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월 122007
 

<2007-1 인문학 발표경시대회>







뇌와 마음의 함수




– 지식생산체계 분석을 중심으로 –







이훈재 (심리학, 0310331)




허승 (철학, 0310448)




유진희 (천문우주학, 0430211)




김수연 (의학, 0451113)








Ⅰ. 서론



Ⅱ. 본론


1. 연구 개요



2. 기존 논의 검토


2.1 기존 입장의 정리


2.2 논의의 한계



3. 통섭 논의의 조건


3.1 학문의 구조 – 지식생산체계


3.2 과학이란 무엇인가?


3.2.1 과학의 엄밀성과 객관성


3.2.3 과학의 대상


3.3 구조들


3.4 지식생산체계의 다른 영역들


3.4.1 철학의 역할


3.4.2 문학의 역할


3.5 인문학


3.6 통섭의 필요성



4. 통섭의 재정의


4.1 자연과학과 인문과학의 통섭 -설명 대상이 가지고 있는 다양한 층위


4.2 자연과학과 철학의 통섭 – 지식생산체계의 층위들



Ⅲ. 결론


1. 의의


2. 한계점



Ⅳ. 참고문헌



“통섭”, 진리를 찾아 떠난 사람들의 노스탤지어, ☏ 016-558-9612 / ✉ lhj9612@paran.com




Ⅰ. 서론




통섭(統攝, consilience)이라는 개념이 뜨고 있다. 학계뿐만 아니라 재계 및 정치권도 통섭에 관심을 보이면서, 개념어 하나에 걸린 사회적 영향력은 일파만파 커져 가고 있다. 책 제목, 목차부터 시작하여 심지어 건물이름에도 통섭이 들어간다. 그야말로 통섭에 대한 비판적 검토가 요청되는 시점이다.




이명박, 통섭정경연구원 출범식 축사, 2007.2.27.


‘CEO들이 인문 · 이공계 석학들 초청한 까닭은?’, 중앙일보 경제 Coverstory, 2006.12.21.


통섭이란 최재천 교수가 에드워드 윌슨의 저서 『Consilience』를 번역하면서 발굴해낸 개념이다. 책에 따르면 통섭은 인문학과 비인문학을 한데 어울러 하나의 줄기로 만드는 작업으로 정의 되는데 한마디로 지식의 통합을 의미한다. 현대 사회에서 소위 전문가라 불리는 사람들은 자신의 전공분야에만 매진하느라 다른 분야의 학문과의 교류가 거의 없어 협소한 시각을 갖기 쉽다. 아마도 통섭이 주목받는 이유 역시 학문의 단면만 보는 것에서 벗어나서 포괄적인 시선으로 학문에 다가서야한다는 문제의식에 모두가 공감하고 있기 때문일 것이다. 윤리적 고뇌와 성찰이 부족한 과학적 연구 및 활용, 혹은 과학적 몰이해에 근거한 독선적인 인문학 논의들이 바로 통섭의 문제를 제기한다.




그런데 문제는 그리 간단하지 않다. 이미 지난 세기말에도 게놈 프로젝트 및 인간복제와 관련된 생명윤리가 논란이 되어, 인문학과 자연과학이 어색한 만남을 가졌던 적이 있다. 일단, 크게는 인문학과 비인문학, 작게는 여러 세부분과의 전문화 정도가 심하여 이것을 하나로 묶는다는 것은 도저히 불가능해 보인다. 인간이 현대의 모든 지식을 습득하는 것은 분명 불가능한 일이기 때문에 통섭의 의미가 개인이 모든 지식을 가진다는 것은 아닐 것이다. 그렇다면 통섭은 현실적으로 어떤 것을 의미하는 것인가?




통섭의 현실적 가능성 이외에 그 필요성과 목적도 미심쩍다. 인문학이 더 이상 현실적인 효용을 창출해 주지 못하고 고사해가는 현재의 위기 속에서, 통섭을 이야기한다는 것은 자칫 인문학의 무용성에 대한 주장으로 흐를 위험을 안고 있기 때문이다. 실제로 인간의 마음과 의식에 대한 최신의 연구결과들은 수많은 철학자들이 수천 년간 펼쳐놓은 다양한 인식론을 단 한 순간에 사실이 아닌 것으로 판명해버릴 수 있다. 단지 특정 과학의 연구방법을 학문의 전 분야에 대해 적용하는 것을 바람직한 통섭이라고 할 수 있을까?




현재 우리는 현실과 조건을 제대로 분석함으로써 이런 질문들에 답해야만 한다.







Ⅱ. 본론




1. 연구개요




따라서 우리의 논의는 현재 진행되고 있는 통섭의 찬반양론에 대한 검토와 비판으로부터 시작한다. 통섭 논의의 시발점이 된 윌슨의 환원주의적 통섭과 그에 정면으로 반박하는 웰덴 베리식의 삶의 기적, 인문학과 비인문학의 수평적 통합을 주장하는 최재천 등을 살펴본다. 그리고 이들의 대립 양상이 갖는 한계를 지적하며, 통섭 논의를 위한 기본조건을 제시한다. 이는 논의가 자칫 기계적인 찬반 입장의 정리로 흐르거나 틀에 박힌 변증적 결론으로 끝맺는 것을 지양하고자 함이다. 통섭의 조건들을 고찰하는 데는 학문의 구조, 과학과 인문학의 연구대상과 방법에 대한 고려가 필수적이다. 이를 통해 우리는 통섭을 새롭게 재정의하고 그 현실적 의미를 찾아볼 것이다.







2. 기존 논의 검토




2.1 기존 입장의 정리




통섭의 제안은 자연과학자들로부터 시작됐다. 현대 과학자들의 관심사는 오랫동안 인간 이외의 것 또는 생물로서의 인간에만 집중되어왔다. 인간의 정신세계에 대한 구체적인 접근이 시작된 것은 비교적 최근의 일이다. 과학자들은 이제야 비로소 자신이 그린 퍼즐조각을 다른 퍼즐조각과 맞춰볼 엄두가 난 것이다.




윌슨은 『통섭』에서 인간의 지식은 본질적으로 통일성을 추구하고 있다고 주장한다. 그는 고대 그리스 철학과 18세기 프랑스 계몽주의라는 서구 학문의 큰 줄기에서 갈라져 나온 다양한 학문 지류들을 섬세하게 분석하며, 인문학과 예술, 심지어 종교까지도 자연과학과 통합 가능하다고 말한다. 그리고 지식 대통합을 가로 막는 이분법적 대립들, 예컨대 자연과학자와 인문학자, 유전자주의자와 환경주의자, 유신론과 유물론자 사이에 놓인 벽을 넘나들며 사물에 널리 통하는 원리를 모색했다. 그는 21세기 학문은 결국 자연과학과 창조적 예술을 바탕으로 한 인문학으로 양분될 것이며, 사회과학은 생물학이나 인문학에 자연스레 흡수될 것이라 전망한다. 이것이 바로 그가 말하는 ‘통섭’이다. 그는 사회학, 경제학, 인류학 등 사회과학이 자신의 이론적 틀을 확장하기 위해서는 생물학을 받아들여야 한다고 단언하고, 창조적 예술의 기원도 생물학으로 설명 가능하다고 주장하며, 심지어 윤리와 종교의 근거도 현대 생물학의 성과에서 찾을 수 있다고 말한다. 그가 꿈꾸는 통섭된 지식의 틀 중심에는 사회생물학과 진화심리학, 그리고 신경과학이 놓여있다.




