첨부된 논문들을 상세히 읽고, “자유 의지란 존재하는가?”에 대하여 자신의 의견을 개진하시오. 논문들의 경험적인 증거들과 자신의 생각을 명확히 구분해서 글을 쓰시오. 보고서는 중간고사와 같이 글자크기 11 이상, 줄 간격 1.5 이상으로 하여 5 페이지 이상 10 페이지 이내로 작성하시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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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유의지란 존재하는가?
1: 읽기 자료 검토
<Failure to Detect Mismatches Between Intention and Outcome in a Simple Decision Task>
의사결정에 대한 주된 가설은 사람들이 의도와 결과 사이의 불일치가 발견됐을 경우에, 자신의 행동을 조정하여 변화한 상황에 적응한다는 것이다. 그런데 피험자에게 두 장의 여자 사진 카드(닮은 사진 조건과, 닮지 않은 사진 조건)를 보여주고 더 매력적인 여성을 선택하게 한 뒤, 곧 이어 (2초, 5초, 자유시간조건) 피험자가 선택한 것과 다른 카드를 보여주고, 왜 이 여자를 선택했는지 물었을 때, 놀랍게도 많은 피험자들이 카드가 바뀌었다는 것을 알아채지 못했다. (조건 통합 26%만 알아챘고, 시간이 길어질수록 발견률이 높아지긴 했지만 모든 조건에 걸쳐 저조한 발견률이었다.) 그리고 자신이 선택한 카드가 아닌데도 보여준 카드를 바탕으로 이유를 둘러대는 일이 발생했다. 이러한 결과는 우리가 자유의지를 가지고 의도한 행동을 행하는 것이 아니라 발생한 사건의 결과를 토대로 자신의 의도와 자유의지를 “재구성”해낼 수 있음을 시사한다.
<첫 만남에선 자이로드롭을 함께 타라>
육체적인 흥분을 (상대방에 대한) 감정으로 인식하는 과정과 관련한 여러 연구결과가 소개되어있다. 절벽 낭떠러지에서 흔들거리는 다리가 무서워서 흥분한 것을, 다리 위에서 마주친 여자를 좋아하는 것으로 인식하게 된다는 실험, 피험자 본인의 심장박동 소리라고 속이고 미리 녹음해둔 심장박동 소리를 들려주며 여자사진을 보여주면, 빠른 심장박동소리를 들을 때, 호감도가 증가했다는 실험 등이 그것이다.
이것은 구체적인 감정의 상태 –사랑, 미움– 등을 인지한다는 점에서 차이는 있겠지만, 자율신경계의 각성과 정서 사이의 관계에 대한 전통적인 논의를 떠올리게 한다. (Karat, 생물심리학 6th p. 412 참고) 상식적으로 우리는 먼저 특정 정서를 느끼고 이어서 심박률의 변화가 일어난다고 생각하지만 James-Lange theory (1884)에 따르면 자율적 각성과 골격 운동이 먼저 일어난다. 우리가 어떤 정서로서 경험하는 것은 그와 같은 반응에 이름을 붙이는 것이다. 즉, 내가 흥분했기 때문에 사랑하는 것이고, 내가 도망치고 있기 때문에 두려운 것이다. 반면에 Cannon-Bard theory 는 신체변화와 정서경험이 동시에 일어난다고 주장한다. 그런데 어느 쪽이 옳은지 확실히 알 수 없다. 우리는 약물을 이용하여 신경계의 반응을 변화시킬 수 있는데, 실제로 자율신경계의 각성이 변화하면 정서적 경험이 변화하는 것으로 보아 Cannon-Bard 이론은 완전하지 못하며, 신체가 완전히 마비되어 감각을 느끼지 못하는 사람도 정서적 경험이 사라지지 않는걸 보면 James-Lange의 이론도 완전하지 못하기 때문이다. 과연 인간의 의식 경험은 어느 위치에 있는 것일까?
