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월 172006
 

김청하 – 인간은 자유로운가 (1) – 유전자

유전자가 인간에게 미치는 영향에 대해 연구하기 위해 가장 좋은 예는 바로 ‘일란성 쌍둥이’입니다. 여러분도 아시다시피, 그들의 유전자는 완전히 동일합니다. 동일한 유전자-다른 사람. 대체 쌍둥이가 없었다면 유전학자들은 무슨 수로 인간의 유전 연구를 했을까, 싶을 정도지요. 물론 쌍둥이가 같은 사람은 아니고, 인간에게 영향을 주는 환경은 통제하기가 힘드니 환경의 영향 또한 깊이 고려해야 합니다.

먼저, 일란성 쌍둥이가 완전히 동일한 유전자를 갖고 있고, 그들이 비슷한 형질을 보인다는 것은 익히 알려진 사실입니다. 그들은 측정 가능한 거의 모든 특성에서 서로를 닮습니다. 언어적, 수학적, 일반적 지능과 생활만족도, 외향성, 친화성, 정서 안정성, 성실성, 개방성 등의 다섯 가지 성격 기준에서도 상당히 비슷한 면을 보이는 것이지요. 이런 ‘재능’들을 유전자가 직접적으로 결정한다고 치더라도, 사형제도나 종교, 현대 음악의 쟁점 등에서도 그들은 비슷한 태도를 보이며 심지어 그들은 결과론적인 행동으로 나타나는 도박, 이혼, 범죄, 교통 사고, TV시청 습관 또한 비슷한 양상을 보인다고 합니다. 그들은 똑같이 도박을 좋아하고, 비슷한 나이에 결혼했다가 비슷한 나이에 이혼하고, 같은 TV프로그램을 보다가 비슷한 타이밍에 채널을 돌립니다.

물론 이런 결과들이 그들이 비슷한 환경에서 자라났기 때문에 이렇게 되었을 가능성을 배제할 수 없습니다. 그렇다면 출생 직후 헤어져 (여러 의미로) 다른 가정환경에서 떨어져서 산 쌍둥이들에 대하여 검토해보아야 합니다. 하지만 연구자들은 그런 경우 또한 그들이 비슷한 형질을 보인다는 점을 발견했습니다. 물론 함께 자란 일란성 쌍둥이보다는 다르지만, 함께 자란 이란성 쌍둥이보다는 훨씬 비슷한 결과를 보이는 것입니다.

회의론자들은 실험 전에 이들이 미리 만났을 가능성, 외모가 비슷해서 비슷한 대우를 받고 자랐을 가능성, 유전자 때문이 아니라 한 자궁을 공유했기 때문일 가능성들을 제기하지만, 행동 유전학의 발달은 이런 주장들의 사실 여부를 밝히는 방법을 많이 개발해냈습니다. 그리고 결국, 이런 주장들은 전부 거부되었습니다.

한 가지 방법으로, “가짜 쌍둥이”의 방법이 있습니다. 그들은 부모가 다른 아이들이 유아기부터 한 가정에 입양되어 양육된 가짜 쌍둥이들입니다. 나이도 같고 가정환경도 같지만, 결국 그들의 지능을 비롯한 형질은 거의 상관이 없다는 결과가 나왔습니다. 이외에 비슷한 기대를 받고 자랐을 지도 모른다는 가능성은 ‘자신들이 이란성 쌍둥이라고 알고 자란/키워진 일란성 쌍둥이들의 예’를 통해 부정되었고, 비슷한 외모 때문에 비슷한 대우를 받고 자랐을 가능성 또한 ‘한 쪽이 사고를 당한 쌍둥이들의 예’에 의해 부정되었습니다.

결국 “일란성 쌍둥이는 상당히 비슷하며, 그것은 환경의 영향에서 독립적입니다.”

하지만 이 결과는 어쩌면 많은 사람들을 불쾌하게 할 결론을 함의하고 있습니다. 완전히 다른 곳에서 완전히 따로 자란 쌍둥이 형제가 처음으로 만났는데, 같은 차를 타고 같은 옷을 입고 같은 유머에 웃고 같은 영화를 좋아한다면, 그들에게 자유는 있었던 것일까요? 유전자가 모든 것을 결정한다는 것은, 새로운 운명론인가요? 우린 어차피 범죄자가 될 유전자를 타고났기에 범죄자가 된 사람을 더이상 처벌할 수 없는 것일까요?

어떤 남자(편의를 위해 이영기라고 합시다)는 어릴 때부터 다른 가정에 입양되어 자라난 자신의 형제(편의를 위해 고계영이라고 합시다)를 만났습니다. 영기 씨는 얼마 전에 빨간 머리의 여성과 결혼하고 자동차를 샀으며 엘리베이터 안에서 고개를 까딱이는데, 계영 씨 또한 얼마 전에 빨간 머리의 여성과 결혼하고 똑같은 자동차를 샀으며 엘리베이터 안에서 고개를 까딱인다는 사실을 깨닫게 되었습니다. 그렇다면 영기 씨는 정말 ‘자신의 의지로’ 빨간 머리의 여성과 결혼하고, 그 자동차를 ‘선택’한 것일까요? 엘리베이터 안에서 고개를 까딱이는 습관은 정말 자기가 만든 습관일까요? 그 선택들은 정말 영기 씨 자신에 의해 행해진 것일까요? 이런 문제는 쌍둥이가 아니라고 해도 적용됩니다. 유전자가 그런 행동들을 결정한다면, 우리 모두 자유롭지 못한 셈입니다.

자유란 무엇일까요? 유전자로부터의 자유는 유전자에 각인된 운명에 반항할 수 있는 것을 뜻할까요? 현대인은 외향적인 형질이 유전되는 것에 대해서는 그리 어렵지 않게 받아들입니다. 혀말기라던가, 머리 색깔, 특정 질병의 발생 경향이 유전되는 현상은 현대인의 상식입니다. 하지만 정신적인, 다르게 말하면 ‘영혼이 관장하는’ 부분에 대해서는 거부감을 보입니다. 당연합니다. 당신이 어제 한 친절하거나 난폭한 일들이 당신의 의지가 아니라 그저 유전자가 시켜서 한 것일뿐이라고 하면 당신은 쉽게 받아들이겠습니까? 당신이 첨단 기술과 최신 과학에 열광하는 것이라던가, 당신이 세계의 근원에 대해 궁금해하는 것, 그리고 당신이 책마을에 열심히 리플을 다는 것 또한 당신의 자유 의지가 아니라 당신의 유전자에 의해 결정된 것이라면?

우리는 일상 속에서, 얼마나 자유롭게 선택할 수 있을까요? 이 우주는 안타깝게도, 제가 알기로는 세이브와 로드가 되지 않는 우주입니다. 어떤 하나를 선택하면 나머지 가능성은 전부 사라지는 것이지요. 이것은 양자적인 규모에서조차 사실입니다. 양자 또한 확률적으로 가능한 모든 지점에 동시에 존재하지만, 실제로 관측하면 그 순간 위치는 어떤 한 점으로 고정되고 나머지 확률들은 전부 사라집니다(이른바 ‘확률파동의 붕괴’). 우리가 같은 상황에서 다른 결정을 할 수 있었는지 알 수 있는 방법은 존재하지 않는 것이지요.

하지만 우리가 알고 있는 쌍둥이들은 대부분 같은 가정에서 자라나는 데다가 유전자가 완벽히 일치함에도, 조금씩 다릅니다. 여기에서 조금 틈이 생깁니다. 어쩌면 위의 쌍둥이 연구 결과들은 통계의 함정이 아닐까요? 대부분의 쌍둥이가 거의 모든 형질에서 일치한다, 는 말은 ‘일부’가 두 번 들어갑니다. ‘대부분’을 하나 빼고 생각해봅시다. ‘특정한 쌍둥이는 거의 모든 형질에서 일치하는가?’ 측정가능한 거의 모든 형질이 일치한다고 해도, 그것은 통계적으로 그럴 확률이 높을 뿐 그것이 ‘결정’된 것은 아닙니다. 특정한 쌍둥이들을 보면, 이런 모든 형질이 일치하는 경우는 없습니다(우주 역사에 한 번 쯤은 있을지도 모르겠습니다만, 인류 역사에선 한 번도 나오기 힘들 확률입니다). 무엇인가 분명히 다르죠.

자, 우리는 유전자로부터 자유를 얻은걸까요? 유전학자들은 이미 이런 반론에 답을 준비해뒀습니다. 유전자의 발현은 어느 정도 확률적이라는 것이지요. 동일한 유전자를 갖고 있다고 해도 특정한 유전자가 표현형으로 나타날 확률은 1이 아닙니다. 정확한 수치는 계산하기 어렵지만, 그래도 0보다는 높지요. 쌍둥이들 간의 형질 차이는 관련한 유전자가 한 쪽에서는 발현하고 다른 쪽에서는 발현하지 않았다는 차이에서 발생한 것 뿐, 그것이 유전자와 관련없는 형질이라는 증거는 되지 못합니다.

그래도 유전자의 발현률이 1이 아니라는 것은 우리에게 자유의 여지가 있는 것 아닐까요? 그렇지 않습니다. 유전자가 발현하고 그렇지 않고를 우리의 자유의지로 통제할 수 있는 것이 아니라면 아무 의미가 없습니다. 무조건 4칸 가는거나 주사위 던져서 1d6칸 가는거나 우리의 자유가 아닌건 마찬가지지요.

그러면 결국 인간의 자유는 ‘측정불가능의 영역’에서 찾을 수 있지 않을까요? 측정가능한 형질을 모두 측정한다는 것은 불가능하고, 그것이 가능하다고 해도 측정가능한 형질들은 극히 일부분입니다. 또한 유전자가 표현형으로 발현하는 메카니즘은 상당히 복잡하고, 우린 그것을 완전히 알지 못하기에 단언할 수 없는 것도 사실이구요. 아마 우리의 자유는 그 안에 있을지도 모릅니다.

다만 2001년, 게놈 지도의 발표는 02-03학번 입시생들의 논술 공부에만 영향을 미친 것이 아닙니다. 연구자들은 꾸준히 게놈 지도를 해석하고 있고, 어쩌면 완벽히 해석해낼 수 있을지도 모릅니다. 그 때에, 우리는 과연 자유를 어디에서 찾을 수 있을까요? 일단 그 얘기는 다음으로 미루고, 한 마디만 하겠습니다.

Don’t Panic.

인간은 자유로운가 (2) – 두뇌

. 들어가기 전에.

난 이 글을 통해 인간은 결정론적으로 움직이며, 우리가 생각하는 ‘자유’에 대한 낡은 개념은 버려야 함을 증명할 것이다. 하지만 이 글을 풀어나가기 위해서는 가장 먼저 취해야 할 가정이 있다.

바로 ‘이 세계는 자기완결적이다’라는 것. 이 세계는 완결적이고, 이 세계에서 일어나는 현상들은 세계 밖의 존재(예컨대, 신) 없이 설명가능한가? 나는 불가지론자고, 이 답은 이 세계 내에서는 알아낼 수 없는 것이라고 생각한다. 하지만 과학자들은 묵묵히 세계 안의 요소들을 통하여 세계에서 일어나는 현상들을 설명하려고 애써왔고, 그 결과는 성공적이었다. 그렇기에 우리들은 이 세계가 자기완결적이라는 명제에 대하여 강한 심증을 갖고 있다.

이 가정이 틀렸다고 말한다면 이 글은 원천무효가 된다. 이 글에 대한 반론은 이 가정이 틀렸다는 것으로 시작해서는 안된다. 왜냐하면, 이 가정이 틀렸다면 애초에 이 글은 아무 의미도 없으니까. 하지만 그러면 이 글 뿐만 아니라 과학체계 전체가 무너진다. 뭐 그렇다고 미리 절망할 필요는 없다. 우린 지금까지는 잘 버텨왔다.

