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월 242007
 

  0. 열정


   열정을 사랑의 필수요소로 볼 것인가에 관하여는 이견이 존재하는 것 같다. 극단적 이성숭배자들은 사랑이란 감정을 부정하고, 짝짓기를 위한 일시적인 생화학작용으로 보아 그 지위를 숭고한 것에서 하찮은 것으로 끌어내린다. 몇 번의 실패로 상처입은 사람들은 쉽게 사랑의 덧없음을 논하며, 새로운 열정에 사로잡히는 것을 경계한다. 이렇게 사랑에 있어서 열정의 역할을 배제하는 사람들은 흔히 성숙하고 어른스러움을 내세워 자신의 연애방식을 변호하려한다. “열정은 탐닉에 의하여 더럽혀지고, 구속에 의하여 살해당하는데 어느 쪽이든 그 상실은 불가피하다.” 라는 말도 있다. 한 번 보고 두 번 보고 자꾸만 보고 싶은 심정과 같은 순정은 만남을 거듭할수록 변질되고, 종국에는 상대방 뿐만아니라 스스로의 자제에 의하여 구속되고 수그러들고 만다. 그러나 열정의 덧없음을 한탄하는 이 말이 열정의 무용함을 주장하는 근거가 될 수는 없다.


   논리적 오류 중에 우리가 흔히 범하는 것으로 ‘성급한 일반화의 오류’, ‘자연주의의 오류’등이 있는데 위 부류들의 경우에도 이에 해당한다 볼 수 있다. 우리는 속단해서도 안 되고, 결과를 당위로 받아들여서도 안 된다. 


   물론 나 역시 열정에 대해서라면 데인 경험도 있고, 그닥 달갑지 않은 게 사실이다. 사랑의 범주를 떠나서라도, 나는 ‘미쳐야 미친다’, ‘당신의 열정을 보여주세요’와 같은 말로 열정을 고평가하고, 열정에 대한 열정을 갖고 싶지는 않다. 카르페디엠이 진부한 얘기가 됐듯 우리시대 열정에 대한 광신은 결국 열정을 열정이 아닌 보잘 것 없는 것으로 만들고 만다. “그만큼 했으면 됐어.”, “할 만큼 했다.”, “수고했어, 어쩔 수 없지.”, “인생 무어 있나. 다시 가는거야.” 와 같은 말들은 더 하고 싶지 않다. 작심삼일이 문제라면 3일마다 작심하겠다는 이런 단발마적인 열정은 어느 덧 습관이 되어 삶을 지배한다.


   그러나 우리가 어떤 것에 관심을 갖고, 선택하고 집중하며 애착을 형성하는 행위, 그 기저에는 어떤 이유로든지, 혹은 별다른 이유없이라도 샘솟는 강력한 감정이 있다. 그 감정에 열정이라는 이름을 붙여야한다면, 그렇다면, 열정은 사랑의 필수요소이지 않을까.


   이성과 진실을 추구하는 것과 꼭 같이, 나는 그녀를 더 많이 알고 싶고 더 깊이 느끼고 싶다. 나를 더 많이 돌아봐주길 바라고, 그녀가 나를 좀더 이해할 수 있도록 뭐든 하고 싶다. 본디 집요하고 고집 센 나의 온 몸이 근질거린다. 가려운 곳은 없지만 도저히 가만 앉아있을 수가 없어서, 이렇게 자리에 앉아 생각만해도, 나도 모르게 다리를 떨며 조바심을 낸다. 어떤 장애물이 있든지 내겐 거칠 것이 없을 것만 같다.



   하지만 쉽지만은 않다. 지나친 열정으로 모든 것을 다 태워버린 경력이 있는 나는 두렵다, 또 다른 사람에게 지울 수 없는 상처를 입힐까봐 그리고 그로인해 나 또한 또 다시 오랫동안 자책의 고통 속에서 허우적 거릴까봐, 두렵다. 무엇보다, 내가 다시 사랑할 수 있을까? 설레이고, 떨리는 첫만남이 다시 가능할까. 사랑이 정상궤도에 들어서 서로가 편안한 사이가 될 때까지 그 지난한, 지루한 과정을 내가 견딜 수 있을까. 으레 겪기 마련인 밀고 당기기, 사랑 싸움, 예의 갖춘 행동과 듣기 좋은 말, 이 모든 사랑의 레토릭을 태연히 반복할 수 있을까. 처음 가는 유격훈련처럼 차라리 모른다면 나을텐데. 나는 문득 로또 당첨과 같은 운명같은 사랑을 희망한다. 그저 이러고 가만 있으면, 하늘에선가 어디에선가 기적처럼 벼락같이 떨어진 여인이 있어, 긴 과정을 생략하고 이상적인 사랑을 나누었으면 좋겠다. 그녀는 지적으로 날카롭고 매사에 능하면서 나를 챙겨주고 리드해주는 자상한 누님이었으면 좋겠고, 내 억센 고집과 당당함 이면에 숨겨진 나약함을 어루만져주는 따스한 어머니였으면 좋겠다. (g ral)


   그러나 언제까지고 이런 비현실적이고, 지극히 이기적인 환상에 사로잡혀 있을 수만은 없다. 그래서 용기를 내어본다. 실상 나의 열정은 완전히 사라져버린 것이 아니다. 어쩜 과거의 나는 다만 기름적신 휴지에 불과했을지도 모른다. 그래서 작은 감정의 스파크에도 쉽게 불이 붙지만 이내 꺼져버리고 말았다. 이제 나는 물에 젖은 장작더미가 되려한다. 그리하여 잔불들에 아랑곳않고 열정으로 몸이 마를 때까지 차분하게 기다릴테다. 그럼 마침내 불이 붙어 오래오래 타오를 것이다. 그렇게 나는 열정으로 충만한 사랑을 할 것이다. 늘상 꿈틀대는 생의 충동처럼, 내 삶도, 사랑도 활기 넘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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