<The zombie within>
의식이 없이도 움직일 수 있도록 하는 감각운동영역이 뇌 속에 있기 때문에 우리는 무의식을 설명하기 위해 걱정할 필요가 없다. 그 근거로 지각을 위한 시각과 운동을 위한 시각의 분리현상을 들 수 있다. 피험자에게 어두운 방에서 빛을 반짝이게 해서 손가락으로 가리키게 하고, 또다시 다른 위치에 빛을 비추고 가리키는 과제를 시켰을 때, 빛을 쫓아 눈이 움직이는 사이에 빛 표적을 약간씩 좌우로 움직여도 피험자는 문제없이 정확히 위치를 가리킬 수 있지만 표적의 위치가 움직였다는 사실은 알지 못한다. 또한 D.F 환자의 경우 수직인지 수평인지 방향을 분간하지 못하면서 편지통에 편지를 집어넣을 수는 있다. 즉, 우리의 운동시스템이 의식과 상관없이 작동할 수 있다는 것이다. 몽유병 환자의 경우 의식이 없는 상태에서 장애물을 피해다니며 돌아다니고, 가구를 옮기고 자동차 운전도 할 수 있다. 노력없이 빠르게 할 수 있는 자동화된 행동들은 의식보다 선행하여 이루어지는 것 같은데, 이런 현상을 받아들이려면 의식적인 마음과 자유의지에 대해 고집해서는 안 된다. 그리고 이를 바탕으로 중요한 질문들을 던질 수 있다. 첫째, 왜 우리는 “의식, 자유의지”를 고집할까. 그것은 아마도 미래계획을 세우고, 다양한 행동 레퍼토리를 만들고, 외현기억이 가능케 하는데 의식이 필요하기 때문이다. 둘째, 무의식적인 행동과 의식에 의한 행동이 일어나는 과정에서 뇌의 신경회로 활동에 차이가 있을까? 활성화 되는 뉴런집합이 다르고 영역이 분리될까? 의식은 매우 짧은 시간(ms) 수준에서 동시에 발화하는 뉴런과 관련이 있고, 무관한 발화는 무의식적인 행동에 영향을 준다는 가설을 세울 수 있다. 만약에 의식, 자유의지가 없는 “좀비”가 있다면 우리는 그가 좀비라는 것을 어떻게 테스트 할 것인가.
<Introduction> – 알수없는제목 (아마도 “의식”)의 책 서문
사람들은 보통 의식적 자아가 행동을 낳는다고 믿는다. 하지만 정말로 그런가? Libet 의 실험(1983)에서, 피험자에게 내키는 때에 손가락을 움직이게 하되, 움직여야겠다고 마음먹었을 때의 시간을 기억해서 보고하게 하고, 실제 보고한 시간과, 실제로 눌러서 반응한 시간 그리고 EEG를 측정했다. 결과 의식적인 행동 뿐만 아니라 무의식적인 행동 이전에 이미 Readiness Potential 이 출현했다. Libet이 실제 보고한 시간과 눌러서 반응한 시간 사이에 의식의 힘이 있다는 식으로 억지스럽게 의식을 옹호했지만, 이 실험은 의식이 행동의 원인이라는 것을 뒤엎고, 행동이나 뇌 활동에 따른 부수적인 산물이라는 초기 연구결과로 의미가 있다. 비교적 최근인 Wegner의 실험에서는, 30초간 컴퓨터 커서를 피험자가 마우스로 자신이 조작했다고 느끼게 만들고, 특정 표적에 멈추기 5초나 1초전에 객체 이름을 들려주기만 하면, 실제로 실험자가 피험자의 커서를 움직인 것임에도 불구하고 피험자의 56%가 자기가 커서를 조작했다고 믿는 것으로 나타났다. 이를 통해 그는 의식적인 사고는 무의식적인 신경활동의 부산물, 환상이며, 우리는 의식적 사고와 행동의 관계를 잘못 추론해서 인과적인 것이라고 믿고 있다고 말한다.
Chapter I 에서는 의식적 사고와 관련한 신경과학적 기초 지식과, 축적된 증거를 소개하고 있다. 의식과 행동의 관계는 의식이 행동을 낳는 한편 행동이 의식을 낳기도 하므로 복잡한 문제이다. 어쩌면 우리는 잘못된 질문을 하고 있는 것인지도 모른다. 의식과 뇌의 신경활동은 상호의존적이고 지금의 질문은 순환논리의 오류에 빠져있는 지도 모른다.