2. 뉴턴의 우주

2-1. 우주 속의 인간.

뉴턴의 우주는 너무나도 조화롭고 예측가능하게 움직였다. 어쩌면 과학자들이 가장 행복했던 시절은 그 때가 아닐까? 인간은 실험과 이론을 통하여 모든 현상을 예측할 수 있을 것 같았다. 그 조화롭고 아름다운 우주에서 인간도 예외가 아니었다. 어쩌면 두뇌도 결정론적으로 움직이는 것은 아닐까? 하지만 그 시절에 감히 인간이 기계라는 말을 할 만한 사람은 없었고, 인간과 두뇌에 대한 연구는 부족했기에 인간만은 어떤 위대한 존재로 남아있었다.

하지만 (불경스럽게도) 최근의 (인지)신경학자들은 두뇌 – 그리고 인간 – 또한 결정론적인 결과를 내놓는 튜링 머신의 일종이라는 의혹에 계속해서 설득력을 싣고 있다. 물론 학계 내부에서도 이에 대한 비판은 적지 않으나 두뇌에 대한 실험 결과들은 대부분 그에 일치하고 있다. 알려진 많은 부분에서 두뇌는, 정말 기계처럼 행동한다. 황당하지 않은가? 우리와 자판기가 그리 다를 것 없는 구조로 움직인다니. 사람들은 분노했다. 과학이 인간을 모독하고 있다는 오해는 대부분 이러한 생각들에서 기인한다. 하지만 과학은 결코 무언가를 모독하지 않는다. 인간을 모독하는 것은 과학의 탈을 쓴 비과학, 그리고 인간 자신이다.

간단히 생각해보자.

1) 뉴턴의 우주에서 모든 입자들은 결정론적으로 움직인다.

2) 인간은 이 세계의 구성원이고 → 입자들로 이루어져있다. (*)

3) 인간의 모든 입자들은 결정론적으로 움직인다.

(*) 사실 (2)를 위해 1.의 가정이 필요했다. 인간 또한 ‘세계 내 존재’이며 세계 안에서 설명가능한 존재라는 것이다. 사실 두뇌 연구에 대한 가장 많은 반론은 1의 가정을 인정하지 않는 것에서 출발한다. 그것이 소통을 가로막는 가장 큰 장벽이다. 인간은 특별한가? 인간은 세계 밖의 무언가와 링크된 특별한 존재인가? 우리는 대답할 수 없다.

돌아가서, 위에 얘기대로라면 인간은 결정론적인 결과를 내놓는 하나의 기계다. 물론 인간은 동일한 상황에서도 다른 결과를 내놓는다. 또한 인간의 구성상태는 수시로 변한다. 그렇지만 그것이 인간이 결정론적으로 움직인다는 결과를 훼손하는 것은 아니다. ‘동일한 상황’이라는 것은 외부 입력 뿐만 아니라 기계 자신 또한 동일한 상황이어야 하는 것이다. 자판기조차도 동전이 없거나, 지폐가 없거나 하는 스스로의 상태를 감안하여 동일한 입력에 대해 거기에서 산을 내뱉는다.

2-2. 예측불가능성

인간의 행동은 거의 혼돈에 가깝다. 인간의 행동을 100% 예측할 수 있는 방법은 없고, 심리학이 통계학과 친하다면 아마도 그런 이유일 것이다. ‘몇 가지 질문만으로 타인의 심리를 알아내거나 그를 이용하거나 하는 것은 그저 일반인의 환상’이다(이훈재 님). 심리학이 유의미한 연구가 되기 위해서는 필연적으로 통계의 도움이 필요하다. 아직은.

두뇌는 양자역학을 데려오지 않더라도 충분히 예측불가능하다. 양자적 요동을 고려하지 않는 수준에서조차 두뇌는 예측할 수 없게 행동하는 것이다! 이것을 어떻게 설명할텐가? 어떻게 설명할 거냐고! 예전엔 여기에서 무릎을 꿇었지만, 지금의 연구자들은 이에 대해 이미 설명을 준비했다. 인간의 행동을 예측할 수 없는 것은 두뇌가 이 우주에서는 설명할 수 없는 메카니즘으로 움직이는 블랙박스이기 때문이 아니다. 바로 인간의 두뇌가 재귀적으로(recursive, 영어 미안) 기능하기 때문이다! 이해를 돕기 위해 아래의 수열을 보자.

1, 1, 1, 4, 9, 22, 80, 358, 818, 2064, …

15초만 들여다보라. 당신은 이 수열이 어떠한 식에 의해 만들어진 것인지 예측할 수 있는가?

혹시 알아냈는가? 이 수열은 다음과 같은 식을 따른다.

f(t(k)) = 2 * f(t(k-1)) + f(t(k-2)) + f(t(k-3)), f(1) = 1, f(2) = 1, f(3) = 1

뭔가 복잡해보이지만 그냥 바로 전의 수에 2를 곱해서 전전의 수, 전전전의 수와 더하는 것이다. 이 식을 그래프로 그려보면 꽤 불규칙하게 움직이는 것을 (아마도) 확인할 수 있을 것이다. 이 식이 복잡해서일까? 언뜻 보면 복잡해보이지만 최고차항이래봐야 겨우 1차항이다. 그렇기에 이러한 방정식의 일반해를 구한다는 것은 사실상 불가능하고, 이것은 ‘증명할 수 있는 사실’이다.

재귀적인 메카니즘은 이렇게 예측불가능성을 엄청나게 증폭시킨다. 유기체의 움직임을 겉으로 보고 그 메카니즘을 – 메카니즘이 존재한다는 사실조차 – 생각하기 힘든 것은 바로 이러한 이유, 생물이 항상 재귀적으로 기능하기 때문이다. 이 말은 자판기처럼 입력을 받아 간단한 계산을 거쳐 바로 출력하는 것이 아니라, 최초 입력에 따라 나온 결과를 다시 돌려서 나온 결과를 다시 돌려서 나온 결과를 (중략) 다시 돌려서 나온 결과를 내뱉는다는 뜻이다.

나는 여기서 생명체의 두뇌가 예측불가능하다고 해서 그것이 결정론적으로 움직인다는 사실에 대한 반증이 될 수는 없다는 사실을 보였다. 하지만 다음의 예를 보자. 우리의 우주는 뉴턴이 생각한 것처럼 조화로운 우주가 아니고, 결정적으로 움직이지도 않는다.

3. 양자역학의 우주

양자역학은 세계에 대한 우리의 관점을 송두리째, 까지는 아니더라도 꽤나 많이 바꿔놓았다. 양자의 위치는 정해져 있지 않고 우주 전체에 걸친 특정한 확률(파동)로만 존재하며, 그것은 그것을 관측하는 순간에 결정된다(이 때 우주 전체에 걸쳐 존재하던 확률파동이 붕괴하여 관측된 지점에 1, 나머지 지점에 0의 확률이 되는데 이게 바로 ‘확률 파동의 붕괴’다). 아인슈타인은 관측하기 전에는 그것을 알지 못하는 것뿐 실제로 걔들은 특정한 속도와 위치를 갖고 있지 않느냐며 화를 냈지만 그건 실험에 의해 부정되었다. 양자들은 실제로 가능한 모든 곳에 걸쳐 존재한다.

우리는 이런 양자의 불확정성을 다른 현상에 적용하여, 양자들의 특성 때문에 그 결과를 예측할 수 없는 경우를 흔히 ‘양자적 요동에 의해’라고 한다. 다시 두뇌 얘기로 돌아와보자. 사실 양자적 요동이 두뇌 전체에 미치는 영향은 그리 크지 않다. 두뇌를 구성하는 최소 단위는 뭐 끈일 수도 있고 입자들일 수도 있지만, 두뇌의 기능을 구성하는 최소 단위는 그렇게 작지는 않다. 양자적 요동에 의해 결과가 바뀌기에는 그 크기가 너무 큰 것이다. 점호하는데 각 개인이 양자적 요동에 의해 우주 전체에 걸쳐 파동으로 존재한다면 당직사관과 생활관장은 분명 분노하겠지만, 그러기에 인간은 너무나도 크다. 양자에 비하면 뉴런조차도 너무 크다!

하지만 굳이 뉴런 레벨의 양자적 요동까지는 필요 없다. 이승일 님은 신경세포들 간의 연결에서, 양이온 입자의 양자적 요동에 의해 세포를 자극하여 어떤 랜덤한 결과가 도출될 가능성을 제기한다. 물론 이 가능성 자체는 계영 님의 얘기도 있고 조금 더 과학적으로 검증되어야 할 부분이겠지만, 중요한건 바로 답글 중에 나온 다음 문장이다. “(그러한) 방식 이외에도 양자 효과가 개입될 수 있는 여지는 신경계 안에서 아주 많지 않을까요?”

나는 처음에 두뇌가 튜링머신이라는 가정 하에 이 글을 쓰려 했으나, 글에 보편성을 기하기 위해 그 가정을 버리고 인간이 세계 내의 존재라는 점에 착안했다. 그러나 이 가정은 보편적인만큼 더 쉽게 무너질 수 있다. 그 세계가 비결정론적으로 움직인다면 결국 인간 또한 결정론적인 기계라고 보는 것은 불가능한 것이 아닌가? 양자들의 요동이 어떤 식으로든 두뇌의 작동에 영향을 미칠 수 있다면 그것은 두뇌가 결정론적으로 움직인다는 사실에 대한 훌륭한 반증이 될 수 있는 것이다.

하지만 우리가 얘기하고 있는 것은 두뇌가 결정론적으로 움직이는가, 가 아니라 인간은 자유로운가, 하는 것이다! 난 이 글, 인간은 자유로운가? 1부에서 이렇게 썼다.

“그래도 유전자의 발현률이 1이 아니라는 것은 우리에게 자유의 여지가 있는 것 아닐까요? 그렇지 않습니다. 유전자가 발현하고 그렇지 않고를 우리의 자유의지로 통제할 수 있는 것이 아니라면 아무 의미가 없습니다. 무조건 4칸 가는거나 주사위 던져서 1d6칸 가는거나 우리의 자유가 아닌건 마찬가지지요.”

…자기 글을 인용하는 뻔뻔함에 대한 비판은 달게 받겠다. 인용하고 나서야 1부와 2부의 말투가 바뀌었다는 사실을 알아차렸다는 비판도 달게 받겠다. 유전자의 발현률이 1이나 0이 아니라는 것, 그리고 양자들이 결정론적으로 움직이지 않는다는 사실이 어쩌면 우리에게 구원으로 느껴질지 모르나, 실제로는 그렇지 않다.

유전자의 발현률을, 양자적 요동을 인간이 제어할 수 있는가? 그들은 그저 나름대로의 의지를 갖고 움직일 뿐이다. 그 확률을 우리가 조정할 수 있다면 그것은 분명히 인간의 자유에 대한 어떤 실마리가 될 수 있겠지만, 그건 불가능하다. 결국 양자적 요동과 인간의 자유는 별 관계가 없다는 것이다.

위에서 말한대로, 주사위를 던져서 결정하건 그것이 결정되어 있건 결국 자유의 관점에서는 별 차이가 없다. 주사위눈을 조작할 수 있다면 모를까, 실제로는 주사위를 던지는 것조차 우리가 아니다.

결론은 이렇다. 두뇌가 양자적 요동에 의해 어느 정도 비결정적으로 움직일 수 있다는 사실에 대해서는 동의하지만, 그것이 우리의 자유를 뜻하는 것은 아니다. 양자역학의 우주에서도 우리는 자유로운 것이 아니다.