한편 웬델 베리는 『삶은 기적이다』라는 책에서 윌슨의 『통섭』을 정면으로 비판한다. 윌슨이 “별들의 탄생에서 사회제도의 운용에 이르기까지 눈에 보이는 모든 현상은 궁극적으로…물리적 법칙들로 환원될 수 있는 물질적 진행과정에 근거한다”며 세계를 “합법칙적인 물질세계”로 규정하는 것에 베리는 반대한다. 베리는 인간과 인간의 영혼, 그리고 생명, 나아가 자연세계의 모든 것은 “불가해하고 형언할 수 없는” 요소로 가득 차 있다고 주장하며, 삶은 “설명할 수 없는 무엇인가가 지속적으로 개입하는 것”이라고 말한다. 베리는 ‘통섭’이 전제하는 물질주의와 환원주의, 기계론적 사고는 불가해한, 더욱이 기적적인 성격을 갖는 삶의 의미를 뺏는 것이라고 주장한다. 또 이러한 현대 과학의 사고방식은 외적 맥락이면서 이미 내면화한 산업주의와 전체주의로 이어진다고 강조한다. “지구상의 모든 피조물은 팔려갈 물건처럼 제 몸에 가격이 매겨지는 신세로 전락”했고, 예술과 인문학 역시 이러한 “정복주의적 경제체제와 공모하고 있다”는 것이다.




국내에 통섭을 소개한 최재천의 입장은 이들과 또 다르다. 그의 ‘통섭’은 윌슨과는 달리 사회과학, 예술, 종교가 자연과학으로 흡수 통합되는 ‘수직적 통합’이 아닌 인문학과 비인문학을 대등한 위치에 두고 수평적 통합을 이루는 것이다. 물론 윌슨의 제자인 그의 기본적인 입장 역시 생물학에서 시작한다. 그의 좌우명 “알면 사랑한다.” 는 생물학이 인간성의 기원과 발전을 분석하는데 가장 직접적인 단서를 제공하며, 이것이 바로 인간이 더 나은 인간이 될 수 있는 단초가 된다는 것이다. 그는 생명의 본질을 이해하고 자연계에서 인간의 위치를 확인하고 나면 삶의 의미는 물론 앞으로의 방향에 대해서도 보다 뚜렷한 이해가 가능하다고 말한다. 그러면서 21세기 새로운 인간상으로 ‘호모 심비우스(Homo symbious, 공생적 인간)’를 제시하며 과학과 종교의 두 축이 인간사회를 이끌어갈 두 거대한 등불이라고 주장한다. 인간으로 하여금 환경을 보호하기 위해 자원을 아끼고 물욕을 절제하도록 만들어주는 유전자는 몸속에 존재하지 않으며, 기나긴 생명의 역사에서 볼 때, 기껏해야 1만 년이라는 극히 짧은 시간 동안에 인류는 아직 도시문명 사회에 적합하게 진화하지 못했다는 사실을 근거로, 바로 이 부족한 부분을 종교가 채워주어야만 한다고 역설한다.







2.2 논의의 한계




그러나 이러한 대립 양상은 많은 부분이 서로의 입장에 대한 무지와 오해에서 비롯된 것으로 보이므로 논의의 유효성에 한계를 지닌다. 과학적 환원주의는 무조건 안 된다는 식의 반대는 진정한 의미에서 통섭의 걸림돌이 된다.




실제로 ‘진화는 진보다’식의 진화론의 오독과 인종주의, 제국주의 합리화 등의 정치적 악용에 맞서, 복잡다양한 생명현상의 아름다움에 대하여, 단일 개체의 사소한 행동과 그 기저원리에 대하여 탐구하는 것은 과학자 나름의 인류를 사랑하는, 알아가는 방식이다. 오늘날 심리학과 뇌신경과학의 연구나 진화심리학, 사회생물학적 연구들이 혹여 숭고한 휴머니즘에 맞서서 짐승적인 생존경쟁을 옹호하는 것으로 비춰지는 것에는 별다른 근거가 없다. 윌슨은 줄곧 생태학적 입장에서 인류의 존속을 위하여 지속가능한 발전과 환경보존을 부르짖고 있다. 비록 과학이 어떤 대상을 연구의 주제로 삼느냐는 문제에서 정치·경제적 문제로부터 자유로웠던 적은 없으나, 윌슨을 일방적으로 산업주의와 정복주의적 경제체제의 공모자로 몰기에는 분명 지나친 감이 없지 않다.




더군다나 기적과도 같은 생명의 놀라움은 유전과 진화의 논의에서도 충분히 엿볼 수 있다. 그것은 다인자(polygenes)와 발현(pleiotropy)이다. ‘다인자’는 하나의 표현형질에 관여하는 유전자가 여러 개일 수 있다는 얘기고, ‘발현’은 하나의 유전자가 영향을 끼치는 표현형질이 다양하다는 말이다. 그래서 비록 유전자 지도를 완성시켰다하더라도, 우리는 쉽게 유전자조작, 변형과 관련된 결과를 단언할 수 없다. 진화에는 일관된 방향성조차 없다. 그리고 양자역학적 세계는 관측에 따라 시시각각 변화한다. 그들에게는 진화를 약자의 도태개념으로 보는 것도 개운치 못한 일이다. “약자”라는 건 지극히 권력을 쥔 인간의 짧은 찰나에 유효한 평가일 뿐이다.




그런데 최재천은 인류가 “공생적 인간”을 지향해야 한다며 삶에 목적성을 부여한다. 이런 주장은 진화론, 환원주의와 논리적으로 양립할 수 없게 된다. 연결고리를 찾기 위해 유전자-문화 공진화의 개념 등을 도입해보기도 하지만 여전히 어색함과 부자연스러움을 지울 수 없다.




현재 활발히 진행되고 있는 통섭에 대한 논의가 위와 같은 한계에 봉착한 이유는 그 논의의 층위가 지극히 단선적이라는 데 있다. “과학이 인간의 사고와 행동, 문화를 모두 설명할 수 있다/없다.” 또는 “과학은 가치중립적이다/그렇지 않다.” 와 같이 지루한 쟁점을 들고서 감정싸움과 자기 영역 지키기에 머무르는 통섭 논의는 생산적이지 못한 셈이다. 이런 논의에 따르면 윌슨이 주창한 통섭은 전혀 공박되지 못하며 결론은 언제나 인문학과 비인문학, 서로 다른 입장의 존재에 대한 관례적인 긍정에 그칠 뿐이다.







3. 통섭 논의의 조건




그러므로 통섭에 다가가기 위해 조금 긴 우회를 거쳐야 한다. 우리는 먼저 통섭이 전제하고 있는 학문 분과 체제에 대해 이야기해야만 한다. 거대한 지식생산체계인 학문의 구조는 현실에서 분과학문이란 인위적인 형태로 드러난다. 우리는 인위적인 분과학문에 내재하고 있는 지식생산의 구조를 분석해야만, 환원주의의 자기모순을 넘어서서 인문학과 비인문학의 통섭이 갖는 유효성을 이야기 할 수 있다고 생각한다.







3.1 학문의 구조 – 지식생산체계




학문체계는 거대한 지식생산의 체계이다. 우리는 가치의 생산체계에 대한 기존의 연구결과를 바탕으로 지식생산체계의 구조를 구성해볼 수 있다. 이로써 현실에서는 혼재되어 나타나지만 개념적으로는 전혀 다른 기능을 수행하는 학문 구조의 각 층위가 상정된다.




지식생산체계는 그 자체가 역사적인 구성물로서 시대적인 요구나, 맥락에서 자체적으로 변해왔다. 과거에 철학이란 범주에 모든 학문체계가 통합되기도 하였고, 당시에 유효한 지식을 생산해준다고 믿었던 점성학과 같은 것들은 변화하는 시대 속에서 소멸하기도 하였다. 전혀 새로운 분과학문이 탄생하기도 한다.