Chapter II 에서는 운동 통제와 의식과 행동의 관계에 관한 실험 연구들이 전제로 하고 있는 명제들에 대하여 철학적인 질문을 던진다. Libet과 Wegner 의 연구가 자유의지가 있는지 없는지에 대해 별로 말해주는 게 없을지도 모른다. 무의식과 의식을 구별해야하며 의식은 의도적 행동에서의 자유의지에 작용하는 것인데, 위 실험에서는 그것을 움직임의 시작과 통제를 통해 측정하려했는데 이것은 적절하지 않을 수 있다. 결국 실험연구를 통해서는 양립론(자유론과 결정론이 양립가능하다는 입장)을 해명하지 못하고, 단지 자유론과 결정론 사이의 논쟁을 보여줄 뿐이라는 것이다. 인간의 자유의지, 의도, 의식적 사고는 다양한 맥락에서, 다양한 기능을 하기 때문에 여러 유형으로 나누어 생각할 수 있다. (예를 들어, 우리가 마음 속으로 의식적인 어떤 생각을 하고 결론을 내려도 그것이 꼭 당장 행동으로 이어지는 것은 아니다.) 따라서, 위의 실험연구들이 의식과 행동의 인과관계가 환상이라는 결정적인 이유를 제공하는 것은 아니라는 것이다. 의식적인 자유의지의 경험은 Wegner가 말한 것보다 훨씬 복잡하고 풍부한 경험이다.
Chapter III 에서는 자유의지 개념과 의식의 효용을 논하며 최근의 심리학, 뇌과학 연구들을 비판적으로 검토한다. 의식은 선천적으로 주어지는 게 아니라 사회에 의해 만들어지는데, “행동통제”에 유리하기 때문이라고 설명한다. “자유의지”에 대한 논의는 법, 사회, 도덕적 판단과 책임과 관련해서 중요한 함의를 가지고 있다. 만약 의식이 행동을 일으키지 않는다면, 죄를 저지른 범인을 법정에서 옹호할 수 있는 근거가 마련되는 것이므로, 이 문제에 대한 섣부른 결론은 사회적으로 위험할 수 있는 것이다. 과연 과학적 연구 결과 사실인 것이, 언제나 사회 정책에 반영되어야 할까? (예를들어 검열제도)
<Apparent Mental Causation>
David Hume의 경험론을 들며, “자유의지” 역시 인간의 다른 지각과정과 같이 일련의 사건들의 조합에 의해 심리적으로 만들어진 “경험”일 뿐이다. 자유의지를 경험하게 되는 요건으로 “선행성 : 의식적 사고가 실제 사건보다 먼저 지각됨. 늦어도 안되고 너무 빨라도 안됨”, “일관성 : 관찰된 사건이 추정하는 것과 일치할 때”, “배타성 : 행동의 원인을 자신의 의식적 사고 외에 다른 곳에서 찾을 수 없어야 함” 등이 있다. (I Spy 실험 결과은 앞에서 소개). 이런 결과는 이미 오래전에 발표된 심리학의 다른 연구결과들과도 부합하는 것 같다. Bem 의 자기지각이론 (나는 야구를 좋아한다. 라는 판단을 할 때, 단지 심심해서 집에서 TV로 종일 야구경기를 시청했을 뿐인데, 그렇게 한 자신의 행동을 반추하여 자신이 야구를 좋아하는 것이라고 생각한다는 것)이나 Festinger의 인지부조화, Milgram의 복종실험 (자신의 행동의 원인을 다른 사람에게 귀인시켜버리는 상황) 등이 그 예이다. 이렇게 볼 때, 결국 자유의지는 환상이며 단지 마음이 자신의 작동기제를 우리에게 표현하는 방식으로 볼 수 있는 것이다.
2 : 자유의지가 있는지 없는지 현재는 알 수 없다.