두뇌가 양자적 요동에 의해 비결정론적으로 움직일 수 있다는 가능성에 대해서는 원론적으로 동의하지만, 실제로 나는 얼마나 영향을 받는지에 대해서 알지 못하고 난 그 영향은 무시해도 좋을 수준이라고 생각한다. 또한 신경학자들의 실제 연구결과는 두뇌가 상당히 기계적으로 작동한다는 것을 얘기하고 있다. 두뇌는 양자적 요동에 의한 다소간의 에러가 있다고 해도 여전히 ‘예측불가능한 결정론적인 기계’에 가깝다.

4. 그렇다면.

인간이 결정론적으로 움직인다면 우리는 많은 것을 잃는 것처럼 보인다. 인간은 자유로운 경제 주체도 될 수 없고, 신의 형상을 본떠 만들어진 위대한 피조물일 수도 없고, 자살로써 자신을 파괴할 자유조차도 그 자신의 것이 아닌거 아닌가? 교육은 아무 의미도 없고 범죄에 대한 처벌도, 결국에는 삶 자체가 우리에겐 아무런 의미도 없어지는 것은 아닌가? 이것은 인간에 대한 심각한 모독처럼 들린다. (이에 대해서는 4부, 혹은 다른 글에서 다시 얘기하도록 하겠다)

하지만 난 인간의 자유가 이론들 사이의 미싱링크에 위치해서는 안된다고 생각한다. 과학의 진보 앞에서 종교와 철학은 자신들의 위치를 과학 이론들 사이의 미싱 링크에 자리매김하려고 했다. 예컨대 생명에 있어 발생과 진화 사이의 설명이 안되는 몇몇 지점과 같은 것이 바로 일부 종교 – 주로 창조론자들 – 가 비집고 들어가려 했던 지점이고, 인간의 예측불가능성과 두뇌 연구의 난해함이 인간의 자유를 부르짖는 사람들이 위치했던 지점이다.

인간의 자유와 존엄함(그리고 종교)은 그런 곳에 위치해서는 안된다. 미싱링크가 이어질 때마다 다른 미싱링크를 찾아 도피할 셈인가? 아직 설명되지 않은 지점일 뿐인 곳에 비집고 들어가 이것이 인간의 고귀함이라고 외칠 셈인가? 그건 정말로 ‘도피’다. 베르세르크에서도 나오듯이, 도망쳐서 간 곳에 낙원이란 없다(물론 이럴 때 쓰는 말은 아니지만).

난 결국 설명될 수 없는 ‘내 머릿속의 블랙박스’에 의해 유지되던 인간의 자유에 대한 낡은 개념들은 갖다 버리고, 설명된 지점들의 위에 새로 쓰여져야 한다. 이것을 새로 쓰는 일은 지금의 나로서는 쉽지 않은 일이고, 아마 내가 평생동안 해야할 일이 될 것이다. 하지만 난 그것이 분명히 어딘가에서 새로 쓰여질 수 있으리라고 믿고, 우리 히치하이커들의 편리한 잠언 하나를 인용하며 이 글을 맺겠다.

Don’t Panic. 쫄지 마라!

인간의 자유 재론 : 이승일

청하씨 글 잘 읽었습니다. 참으로 흥미로운 내용이군요. 그렇게 기다렸으니 답변을 하는 것이 도리인 것 같습니다.

먼저 청하씨의 논지를 세가지 정도로 정리해보겠습니다. 물론 다른 내용도 있지만, 강한 주장이 실린 부분만 발췌하겠습니다.

1. 이 세계는 자기완결적이다.

2. 인간의 두뇌는, 그것이 어떤 물리법칙에 따르던간에 너무 복잡해서

예측 불가능하다.

3. 두뇌의 정보처리 과정에 양자 효과가 개입되어있다고 하더라도, 그것이

인간의 자유와 곧바로 연결되는 것은 아니다. 즉 비결정성과 자유는

다른 문제이다.

(우선 생각나는 대로 저의 생각을 써보고, 차후에 덧붙이거나 수정하겠습니다.)

이제 하나씩 살펴보도록 하죠.

1. “이 세계는 자기 완결적이다.”

우선 용어에 관해 생각해보도록 하겠습니다. ‘자기완결성’ 으로도 의미 전달이 되지만 더 좋은 용어가 원래 있기 때문입니다. 청하씨가 말씀하시려는 개념은 흔히 ‘물리세계의 인과폐쇄성’ 이라는 용어로 표시합니다. 청하씨가 ‘세계밖’ 이라고 했을 때, 그것은 단지 공간적인 개념이 아님은 분명할 것입니다. 만약 그렇다면, 공간적으로 우주 내에 있는 영적인 존재들을 배제할 수 없을 것이기 때문입니다. 결국 청하씨의 주장은 이 우주가 물리적인 인과관계에 있어서 폐쇄적이라는 뜻인 것 같습니다.

그러나 혹시라도 ‘물리세계의 인과폐쇄성’ 과 청하씨가 말씀하신 ‘자기완결성’이 다음의 사실에서 다를지도 모르겠군요. 즉, 인괘폐쇄성은 어떤 사건 A 가 다른 사건의 원인이지만 어떤 사건의 결과도 아닐 경우를 배제하지 않습니다. 다시말해 원인이 없을 가능성을 열어놓습니다. 반면 청하씨가 말씀하신 자기완결성은 라이프니츠의 ‘충분 이유율’ 처럼, 모든 사건엔 그 원인이 있어야한다는 뜻을 담고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듭니다. 만약 그렇다면 그것은 전제로 삼기엔 너무 강한 주장입니다. 오히려 틀릴 확률이 높구요.

만약 인과폐쇄성과 동일한 개념이라면, 그것은 우리의 논의에서 그다지 중요한 위치를 차지할 것 같진 않습니다. 왜냐면 아마도 청하씨나 저나 물리세계의 인과폐쇄성은 모두 받아드리고 있는 것 같기 때문입니다. 때문에 이 부분은 가볍게 넘어가겠습니다.

2. “인간의 두뇌는 너무 복잡해서 예측 불가능하다”

이 것은 우선 제가 썼던 글이 부분적으로 답변이 되는 것 같습니다.

예측 불가능성이 의미하는 바는 사실상 거의 없다는 것입니다. 무지는 결코

우리의 자랑이 아니며, 언제까지 예측 불가능한 상태로 남아있을지 알 수도

없습니다. ‘언젠가는 예측할 수 있을지 모르지만, 지금은 아무튼 할 수 없으므로

괜찮다’, 라는 논리는 우리에게 말해주는 것이 거의 없다고 생각합니다. 중요한 것은 예측 불가능성이 아니라 결정 불가능성입니다. 결정불가능성은 예측불가능성의 시간적 극한과 같다고 보면 될 것 같습니다. 어떤 것이 결정불가능하다면, 그것은 영원히 예측 불가능합니다. 아무리 과학이 발전해도 말이죠. 따라서 우리가

결정 불가능성에 도달하지 못한다면, 우리의 논의는 어디까지나 미완의, 잠정적인 상태에 머물 수 밖에 없을 것입니다.

3. “양자효과와 자유의지는 무관하다.”

이 부분은 가장 의미있는 반론인 것 같습니다. 답변하기가 어려울 것 같지만 해보겠습니다. 청하씨의 말씀이 부분적으로는 맞습니다. 두뇌가 여러 상태벡터의 중첩상태를 유지한다고 하더라도, 어떤 상태로 무너질 것인가를 결정하는 것은 우리의 자유의지가 아니므로 두뇌가 양자역학적 기계라는 사실이 인간의 자유를 보장해주는 것은 아닌 것으로 보입니다. 그러나 자유라는 개념을 좀 더 구체적으로, 두 가지로 나누어봅시다.

하나는 현상학적인 느낌으로서의 자유입니다. 이것은 ‘능동성’, ‘주체성’ ‘의지’ 등의 말들로 대체할 수 있을 것입니다. 아마도 청하씨는 이런 의미의 자유에 더욱 중점을 두신 듯 합니다. 저도 물론 이런 부분을 중요하게 생각하고 있습니다. 이 것을 ‘현상학적 자유’ 라고 부르기로 합시다.

‘자유’ 에서 뽑아낼 수 있는 다른 하나의 내포는 ‘그 어떤 것에도 구속받지 않음’ 이라는 것입니다. 자유의 사전적 의미는 ‘스스로 그러함’ 입니다. 때문에 만약 다른 어떤 것의 지배를 받는다면 그것은 자유롭다고 할 수 없을 것입니다. 이런 의미에서의 자유는 꼭 1인칭적으로 경험될 필요가 없으며, 객관적으로 확인될 수 있는 성질의 것입니다. 이러한 자유의 개념을 ‘객관적 자유’ 라고 부르겠습니다.

우리가 자유를 이야기할 때에는 위의 두 내포를 모두 고려하지 않으면 안된다고 생각합니다. 현상학적 자유는 가장 직관적이고 실존적이지만 근본적으로

자폐적인 성격을 벗어날 수 없습니다. 즉, 우리는 자기 자신의 현상학적 자유에 대해서만 말할 수 있는데, ‘인간의 자유’ 가 의미하는 것은 ‘나의 자유’ 그 이상임이 분명합니다.

객관적 자유는 더 보편적이기는 하지만, 자유의 강렬한 측면을 담아내지는 못합니다. 따라서 이 두 내포는 상호보완적으로 ‘자유’ 라는 개념을 형성해야한다고 보아야할 것입니다.

저의 주장은, 우리가 현상학적 자유를 느끼고 있다는 것은 너무도 자명하므로,

객관적 자유를 증명해 내야지만 인간의 자유를 확실하게 주장할 수 있다는 것입니다. 즉 우리 자신이 스스로 능동성, 주체성을 느끼고 있다는 사실은 너무 명확하며, 그것을 따로 증명해야할 필요는 느끼지 못하겠습니다. 그러나 만약 객관적 자유가 보장되지 않는다면, 현상학적 자유는 일종의 착각에 불과한 것이 됩니다.

청하씨의 말씀대로, 양자역학이 두뇌에서 어떤 역할을 하든지간에 그것은

현상학적 자유와는 거의 관련이 없을 것입니다. 그러나 객관적 자유와는 직접적으로 관련됩니다. 따라서 양자역학과 자유와의 관계는 우리가 자유의 어떤 측면에 주목하느냐에 달려있게 됩니다.

저는 자유의 현상학적 측면이 중요하지 않다는 것이 아니라, 그것은 이미 우리가 충분히 확보하고 있으므로, 다른 중요한 일면에 주목해보자는 것이었습니다.

그리고 그 측면을 다루기에 예측 불가능성은 충분하지 않으며, 결정 불가능성이

필요하다는 것입니다. 결정불가능성이 존재하려면 양자역학의 개입이 불가피할 것이구요.

한가지 덧붙이자면, 신경과학에서의 여러 발견들 – 즉 두뇌가 고도로 모듈화 되어있으며, 매우 기계적인 정보처리능력을 가지고 있다는 발견들 – 은 두뇌가 결정론적 체계인지 아닌지와 거의 직접적인 관련이 없습니다. 어떤 것이 기계적이냐

아니냐와 결정론적이냐 아니냐는 독립적인 문제입니다. 왜냐하면 양자역학이 개입되더라도 두뇌는 여전히 ‘확률론적인 기계’ 가 될 수 있을 것이기 때문입니다. 이러한 기계는 여전히 모듈화되어서 작동할 수 있고, 고정된 패턴의 정보처리 능력을 부여줄 수 있습니다. 양자역학이 관여하는 것은 신경망의 차원보다 훨씬 기초적인 차원이 될 것입니다. 즉 하나의 신경세포가 역치에 도달할 것인가 아닌가 등의 문제에 관여하는 것이지, 일단 역치에 도달하면 어떤 방식으로 행동할까에 관여하는 것이 아니므로 기계적인 신경망과는 전혀 충돌하지 않은 체 양자효과를 논의할 수 있습니다.