1. 하나의 대상을 가지고 그에 관한 새로운 지식을 생산하는 영역




2. 대상을 갖지 않고, 지식을 생산하지 않지만 주장을 표명하는 영역




(≒지식 생산을 가능하도록 체계를 유지시키는 영역)




3. 생산된 지식을 실현시키는 영역







이것은 정치경제학에서 빌려온 개념일 뿐이다. 따라서 일정 정도 그럴듯해 보이더라도 현재의 학문 구조에 적합하게 다듬는 과정이 필요하다.







3.2 과학이란 무엇인가?




우선 1의 영역은 흔히 말하는 과학의 영역이다. 과학은 대상을 갖는다. 그리고 과학은 그러한 대상들에 대해서 합당한 방법론과 연구를 통해 지식을 생산해낸다. 하지만 과학이 대상으로 삼는다고 하는 그 ‘대상’은 무엇이며, 과학이 생산해내는 지식의 엄밀성과 객관성은 어떻게 담보되는가? 이것은 과학이 생산하는 지식은 어떤 것인지, 우리가 무엇을 과학으로 부를 것인지에 대한 판단 근거가 된다.




무엇을 과학으로 부를 것인지 말 것인지는 매우 중요하다. 지식생산체계에서 어느 위치를 점하는가에도 관련이 있지만 현실에서 과학이란 명함이 가지고 있는 강력한 권위가 엄연히 존재한다.





3.2.1 과학의 엄밀성과 객관성 – 자연과학과 인문ㆍ사회과학




자연과학이든 인문ㆍ사회과학이든 고유한 대상을 갖고 지식을 생산하고 있지만, 흔히, 과학이란 일상적으로 자연과학에 한정되어 말해지곤 한다. 광의의 과학에 대해 말한다고 하더라도 자연과학과 여타 인문ㆍ사회과학 사이에는 넘을 수 없는 강력한 구분선이 존재하는 것처럼 보인다. 이런 구분선이 현실에서 강력한 작용을 하는 것은 그 대상의 문제이기보다는 보통 그 엄밀성과 객관성의 문제 때문이다. 자연과학은 매우 명백하고 객관적인 사실을 생산해낸다고 여겨지고 자연과학이 생산해낸 지식은 믿을만하다고 여겨진다. 그리고 인문ㆍ사회과학은 아무래도 엄밀성이나 객관성에서 불충분하고, 연구자의 관점이나 입장이 녹아드는 것을 결코 피할 수 없는 사이비 과학으로 여겨진다.




그러나 사실 이런 구분은 생각만큼 명백하지 않다. 엄밀성의 정도는 그 학문의 방법론과 기술적 한계, 그리고 대상의 복잡성에서 기인하기 때문이다. 물리학에서 폐쇄체계를 구성하고, 유효한 실험을 진행시킬 수 있는 기술적 수준에 도달하지 못했을 때, 물체의 낙하와 같은 운동은 매우 불규칙하게 보였고, 그것을 하나의 수학공식으로 도출해내는 것은 전적으로 불가능해 보였다. 또한 생물학에서 다양한 개체군에 대해 경험적 연구를 할 수 있는 조건이 마련되어 있지 않을 때에는 생물의 다양성은 자연의 오묘한 섭리로 이해될 수밖에 없었다. 그것은 현실에서의 자연 현상(개방체계)은 매우 복잡한 요인들이 복합적으로 영향을 미치며 결정되기 때문이다. 마찬가지로 사회과학에서 사회현상에 대한 연구가 좀 더 과학적인 방법론과 기술들을 가져갈 때, 그것은 좀 더 엄밀한 학문에 다가가고 있다. 경제현상, 사회변동, 인간 심리에 대해서 일정한 변수를 통제하거나, 혹은 충분한 사례수를 확보할 때, 그리고 합당한 방법론을 가져갈 때 그것은 과학의 지위를 부여받을 수 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무엇보다도 자연과학과 인문ㆍ사회과학 사이에 그어진 강력한 경계선이 흐릿해진 것은 자연과학이 확보한 절대적 엄밀성과 객관성에 손상이 가면서부터이다. 이것은 실제 과학 이론의 정립 과정을 살펴볼 때, 보다 확실하게 드러난다. ‘생각한다’라는 현상이 뇌 속에서 이루어지는 작은 분자들의 상호작용과 신경 세포에 있어서의 전기적 신호의 전달로 관찰된다 하더라도, 그것으로 그 생각의 ‘내용’을 도출해 낼 수는 없다. 본질적으로 과학자들은 어떤 체계를 이해하기 위해서 그 체계를 이루는 하위 요소로부터의 분석을 시도하게 되는데, 이는 상위 체계를 하위 체계의 단순한 합으로 치환해 버리는 것을 지칭하는 것이 아니다. 무엇보다 두 범주 사이에는 분명한 간극이 존재하기 때문에 사고의 비약이 필연적이다. 예를 들어, 1차원은 점과 선을 지정하고, 관찰대상은 방향이다. 그보다 높은 차원인 2차원에서는 전혀 새로운 다각형의 개념이 형성된다. 이는 1차원에서 결코 ‘경험적으로 관찰할 수 없는’ 개념이다. 즉, 2차원 안에서 1차원의 선과 방향, 그리고 선이 모인 다각형, 그리고 다각형의 성질인 ‘면적’을 인식하는 것은 당연한 일이지만(2차원에서 1차원으로의 설명의 연속성이 존재), 1차원에서 2차원으로의 설명의 연속성은 존재할 수 없고 다만 놀라운 수준의 추상적 사고의 도입이 존재하는 것이다. 이러한 직관은 철저히 과학자 개인 및 사회에 의존하게 되며 이 패러다임들을 과학자 사회 다수의 지지에 따라 선택 또는 기각하는데서(paradigm shift) 바로 토마스 쿤이 말한 과학의 객관적 진리에 대한 허구성과 정치적 파벌의 속성이 드러나게 된다. 따라서 엄밀성과 객관성을 절대적으로 확보한 과학은 없으며, 단지 과학들의 엄밀성과 객관성에 대한 경향성으로 이해하는 것이 좋을 것이다.




헨리 마지노,『아인슈타인의 공간과, 반 고흐의 하늘』





3.2.2 과학의 대상




학문 간의 흐린 경계와 더불어 과학의 대상에 대해 면밀히 검토하는 것은 통섭 논의의 가장 중요한 부분이다. 존재의 ‘무한성’ 대상의 ‘가상성’이 결국 환원주의의 한계를 드러내며 진실에 다가가기 위해서는 통섭이 필요함을 밝혀주기 때문이다. 예를 들어 죽음이란 하나의 현상이 존재한다고 가정하자. 많은 학자들, 생물학, 의학, 심리학, 사회학, 인류학 같은 분야들에서 관심을 보일 것이다. 하지만 모두가 공통적으로 죽음을 관심 대상으로 하고 있다고 그들의 학문이 같은 이름으로 묶이지는 않는다. 결론적으로 특정한 과학이 대상으로 삼고 있는 ‘무엇’은 현실에 존재하는 그 자체로서의 ‘무엇’이 아니다. 그것은 대상의 원인이나 결과, 혹은 그 속성 중 어떤 것 등으로부터 추출된 가상적 범주이다. 생물학자는 죽음을 맞이한 한 생물의 구조와 기능에 대하여 관심을 가질 것이며, 사회학에서는 죽음에 대한 사회 현상의 통일적인 관계, 개인과 사회의 상호작용에 대해 관심을 가질 것이다. 인류학자나 심리학자는 각각 또 다른 측면에 관심을 가질 것이다.




