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월 062006
 

닉 혼비의 <피버피치>를 읽다가.


우리의 관계– 난생처음으로 맺은, 진지하고, 지속적이며, 밤을 함께 보내고, 서로의 가족을 만나고, 언젠가 애를 낳게 되면 어떡할지 이야기하는 사이 — 는, 어찌보면 이성 가운데 자신과 비슷한 상대를 만났다는 신기함에서 비롯된 것이었을지도 모른다. 물론 그 전에도 여자친구들이 있기는 했지만 그녀와 나는 비슷한 배경과 비슷한 욕구, 비슷한 관심사와 비슷한 태도를 갖고 있었다. 물론 서로 다른 점도 많았는데, 그건 주로 성별의 차이에 기인한 것이었다. 내가 여자로 태어났더라면 그녀와 같은 여자가 되었을 것이며, 또 그러기를 바랐다. 어쩌면 그런 이유에서 나는 그녀의 취향과 변덕과 환상에 그토록 당황했던 것일지도 모르며, 그녀의 소지품을 보고 여자 방에 대한 환상을 갖게 되었던 것일지도 모른다.


나는 그녀의 방을 보고 나서 여자들이 남자들보다 더 독특하다는 것을 알게 되었고, 그 사실에 괴로워했다. 그녀는 예프츠센코의 시집을 갖고 있었고 (대체 예프츠센코가 누구란 말인가?) 앤 볼레인과 (영국왕 헨리 8세의 아내) 브론트자매들에게 깊은 애착을 갖고 있었다. 그녀는 감수성이 품부한 온갖 가수와 작곡가를 좋아했으며, 저메인 그리어 (호주의 여성학자)의 사상에 정통해 있었다. 그녀는 미술과 클래식 음악에 조예가 깊었고, 대입 시험 과목 이외의 지식도 풍부했다. 어떻게 그런 일이? 어떻게 나는 레이먼드 챈들러의 염가판 소설 두어권과 레이몬드의 첫 앨범에 의지하여 정체성을 형성하고자 했던 것일까?


어쩌면 내 여자친구가 하이버리에 오고 싶어했던 것은 당연한 일일지도 모른다. 하이버리를 빼고는 달리 나에 대해서 알아낼 것도 없었을 테고, (그녀는 나의 라몬스 앨범을 이미 들어보았다.) 내가 그 때까지 감추고 보여주지 않았던 것은 하나도 없었다. 내게도 나만의 세계는 있었다. 친구, 어머니와 아버지와 여동생 등 가족과의 관계, 음악, 영화, 유머감각 등등 하지만 나의 세계가 그녀의 세계가 개성적이었던 만큼 개성적이라고 볼 수는 없었다. 그러나 아스날에 대한 고독하고 강렬한 애정과 거기에 수반되는 필수품들. 최소한 거기에는 뭔가 남다른 면이 있었고 나에게도 눈 두개 코 하나 입 하나 이외의 특징이 있음을 보여주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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