저희가 논의하고 있는 문제는 분명 매우 – 어쩌면 가장 – 어려운 문제이고,

쉽게 답을 가려낼 수 있는 문제도 아님은 분명합니다. 만약 그럴 수 있었다면

저희가 여기 없었겠죠? (웃음)

저 역시 얼마전까지 청하씨와 같은 의견이었으며, 언젠가 또 바뀔지도 모르겠지요. 계속해서 여러 측면을 고려해서 생각을 해봤으면 좋겠습니다.

저도 폼으로 한마디 쏘겠습니다.

죽느냐 사느냐, 그것은 문제가 아니다. 그것은 해답이다.

재반론 – 김청하

글을 다시 읽어보고 답글을 달다가 깨달은 것입니다만, 승일 씨의 생각은 단 한 군데를 제외하면 제가 일관되게 주장하는 생각과 충돌하는 부분이 거의 없습니다. 애초에 그렇게 느끼신 부분이 있다면 그건 오해일 것입니다. 그렇기에 이 글은 주로 승일 씨의 오해를 푸는 것에 목적을 둘 것입니다. 제 글의 부족함이 그대로 드러난 것 같아 부끄러울 따름입니다.

전 생각하는 것을 좋아하긴 합니다만 배움이 얕은지라 제 생각들이 기존 담론에서 어떠한 위치를 차지하고 어떠한 이름을 갖고 있는지에 대해 잘 알지는 못합니다. 물론 이것은 자랑할 일은 아니고 부끄러워해야 마땅한 일임에도 굳이 말씀드리는 것은, 부족한 제가 간혹 잘못된 용어선택을 한다고 해도 그 용어 하나에 대해서보다는 너그러이 전반적인 제 글을 통해 지적해주시기를 바라는 마음입니다.

1.

아무래도 제 단어 선택과 설명이 좋지 않았던 것이겠습니다만, 제 가정은 말씀하시는 것처럼 강력하지 않습니다. 이 세계의 모든 현상이 원인을 가지고 있다, 까지 나가는건 지나친 비약입니다. 모든 현상에 원인이 존재하는지에 대해 저는 알지 못하기에, 침묵합니다. 무엇보다 제 글에 그런 강력한 가정이 필요하지도 않구요. 제가 전제로 깔아두고 싶었던 것은 그저 “이 세계에서 일어나는 현상은 이 세계 내부의 것들에 의해 설명이 이루어질 수 있다.”라는 것이지요.

우주 내의 영적인 존재들은 좋은 지적이십니다. 그에 대해 저는 답을 알지 못하지만, 그것이 이 세계 내부에 속하는 것이 분명하다면 제 설명은 물론 그것들에 의한 현상을 포함할 것입니다. 반대로 추론할 수도 있지요. 그들이 이 세계에 영향을 미친다면 그것은 이 세계 내부의 존재라는 것입니다. 이건 어쩌면 정의의 문제가 아닌가 생각해봅니다.

또한, 말씀하신 ‘물리세계의 인과폐쇄성’이라는 것이 제가 지금 위에서 말하는 것과 동일한 개념이라면, 그 독해는 옳습니다.

다만 조금 더 생각해보면, 불확정성에 의해 영원히 증명될 수 없는 명제도 존재하는군요. 하지만 저는 그것이 우주 밖의 존재를 가정한다고 해서 해결될 수 있는 것이 아니라고 봅니다. 결국 수정은 불가피해지는군요. 저는 “이 세계에서 일어나는 모든 설명될 수 있는 현상은 이 세계 내부의 것들에 의해 설명될 수 있다”라고 정정하고 싶습니다. 설명될 수 없다면 그것은 애초에 문제의 문제인 것이라는 것이지요.

2.

제가 두뇌의 재귀성을 근거로 예측불가능성을 얘기한 이유는 바로 “결정론적인 기계 또한 예측불가능할 수 있다” 또는 “예측불가능하다고 해서 결정론적으로 움직이지 않는 것은 아니다”가 되겠습니다. 저는 ‘지금은 할 수 없으므로 괜찮다’거나, 혹은 비슷한 말을 한 사실이 없습니다. 제가 예측불가능성을 얘기한 이유를 잘못 이해하고 계신 것이 아닐까 조심스럽게 생각해봅니다.

제 글이 염두에 두고 반론한 주장이 있다면 ‘인간은 예측불가능하므로 우리는 자유롭다’라는 주장입니다. 그렇게 주장하지 않으셨다면 제 의견과 배치되는 점은 없는 셈입니다.

3.

이 부분이 가장 의미있는 반론이라는 얘기는 쪼끔 불편합니다. 다른 부분은 별다른 의미가 없다는 말처럼 들리니까요. 애초에 저는 “인간은 자유로운가?” 글에 대한 반론으로 그 글을 쓴 것이 아니니 그 부분이 승일 씨의 글과 배치되는 부분이라는 말이 좀 더 진실에 가까울 것입니다.

사실 ‘현상학적 자유’와 ‘객관적 자유’에 대해서 우리는 그다지 다른 의견이 아닙니다. 제가 현상학적 자유와 객관적 자유에 대해 언급하지 않은 것은 말씀하신 것과 같이, 현상학적 자유가 너무나 자명한 것으로 보이기 때문이지요. 애초에 제 글 자체가 쓰여진 목적이 ‘현상학적 자유’의 존립기반인 ‘객관적 자유’를 흔들기 위한 것임을 상기해 주셨으면 합니다. 다른 설명은 제 글이 쓰여진 목적을 설명하기 힘듭니다.

우리의 생각에서 차이는 바로 아래 부분입니다.

“청하씨의 말씀대로, 양자역학이 두뇌에서 어떤 역할을 하든지간에 그것은 현상학적 자유와는 거의 관련이 없을 것입니다. 그러나 객관적 자유와는 직접적으로 관련됩니다. 따라서 양자역학과 자유와의 관계는 우리가 자유의 어떤 측면에 주목하느냐에 달려있게 됩니다.”

저는 이 부분에서 승일 씨가 조금 얼버무린 느낌을 받습니다. 몇 번 읽어보았습니다만, ‘양자역학이 객관적 자유와는 직접적으로 관련된’다는 것 만으로 저는 승일 씨의 생각을 읽어내기 힘듭니다. 저는 우리가 통제할 수 없는 확률의 지배를 받는다면 그것이 (객관적) 자유를 훼손한다고 생각합니다. 이 부분에 대해 조금 더 설명해주실 수 있으신지요?

그리고.

덧붙이신 말씀은 모두 옳습니다. 다만 저 또한 그 부분에 대해서는 이해하고 있었는데, 제가 단어 선택을 잘못한 부분입니다. 이건 제 실책이라고밖에 할 수 없으니 죄송한 마음이군요. 저는 두뇌가 기계적인 정보처리 능력을 갖고 있다고 말하려는 것이 아니라, ‘정말 기계처럼 움직인다’고 말하려던 것이었습니다. 그것은 기계에 가까운 능력을 갖고 있다는 뜻이 아니라 동일한 입력과 동일한 상태에서 동일한 결과를 내놓는다, 라는 뜻이지요. 물론 그 자체가 틀린 연구결과라는 것을 증명할 수 있다면 저는 그것을 받아들이겠습니다만, 제가 두뇌가 기계적으로 작동한다고 해서 거기서 결정가능성을 연역해낸 것은 아니라고 말씀드리고 싶습니다.

여러 가지 지적에 감사드립니다. 계속해서 함께 더 생각해보고 더 말씀을 청해듣고 싶군요!

확률의 지배도 지배인가? to 김청하 – 이승일

저번에 논의했던 3번 문제를 살펴보겠습니다.

“확률론적 법칙도 하나의 법칙이므로, 그것의 지배를 받고 있는 뇌는 객관적 자유를 가질 수 없다.”

이 주장에 반론을 제시하기 위해 저는 세 가지 논점을 생각해보았습니다.

(1) 법칙이라고 해서 모두 같은 의미를 갖는 것이 아니다.

(2) 특히, 확률론적 법칙은 개별 시행이나 사건에 대해서는 법칙의 의미를상실한다.

(3) 인간의 사고과정이 완전한 무질서가 아니라 어떤 제약을 받고 있다는 사실은 오히려 사고의 기능성을 잘 설명해준다.

이제 각각의 논점에 관해 구체적으로 설명하겠습니다.

(1)법칙이라고 해서 모두 같은 의미를 갖는 것이 아니다.

먼저 비유로 시작해보겠습니다.

우리는 자유로운 민주주의 사회에 살고 있습니다. 물론 민주주의 사회라고 해서 법률이나 제약이 없는 것은 아닙니다. 수많은 법률과 사회적 규약들이 우리의 활동을 제한합니다.

그러나 여전히 제한당하는 영역은 작은 부분에 불과하고 나머지 커다란 여백은 우리에게 자유의 공간으로 주어져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민주주의를 자유로운 정치체계라고 할 수 있는 것입니다.

우리의 사고과정에 양자역학이 개입되어있다면, 우리 사고과정은 분명 확률론적인 제약을 안게 됩니다. 모든 것이 다 가능한 것은 아니라는 얘기죠. 그러나 모든 것이 가능해야 자유로운 것이라면, 신조차 자유가 없다고 해야할 것입니다. 왜냐면 신조차 논리적으로 모순된 일을 할 수는 없기 때문입니다. 확률론이 가하는 제약은 너무 작습니다.(물론 모순율이 가하는 제약보다야 크겠지만 말입니다. 신보다 자유롭지 못하다고 해서 흠이 되진 않겠죠!) 우리는 여전히 커다란 여백을 가지고 있습니다. 모든 것을 완벽하게 결정짓는 법칙이 아니라면, 우리의 객관적 자유는 훼손되지 않을 것입니다. 이제부터는 자유의 정도가 문제될 뿐, 자유의 존재는 문제가 되지 않는 것입니다.

뉴턴역학, 상대성이론, 맥스웰 전자기학 등의 물리학은 모두 완벽하게 결정(론)적인 이론들입니다. 이 이론들이 대상으로 삼고 있는 영역 안에서는 단 한 가지 사건도 결정되지 않은 채 존재할 수 없습니다. 그러나 양자역학에서는 그렇지 않습니다. 이것은 중요한 차이입니다. 극히 작은 비결정성이라도 존재한다면, 객관적 자유의 존재는 보장받을 수 있는 것입니다. 단지 ‘법칙’ 이라는 단어에 오도되어서 모든 법칙이 자유에 동등한 파괴력을 행사한다고 믿어서는 안 될 것입니다.

(2) 확률론적 법칙은 개별 시행이나 사건에 대해서는 법칙의 의미를 상실한다.

(1)에서 말한 내용만으로도 양자역학과 객관적 자유의 존재 사이의 밀접한 관계는 충분히 주장될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이번에는 그 자유의 정도 가 결코 작지 않다는 것을 이야기 하겠습니다.

다시 예로 시작하죠. 100원 짜리동전을 던집니다. 앞면이 나올 확률과 뒷면이 나올 확률은 모두 0.5입니다. 그런데 우리가 지금 딱 한 개의 동전을 던져야하는 상황이라고 해봅시다. 이 때 과연 0.5라는 숫자가 우리에게 알려주는 것이 뭐가 있을까요? 그저 앞면이나 뒷면 중 하나가 나온다는 사실밖에 없습니다. 앞면이 나올 확률과 뒷면이 나올 확률이 반반이 아니라고 해도 마찬가지입니다. 앞면은 0.2의 확률로, 뒷면은 0.8의 확률로 나온다고 해봅시다. 그러나 여전히 변하는 것은 없습니다. 어쨌건 그저 둘 중 하나가 나올 뿐입니다. 동전이 하나가 아니라 몇 개 추가된다고 해도 상황은 크게 나아지지 않습니다. 관련된 시행이나 사건이 적은 수일 경우에 확률은 실질적으로 법칙으로서의 의미를 상실합니다.