즉, 과학이 대상으로 하고 있는 범주는 가상적이다. 가상적 범주를 현실로부터 추출해내고 자신의 대상으로 삼는다. 그러나 우리는 과학의 대상이 가상적일 수밖에 없다는 것에 결코 절망하지 않으며 그럴 필요도 없다. 어떤 대상이 가상적이기 때문에 사실이 아닌 것은 결코 아니기 때문이다. “책은 종이이다.”라고 말하는 것은 충분히 사실이지만, 그것만으로는 설명할 수 없는 그 외의 다른 내용들이 복잡하게 얽혀있다는 것이 중요할 뿐이다. 따라서 과학이 대상으로 삼고 있는 가상적 범주에 관한 지식은 충분히 사실일 수 있지만, 그 자체로 진실은 아니다.




이는 현실이 갖는 본질적인 속성에 기인한다. 하나의 존재는 무한한 속성을 갖는다. 우리는 그 중에서 어떤 특정한 속성에 관심을 갖게 되는 것이다. 하나의 설명체계는 어떤 특정한 속성에 대해서만 이야기할 뿐이다. 따라서 과학의 정의를 다음과 같이 내려 볼 수 있다.




“현상으로부터 추출된 가상적 범주를 대상으로 삼고, 그에 대한 지식을 생산하는 영역”







3.3 구조들




그리고 하나의 속성은 구조들이 만들어낸 효과들이 복합적으로 작용한 결과이다. 책의 분자구조라는 속성은 물질의 조성과 변화와 같은 화학구조와 관련이 있다. 다른 매체가 아닌 책을 구입하게 된 것은 책이란 매체에 얽힌 정치구조, 경제구조, 개인의 심리구조와 관련이 있다. 각각의 속성은 그에 관계된 여러 구조들의 복합적인 효과성이며, 과학은 바로 그런 자신이 대상으로 삼고 있는 가상적 범주의 “구조”를 분석하는 것이다. 구조는 은폐되어 있고 오직 자신의 효과성으로서만 그 모습을 드러내기 때문에 우리는 구조의 내밀한 모습을 완벽히 이해하기 힘들다.




우리는 표출되는 효과성 속에서 구조의 ‘외적 규정성’과 ‘내적 구조’를 분석할 뿐이다. 중요한 것은 하나의 구조는 외적 규정성과 내적 구조로 이루어진 구조들의 구조라는 점이다. 실재는 단일한 세계이다. 때문에 분석의 대상이 되는 구조들 역시 실재에 대한 가상적 구분에 지나지 않는다. 하지만 구조들은 일정한 범위에서 번역 불가능한 고유한 체계를 구성한다. 가령 실제 세계의 단일한 체계에 속하는 것이라도 가상적으로 구분된 정치구조와 경제구조, 물리법칙의 구조는 결코 동일한 것도 아니며 환원 가능한 것도 아니다. 경제구조는 인류의 시기적 한계성과 자연 속에서의 생존이란 외적 규정성과 생산, 분배, 소비 등을 구성하는 내적 구조를 갖는다. 정치구조는 경제라는 한계 내에 설정되면서도, 경제구조만으로는 설명될 수 없는 독자적인 기능과 내적 구조를 갖는다. 구조들은 다른 구조와의 관계 즉, 외적 규정성 속에서 내적 구조를 변화시키며, 서로를 의지하고, 때론 제약한다.




현실에서 각각의 구조들은 겹쳐져서 나타난다. 현상으로 표출되는 효과성은 구조들의 복합적 관계 속에서 구성되기 때문이다. 예를 들어 프랑스의 역사가 페르낭 브로델은 『물질문명과 자본주의』란 책에서 지금의 세계를 ‘자본주의, 시장경제, 물질문명’이라는 세 가지 층위로 설명하는데 인간의 삶과 역사는 이런 각각의 층위가 언제나 함께 하고 있다는 것이다. 이런 중층적인 구조는 위계를 갖는다. 즉 하나의 구조는 하나의 구조에 대해 우위를 점하는데, 가령 문화는 자본주의와 시장경제라는 한계 속에 설정되는 외적 규정성을 갖는다. 이런 위계적 질서는 환원주의가 가능할 것이라는 착각을 불러일으킨다. 하지만 하나의 구조(정치, 문화, 일상세계)를 다른 구조(경제, 자연법칙, 유전자)로 완벽하게 환원시키거나 설명해낼 수 없는 것은 각각의 구조가 갖고 있는 자율성 때문이다. 그 자율성은 하나의 구조가 독자적인 기능과 체계를 갖는다는 점이며, 그 구조를 바라보는 시점 자체가 이동했다는 뜻이다. 즉 그 자율성은 우위 속의 자율성, 상대적 자율성이다.







3.4 지식생산체계의 다른 영역들




그런데 지금까지 서술한 과학은 이념형으로서의 과학이다. 현실에 존재하는 각각의 과학은 단지 1의 영역만을 담당하지는 않는다. 그것만 가지고는 결코 지식생산체계가 유지되지 못한다. 무엇보다도 과학이 생산한 지식이 가상적 사실에 멈출 때, 그 지식은 실현되지 않는다. 가상적 범주에 관한 사실에 불과한 지식을 종합하여 그것들에 진리성을 부여하고 그것을 외부적으로 실현시키는 것에는 필연적으로 개입과 도약이 필요하다. 따라서 우리는 지식생산체계라는 하나의 거대한 구조를 구성하는 또 다른 하위 구조들, 그리고 지식생산체계의 외부가 존재함을 고려해야 한다.




현실에 존재하는 과학이 순수한 과학의 영역만이 아닌 다른 영역과 중첩되어 있다고 할 때, 우리는 다른 영역의 존재와 기능, 그리고 그 영역을 전담하는 다른 학문을 짐작한다. 바로 자신의 고유한 대상도 갖지 않고, 지식을 생산하지도 않는 학문, 바로 철학과 문학이다.







3.4.1 철학의 역할




과학은 지식을 생산한다. 지식은 사실을 지향한다. 여기에서 두 가지 문제가 발생한다. 하나는 사실과 거짓이 모호하다는 것이고, 다른 하나는 설사 그것이 사실이라고 하더라도 단지 사실일 뿐이라는 것이다. 철학은 과학이 발생시키는 난점에 개입한다. 그리고 그런 개입은 실천을 불러오며, 그것은 다시 과학과 철학 자신에게 돌아온다.




우선 사실과 거짓 사이의 모호함을 살펴보자. 하나의 구조를 설명하는 학문체계, 특정한 과학이 있다고 할 때, 본질적으론 무한한 속성을 갖는 과학의 대상은 과학의 내부로 포섭될 수 있도록 인위적으로 가공되고, 따라서 의식적으로, 혹은 무의식적으로 은폐되는 내용들이 발생한다. 이 은폐된 정도가 심하여 대상과 보다 직접적이고 많은 관련을 갖고 있는 구조가 은폐될 가능성이 있다. 더욱 큰 문제는 은폐되는 구조에 대한 충분한 과학적 고려 없이 그 공백을 다른 환상적인 내용들로 메울 때 과학이 생산한 지식은, 지식으로 위장된 잘못된 주장, 혹은 거짓에 가까워진다. 정도의 차이는 있지만 이런 현상은 자연과학 내에서도 발생한다. 예를 들어 유전자-문화 공진화론이 그렇다. 문화의 기본단위로 모방자meme, 후성규칙 등이 제시한다. 이미 많은 신화학자나 기호학자들이 밝혀냈듯 다양한 인간 문화 사이에는 분명 공통점이 존재한다. 하지만 물질적 실체가 있는 유전자와는 달리 모방자는 아직 과학적인 개념이기 보다는 환상적인 비유에 가깝다. 즉, 과학이 말한 진실은 사실을 지향하지만 어쩌면 거짓일 수도 있는 것이다.




