다. 그는 언론에 가끔 보도되는 게임 세계 속의 범죄 사건에 대해서도, “이 정도면 거의 절대 이상적인 수준이다, 현실 세계에서 지금 이 순간에도 수없이 일어나는 잔인무도한 범죄를 생각해보면 리니지 속처럼 질서 있는 곳도 없지 않은가.” 라는 말로 일축했다.
우리의 핵심 물음인 허접 캐릭터와 고수 캐릭터의 생활 차에 대해서는, 게임의 목적 차이라는 단순한 논리로 설명했다. 즉, 게임을 하는 스타일의 차이라는 것이다. 리니지 세계에서 주류가 되고 싶은 확고한 욕심이 있고 게임을 진정으로 즐기는 사람이라면 플레이하는 것이 마치 다수의 사람들의 현실 인생처럼 조심스럽고 노력하고, 성취 지향적이라는 것이다. 온라인 게임이 기존 게임처럼 미리 정해진 미션이 있는 것은 아니지만, 매번 다른 수많은 사용자들이 일으키는 사건, 갑자기 자신이 갖고 싶은 아이템이 생기는 것 등등이 그 때 그 때 직접 반응하고 몰두해야 할 목표는 있는 것으로 보인다. 허접 캐릭터의 경우 리니지로 돈을 벌 생각이면 장사를 하는 데 필요한 만큼만 리니지를 할 줄 알면 되는 것이다.
그게 아니라 지금 바로 리니지를 잘 하고 싶으면, 초기 자금을 투자하거나 실제 친구의 도움을 받으며, 리니지 플레이포럼을 애용하며 2~3시간 씩 몰두하면 한 달도 채 안되서 ·빠져들게 된다는 조언도 덧붙였다.
현실에서는 단지 평범한 대학생에 불과하지만 리니지 린델 서버에서는 서버 내 다크 엘프 클래스 캐릭터 중에서 레벨 50 이상의 10명 속에 자기 자신이 끼어있고, 장비 까지 따지면 서버 내 두 손가락 안에 들기 때문에 자신이 지나가면 모르는 사람이 인사할 정도라고 하는 말이 인상적이다. 가히 리니지의 세계의 원칙은 “부익부 빈익빈”, “억울하면 강해져라.” 라고 말할 만 한 것이다.
이렇듯 RPG게임의 기본 원칙에 따라 레벨과 장비의 차이는 곧 게임 세계 속의 다른 대우, 행동 가능성의 차이로 연결되는 것이다. 레벨 10에서 상대할 수 있는 몇 가지 몬스터와 비교해서 레벨 50의 캐릭터는 수십가지의 몬스터를 상대할 수 있다. 허접 유저는 화면 상에서 이동하는 것만으로도 몇 분을 지겨워해야하지만, 고랩 유저는 원하는 장소로 언제든지 이동이 가능하다. 쓸 수 있는 마법이 한 화면에 모두 표시되지도 않고, 하나만 있어도 좋은 물약이 창고에 수백 개씩 쌓여있다.
레벨 10의 캐릭터가 게임에 접속해도 레벨 업을 위한 몬스터 잡기 말고는 다른 주어진 일이 없는 것과 다르게 레벨 50의 캐릭터는 그에 걸 맞는 혈맹에 소속되어 혈맹에 필요한 일도 맡아서 해야 하고, 때로는 게임을 끄고 싶어도, 주위 사람과 같이 플레이 하느라 괴롭기 까지 하다. 게임 세게 속에서 확고한 자기 위치와 역할이 있는 것이다.
그러나 이러한 것이 결국 어디선가 나에게 부여한 임무가 아니라는 점에서 레벨 10에서 난관에 봉착한 우리의 문제를 직접적으로 해결해주지는 못한다. 게이머가 하는 행동만큼만 게임이 만들어지는 것인데, 환경을 탓할 수는 없다. 단지 빈익빈 부익부가 심화된 리니지 세계의 높은 진입장벽을 실감하고 있는 것이다. 게임 제작 시에는 있지도 않았던 “혈맹 아지트” 라는 개념이 만들어지고, 그 아지트가 마치 현실의 부동산 가격처럼 위치나 평수에 따라서 값이 매겨지는 리니지 세상 속에서 레벨 10의 캐릭터들은 너무나 순진하고 단순한 마음으로 게임에 임했는지도 모른다. 현실을 그렇게 안일하게 살아가면 반드시 실패하는 것처럼 게임 속 세상 역시 마찬가지인 것이다.
* 게임을 끝내며..
그렇다면 우리의 생각은…!