확률이 ‘확률법칙’ 이라는 용어에 걸맞는 자격을 갖는 것은 시행횟수나 관련된 사건의 수가 상당히 늘어난 이후입니다. 전자 몇 개가 A 상태로 무너질 것인지 B 상태로 무너질 것인지에 대해 확률은 거의 아무 의미도 못 갖습니다. 전자가 수백만개 정도는 되어야, 몇 개가 A로, 몇 개가 B로 무너질지에 대해서 매우 훌륭한 이야기를 할 수 있습니다.

양자역학이 사고과정에 개입한다면, 그것은 하나 하나의 개별적인 신경세포가 역치에 도달할지 안할지의 여부에 확률적 요소를 제공하는 방식이 될 것입니다. 그리고 이 과정에는 소수의 이온입자들이 관련될 것이고 심지어 한 입자의 확률진폭만이 문제가 될 수도 있습니다. 이 경우 확률은 실질적인 의미를 상실합니다. 물론 뇌에는 엄청난 수의 뉴런이 있습니다. 그러나 그것이 차이를 만들지는 않습니다. 왜냐면 각각의 확률이 모두 독립적이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확률은 더해지는 것이 아니라 곱해지며, 모든 경우의 수가 극히 작은 확률 값 만을 갖게 될 것입니다. 예컨대 어떤 사람이 10초 후에 물을 마실 확률 0.1% , 쥬스를 마실 확률 0.2 %, 컵을 깰 확률 0.03 % …….. 등 등. 이 정도까지 되면 이미 확률의 제약은 무의미하다고 할 수 있습니다.

(3) 인간의 사고과정이 완전한 무질서가 아니라 어떤 제약을 받고 있다는 사실은 오히려 사고의 기능성을 잘 설명해준다.

위에서 보았듯이 확률의 제약이라는 것은 매우 느슨한 것입니다. 그러나 이 느슨한 제약조차 없다면, 인간의 두뇌는 아무런 기능도 할 수 없을 것입니다. ‘지나치게 자유로운 뇌’ 도 우리가 원하는 상황은 분명 아닙니다. 우리의 두뇌는 완전한 무질서와 완전한 결정성, 그 사이에 위치하는 것으로 보이며 이는 확률론의 성격과 부합하는 것입니다. 따라서 확률적 법칙은 객관적 자유를 부정하기는 커녕, 전체적인 인간의 사고과정을 더욱 잘 설명할 수 있게 만들어줍니다.

결론은 이것입니다. 확률은 매우 느슨한 법칙이고, 특히 개별적인 사건에 관해서는 더욱 그렇습니다. 확률 법칙의 입김이 닿지 않는 곳은 여전히 어마어마하게 넓으며 객관적 자유가 숨쉬는 공간도 바로 그곳입니다. 오히려 조금이나마 제약이 있다는 사실은 인간의 뇌가 랜덤머신이 되지 않도록 만들어줍니다.

인간의 자유, 그리고 두뇌의 질서와 무질서 – 김청하

-. 용어가 어렵다거나 개념이 이해가 안된다거나 장문이라 싫다거나 하시면 끝 부분이라도 읽어주세요 여러분. 흑흑. 이게 얼마나 중요한 문제인데.

-. 조금 답변이 늦은 점 사과드립니다. 저는 다른 분들과는 달리 생각을 많이 해야 조금이나마 정리가 되는 타입인지라, 이렇게 시간이 나지 않으면 답을 드리기가 힘듭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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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번 글에서 저는 논의 중에 드러난 다소간의 불명확한 부분들과 제 생각의 미진한 점들을 차근차근 제거해나가며 제 의견을 좀 더 말씀드릴 것입니다. 그렇기에 이 글은 승일 님의 글에 대한 재반론인 동시에, 제 글에 대한 독립적 자기보론이기도 합니다.

승일 님께서는 몇 가지 논점을 통하여, “인간의 사고과정이 어떤 제약을 받고 있다는 사실이 오히려 사고의 기능성을 잘 설명해준”다고 말씀하셨습니다. 두뇌는 완벽하게 랜덤한 것도 아니고 완벽하게 결정적인 것도 아닌 그 사이에 위치함으로써, 객관적 자유를 부정하지 않는다는 생각이시지요. 저는 먼저 승일 님의 세 가지 논점에 대해 반론하고, 그 이후에 제 생각을 말씀드리려 합니다.

(1) 법칙이라고 해서 모두 같은 의미를 갖는 것이 아니다.

위에 쓴 승일 님의 생각은 옳으며, 저 또한 이에 동의합니다. 하지만 저는 이 부분이 승일 님께서 오해하신 부분이 아닐까, 하고 생각합니다. 승일 님께서는 “법칙이라는 단어에 오도되어 모든 법칙이 자유에 동일한 파괴력을 행사한다고 믿어서는 안된”다고 말씀하셨습니다만, 저는 “확률론이 그저 또 하나의 ‘법칙’이기 때문에 자유에 파괴력을 행사한”다고 말씀드린 적이 없습니다.

양자역학적 확률론이 자유의 구원자가 되지 못하는 이유에 대해서는 일단 뒤에서도 말씀하고 계시니 뒤에서 논하기로 하고, 오히려 저는 양자적 요동이 두뇌의 결정론적 특성에 영향을 미치는 바가 그리 크지 않으리라는 강한 심증을 갖고 있으며, 이에 대해서는 이미 말씀드린 바 있습니다. 그럼에도 굳이 확률론을 끌어들인 것은 아무리 작은 영향이라고 해도 그것이 영향을 미치는 한 두뇌가 완벽하게 결정론적으로 움직이는 것은 아니라는 반례가 되기 때문이지 그것이 두뇌를 얼마나 좌우하는지에 대해 알기 때문은 아닙니다.

물론 이것은 어디까지나 ‘심증’입니다만, 저는 이 심증을 증명해낼 하나의 방법을 고안해봤습니다. 바로 1전자볼트(전자 하나의 전압)와 두뇌의 시냅스 연결이 문턱값(임계치)으로 요구하는 전압의 크기를 비교하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전자 하나는 충분히 양자적(확률론적)인 움직임을 보이지만, 그런 랜덤한 움직임이 ‘우연히’ 한 곳으로 모일 확률은 모여야 할 전자의 수가 많을 수록 낮을 것입니다. 양자역학에 의하면 산소 분자들이 ‘우연히’ 한 곳으로 모여서 제가 질식사할 확률이라거나 제가 치고 있는 키보드가 1초 후에 달 뒷면에서 발견될 확률은 분명히 0이 아니지만, 우주의 역사가 아무리 길다고 해도 일어날 수 없을 정도로 낮으니까요. 이 부분을 증명해드리기 위해 자료를 찾아봤는데, 제가 갖고 있는 자료들에서는 이 상수를 찾을 수 없었습니다. 다만 세포(뉴런)에 비해 전자는 엄청나게 작고, 세포의 통신에 사용되는 전압은 1전자볼트에 비해 상당히 높을 것이라는 것에서 저는 이 심증에 무게를 싣습니다.

이 심증에 대한 지지근거는 이 뿐만이 아닙니다. 두뇌 뿐만 아니라 생물의 세포들은 대부분 자기 일을 제대로 잘 합니다. 각각의 세포들이 이렇게 양자적 요동에 의해 방해를 받는 수준이라면 과연 생명체는 자기 기능을 잘 할 수 있을까요? 단세포동물조차도 어느 정도 규칙적인 움직임을 보인다는 사실은, 세포가 작아보여도 양자의 세계에서는 ‘졸라 큰’ 단위임을 말해줍니다.

(2) 확률론적 법칙은 개별 시행이나 사건에 대해서는 법칙의 의미를 상실한다.

음, 저는 위의 문장을 보고 확률파동붕괴 이후의 확정되는 부분에 대해 말씀하시려는줄 알았는데, 조금 다른 얘기군요.

양자역학이 두뇌에도 적용되지만, 확률에 의해 지배되는 부분이 그리 크지 않다는 말씀에 대해서는 위에서도 설명드렸습니다. 다만 이 부분에서 저는 승일 님의 글이 조금 애매하고 산만해지는 느낌을 받습니다. 승일 님께서는 “확률은 곱해지기에 모든 경우의 수가 극히 작은 확률 값만을 갖기에 이미 확률의 제약은 이미 무의미하”다고 하셨는데, 그 말은 몇 가지로 해석이 가능합니다. 이제와서 여쭙기도 힘들 것 같으니 몇 가지를 예상해보자면.

▷ 하나 제가 (1)에서 말한 것과 동일한 해석. 저는 뉴런은 ‘졸라 큰’ 단위라서 그들 간의 정보교환에도 (1전자볼트에 비하면) 상당히 높은 전압이 필요하리라고 말씀드렸습니다. 이와 같은 의견이라면 우리는 이 점에 대해서 또한 의견 합치를 본 셈입니다만, 하나의 신경세포가 역치에 도달하기 위해 소수의 이온입자만이 필요할 것이라는 말을 보면 그런 것은 아닌 듯 합니다. 그렇다면,

▷ 둘. 사람이 취할 수 있는 행동이 엄청나게 많고, 그러한 각각의 행동을 결정하게될 확률은 높지 않다는 해석. 이것은 지금까지의 증거들로 볼 때 충분히 가능한 가설입니다만, 우리의 최종적인 이야기에는 영향을 미치지 않습니다. 우리가 6면체를 던지건 20면체를 던지건 100면체를 던지건, 심지어 ∞면체를 던지건 그것이 주사위이고, 랜덤하며, 다이스신의 가호를 받는다는 사실에는 변함이 없습니다. 심지어 그 주사위는 우리가 던지지도 않습니다! 그걸 던지는 것은 이 우주죠. 우린 여전히, 자유롭지 못합니다.

▷ 셋. 시행 횟수나 관련 사건의 수가 상당히 늘어난 다음이라면 우리는 어느 정도 확률에 대한 감을 잡을 수 있겠지만, 개별 시행에서는 무슨 결과가 나올지 전혀 예측할 수 없다는 해석. 예측가능성이 자유와 관계없다는 부분에서 우리는 이미 같은 의견에 도달했습니다. 자유를 훼손하는 것은 예측가능성이 아니라 결정가능성이지요. 이 부분은 이전에 이미 승일 님께서 반박하신 부분이니 이러한 해석은 제가 잘못 생각한 것이라고 생각합니다만, 이러한 해석이 불가능하지도 않을 것 같아 일단 적어봅니다.

(3) 인간의 사고과정이 완전한 무질서가 아니라 어떤 제약을 받고 있다는 사실은 오히려 사고의 기능성을 잘 설명해준다.

저는 또한, 인간의 사고과정이 완전한 무질서라고 말한 적이 없습니다. 승일 님의 마지막 문장 “…오히려 조금이나마 제약이 있다는 사실은 인간의 뇌가 랜덤머신이 되지 않도록 만들어줍니다.”는 승일 님 글에서 가장 큰 오해가 아닌가 싶습니다.

두뇌가 완전한 무질서와 완전한 질서 사이의 어딘가에 위치하고 있다는 생각에는 동의합니다만, 저는 위의 ‘심증’에 의하여 두뇌는 정말 미미한 수준의 양자적 간섭을 제외하면 거의 ‘완전한 질서’에 가까운 기계라고 생각합니다. 하지만 이걸로 끝일까요? 잠깐, 잠깐, 오브젝션. 언어의 함정에 빠져서는 안됩니다. ‘완전한 질서와 완전한 무질서 사이의 어딘가’라는 말은 과학적으로 옳지 않습니다! ‘완전한 질서’와 ‘완전한 무질서’에 대해 잠깐 생각해볼까요? 두 가지가 하나의 스펙트럼에 의해 이쪽 끝과 저쪽 끝을 구성한다고 생각하기 쉽습니다만, 우리의 논의에서 양자적 요동은 두뇌의 메카니즘 밖에 존재합니다. 두뇌가 이미 확률론적으로 설계되어 있는 것이 아니라, 두뇌는 결정론적으로 설계되어 있는데 거기에 양자역학이 끼어들어서 가끔 에러를 낼 뿐인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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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제는 승일 님의 글에서 조금 떨어져서, 제 생각을 말씀드리겠습니다.