리차드 도킨스, 『이기적유전자』, 1976


에드워드 윌슨, 『인간 본성에 대하여』, 1978


문제는 하나의 지식이 참된 지식인지, 혹은 지식으로 위장된 거짓인지 분별하기 어렵다는 것이다. 왜냐하면 그것을 생산해낸 체계는 과학의 모습을 하고 있고, 엄밀한 과학으로 인정받은 과학은 매우 큰 권위를 갖고 의심을 허용하지 않기 때문이다. 따라서 그것의 참, 거짓인지를 판단하는 것, 심지어 그것에 대해 문제를 제기하는 것조차 매우 힘든 일이다.




여기에 필연적으로 철학이 개입한다. 철학은 대상을 갖지 않지만 과학이 생산한 지식, 즉 사실을 지향하는 지식에 대해 이야기한다. 철학은 그것의 참됨을 증명하지는 못하지만, 무엇이 더 올바른지에 대해 말할 수 있으며, 또한 올바르지 못함에 대해 문제를 제기할 수 있다. 이런 철학의 개입으로 그 과학 내부에서, 혹은 외부에서 거짓 지식을 구별하는 시도를 가능하게 한다. 이것은 필연적으로 현실과의 소통을 통해 이루어진다. 즉 폐쇄적인 학문 체계 내부에서가 아니라 모든 현상이 개방적으로 펼쳐진 현실과의 소통을 통해 이야기할 수 있으며, 실천 속에서 만들어진다. 하지만 철학의 역할은 여기서 끝나지 않는다.







과학의 또 다른 난점이 존재한다. 과학이 생산해낸 지식이 사실일지라도 그것은 그저 사실일 뿐이라는 것이다. 가령 어떤 사람이 절망했을 때, 한 생물학자는 그것에 대해 뇌의 작용으로 설명할 수 있다. 그것은 사실에 매우 근접해 있다. 하지만 한 사람의 절망이 단지 뇌의 작용인 것만은 아니다. 사회학자는 그것을 어떤 일반적인 사회현상으로 설명할 것이며, 역사학자는 역사적 과정 속에서 설명할 것이다. 따라서 “절망은 뇌의 작용이다.”라고 말하는 것과 ”절망은 뇌의 작용에 불과하다.“라고 말하는 것은 근본적으로 다르다. 전자는 사실의 기술이고, 후자는 주장이다. 하나의 사실은 그 자체로 진실을 말하지 않는다. 사실들이 종합되고, 버릴 건 버리고, 취할 건 취해진 이후에 비로소 진실에 다가간다. 따라서 진실은 특정한 조건 아래에서의 올바른 주장이다. 과학이 생산한 지식들을 취하거나 배체하는 공정을 거쳐 종합하여 올바른 주장을 표명하는 것, 이것이 철학의 역할이다. 지식에서 가공된 하나의 주장은 필연적으로 이데올로기를 수반한다. 우리는 이데올로기라는 하나의 구조가 인간의 주어진 조건(혹은 한계) 속에서 결코 해체될 수 없는 하나의 층위라는 것을 인정해야 한다. 우리는 다만 진실을 가리고, 좋지 않은 효과를 일으키는 허구적 이데올로기에 개입해 그것을 좀 더 좋은 효과를 내는 형태로 바꿀 수밖에 없다. 따라서 철학은 현실과의 관계를 긴밀히 유지해야 한다.




철학이 자기 학문의 분과에 갇혀 과학이 쏟아내는 지식을 취하지 않는다면, 철학은 지식을 재료로 주장을 표명하지 않게 된다. 철학마저 허구적인 이데올로기 속에서 허우적거리게 되어 철학 본연의 기능을 상실하고 스스로의 역사 속에 갇히게 된다는 것이다. 현실과 소통의 차단 및 고립은 곧 위기이다.










3.4.2 문학의 역할




과학은 지식을 생산하고 철학은 현실과의 소통 속에서 과학이 생산한 지식을 압류하여 과학에 개입하고, 올바른 주장을 표명한다. 이 철학과 과학의 소통 과정은 지식생산체계에서 매우 핵심적인 역할을 한다. 하지만 과학과 철학을 통해 생산된 지식과 주장은 여전히 잠재된 상태에 불과하다. 그것은 학문의 구조 외부로 실현될 때, 비로소 제 값을 갖는다. 이 연결고리를 담당하는 것은 문학, 예술이다. 순수하게 문학적인 영역은 지식도 생산하지 않고, 주장도 표명하지 않는다. 고유한 대상을 갖지도 않는다. 하지만 문학은 과학이 생산한 지식과 철학이 표명한 주장을 가공하여 그것을 실현시킨다. 극단적으로 말해 표현의 영역이 된다. 하지만 단지 표현 자체가 문학인 것은 아니다. 문학은 지식과 주장을 가공하여 그것을 조리 있게 배열한다. 즉 아름다움을 생산한다. 거기에는 필연적으로 표현양식, 즉 언어가 개입된다. 언어의 개입을 통한 지식의 궁극적인 실현이 문학의 역할이다.




하지만 문학에 대한 이런 정의에서도 애매한 점은 있다. 우선 문학가가 아니어도 철학자와 과학자는 글을 쓰며, 충분히 자신이 생산한 지식과 표명할 주장을 실현하고 있다는 것이다. 과학자도 철학자도 글을 쓴다. 그것이 가능한 이유는 그들 역시 언어능력이 있으며, 최소한의 문학에 대해 습득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들은 자신이 말하고자 하는 바를 조리 있게 배열하고 꾸밀 줄 안다. 문학이란 영역이 제도적으로 지식생산체계의 전 영역, 뿐만 아니라 전 사회의 영역들에 폭 넓게 개입되어 있기 때문이다. 얼핏 과학 서적이나 철학서적은 문학이 생산하는 아름다움과 관련이 없어 보이지만, 그들이 생산한 지식 체계, 철학 체계 자체의 배열에 문학은 개입하여 그것을 아름답게 보이게 한다.




문학이 담당하는 영역에는 단지 과학이나 철학이 생산한 지식과 주장을 실현시키는 것 이상으로 순수하고 독자적인 무언가가 있다. 문학 자체가 지식생산체계의 구조 내에 갇힐 수 없는 아름다움을 생산하기 때문이다. 문학은 과학자나 철학자의 지식과 주장을 빌려올 뿐 아니라, 스스로 이야기를 풀어내며 미적 양식을 생산한다. 중요한 것은 정도의 차이가 있을 뿐 그 어떤 지식이나 철학적 입장이 없는 문학은 없다는 사실이다. 여기서 문학의 난점이 발생한다. 과학과 철학이 빈곤할 때, 문학은 그 공백을 이데올로기로 메우게 되며, 그것은 현실에서 왜곡된 방식으로 실현된다. 따라서 문학은 과학과 철학으로부터의 개입을 필요로 한다.







3.5 인문학




인문학 안에는 매우 다양한 분과학문들이 포함되어 있다. 언어학, 문학, 철학, 사학, 심리학은 물론이거니와 정의하는 방식에 따라 사회과학들도 포함된다. 그리고 이 중 적지 않은 분과학문은 이미 자신이 문제 삼은 하나의 대상에 대한 지식들을 생산하고 있다. 우리는 그것들에 대해 과학의 이름을 부여해야 한다. 예를 들어 언어학이 언어 구조에 대해서 일정한 과학적 방법론을 도입해 지식을 생산해내고 있다면 그것은 분명 과학이다. 역사의 경우 과거 단순한 기록과 서술의 영역을 넘어서서 인간의 역사라는 구조에 대해, 그런 역사 변동의 메커니즘에 대해 분석하고, 새로운 지식을 생산해내고 있다면 우리는 그것을 과학이라고 불러야 한다.