앞서 살펴본 자료들은 모두 자유의지의 “느낌”에 대해 설명하고 있다. 즉 심리학적 개념으로서의 자유의지인 것이다. 그런데 우리가 “인간이 과연 자유로운가, 자유의지란 존재할 수 있는가”라고 물을 때에는 자유의 개념을 좀더 종합적으로 생각해야한다. 나는 둘로 나누어 생각해 보았다. 하나는 현상학적인 느낌으로서의 자유이다. 이것은 ‘능동성‘, ‘주체성‘ ‘의지‘ 등의 말들로 대체할 수 있다. 아마도 위의 일련의 심리학적 연구들은 이런 의미의 자유에 더욱 중점을 둔 것 같다. 그런데 ‘자유‘ 에서 뽑아낼 수 있는 다른 하나의 내포는 ‘그 어떤 것에도 구속받지 않음‘ 이라는 것이다. 자유의 사전적 의미는 ‘스스로 그러함‘ 이기 때문에 만약 다른 어떤 것의 지배를 받는다면 그것은 자유롭다고 할 수 없다. 이런 의미에서의 자유는 꼭 1인칭적으로 경험될 필요가 없으며, 객관적으로 확인될 수 있는 성질의 것이다. 이러한 자유의 개념을 ‘객관적 자유‘ 라고 할 수 있다.
우리가 자유를 이야기할 때에는 위의 두 내포를 모두 고려하지 않으면 안된다고 생각한다. 현상학적 자유는 가장 직관적이고 실존적이지만 근본적으로 자폐적인 성격을 벗어날 수 없다. 즉, 우리는 자기 자신의 현상학적 자유에 대해서만 말할 수 있는데, ‘인간의 자유‘ 가 의미하는 것은 ‘나의 자유‘ 그 이상이기 때문이다. 객관적 자유는 더 보편적이기는 하지만, 자유의 강렬한 측면을 담아내지는 못한다. 따라서 이 두 내포는 상호보완적으로 ‘자유‘ 라는 개념을 형성해야한다고 생각한다.
나의 생각은, 위의 실험 연구 결과가 증명하듯, 우리가 비록 환상일지라도 현상학적 자유를 느끼고 있다는 것은 너무도 자명하기 때문에 객관적 자유를 증명해 내야지만 인간의 자유를 확실하게 주장할 수 있다는 것이다. 즉 우리 자신이 스스로 능동성, 주체성을 느끼고 있다는 사실은 너무 명확하며, 그것을 따로 증명해야할 필요까지는 없다. 그것의 의미는 우리가 의식적인 행동이라고 믿는 것들이 얼마나 많이 무의식적 원인에 의해 생겨날 수 있는지 알려주는 것 정도에서 그친다. (물론 이것도 매우 가치있는 작업이다.) 사람들은 당혹감을 느끼고 개인의 행동의 원인을 무의식에서 찾으며 자신의 행동에 대한 책임을 회피하려 들 수도 있겠지만, 이내 법과 제도 수준에서 제한되기 쉽다. 학문적으로 보면 만약 객관적 자유가 보장되지 않는다면, 현상학적 자유는 일종의 착각에 불과한 것이 된다. “물질주의”의 관점에서, 그리고 이 세계가 물리법칙으로 닫혀있는 인과폐쇄적인 세계라고 가정할 때, 뇌의 활동이 모두 결정론적이라면, 우리는 객관적으로 자유롭지 않으며, 자유의지는 허수아비 개념이 되어 실재로 존재하지 않는다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
논리적으로 생각해서 어쩌면 현재 인간의 자유, 자유의지는 고작 “예측불가능성”에 기반하여 있는 것으로 간주되고 있는지도 모른다. 인간의 행동은 거의 혼돈에 가깝다. 현재 인간의 행동을 100% 예측할 수 있는 방법은 없고, 심리학이 통계학과 친하다면 아마도 그런 이유일 것이다. 현재 연구수준에서 두뇌는 양자역학을 데려오지 않더라도 충분히 예측불가능하다. 연구들에 따르면, 인간의 두뇌는 재귀적(recursive)으로 기능한다고 한다. 수열의 예를 들면, “1, 1, 1, 4, 9, 22, 80, 358, 818, 2064, …” 우리는 이 수열이 어떠한 식에 의해 만들어진 것인지 쉽게 예측할 수 없다. 이 수열은 다음과 같은 식을 따른다.