저는 인간의 두뇌가, 1)예측이 불가능하긴 하지만 2)양자적 요동에 의한 ( 3)미미한 ) 확률론적 에러를 제외하면 4) 상당히 결정론적으로 작용한다고 생각합니다.

1)에 대해서 저는 [인간은 자유로운가? (2) 두뇌]에서 두뇌가 재귀적으로 작동하기 때문이라고 설명했으며,

2)에 대해서 저는 [인간은 자유로운가? (2) 두뇌]에서 설명드렸습니다. 비유로 설명드리자면, 뱀주사위놀이에서 우리가 몇 칸을 움직일지 직접 결정하는 것이 아니라면, 무조건 3칸을 가건 주사위를 던져 그만큼의 칸을 가건 마찬가지로 우리의 자유와는 관계없다는 것입니다.

3)에 대해서 저는 위의 ‘심증’에 의한 것이라고 설명드렸으며

4)에 대해서 저는 [인간은 자유로운가? (2) 두뇌]에서 인간이 세계 내의, 결정론적으로 움직이는 세포들로 이루어진 무언가이기 때문이라고 설명드렸습니다. (이는 최근의 신경학자들이 세운 ‘인간은 튜링머신이다’라는 가설에 의해서 더 강력하게 설명될 수 있으나, 이른바 ‘대세’일뿐 ‘정설’은 아닌지라 그러한 설명은 다소 보편성을 잃을 수 있다는 생각에 저는 그 글에서는 인간이 세계 내의 존재라는 점을 통해 설명드렸습니다.)

이제 증거들은 전부 갖춰졌으니, 우리의 판결을 향해 손을 뻗어봅시다.

자유에 대해, 한컴사전은 외부적인 구속이나 무엇에 얽매이지 아니하고 자기 마음대로 행동함. 또는 그런 상태라고 정의합니다. 여기서 ‘자기 마음대로’가 중요합니다. 결국에는 이미 결정론적인 두뇌의 ‘연산’에 의해 같은 길을 따라갈 뿐이라면 그것은 ‘자기 마음대로’라고 할 수 없을테니까요. 우리가 아무리 ‘나는 자유로워!’ 하고 소리치건 경악을 하건 괴로워하건 그건 아무 소용 없는 일입니다. 그것 또한 이미 결정된 일일 수 있으니까요. 이것을 증명하는 일은 결국 두뇌 연구를 통해 이루어져야 하는데, 두뇌 연구는 그것들이 이미 결정되어 있다고 말합니다. 그렇다고 예측해봐! 할 수도 없습니다. 두뇌는 예측이 불가능한 기계니까요. 양자적 요동은 두뇌가 결정론적 기계라는 가설에 흠집을 내지만, 그 흠집을 우리가 조종할 수 있는 것도 아닌 이상(주사위는 우주가 던지죠) ‘자기 마음대로’ 움직이는 것은 불가능한 일입니다.

결국 이렇게 우리는, 무섭고 끔찍한 결론에 도달하고 마는 것일까요? 결론부터 말하자면, 예, 하지만 아닙니다. 저는 이렇게 ‘내 머릿속의 블랙박스’라는 불안정한 기반에 의해 유지되던 인간의 자유에 대한 낡은 개념은 갖다버리고, 그저 현상학적 자유건 이미 설명이 된 지점이건 어딘가 탄탄한 지점에 새로이 세워져야 할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병장 이영기(2006/08/04 07:27:26)

승일 / 승일씨가 말하는 부분과 청하씨가 말하는 부분에서는 개념이 다른 것 같은데 착각인가요.

이를테면 객관적 자유에 대한 부분 말이죠. 음. 이과라거나 신경과학에서는 자유를 어떻게 정의하는지는 잘 모르겠습니다만, 200만원이라는 월수입을 예산제약선 내에서의 효용에 따라 자유 선호할 수 있다는 의미에서 자유롭다고 보는 사람과, 그 자체로서 제약이 있으며 다만 일부의 가공된 자유가 있는 것 처럼 보일 수 있다, 는 사람간에 개념 규정이 없고서는 계속 논의가 미끄러질 수 있지 않을까 합니다.

물론, 제가 글을 이해를 못해서 헛소리하고 있을 확률이 농후하긴 합니다. 허허

상병 이승일(2006/08/04 07:45:39)

영기 / 아닙니다. 좋은 지적이에요.. 그 구분은 중요하긴 하지만 곧 해결될 것 같군요. 그보다 더 중요한 현상학적 자유/ 객관적 자유에 대한 구분에 대해선 이미 서로 동의했습니다.

청하 / 서버가 닫힌다니 주말 동안 서로 이 부분을 생각해보았으면 좋겠습니다. 양자 효과가 ‘에러’ 라는 말에 대해서요. 실수란, ‘없을 수도 있었는데 발생한’ 것입니다. 그렇다면 청하님께서는 양자효과가 운좋게도 일어나지 않은 (즉 실수하지 않은) 상황에 대해서도 고려를 해야할 것입니다. 이 경우에는 완전한 결정론이 적용되겠죠. 그렇게 되면 얼마나 커다란 문제가 발생하는지 다음 글에서 말씀드리겠습니다.(이 점은 매우 흥미로울 것입니다.)

만약 이 ‘실수’가 일어나지 않을 수 없는 것이라면, 그건 이미 실수라고 할 수 없으며 두뇌 메커니즘 밖이 아니라 안에 있다고 해야할 것입니다. 그렇게 되면 사실상 저의 주장과 일치하게 되는 것이구요. 따라서 청하님은 양자효과가 일어나지 않은 두뇌를 반드시 받아드릴 수 있어야 합니다.

점에만 동의할 수 있다면 상당한 합의를 얻을 수 있을 것 같습니다.

상병 이승일(2006/08/04 07:55:41)

영기/

자유에 대한 개념이 모호하게 느껴지는 것은 다음 두 구분으로 해결할 수 있을 것 같네요.

현상학적 자유 vs 객관적 자유 : 현상학적 자유는 1인칭 주체로서 느끼는 능동성

객관적 자유는 어떤 체계를 지배하는 결정론적인 법칙이

존재하지 않을 때의 무법칙성

논리적 자유 vs 형이상학적 자유 : 논리적 자유는 논리적으로 상상가능한 모든 일을 할 수 있느냐의 문 제.

: 형이상학적 자유는 주어진 선택지 안에서 모든 선택지들을 택할 수 있느냐는 문제 (주사위, 동전던지기)

위의 두 구분은 차원이 다른 것으로서, 청하님과 저는 객관적 자유에 대해서 이야기하는 것으로는 합의를 보았지만, 아래의 구분에 대해서는 잘 모르겠네요.

상병 김청하(2006/08/04 12:30:43)

‘대체로 결정적인’ 이라는 말은 오해를 살 만한 잘못된 어휘선택입니다. 반성할게요. 하지만 어휘 하나보다는 본문 내용에 집중해주시겠습니까? 저는 이렇게 생각합니다. 두뇌의 메카니즘은 100% 결정론적이지만, 양자효과에 의하여 다소 결정론에 어긋나는 결과가 나올 수도 있다, 이렇게요.

저는 일관되게 다음과 같이 주장하고 있습니다.

1. 두뇌가 100% 결정론적인 경우에 인간의 객관적 자유는 훼손된다. (양자효과가 없을 경우)

2. 거기에 (양자 효과로 인한) 확률이 개입해도 확률을 인간이 컨트롤할 수 없는 이상 인간의 객관적 자유는 훼손된다.

3. 인간의 객관적 자유는 위에서 말한 것 이외의 요인이 개입하지 않는 이상 허상이다.

제 주장의 뼈대는 저렇고, 승일 씨는 제 주장의 뼈대, 혹은 뼈를 받치고 있는 근거들에 대하여 반박하셔야 할 것입니다. 양자효과가 두뇌의 메카니즘 안에 있는지 밖에 있는지에 대한 승일 씨의 반론 또한 의미있는 반론입니다만, 그것은 우리의 논의와 크게 관계없는 부분입니다.

상병 김청하(2006/08/04 12:36:55)

그래도 일단 그 부분에 대해 말씀드리자면, 양자효과가 두뇌의 메카니즘 ‘밖’에 있다는 말은 이런 과정을 거칩니다.

전제 하나; 두뇌는 처음부터 양자효과를 예측하고 구성된 것이 아니다.

전제 둘; 양자효과는 자신을 예측하지 못한 두뇌에 또한 영향을 미친다.

그리고 결론: 양자효과는 두뇌의 메카니즘 밖에 있다.

하나, 는 생물학, 신경학에 의해 증명될 수 있습니다. 뇌는 알려진 모든 부분에서 기계와 같은 결정성을 가지고 움직인다는 연구결과는 이전에도 말씀드렸지요. 이외의 생물학적 증거들은 나중에 자료를 찾아봐야 할 것 같습니다.

둘, 은 뭐 이 우주가 움직이는 원리이고, 두뇌만 예외일 수야 없겠지요.

그래서 나온 것이 양자효과는 두뇌의 메카니즘 밖에 있다는 생각입니다. 양자효과는 이를테면, ‘외부효과’라는 것이지요.

쉬어가는 글 – 이승일

제 생각에 지금 저희 논의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물론 제 입장에서) 뇌가 결정론적인 체계일 수 있는가 하는 것이라고 보입니다. 저는 뇌가 결정론적이라면 어떠한 논리적 문제들이 나오는지 보여드릴 예정입니다. 그러나 그 전에 사소한 문제들을 그냥 편하게 이야기해보고 싶군요.

저는 청하씨의 주장에 깊이 공감할 수 있습니다. 왜냐면 저 역시 청하씨와 같은 생각을 가져왔었기 때문입니다.. 그렇다고 청하씨가 저의 옛날 생각을 가지고 있다, 이렇게 말하려는 것은 결코 아닙니다. 생각이 꼭 올바른 쪽으로만 바뀐다는 보장은 없잖아요.

저는 예전에 이렇게 생각했었어요. : 두뇌가 결정론적이든 아니든 그것과 상관없이 인간의 현상학적 자유는 유지될 수 있다는 것, 그리고 우리가 주목해야할 부분은 바로 이 점이라고 말이죠. 사람들이 기계론적 세계관에 전혀 자유를 침해당하는 느낌을 가질 필요가 없다고, 왜냐면 자유의 본질은 현상학적 자유이고 그것은 결코 사라지지 않으니깐 .. 아마 청하씨도 비슷한 생각이실 것 같군요.

실제로 저 개인적으로는 현상학적 자유에 대한 깊은 신뢰를 갖고 있답니다. 하지만 지금은 사람들에게 그것을 받아드리라고 할 수는 없다고 생각해요.

우리가 지금 자유에 대해 논의하게된 이유가 무엇일까요? 왜 우리가 자유에 관심을 갖게 되었을까요. 그것이 침해받고 있다고 생각했기 때문일 것입니다. 누가 침해했을까요? 사회의 제도, 법률, 세계에 대한, 그리고 인간에 대한 수많은 이론들이 아닐까요? (물론 하루하루 먹고 살기 힘들거나, 독재정권하에 있었다면 그런 이론들은 자유를 침해할 기회조차 없었겠죠.)

