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월 252006
 


그룹 쿨이 해체한지 언젠데 아직도 쿨입니까, 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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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아- 다들 대세가 쿨한 사랑이라는데, 전혀 쿨하지 않은 나에게.
그리고 유행을 좇느라 억지로 쿨한척하느라 후달리는 사람들에게.


헤어진지 1년하고도 8개월이 지났지만 여전히 그녀를 떠올린다. 혹 재결합의 가능성이 있진 않을까, 일단 연락을 한 번 해봄이 어떨지, 아니 우연히 마주쳐서 뭐라 말을 건네면, 그녀가 웃을까, 어느새 시나리오 작가가 된다. 그런 와중에 뜻밖의 친구에게서 온 소소한 편지 한 통에 가슴이 두근거린다. 그렇지만 그녀가 날 원하는 건 아니니까, 내 순간의 감정에 확신을 하는 건 섣부른 일이어서, 또 내가 군인이라서, 접는다. 자칫 동기라는 무난한 관계를 파탄으로 몰고, 착한 그녀 마음에 상처를 줄지도 모르는데 쉽게 생각할 문제가 아니다. 한마디로 쿨하지 못하다. 괜히 복잡하기만 하고 어려운 사랑을 하려는 이런 이들에게 “찌.질.이.” 라는 사전에도 없는 오명이 주어진다.


어떤 사랑이 트렌드다, 요즘같은 연애시대에 그런 자세로는 연애하기 힘들다는 조언들, 걱정해주어 눈물나게 고맙다. 그렇지만 미안하게도 난 좀 완고하다. 시작도 끝도 쉬운 사랑, 상처를 주지도 받지도 않는 사랑, 상처받느니 차라리 주는 게 낫다는 사랑, 그런 사랑을 할 바에야 사랑을 안 하겠다, 또는 그 반대의 사랑을 하겠다는 게 아니다. 나는 그런 걸 아예 사랑이라 부를 수 없다. 사랑을 인간만의 숭고한 가치를 지닌 것이라 여겨 그런 것만은 아니다. 설령 사랑이 뇌 속의 화학작용에 불과한 것이라도, 우리가 “사랑”이라 명명한 감정은 손해보고, 상처받는 행동인 줄 알면서도 그리 할 수 밖에 없는 마음을 가리키기 때문이다. 단순히 씨를 많이 뿌리는 것도 좋지만 인간 종의 특성상 양보다 질이란다. 살아남기에 보다 적합한 자손을 얻으려면 좋은 짝을 찾아야하고, 이 작업에 쏟는 온갖 비합리적인 행동은 얼마나 가여운가, 또 인간적인가.


그래서 생물의 진화와 함께 인간본성의 진화를 논한다면 오히려 더디기 더딘 유전적 변화의 행보에 안타까워 할 일이다. 겉모습 한번 쳐다보고 간단한 호구조사만해도 짝짓기 상대로서의 적/부적격이 무의식적으로 판별되는 세상, 과학적 피임이 고도로 발달한 이 마당에도 인간은 “사랑”에 구속된 채 진정한 자유를 누리지 못하고 있으니까. 이렇게 보면 소위 쿨(Cool)하다는 사람들에게 양극단의 평가가 가능할지도 모르겠다. 진정한 자유인, 혹은 가능한 많은 여자와 섹스를 해서 가능한 많은 자손을 남기려는 본능을 충족시키는 덜 떨어진 인간종. 그리고 안타깝게도 어느 쪽이든 “사랑”과는 거리가 멀다.


게다가 쿨(Cool)함의 이면에는 왠지 석연치않은 구석이 있다. 2년의 대학생활동안 그 어두운 이면을 충분히 느꼈다. 처음에 대학에 입학해서 놀랐던 건 도무지 젊은이를 찾아보기 힘들다는 것이었다. 간신히 십의자리만 2로 바뀌었을 뿐인데 다들 왜 그리 애늙은이 같은지 정말 토할 뻔 했다. 술 마시고 털어놓는 얘기라는 게 고작 자신의 수능점수와 입시의 성패이고 사회를 좀 안다는 재수생들은 천진한 현역들의 낭만적 꿈을 깨트려준다며 주절거리며 우월감을 맛본다. 고학점 선배가 등장해서 청년실업시대에 준비된 인재만이 살아남을 수 있다고 빡센 대학생활과 나름의 스킬에 대해 읊어주면 좌중은 숙연해지고, 이는 곧 경전이 되고 만다. 그런 대학생활에서 그런 대학생들을 만나봐야 인맥넓히기용 술자리와 붙여넣기 레폿에 지쳐 썩어빠진 동태눈깔을 보게 된다.