f(t(k)) = 2 * f(t(k-1)) + f(t(k-2)) + f(t(k-3)), f(1) = 1, f(2) = 1, f(3) = 1
복잡해보이지만 바로 전의 수에 2를 곱해서 전전의 수, 전전전의 수와 더하는 것이다. 이 식을 그래프로 그려보면 꽤 불규칙하게 움직이는 것을 확인할 수 있다고 한다. 재귀적인 메카니즘은 이렇게 예측불가능성을 엄청나게 증폭시킨다. 유기체의 움직임을 겉으로 보고 그 메카니즘을 – 메카니즘이 존재한다는 사실조차 – 생각하기 힘든 것은 바로 이러한 이유, 생물이 항상 재귀적으로 기능하기 때문이다. 이 말은 자판기처럼 입력을 받아 간단한 계산을 거쳐 바로 출력하는 것이 아니라, 최초 입력에 따라 나온 결과를 다시 돌려서 나온 결과를 다시 돌려서 나온 결과를 (중략) 다시 돌려서 나온 결과를 내뱉는다는 뜻이다.
여기서 문제는, 그렇다면 심리학, 신경과학의 연구가 고도로 발달하면 예측불가능성을 해소하여 뇌가 결정론적이라는 것을 밝혀낼 수 있을지도 모른다는 것이다. 예측 불가능성은 인식론적 개념이고 상대적인 개념이라서 나에게 예측 불가능한 것이 다른 사람에게는 예측 가능할 수 있고, 지금은 예측 불가능한 것이 미래에는 가능하게 될 수도 있다. 반면 결정 불가능성은 논리적 개념이고 절대적인 개념이다. 어떤 것이 결정 불가능하다면, 그것은 언제나, 누구에게나 결정 불가능하다.
철학을 비롯한 타 기초학문이 끼어들어 “자유의지”에 관한 수많은 사고실험을 거듭하고, 신경과학의 연구에 비판을 보내는 것은 바로 이런 이유에서라고 생각한다. 예측 불가능성하다고 결정불가능한 것은 아니지만, 결정불가능하면 예측도 불가능하다. 두뇌가 재귀적이든 어마어마하게 복잡하든, 그것이 결정론적이라면, 예측할 수 있는 ‘가능성’ 이 있다. 매일 같이 피땀흘리는 실험실 연구자에 의해서 언젠가는, 혹은 어떤 천재적인 사람은 할 수 있을지도 모른다.
과학철학, 논리/수리철학을 하는 사람들 중에서는 (예를들어 우리학교 철학과의 선우환 교수 등), “양자역학”을 끌어다가 물질주의 속에서 뇌가 결국 결정불가능하다는 것을 증명해내려고 시도하는 것을 보았다. 개인적으로 매우 인상깊었던 이야기였다. 그 설명에 따르면, 신경과학에서의 여러 발견들 – 즉 두뇌가 고도로 모듈화 되어있으며, 매우 기계적인 정보처리능력을 가지고 있다는 발견들 – 은 두뇌가 결정론적 체계인지 아닌지와 직접적인 관련이 없다. 어떤 것이 기계적이냐 아니냐와 결정론적이냐 아니냐는 독립적인 문제이다. 왜냐하면, 예를들어 현대 물리학의 첨단인 양자역학이 개입되더라도 두뇌는 여전히 ‘확률론적인 기계‘ 가 될 수 있기 때문이다. 이러한 기계는 여전히 모듈화되어서 작동할 수 있고, 고정된 패턴의 정보처리 능력을 보여줄 수 있다. 양자역학이 관여하는 것은 신경망의 차원보다 훨씬 기초적인 차원, 하나의 신경세포가 역치에 도달할 것인가 아닌가 등의 문제에 관여하는 것이지, 일단 역치에 도달하면 어떤 방식으로 행동할까에 관여하는 것이 아니라고 말한다. 즉, 양자역학에서 말하는 “불확정성”을 근거로 인간이 객관적으로 자유롭다는 것을 증명한다.