그런데 말입니다. 그런 이론이나 제도 등이 ‘직접적’으로 제약하는 것은 현상학적 자유가 아니라 객관적 자유입니다. 현상학적 자유는 아무 영향도 받지 않아야할 것 같습니다. 그러나 사실 절대 그렇지가 않습니다. 객관적 자유에 대한 신뢰 없이는 현상학적 자유에 대한 의미 부여도 결국 힘들어지거든요. 뉴턴 역학과 기계론적 세계관이 사람들에게 준 영향이 바로 그런 종류의 것이었습니다. 우리가 이렇게 자유에 대해 이야기하고 있는 이유는, 객관적 자유의 붕괴가 정말로 현상학적 자유까지 침해했기 때문입니다! 우리 모두는 그렇게 느꼈고, 느낄 수밖에 없었습니다.

청하님께서는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자유롭다, 자유의 본질을 보아라, 라고 말씀하시는 것 같습니다.(최소한 저는 그랬었습니다.) 하지만 그것은 위대한 태도일 수는 있지만 정말로 문제를 해결하는 길일 수는 없습니다. 우리의 정신세계는 우리가 생각하는 것처럼 우리가 마음대로 할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객관적 자유의 존재 여부와 상관없이 현상학적 자유가 유지될 수 있다’ 는 믿음은 제 생각에는 학문적인 주장이라기보다는 실천적 태도에 가까운 것 같습니다. ‘실천적’ 이라는 말로 그것을 평가 절하하는 것은 결코 아니며, 저 자신도 그러한 신념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러나 그것을 보편적으로 남에게 주장할 수는 없다는 것입니다. 특히 한 시대가 처해있는 곤경에서 구출해줄 수는 더더욱 없다는 것입니다.

제가 양자역학과 정신의 관계를 주장하는 것은 단지 확률론적 속성을 통해 객관적 자유를 보호하기 위한 것만은 아니랍니다. 인간의 뇌가 보여주는 전일성, 자기측정불가능의 문제 등이 양자역학과 긴밀하게 연결되어있으며, 의식만이 배타적으로 가지고 있는 속성들을 너무나도 잘 설명해낼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그것은 너무 전문적인 문제이므로 기호를 사용할 수 없는 이곳에서 함께 다루기에는 곤란한 부분이 있습니다.

글쎄, 제 생각으로는 청하씨와 저는 (동기라는 점 말고도) 비슷한 감성과 사고방식을 갖고 있지 않나 생각합니다. 그러나 태도는 조금 다른 것 같습니다… 그 태도가 같는 의미를 서로 아는 것도 좋은 일이리라고 생각합니다. 결정론적이니 어쩌니 하는 껍데기 속에 가려져있는 속 뜻을 말입니다.

저는 인간의 정신이 독립적인 물리적 실체라고 생각합니다. 저는 그것이 신기루도 아니고, 허상도, 단순한 기능도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즉, 한 인간은 단지 그 육체와 육체의 기능들이 아니라고 믿습니다. 그러나 중요한 것은 정신이 어떤 종류의 물리적 실체이냐 하는 것입니다. 저는 중첩상태가 다름 아닌 ‘내적’상태라고 생각합니다. 즉 우리가 1인칭으로 경험하는 ‘나’라는 영역 말이죠. 중첩상태라는 것은 정말 기묘한 상태입니다. 그것은 물리적 실체이지만, 공간적인 연장을 가지지 않을 수도 있습니다. 저는 인간이 주체적으로 경험하는 내적 상태가 중첩 상태와 매우 큰 유사성을 가지고 있다고 믿습니다.

우리 의식이 가진 기능적 측면과 현상학적 주체라는 측면은 서로 다른 두 측면입니다. 기능적 측면은 청하씨가 말씀하신대로 신경과학에서 굉장히 많은 것이 밝혀졌지요. 그러나 왜 하필 그것이 스스로를 1인칭으로서 경험하는 ‘나’ 여야 하는지, 왜 내적인 상태라는게 존재해야하는지는 그것으로부터 답이 나오지 않습니다. 저는 그 답이 중첩상태의 특징으로부터 나오리라고 믿고 있습니다. 전 인간의 정신을 진정으로 ‘발견’ 하는 날이 오리라고 생각합니다. 그것이 더 이상 허공을 배회하는 유령이 아니라, 이 곳, 이 땅위에 실제로 존재하는 그 무엇임이 밝혀질 날이 오리라고 믿습니다. 그리고 그것은 어떠한 법칙도 지배하지 못하는 비 결정적인 물리계가 될 것이구요.

어차피 두서없이 쓴 마당에 한마디만 더 두서없이 하겠습니다. 예측불가능성과 결정불가능성에 대해서 말이죠. 왠지 조금 혼란이 있는 것 같아서요.

예측 불가능성은 인식론적 개념이고 상대적인 개념인데 반해 결정 불가능성은 논리적 개념이고 절대적인 개념입니다. 저에게 예측 불가능 한 것이 청하씨에게는 예측 가능할 수 있고, 지금은 예측 불가능한 것이 미래에는 가능하게 될 수도 있지요. 하지만 어떤 것이 결정 불가능하다면, 그것은 저에게도, 청하씨에게도, 지금도, 미래에도 결정 불가능합니다.

따라서 예측 불가능성다고 결정불가능한 것은 아니지만, 결정불가능하면 예측도 불가능합니다. 영원히. 인간의 두뇌가 결정 가능하다면, 그것은 ‘원리적으로’ 예측 가능합니다. 이 것이 청하씨가 조금 잘못 생각하시는 부분이 아닌가 합니다. 두뇌가 재귀적이든 어마어마하게 복잡하든, 그것이 결정론적이라면, 예측할 수 있는 ‘가능성’ 이 있습니다. 우리는 못해도, 우리 후손들은, 혹은 어떤 천재적인 사람은 할 수 있을지도 모른다는 얘기죠. 따라서 결정론적이지만 예측불가능한 기계로서의 뇌는 기본적으로 말이 되지 않는 것입니다. 답이 있지만 복잡한 수학문제와 답이 없는 문제는 인식론적으로는 같을 수 있겠지만, 논리적으로, 혹은 형이상학적으로는 전혀 다릅니다. 복잡한 수학문제는, 우리는 못 풀더라도 원칙적으로 풀릴 수 있는 문제인 반면, 답이 없는 문제는 원칙적으로 풀지 못하지요. 우리는 지금 원칙적으로 어떠한가를 논의해야지, 지금, 혹은 가까운 미래에 어떠할지를 논의해서는 안됩니다.

뇌가 결정가능하다는 소리는 원칙적으로 언젠가는 예측가능할 수도 있음을 허용하는 것임을 꼭 알아주셨으면 좋겠습니다.

난잡하게 써서 죄송해요. 다음주 즘에 뇌가 결정론적이면 어떤 문제가 발생할지에 관해 써보도록 하겠습니다. -624학파 (땀)

상병 김청하(2006/08/08 16:56:36)

사실 현상학적 자유와 ‘이 모든 자유’에 대해서는 인간은 자유로운가 3부까지 쓰고나서 한방에 정리하려고 좀 말을 아끼고 있기도 했습니다. 그보다 승일 님과 저는 사실 처음부터 몇 가지 오해를 제하면 다른 부분이 거의 없었던 것이 아닌가 싶군요. 전일성이나 자기측정불가능의 문제, 그리고 어떠한 법칙도 지배하지 못한느 비결정적인 물리계, 와 같은 부분에 대해서는 아직 제가 이해하기 힘들기에 인정할 수 없고, 그렇기에 조금 더 승일 씨에게 말씀을 청해들어야 할 부분입니다만, 나머지 부분은 거의 제 생각과 같습니다.

결정가능하다면 언젠가는 예측가능할 수 있다는 점 또한 그렇구요. 제가 ‘생명체의 두뇌는 재귀적으로 작동한’다는 것을 굳이 밝혔던 것은 예측이 어렵다고 해서 결정론적으로 움직이지 않는 것은 아니라는 것을 말하기 위함이었지 영원히 예측이 불가능하다는 뜻은 아니었습니다. ‘언젠가’ 예측이 가능할 것이라는 점은 조금 논쟁의 여지가 있긴 합니다만, 원리적으로 예측이 불가능한 것이 아니라는 점에 대해서는 저도 이해하고 있습니다. 맞습니다, 답이 없는 문제는 아니라는 거죠.

뇌는 왜 결정론적일 수 없는가? – 이승일

이 글에서 나는 우선 인간의 뇌가 결정론적인 법칙을 따른다면 어떠한 상황을 받아드려야 하는지 살펴보겠다. 물론 이것이 뇌가 비결정론적이라는 충분한 증거는 아니라고 생각한다. 그러나 최소한 결정론적인 뇌를 받아드리는 것이 생각처럼 단순하고 간단한 일이 아니라는 것은 보일 수 있을 것이다.

이와 함께 인간의 뇌가 알고리즘으로 표현될 수 없다는 증거를 제시할 것이다. 이것이 제대로 이해된다면, 결정론적인 뇌가 불가능하다는 강력한 이유가 되리라고 믿는다.

청하씨의 의견으로부터 시작해보자. 청하씨는 인간의 사고과정에 비결정론적인 요소가 개입될 수 있더라도, 그것은 단지 외부 요소일 뿐이며 근본적인 뇌의 작동 메커니즘은 순전히 결정론적이라는 의견을 제시하였다. 우선 이 말의 뜻을 더 깊이 살펴보자. 내가 제시한 ‘비결정론적인 요소’ 는 파동함수의 무너짐이라는 양자역학적 효과였다. 나는 이것이 뇌의 작동 메커니즘에 있어서 본질적인 요소(즉 내부요소) 중 하나라고 주장했다. 본질적이라는 말은, 그것이 없이는 생각할 수 없다는 뜻이다.

반면 청하씨는 비결정론적 요소의 존재는 인정하지만 그것이 본질적이라고 생각하지는 않는다. 마치 컴퓨터의 물리적 에러가 컴퓨터에서 본질적인 요소가 아닌 것처럼 말이다. 오히려 가능하다면 비결정론적 요소를 제거할 수 있기를 원할 것이다. 청하씨에 따르면 비결정론적 요소는 우리 사고의 노이즈에 불과하기 때문이다.

자, 이제 그러한 노이즈가 제거된 뇌를 상상해보자. 물리적 에러 없는 컴퓨터나 잡음 없는 라디오를 상상할 수 있는 것처럼, 우리는 양자효과가 일어나지 않는 뇌를 상상할 수 있어야한다. 만약 양자효과가 단순히 외부적인 요소라면 말이다. (물론 현실적으로 이러한 뇌가 가능해야할 필요는 없다. 물리적 에러로부터 완전히 자유로운 컴퓨터를 만들 수 없다고 해서 그것이 개념적으로 불가능한 것은 아니다.) 편의를 위해 이런 이상적인 두뇌를 DB (Deterministic Brain, 결정론적 두뇌)라고 부르자. DB는 우리가 지금 갖고 있는 뇌처럼 생물학적인 뇌이다. 단지 어떠한 비결정론적 효과도 개입되지 않았을 뿐이다. DB 의 존재는 청하씨와 나의 의견 모두에 대해 중립적이다. 그러나 나는 DB가 인간의 뇌와 같은 기능을 할 수 없다고 주장하는 것이며, 청하씨는 인간의 뇌와 근본적으로 동일하다고 주장하는 것이다.

DB가 작동하는 메커니즘은 완전히 결정론적이다. 이 말은, 한 단계에서 다른 단계로 이행하는 데에 언제나 충분한 결정절차가 있다는 뜻이다. 그렇다면 우리는 그 결정절차를 알고리즘으로 만들 수 있다. 임의의 체계에 대해, 결정론적이라는 말과 알고리즘적이라는 말은 동치이다. 이 점이 앞으로의 논의에서 중요하다.