슬램덩크로 유명한 작가 다케히코 이노우에의 ‘배가본드’를 본 적이 있는가? 주인공 다케조는 고독한 사무라이의 전형이다. 그의 존재 이유는 전투이며, 전투를 통해 자신을 찾아가고 조금씩 성장해 나간다. 흥미로운 것은 그의 고향친구 마타하치의 경우이다. 다케조와 어린 시절을 함께 보냈던 마타하치는 그저 그런, 약간 비열한 하지만 일상의 우리의 모습을 담은 캐릭터이다.
한 가지 예를 더 들어 보자. 최근에 개봉한 블록버스터 ‘트로이’를 알고 있는가? 호메로스의 ‘일리아드’를 현대적 자본의 힘으로 복원한 이 영화에는 극명하게 대비되는 캐릭터가 등장한다. 이미 짐작했겠지만, 세상의 허무와 고독을 다 짊어진 듯 한 고독한 검투사 아킬레스와 비열한, 속된 말로 찌질한 면모의 극치를 보여주는 패리스 말이다.
결론을 내려야 하는 시점에서 갑자기 왠 엉뚱한 이야기냐고? 두 작품 속에는 우리가 리니지라는 공간에서의 작업을 통해 그려내고 싶어했던 이야기와 사이버 공간 속에서는 정말 피하고 싶은 이야기에 대한 은유가 담겨져 있기 때문이다.
마타하치와 패리스는 오프라인 공간에서의 우리의 모습을 보여준다. 레포트에 쫓기고, 조모임에 시달리는, 그런 무수한 개인들 중에 하나 말이다. 좀 더 폼나게도 살아 보고 싶고, 사이버 신인류의 특징이라는 카오스적인 라이프 스타일도 가져보고 싶지만, 그저 그렇게 현실에 안주하는 자신의 모습. 섬뜩하지 않은가?
리니지라는 공간에서는 좀 더 멋진 자아를 그려내고 싶었다. 전투도 잘 하고, 아데나도 많고, 기타 등등 겉으로 드러나는 이미지를 통해 나를 표현해 보고 싶은 욕망. 다케조와 아킬레스처럼 그냥 고독한 개인으로서 승리의 쾌감 속에서 그렇게 살아보고 싶었다.
그런데… 나의 능력은 한계에 부딪혔다. 세상에 공짜는 없다는 뼈저린 가르침. MMORPG라는 가상사회는 본질적으로 사회와 별반 다를 것 없다는-돈 없고, 빽도 없는 데다가 능력도 없으면 살기 힘들다는- 경험적 교훈이었다. 폼 나는 주연은 안되더라도 극에 양념 역할을 하는 조연이라도 되야 할 것 아닌가? 사이버 공간에서 효능감과 통제력을 상실한 자아는 사이버 공간이 제공한다는 환상이 깨어짐을 발견하게 된다.
어쩌면, 그것은 셀프 핸디캡핑일지도 모른다. 사이버 공간의 탐색이 여의치 않아지자 나오는 거짓말이라고 할 지도 모르겠다. 그런데, 엄연한 사실이다. 조원들이 리니지를 통해 얻고자 했던 것은 현실보다 그럴싸한, 고독한 전사의 이미지였다. 단조롭게 반복되는 전투와 단순 클릭이 아니었단 말이다.
아다치 미츠루의 작품 ‘H2’의 종결부에서 감독은 고시엔 결승전에서 에이스 히로를 등판시키기 위해(휴식을 위해), 준결승전에서는 중견수 키네를 선발로 등판시킨다. 어린 시절 투수 역할을 맡았던 적이 있지만, 고교에 올라와서는 처음 마운드에 서는 그는 7회가 되자 스피드가 떨어지고, 제구력이 엉망이 된다. 감독에게 애절히 교체를 원하는 눈빛을 보내는 키네. 자, 감독의 선택은 어떤 것이었을까? 감독은 에이스 히로를 아예 라인업에서 제외시켜 버린다. ‘남은 이닝은 너 혼자 책임져라~’ 어쩌면 나의 에너지를 불완전연소시켜 버려왔었는지도 모른다는 키네의 독백은 가슴 속에 공명을 가져다 준다.
왜 또 만화이야기냐고? 뭐, 승부는 이제부터고, 우리의 이야기는 이제 시작이라는 말이다. H2 이야기 하나 더해볼까? 타율도 타점도 홈런도 모두 히데오에게 뒤지는 히로가 히데오를 앞서는 타격분야가 딱 하나 있다. 승리타점. 승부를 결정짓는 순간이 오면 그만큼 집중력을 발휘한다는 이야기인데, 학기가 끝났다고, 리니지를 놓아 줄 수는 없다. it’s showtime. 아직 촛불을 끄기엔 이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