하지만 그런 것들 안에는 여전히 그것을 과학이라고 부르기 미심쩍은 부분이 있다. 인문과학이 연구의 대상으로 삼는 구조들은 대체로 매우 복잡하고, 다층적인 구조를 가지고 있어서 접근하기 어렵다는 점이다. 그것은 일정한 학문 수준에서는 그 분과학문 내에 과학의 영역보다는 이데올로기나 환상, 철학이나 문학의 영역들이 더 우위를 점하게 된다는 것이다. 그것이 자연과학과 인문과학 사이의 결정적인 차이이다. 하지만 우리는 오직 자연과학의 지식에 대해서만 그 객관성과 엄밀성을 인정하고, 인문과학이 지식을 생산하지 않는다고 부정하고만 있을 수는 없다는 것을 안다. 이제 그것이 과학임을 인정하고, 인문과학이 생산한 지식에 유효성을 불어넣어줘야 한다. 바로 이것은 자연과학과의 통섭을 통해 가능하다.




인문과학이 갖고 있는 본질적인 성격에 의해, 거기에는 철학과 이데올로기의 개입이 필연적이라는 것 또한 인정해야 한다. 거짓된 이데올로기가 아니라, 철학이 표명하는 올바른 주장과 올바른 주장이 수반하는 이데올로기적 효과들의 개입을 추구해야 할 뿐이다. 인문과학의 유효성은 그런 올바른 철학적 주장에 의해서 유지될 수 있다.







3.6 통섭의 필요성




살펴본 대로, 현실에 존재하는 각각의 학문에는 과학, 철학, 문학의 영역이 모두 중층적으로 포개져 존재한다. 그 사이의 고리가 끊어질 때 위기는 발생한다. 한 사람의 과학자는 결코 자신으로부터 특정한 층위를 거부할 수 없다. 철학과 문학을 이해하지 못한 과학은 자기 파괴적으로 나아갈 수 있다. 그것은 참된 지식을 생산하지도 못하고, 심판받지도 못한다. 과학으로부터 과학적 지식을 받아들이지 않는 철학은 현실과 고립된 채 그 어떤 올바른 주장도 표명할 수 없게 된다. 과학이 생산한 지식과 철학이 표명하는 주장을 실현시키지 못하는 문학은 진리가 아닌 재미만을 생산할 뿐이며, 스스로 문학의 지위를 포기하게 된다.




이러한 위기를 극복하는 것은 매우 적극적인 실천 행위이다. 각각의 영역이 어떤 식으로 존재하는지에 대해 정확하게 분석하고 서로를 인정하고, 서로가 서로의 개입을 시도하고 인정하는 것이 필요하다. 그 과정에서 자기 스스로가 때론 부정되고, 과거와 단절하거나 변화되는 진통을 겪더라도 말이다. 우리는 그것을 ‘통섭’이라고 부른다. 따라서 통섭은 단지 지식생산체계의 각각의 영역이 서로에 관여한다는 사실 자체를 뜻하는 것은 아니다. 현재의 위기로의 경향을 역전시키고 과학, 철학, 문학이 스스로를 변화시키는 것, 그리고 각각의 분과학문, 특히 과학들의 분과학문이 진통을 겪는 것을 목표로 하는 매우 적극적인 실천을 뜻한다.







4. 통섭의 재정의




에드워드 윌슨은 자신의 저서 『통섭』에서 통합학문에 대한 열망을 이야기했다. 통합학문이란 현실에 대한 하나의 설명 체계를 구성한다는 뜻이다. 그 밑바탕에는 지식생산체계의 환원주의적 기획이 깔려있다. 따라서 일반적으로 통섭이란 환원주의적 통섭으로 이해된다. 그런 환원주의적 통섭은 실제로 일정 정도 성공을 거둔 것처럼 보인다. 하지만 그것의 성공은 일정한 시기와 범위 안에서 가능할 뿐임을 지적해야 한다. 하지만 그것은 생물학이란 유기적 관계 속에서 가능할 뿐이다.




우리는 위의 논의를 통해 환원주의적 통섭에 대해 충분히 문제제기할 수 있는 근거를 마련했다. 가장 먼저 과학의 대상이 되는 구조라는 것이 고유한 외적규정성과 내적구조를 갖는다는 것이다. 하나의 구조는 더 우위를 갖는 구조, 즉 더 본질적이라고 볼 수 있는 구조에 대해 경향적 지배 속에서의 상대적 자율성을 가지며, 따라서 하나의 구조는 더 본질적인 구조로 환원되지 않는다는 것이다. 또 하나는 지식생산체계의 각 영역이 전혀 질적으로 다른 역할과 기능을 수행하기 때문이다. 과학은 결코 철학을 대체하거나 문학을 대체할 수 없다. 여기서 환원주의는 그 어떤 경우에도 의미를 갖기 힘들다.




따라서 통섭은 다른 방식으로 이해되어야 한다. 우리는 인문학이 동일한 성격의 분과학문들로 구성된 것이 아니라, 과학의 영역, 철학의 영역, 문학의 영역을 담당하는 다른 층위의 학문들이 인문학이란 범주 안에 함께 포함되어 있다는 점에 근거하여, 인문학과 자연과학의 통섭을 ‘인문과학과 자연과학의 통섭’과 ‘철학과 자연과학의 통섭’으로 나누어서 설명할 것이다.







4.1 자연과학과 인문과학의 통섭 – 설명의 대상이 가지고 있는 다양한 층위




환원주의는 “복잡하고 추상적인 개념을 단일 레벨의 더 기본적인 요소로부터 설명하려는 입장”이다. 그리고 주지하다시피 이는 단지 자연과학의 방법론에 국한된 것이 아니다. 사랑을 예로 들면, 호르몬의 작용과 같은 사랑의 생물학적 속성뿐만이 아니라 다른 수많은 속성에 대해서도 똑같이 환원주의적인 설명을 더 할 수 있다. 어떻게 둘이 만나는 상황이 되었으며, 어떤 방식으로 데이트를 하는지도 충분히 환원론적으로 설명할 수 있다.




하지만 이것은 또 다시 각각의 현상에 대해서 자신의 영역으로 설명하고 있을 뿐이지, 한 사람이 다른 한 사람을 사랑하게 된 그 사건에 대한 다른 설명들을 대체하는 것은 결코 아니다. 또한 새로운 설명 역시도 그 현상에 대해 특정한 영역에서 설명하고 있을 뿐이지 또 다시 그와 관련된 다른 영역들에 대해서는 놓치게 된다. 환원주의는 모든 설명 체계를 포괄하며 진실에 접근하기보다는 이런 ‘미끄러짐’을 가져올 뿐이다. 대상세계를 점점 더 확장하며 많은 것들을 설명하려고 할 수는 있지만 결코 다른 층위의 문제들과 만나지는 못한다.




따라서 사고가 가능한 범위들, 가상적으로 추출한 가상적 범주들의 구조를 다시금 포갬으로써만이 진실에 접근할 수 있다. 한 사람이 다른 한 사람을 사랑하게 되었을 때 우리는 그 하나의 사건에 영향을 끼친 매우 다양한 구조의 효과들 즉, 두 사람의 생물학적인 구조에 대해서, 그리고 두 사람이 거기에서 만나게 된 일상의 구조, 사랑을 꿈꾸게 만드는 사회적인 요인, 사랑을 할 때 특정한 행동을 하게 만드는 문화와 같은 다양한 부분들을 총체적으로 보아야 한다.