그런데! 그들의 눈이 초롱초롱 빛나고 마침내 살아있다 느껴질 때가 있는데, 딴 게 아니라 그들이 “사랑”에 빠졌을 때 였던 것이다.
축제이든, 모임이든 무슨 대단한 이유에서건 절대 결석하지 않을 것 같은 사람이 연인과의 꽃놀이 때문에 그렇게 쉽게 수업을 째버릴 줄이야. 짠돌이가 아니라 합리적 소비자라고 스스를 옹호했던 게으른 녀석이 새벽같이 일어나 어차피 다시 돌아올 길을 마중나간다며 택시타고 나선다. 이들이 자신이 좋아하는 일에 그렇게 몰입하고 나아가 세상과 연애를 한다면 좋으련만. 어쨌든 나조차도 연애를 하면서 그렇게 살아있다는 느낌을 받았고 무한히 기뻤다.


하지만 그 제기랄 쿨(Cool)함이라는 게 젊은이가 젊은이다울 수 있는 이 최후의 보루, 연애질마저 위협할지도 모른다. 몇 번의 이별을 겪고 사랑에 희망을 버렸다든지, 돌아보면 (먹고 사는데) 쓸데없는 휴/복학으로 똥줄타는 고학번만이 되어서야 쿨(Cool)한 사람이 될 수 있었던 시절은 떠나간다. 요즘 새내기들은 학기 초 시간표를 짤 때, 애인이랑 놀 시간도 꼼꼼히 재단해서 넣는다. 내 학업에 지장이 없도록 내 공강 시간에 같이 밥 먹어야하고, 저녁 때는 남들이 부러워 할만한 코스를 돌고 학업을 위해 제 때 귀가해야한다. 그러다 서로 수지타산이 안 맞고, 양보할 수 없는 수준에 이르면 쿨-하게 헤어지면 그만이다, 마치 수강철회하듯 나랑 안 맞아서, 정확히는 학점이 안 나오니까. 덧붙여, 혹여 상대가 너 아니면 안 된다고 매달릴 경우에는 “1. 할 말이 없다, 2. 미안해 어쩔 수 없잖아. , 3. 찌질하게 왜 이러니. 쿨하게 그냥 보내주라.” 요렇게 강도를 높여주면 그만이다.


물론 어느 누구도 쉽사리 위와 같은 세태가 바람직하다고 생각하진 않는다. 게다가 더욱 흥미롭고, 중요한 사실은 사랑의 고통에 괴로워하는 자신을 달래지 못할 망정 나는 왜 쿨하지 못해서 이렇게 궁상을 떨고 있을까하고 자책하는 사람이 자꾸만 늘어간다는 것이다. 심지어 마지막 순간마저 상대방을 향해 찌질하다고 못할 말을 했던 사람조차도 돌아서서는 남몰래 눈물짓는 걸 볼 수 있다. 이는 결국 우리의 사랑, 우리 사는 세상이 실은 조금도 쿨하지 않다는 것을 보여준다. 다들 보이지 않는 손에 떠밀려 억지로 쿨한 척 하느라 괜한 고생만 하고, 위악이 진짜 악을 낳듯 그렇게 세상은 더러워진다. 에쿠니 가오리든 뭐든 한정된 시간과 자원 안에서 보다 극적인 사랑 얘기를 내놓다보니 현실에서 찾아보기 힘든 이야기가 나오기 마련이다. (누군가가 헤어진 연인의 새 애인과 동거할 리도 없겠지만 해서도 안 되는 것이다.)


한 쌍의 연인에 들어가는 경제비용이 자꾸 늘어가는 세태를 보면, 이 모든 게 부르주아들의 음모라는 생각마저 든다. 커플룩을 입고, 커플링을 맞추며 커플메뉴를 먹는 이들에게 겉으로는 영원토록 사랑하라 입에 발린 말을 하지만 그 장삿속내는 하루 속히 깨지고 새로 사귀어 새 커플링을 만들길 바랄테니까. 아무래도 오래 사귀면 점점 절약하게 되고, 궁색하잖아? 쿨-한 사람들이 늘어야 커플회전율이 증가할 것 아닌가?



어쟀든 “쿨”이라는 말이 최근에 등장한 것도 아니지만 보편적인 건 분명 아니다. 이런 시시껄렁한 태도는 남녀간의 사랑과 성 문제에 유독 고리타분했던 전통 윤리에 대한 반발로 이미 오래 전부터 한 자리를 꿰 차고 있었다. “사랑”도 아닌 것이 자유연애와 교묘히 결합해서 근근이 살아오다 자유연애가 가져다 준 그 현실적 괴로움을 틈타 고개를 쳐 든것 뿐이다.


허나, 연애(戀愛)인들아! 사랑은 원래 고달프다. 낭만이든 현실이든 노력하지 않으면 버티기 힘들다, 따져들면 세상 어떤 일이 안 그러겠나. 쉽게 만나고 헤어지고, 별 느낌도 없이 “사귄다” 말 한 마디에 서로를 묶고서 손 잡아봐야 낯선 사람의 살갗이 주는 까칠한 긴장감말고 더 얻을 게 없다. 그러면서 쿨- 하다고 으스대는 놈들아, 니네 정말 찌질하다!


여름이 성큼성큼 다가오는 마당에 어울리는 말은 아니지만, 지금도 충분히 춥다.
대체 무슨 얼어죽을 쿨(Cool)이람!


그 놈이 고개를 쳐 들거든 내가 콱 밟아주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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