그리고 여기서 논의를 이어가서 만약 두뇌가 결정론적이고 인간이 자유롭지 않다면, 인간 뇌의 표상을 그대로 옮겨놓은 책이 존재한다고 할 수 있고, 그렇다면 결국 물질주의가 모순에 빠지게 됨을 근거로 결정론적이지 않다고 말한다. 자세히 설명하면, A, B, C가 서로 다른 물리적 구성을 가지는데 동일한 정신적 속성을 공유한다면, 그 정신적 속성은 물질과 전혀 상관없는 것이 되어버리기 때문이다.
물론 위와 같은 논증이 비논리적인 것은 전혀 아니지만 나는 경험적인 연구가 갖는 힘과 실용성을 보다 선호한다. 실제 세계에서 구현될 수 없고 관찰되지 않는 현상은 그 반대의 것보다 큰 의미를 지니지 못한다고 생각한다. 양자역학에서 말하는 양자적 요동은 결코 우리가 사는 세계를 뒤흔들지 못한다. 양자들은 사실상 그 위치를 확률로밖에 예측할 수 없지만, 그들이 모여 만들어진 세포 규모로만 올라가도 양자적 요동은 이미 무시해도 좋을 확률이 된다.
결론적으로 우리는 아직 자유의지가 있다, 없다를 논할 수 있는 단계가 아니라고 생각한다. 물론 그렇다고 우리가 침묵해야한다는 것은 아니다. 한 가지 확실한 것은 인간이 자유로운가. 그래서 자유의지는 그 객관적 자유에 기반할 수 있는가와 관련하여— 뇌가 결정론적인가 아닌가의 논의에서 증명의 부담은 결정론적이라고 주장하는 쪽에 있다는 사실이다. 많은 신경과학자들은 뇌의 작동을 관장하는 법칙이 존재한다고 말하고 싶어하고, 많은 철학자들은 인본주의의 관점에서 (신경과학이 비인간적인 것이 아님에도) 그러한 것이 존재하지 않는다고 말하려 한다. 만약 양쪽다 스스로의 주장을 명확하게 증명하는데 실패한다면, ‘잠정적인‘ 결론은 그러한 법칙이 없다는 쪽으로 날 수밖에 없다.
따라서 위에서 검토한 여러 연구와는 좀더 다른 성격의 연구가 절실하다고 생각한다. 예를 들어 뇌의 표상방식에 대해서도 현재까지 여러가지 방식이 서로 상충하거나 중복된 상태로 머물러 있는데, 이것들이 종합적인 하나의 체계 안에서 설명될 때 우리는 결정론과 인간의 자유에 대해서, 혹은 “자유의지”를 담당하는 뇌의 기능에 대해서 더 많은 논의를 할 수 있을 것이다. 그리고 의식적 사고가 환상이라는 자유의지에 대한 “간접적”인 연구 이외에, 직접적으로 의식적 경험/사고가 어떻게 우리의 행동에 영향을 미치는지, 또 그것이 뇌의 활동과 어떤 관련이 있는지 측정하려는 연구가 필요하다고 생각한다. (예를 들어, 정상철 교수의 의식이 V1과 관련이 있는가.)
후기: 선우환 선생님 수업에서 선생님 강의를 들었다는 친구와도 얘기를 나누어봤는데, 그 친구들은 기대 외로 “단일뉴런표상”- 제니퍼애니스톤뉴런 이나 의식이 V1과 관련이 있는지에 관해서 feed backward 에 대한 가능성에 굉장한 관심을 보인다는 것을 알게 됐습니다. 아마도 많은 철학적 논쟁들이 철학자들의 선문답이 아닌 실험실에서 결판날 수 있다는 생각을 하는 철학하는 사람들이 있는 것 같습니다. 인지과학의 외연이 정말 넓군요. 한편으로는 넓은 바다에서 길을 잃지 않는 것이 정말 어려운 문제라는 생각이 듭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