총체적으로 본다는 것은 매우 분열적인 시점들의 교차이다. 왜냐하면 다양한 층위를 넘나드는 것이기 때문이다. 사랑이란 대상에 다른 다양한 구조들, 경제, 정치, 문화, 일상, 기후, 유전자 등 다양한 구조가 얽혀있을 때, 총체적으로 본다는 것은 이것을 단지 합하는 문제가 아니다. 각각의 구조는 다른 층위를 형성하며 그것을 보는 것은 시점의 이동을 필요로 한다. 따라서 총체적으로 본다는 것은 통일이 아니라, 분열이 된다. 자유로운 시점의 넘나듦 속에서 다른 하나를 무시하지 않으려는 긴장이 유지될 때, 총체적인 파악이 가능해진다.




인문과학이 관심을 갖는 대상들은 자연과학의 대상보다 훨씬 더 복잡한 구조를 형성하고 있음에 주목한다. 예를 들어 사랑이란 것은 어떠한 구조들의 중첩으로 이루어졌는지조차 모를 정도로 매우 복잡한 구조이다. 거기에는 좀 더 직접적이고 긴밀한 관계를 갖는 구조도 있는가하면, 간접적이고 그 관계가 잘 드러나지 않는 구조도 있을 수 있다. 하지만 인문과학이 자신의 영역에 고립되어 있다면 우리는 사랑을 구성하는 다른 구조들–충분히 설명 가능한 동시에 엄연히 사실인–에 대해 무시할 수 있다. 그리고 그 무시된 부분을 이데올로기적 환상으로 채운다. 사랑을 할 경우 판단력이 흐려지고, 상대방에 대해 무비판적이 될 때, 그것을 단지 콩깍지가 씌었다고 비유적으로 표현하면서 문제 삼지 않거나, 사랑을 한없이 신비화하면서 스스로의 과학성을 포기할 때 인문과학은 과학으로서의 신뢰를 잃고 스스로의 존재기반을 잃게 된다. 우리는 도파민과 같은 사랑과 관련된 호르몬이 뇌에 작용해 뇌의 기능을 일시적으로 저하시킨다는 자연과학자의 말을 받아들여야 한다. 미끄러져 들어오는 자연과학자들의 도전 속에서 인문과학은 자신의 설명체계 내에 갈등을 조직하고, 자신에게 덧씌워져 있던 허구적 이데올로기, 은폐, 무시를 발견해야 한다.




결론적으로 자연과학과의 접촉, 그리고 자연과학이 생산한 지식을 적극적으로 받아 안음으로써 인문과학이 새로운 지식, 좀 더 총체적이고 진실에 근접한 지식을 생산하는 것, 그것이 인문과학과 자연과학의 통섭이 가능한 지점이다. 결국 인문과학과 자연과학의 통섭이란 환원이 아닌 총체성을 지향하는 것이며, 그것은 자연과학의 환원주의적 도전이 결과적으로 설명체계 안으로 미끄러지는 과정 속에서 인문과학 내부의 허구적 이데올로기를 제거하고, 대상을 총체적으로 설명할 수 있는 새로운 설명체계로 재구성됨으로써 가능하다.




이것은 우려와 달리 인문학을 풍부하게 만들어줄 것인데, 이런 여러 설명체계가 미끄러지는 과정에서 일단은 그것을 하나의 분과학문으로 포섭하려고 하지만, 의미 있는 방식으로 전혀 새로운 대상과 관점이 교차할 때에는 새로운 과학이 구성될 수 있기 때문이다.







4.2 자연과학과 철학의 통섭 – 지식생산체계의 층위들




지식생산체계, 즉 학문의 구조는 구조들의 층위로 이루어져 있다. 지식생산체계를 구성하는 구조들은 다른 어떤 구조의 관계보다 더 독자적이면서도 서로가 서로에게 강력하게 의존하고 있다. 따라서 철학과 과학, 혹은 철학과 문학의 통섭은 환원주의와 같은 방식, 혹은 수평적 교환의 방식으로 이루어질 수 없다. 심지어 적용이나 종합, 새로운 학문의 구성과 같은 방식으로 이루어지는 것도 아니다. 지식의 대통합 앞에서 즉, 과학의 영역이 통합됨으로써 다른 층위들이 해체될 수 있는 것 역시도 아니다.




가령 과학은 문학이 해왔던 기능, 역할, 혹은 문학자들의 욕망과 문학작품과 독자와의 상호작용에 대해서도 모조리 분석해낼 수 있을지 모른다. 하지만 문학이란 층위가 사라지는 것은 아니다. 그것은 마치 니체에 의해 도덕은 권력의 의지에 불과하다고 선언되었을 때, 그리고 20세기 초 니체의 선언이 전 유럽을 휩쓸었을 때조차도 도덕이란 층위 자체가 해체되지 않은 것과 마찬가지이다. 혹은 아름다움의 감정이 유전자와 뇌과학을 통해서 그 뿌리 끝까지 샅샅이 파헤쳐졌다고 해서 아름다움이란 영역이 사라지고, 사람들이 아름다움을 느끼지 못하는 것은 아닌 것과 같다.




경향적으로 각각 다른 층위를 담당하게 되는 과학, 철학, 문학의 관계는 상호 개입과 재구성의 관계라고 할 수 있다. 그것은 각자가 다른 층위에 개입하면서 서로를 지탱하며 유기적으로 존재하지만 별다른 접점을 찾지 못하면서 마치 독립적으로 존재하는 것처럼 보이다가 어느 순간, 즉 위기의 순간에 다른 층위로부터의 강력한 도전에 직면하여 재구성되어지는 모습을 보이기 때문이다. 여기서의 위기란 하나의 층위가 다른 층위로부터 그 존재를 부정 당한다는 뜻이다. 하지만 그 고유한 층위는 해체되지 않고, 일정한 혼란을 겪지만 스스로의 모습을 재구성함으로써 다시금 자신의 기능과 역할을 담당하게 된다. 하지만 이것은 자연적으로 이루어진다기보다는 매우 적극적인 형태로 나타난다. 과학자, 철학자, 문학가들의 적극적인 실천을 통해서 이루어진다는 것이며, 궁극적인 성공을 그 자체로 담보하고 있는 것은 아니라는 것이다.




예를 들어 니체, 혹은 맑스주의자들에 의해 도덕의 존재 자체가 공격받을 때, 도덕의 층위는 그 자체로 존재하지만, 그 공격이 시들지 않는다면 결국 도덕 내부의 도덕 체계는 위기를 겪게 된다. 하지만 이것은 해체가 아닌 혼란이며, 사람들은 그 안에서 동요한다. 그리고 새로운 도덕을 다시금 구성하기 위한 적극적인 노력을 하게 된다. 부르주아 이론가는 철학체계를 다시금 공고화하고 기존의 낡은 도덕을 다시금 바로 세우려고 할 것이다. 혹은 다른 사람들은 새로운 도덕 체계를 구성하기 위한 실천들을 벌일 것이다. 그 스스로가 그것을 도덕이라고 인식하든 그렇지 않든 간에 매우 적극적인 형태로 말이다. 예를 들어 사유재산에 반대하는 공동체주의자는 (자신의 낡은 습관으로 인해)남의 물건을 사용하는 것에 거부감을 느끼면서도 공동체 윤리를 가능하게 하기 위해 기꺼이 그런 활동들을 벌일 것이다. 혹은 남성 중심적이고 가부장적인 예법을 거부하고, 좀 더 평등한 관계를 형성하기 위한 남성과 여성 간의 윤리를 실천할 것이다.




