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월 072003
 




[화교의 생활력 보다도 강한 편견과 차별] 2003-05-07, 0310331 이훈재
사학입문논평
지도교수 : 이상의

  2000년 11월 [뉴스위크]지에 우리나라에 살고 있는 외국인들이 국적에 따라 모여사는 동네가 다르다는 기사가 난 적이 있다. 짐작하고는 있었지만, 막상 육체 노동자로 온 나라의 사람들이 사는 곳과 정신 노동자로 온 나라의 사람들이 사는 곳이 너무도 완벽한 대조를 보이고 있다는 사실이 오래도록 씁쓸함을 남겼다.
 
  1995년 발표된 [인구 및 주택 센서스]에 나와있는 서울시 동별 외국인 인구를 주민 만명당 비율로 계산했을 때, 가장 높은 순서대로 적어보면 연희 3동 685.87명, 이촌1동 537.04, 회현동 395.64, 이태원1동 386.07, 한남2동 349.67인데, 가산동은 15위로 130.17로 나타난다. 이 통계에는 국적이 나오지 않기 때문에 [뉴스위크]지 기사를 토대로 외국인들의 국적을 추론해 볼 수 있다. 하지만 이 기사에서 언급되고 있는 동들은 연희동(화교), 구로·대림동(조선족), 동부 이촌동(일본인), 반포·방배동(프랑스), 한남·이태원(독일) 등이다
 
  중국인들이 구한말부터 대대로 자리잡고 살아온 소공동 지역은 시청과 바로 마주하고 있어 도심부 재개발 사업의 1호가 되었다. 처음에 화교들은 자기들 상점을 철거하고 난 자리에 번듯한 고층의 화교회관을 지어 분양하겠다는 서울시의 약속을 믿고 임시로 이 곳을 떠났었다. 1971년부터 소공동 일대의 화교지구가 철거되기 시작했지만, 결국 이들은 어쩔 수 없이 대기업 한화에게 모든 소유권을 팔아넘기고 이 곳을 떠났다. 그리고 그 자리에는 플라자 호텔이 세워졌다. 중국인들이 도심의 노른자위 땅을 잃고 허름한 회현동이나 서대문구 연희동 일대로 나갈 수밖에 없었던 것은 대한민국 정권, 특히 박정희 정권의 지속적인 화교에 대한 차별정책 때문이었다. 1961년의 외국인 토지소유 금지법, 화교들이 집안에 모아둔 돈을 휴지조각으로 만들어 버렸던 1963년의 화폐개혁, 1973년 중국 음식점의 쌀밥 판매 금지령을 등을 통해 이 땅은 차이나타운이 없는 나라, 화교자본이 성공하지 못한 나라, 화교 수가 계속 줄고 있는 나라가 되었다.
 
  화교들을 시청앞 소공동에서 회현동으로 밀어낸 이런식의 화교차별정책이 민족주의 정신의 발로였다고 볼 수는 없다. 미국 대사관은 경복궁 바로 앞, 정부 청사를 마주보면서 광화문 네거리에 버티고 있기 때문이다. 자유중국 대만과 외교관계를 맺었던 시대에는 화교를 찬밥대우할 수 있었지만, 중국과 외교관계를 맺고 있는 이 시대에는 한국화교경제인협회도 만들어지고(1999년), 중국 눈치보느라 달라이 라마의 입국도 허가할 수 없기 때문이다. 세계화 시대의 서울사람들은 ‘외국인과 더불어 살아가야 한다’는 명제를 구한말의 서울사람과 얼마만큼의 차이를 보이며 수용할 수 있을까?

–글을 읽고 난 후 감상을 적는 논평이 아닌 토론 노트라고 하니 이번에는 실제 구체적 지명과 함께 실감나게 작성된 잘 되었다고 생각하는 글을 요약해보았다.
[회현동, 화교(華僑)와 적산가옥 – 서울대 지리교육과  강사 심승희]
원문 :
http://www.issuetoday.com/11_press/10_mpage_view.asp?pk_n4Bulletin=20097&w_mode=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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