이와 같은 과정은 학문의 역사에서도 볼 수 있다. 코페르니쿠스, 갈릴레오, 그리고 뉴턴에 의한 고전물리학, 다윈의 진화론, 맑스의 정치경제학 비판, 프로이트의 무의식에 대한 이론은 이전 과학에 대한 단절은 물론, 하나 같이 철학자들을 혼란에 빠뜨렸다. 새로운 과학은 철학 자체를 부정하는 것처럼 보였다. 그 동안 철학이 다듬어 놓은 수많은 이론체계들, 주체, 신, 역사, 생명에 대한 모든 이론이 흔들리게 되었다. 하지만 그런 위기 속에서도 과학이 생산한 지식을 적극적으로 습득하고 새로운 철학체계를 구축한 과정이 있었다. 그것은 매우 적극적인 행동이었다. 당시 철학자들(로크, 루소 등)은 뉴턴의 『프린키피아』를 이해하기 위해 수학을 배웠고, 그 속에서 새로운 자연법사상을 주창할 수 있었다. 그것은 과거의 철학, 즉 스스로의 역사와 일정한 단절을 감행하는 것이기도 하였으며, 미지의 것에 대해 발을 뻗는 것이기도 하였다. 철학이 자신의 이론 체계를 비약적으로 발전시키고, 시대의 질서에 강력한 영향력을 행사한 것은 이러한 과정 속에서였다.




지금 우리가 위기를 말한다면 그것은 각각의 층위가 서로를 부정하지만, 서로에 대한 이해 속에서 스스로를 재구성해나가지 못하고 있기 때문이다. 속속들이 밝혀지는 과학적 사실들은 그 동안 철학, 혹은 많은 인문학이 해왔던 작업에 근본적으로 문제를 제기 하고 있다. 특히 급격하게 대두되는 생물학의 발달은 철학에 대해 직접적인 도전을 하고 있다. 철학자의 통섭은 이런 과학의 도전에 대한 자기 재구성의 과정이어야 한다. 그리고 그런 재구성이 의미하는 것은 철학 본연의 기능을 다시금 충실히 수행하는 것이다. 주지할 것은 위에서 말한 철학의 역할은 과학자들도 수행하는 것이라는 점이다. 진실에 대한 접근, 허구적 이데올로기를 제거하려는 시도들을 단지 과학자가 한다는 이유로 허구적인 이데올로기로 매도당할 이유는 전혀 없다. 우리는 과학자들에게도 충분히 철학이 존재함을 안다. 과학자들의 철학은 자생적이기도 하고, 때론 철학이란 분과 학문에서 차용한 철학일 수도 있다. 하지만 과학이 생산하는 지식의 참됨이 결국 과학자들의 손에 쥐어져 있고, 과학자들도 충분히 올바른 주장을 표명할 수 있다는 것을 상기할 때, 결국 철학자들이 올바른 주장을 표명하며 과학에 개입한다는 것은 과학자들의 철학에 개입한다는 것과 거의 동일하다. 이런 의미에서 통섭이 가능하고 의미가 있을 것이다.







Ⅲ. 결론




1. 의의




우리는 모두 지금 위기에 발 딛고 있다. 위기는 복수적으로 다가온다. 인문학의 위기, 경제 위기, 정치의 위기, 자본의 위기, 공동체의 위기, 대학의 위기, 소통의 위기 등. 위기란 서로 유기적으로 구성되어 있던 구조 사이의 관계에 단절이 생기고 서로가 서로를 부정함으로써 인간 주체들이 그 속에서 동요하는 것이다. 즉 지금 겪고 있는 인문학의 위기는 지식생산체계 자체의 위기이며, 본질적으로 정치, 경제의 위기와 관련된 인류 역사의 위기의 한 단면이다. 인문학의 위기를 극복하고, 적극적인 통섭을 실현한다는 것은 지식인, 즉 인문학자들이 이런 전체적인 위기의 상황에 의미 있는 실천을 수행하는 것과 동일하다.




실제로 학문의 발전은 인류 역사의 추동력이었다. 물론 대부분의 경우에는 학문은 권력에 종속되어, 지배자의 정당성을 승인해주는 기능을 수행해왔으며, 기술적 진보는 일부 권력자들에게 독점되어 있었다. 우리는 그런 학문의 부끄러운 역사를 알고 있다. 하지만 결정적인 순간에, 과학의 혁명적 전화와 그것을 적극적으로 받아 안고 그 시대에 가장 적합한 주장을 펼친 철학의 통섭은 억압과 종속에 반역을 시도하는 단초를 제공하였다. 코페르니쿠스, 갈릴레오, 뉴턴 등에 의해 이룩된 천문학과 물리학의 발전이, 철학자들에 의해 새로운 인권 사상으로 발전하고, 그런 철학자들의 주장이 수많은 대중들과 공명할 때, 인류는 교회와 봉건제라는 낡은 권력으로부터 벗어날 수 있었다.




그런 점에서 재개념화된 새로운 통섭은 현재 우리 각자가 현재의 위기를 극복하기 위해 무엇을 해야 할 지 알려줄 수 있다고 생각한다. 통섭은 과학, 철학, 문학, 정치, 이데올로기 등의 다양한 층위가 서로 개입하고 서로를 바꾸어낼 때 가능하다. 부족한 점이 많지만, 우리에게 주어진 현실을 정확하게 판단하고 실천적인 통섭을 이끌어냈다는 점에서 충분히 의의가 있겠다.













2. 한계점




그럼에도 짧은 기간, 제한된 분량에 담아야 할 논의여서, 미처 알지 못한 부분, 알면서도 놓칠 수밖에 없었던 부분들이 분명히 존재한다는 점이 아쉽다. 학문의 구조를 지식생산체계로 보고 현실에 존재하는 분과학문 이면의 구조에 접근하려는 시도가 더 철저하게 이루어지지 못해 많은 부분 철학에 치중한 감이 있다. 주어진 조건 안에서 다른 이론으로부터 개념을 차용하여 풀어낼 수밖에 없었던 점은 한계로 남는다.




무엇보다도 통섭을 이야기하면서 지식생산체계의 구조에만 분석의 범위가 한정되었던 점이 이 보고서의 가장 큰 한계점이다. 지식생산체계로서의 학문의 구조와 다른 영역들, 정치나 경제, 문화와 같은 영역들 간의 관계를 다루지 못한 점은 큰 아쉬움으로 남는다.




차후 자체적으로라도 그런 구조들을 총체적으로 살펴봄으로써 통섭의 실현 가능태와 의의를 좀 더 발전시킬 필요가 있을 것이다.







Ⅳ. 참고문헌




공지영 외, 『인문학의 창으로 본 과학』, 한겨레출판, 2006




루이 알튀세르, 『철학과 과학자들의 자생적 철학』, 김용선 옮김, 인간사랑, 1992




리차드 도킨스,『이기적 유전자』, 홍영남 옮김, 을유문화사:30주년 개정판, 2006




C.P.스노우,『두 문화』, 오영환 옮김, 사이언스북스, 2001




알랭 바디우, 『조건들』, 이종영 옮김, 새물결, 2006




에드워드 윌슨,『통섭: 지식의 대통합』, 최재천·장대익 옮김, 사이언스북스, 2005




에드워드 윌슨,『인간 본성에 대하여』, 이한음 옮김, 사이언스북스, 2000




월터 카우프만,『인문학의 미래』, 이남재·이홍수 옮김, 미리내, 1998




토마스 쿤, 『과학 혁명의 구조』, 김명자 옮김, 까치글방, 2002




헨리 마지노·로렌스 르산,『아인슈타인의 공간과 반 고흐의 하늘』, 김영건·박찬수 옮김, 고려원미디어, 199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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