이제 우리는 DB의 알고리즘을 만들고 그것을 프로그램으로 만들 수 있다. 물론 그 알고리즘은 어마어마하게 방대할 것이고, 지구상의 모든 컴퓨터를 동원해도 그것을 프로그래밍하지 못할지도 모른다. 그러나 중요한 것은 그것이 아무리 방대하더라도 무한한 알고리즘이 될 수는 없다는 것이다. 무한한 알고리즘은 결정론적이라고 말할 수 없기 때문이다. (A에서 B에 도달하는데 무한한 시간이 걸린다면, 그것은 A에서 B로 갈 수 있는 결정절차가 없다는 말과 동일하다.) 유한한 알고리즘이라면 어쨌건 유한개의 컴퓨터로 프로그래밍할 수 있으며, 유한개의 컴퓨터에서 그것을 실행시킬 수도 있다. 이렇게 해서 만들어진 프로그램이 실행되는 컴퓨터를 ‘DB-컴퓨터’라고 부르자. 만약 소설가 마크 트웨인의 DB를 만들 수 있다면(혹은 청하씨의 말대로 마크 트웨인의 두뇌가 원래 DB라면), ‘마크 트웨인 DB-컴퓨터’도 (원리적으로) 만들 수 있어야한다. 마크 트웨인 DB-컴퓨터는 그 정신적인 기능에 있어서 마크 트웨인 자신과 동일해야한다. 마크 트웨인 DB-컴퓨터는 마크 트웨인의 연인에게 다정한 편지를 써 줄 수도 있을 것이며, 허클베리핀의 모험도 쓸 수 있어야한다. 마크 트웨인 DB-컴퓨터는 마크 트웨인 자신과 튜링테스트에서 동일한 결과를 내놓을 것이며, 이들의 외형적 차이가 아니라면, 우리는 컴퓨터와 트웨인 자신을 구분하지 못하게 될 것이다.

한편 우리는 트웨인의 DB-알고리즘을 프로그램으로 구성하지 않고 빈 책에 차근차근 써 나갈 수도 있을 것이다. 물론 이것은 너무나 지루한 일이라 아무도 하려고 하지 않겠지만 우리의 관심사가 그런 것이 아님은 분명하다. 이렇게 쓰여 진 책은 엄청난 양을 자랑하겠지만 여전히 유한한 양이고 유한한 종이로 만들 수 있으며, 유한한 시간 안에 다 쓸 수도, 읽을 수도 있다. 마크 트웨인 DB-책은 DB-컴퓨터와 마찬가지로 트웨인의 사고를 완전히 재현해 줘야한다. 트웨인이 죽은 후에, ‘이럴 때 마크 트웨인이라면 어떻게 생각했을까?’ 하는 질문에 답을 구하고 싶다면, 마크 트웨인 DB-책의 어떤 페이지, 예컨대 298981p ~299143p를 찾아보면 된다.

지금까지의 논의는 별로 특별한 것이 아니다. 우리는 트웨인의 뇌를 양자효과와 같은 비결정론적 요소로부터 해방시킨 ‘마크 트웨인 DB’를 만들 수 있다고 가정했다. 그리고 여전히 그것이 마크 트웨인의 사고를 만들어낸다고 가정했다. 그렇다면 그의 정신은 알고리즘화 할 수 있고, 그것을 프로그램으로 만들 수 있으며, 알고리즘을 책에 기록해서 마크 트웨인 사용설명서를 만들 수도 있다는 것이 우리가 이야기한 내용이다. 그리고 이것은 뇌가 근본적으로 결정론적이라는 주장에서 따라 나오는 귀결들이다.

중요한 것은 이 모든 것이 과연 무엇을 의미하느냐 하는 것이다. 마크 트웨인 DB, 마크 트웨인 DB-프로그램, 마크 트웨인 DB-책 등은 모두 동일한 정신적 기능을 갖고 있다. 만약 그렇지 않다면 마크 트웨인의 정신은 알고리즘이외에 무언가가 더 필요하다는 뜻이고, 결정론적일 수 없음을 의미한다. 그런데 문제는 마크 트웨인 DB, 프로그램, 책 등은 모두 다른 물리적 구성방식을 갖는다는 점이다. 마크 트웨인DB는 단백질 등의 유기물로, 컴퓨터는 전기회로로, 책은 종이로 만들어져있다. 이들이 모두 동일한 정신적 기능을 가지고 있다면 정신은 본질적으로 비물리적이어야 한다. A, B, C가 서로 다른 물리적 구성을 가지는데 동일한 정신적 속성을 공유한다면, 그 정신적 속성은 물질과 전혀 상관없는 것임이 분명하다. 이것은 매우 분명한 플라톤적 주장이며 청하씨가 제시했던 유물론적인 입장과 정면으로 대립된다. 따라서 물질과 상관없는 정신적 실체를 인정하지 않는 한, 뇌가 결정론적이라는 주장은 유지될 수 없는 것으로 보인다. 애초에 뇌가 결정론적이라는 주장은 최대한 단순하고 경제적인 유물론적 세계관을 옹호하는 것으로 보여졌겠지만, 실은 물질과 정신의 이원적 분리를 요청하는 것이다. 이것은 뇌의 결정론이 갖는 매력을 반감시키는 사실임에 분명하다.

DB 의 운명은 사실 위에서 논의한 것보다 더 좋지 않다. 왜냐하면 마크 트웨인은 해결할 수 있지만, 마크 트웨인 DB-컴퓨터는 해결할 수 없는 문제가 존재하기 때문이다. 그러한 문제들 중 하나를 아래에 제시할 것이다. 이것은 수학을 싫어하는 사람들에게는 전혀 와닿지 않을 것이므로 아예 맨 밑에 참고사항으로 써놓겠다. 어쨌든 그 결론은, 임의의 형식체계 안에서는 연산할 수 없는 것을 인간은 할 수 있다는 뜻이고, 임의의 형식체계가 연산할 수 없다는 말은 어떠한 컴퓨터도 연살할 수 없다는 말이며 DB-컴퓨터도 예외는 아니다. 결론적으로 마크 트웨인 DB-컴퓨터는 할 수 없는 판단을 (수학을 배운)마크 트웨인은 할 수 있다는 것이다. 이 것은 우리의 사고체계가 유한한 알고리즘으로 표현될 수 없다는 중요한 증거이며, 유한한 알고리즘으로 표현될 수 없다면 결정론적이라고 말할 수도 없다.

따라서 마크 트웨인의 두뇌는 DB가 아니다. 즉 결정론적 두뇌가 아니다. 비결정론적 요소는, 그것이 무엇이건간에, 마크 트웨인의 사고 메커니즘에서 제거할 수 없고 또 제거되어서도 안되는 부분이다. 오직 그럴 때에만 왜 마크 트웨인 DB -컴퓨터는 해결할 수 없는 문제를 마크 트웨인은 해결할 수 있는지 설명할 수 있다.

아래는 단지 참고사항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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컴퓨터 프로그래밍을 하기 위해서는 언어가 필요하다. 이런 언어를 형식언어라고 하여 우리가 일상적으로 쓰는 자연언어와 구분짓는다. 자연언어에서는 여러 가지 예외도 있을 수 있고, 늬양스에 따라 같은 기호의 의미가 달라질 수 있지만, 그리고 이 점이 자연언어를 더 풍성하게 해주기도 하지만, 형식언어에서는 오직 기호들의 ‘모양’ 에 의해 모든 의미가 결정된다. 형식언어는 이미 그 안에서 사용될 기호와 문법을 약속해놓는다. 그래서 기호들이 문법적으로 올바르게 연결된 것을 ‘식’ 이라고 부른다. ‘2+3=4’ 는 수학의 식이지만, ‘감자 – 홍길동 = 4’ 는 추가적인 정의 없이는 식이 아니다. 이제 어떤 형식 언어를 우리가 만든다고 생각해보자. 이 형식언어를 G 라고 부르자. 그 안에서는 알파벳들을 기호로 사용한다. 이 알파벳을 적합한 방식으로 연결하면 식이 만들어진다. 이제 G 안에서 만들 수 있는 모든 식들을 일렬로 정렬시킬 수 있다. 예컨대 기호의 숫자가 적은 것부터, 그리고 기호의 숫자가 같다면 알파벳 순으로 등 등. 그러면 이제 우리는 G의 식들에 대한 정렬된 리스트를 갖게 되고, G 의 1번 식, 2번 식 등등으로 각각의 식을 부를 수 있다.

이런 식들은 여러 가지 ‘변수’를 가질 수도 있다. 하나를 가질 수도 있고, 두개를 가질 수도 있다. 자연언어에서 “x is blue ‘ 라는 문장을 만들 수 있는데, 여기서 x 가 변수이며, 이 문장은 하나의 변수를 갖는다. 이 문장은 간단하게 B(x) 라고 나타낼 수 있을 것이다. B( )는 괄호안에 들어가는 기호를 변수로 갖는 술어가 된다. 마찬가지로 ‘x loves y’ 와 같이 두 개의 변수를 갖는 문장도 있다. 이런 것은 L (x, y) 로 표현할 수 있다. ‘ L ’ 이라는 술어는 두 개의 변수를 갖게된다. 이와 같이 변수의 개수는 아주 많아 질 수 있다. 이러한 변수들에는 우리가 적당한 값을 집어넣어볼 수 있다. 예를 들어 B(x) 에 x 대신 ‘sky’를 대입하면, ’sky is blue‘ 라는 문장이 된다. 이러한 것을 ”예화시킨다“ 라고 한다. 특정한 예를 대입한다는 것이다. 마찬가지로 L(x, y)을 L(아킬레우스, 브리세이스) 로 예화시키면, ’아킬레우스는 브리세이스를 사랑한다.‘ 라는 문장이 된다.

이제 우리는 앞에서 생각한 G의 식에 대한 정렬 리스트 중 w번째 식을 생각해보자. (w는 그냥 임의의 숫자이다.) 그리고 이 식이 하나의 변수를 갖고 있다고 해보자. 그러면 그것을 Pw(X) 라고 나타낼 수 있을 것이다. w번째 식이면서 X 라는 하나의 변수를 갖는 식이다. 이 식을 w라는 숫자에 관해 예화시켜보자. 즉 X대신 W를 대입하자는 말이다. 그러면 Pw(W) 라는 문장을 얻게된다.

한편 G의 식들에 대한 리스트에는 어떤 정리에 대한 증명을 형성하는 문장들의 집합도 있다. 증명이란, 형식적인 관점에서 보자면 단지 여러 문장들의 집합일 뿐이다. 이런 집합들 중 x 번째 집합을 ∏x 라고 부르자. 그렇다면 ∏x는 어떤 정리에 대한 증명이거나 그렇지 않다. 이제 다음과 같은 문장을 구성해보자.

~∃x[∏x proves Pw(W)]

~∃x( ) 라는 표현은, 괄호안에 등장하는 x를 만족하는 그러한 x가 적어도 하나는 존재한다는 뜻이다. ‘~’ 는 not 이라는 뜻이므로, ~∃x( ) 는 당연히 그러한 x가 없다는 뜻이다. proves 라는 표현은 그냥 일상적인 표현을 사용했다. 말 그대로 증명한다는 뜻이다. 그렇다면 위의 식은 다음과 같이 해석된다.

임의의 문장집합 ∏x 에 대해, ∏x 가 Pw(W)의 증명이 되게 하는

그러한 x 는 존재하지 않는다.

좀 더 쉽게 말하자면,

Pw(W) 에 대한 증명이 존재하지 않는다.

는 뜻이다.

그런데 ‘~∃x[∏x proves Pw(W)]’ 라는 문장 자체도 G안의 한 식이기 때문에 G 식들의 리스트 안에서 어떤 위치를 차지하고 있을 것이다. 이 것이 k 번째 식이라고 해보자. 이 문장도 W에 관한 식이기 때문에 Pk(W)라고 이름붙일 수 있다. 그래서

~∃x[∏x proves Pw(W)] = Pk(W) 가 된다.

그런데 만약 k와 w가 같은 숫자라면 어떻게 될까? 즉 k=w라면 위의 식은

~∃x[∏x proves Pk(K)] = Pk(K) 가 된다.

자, 이제 문제는 Pk(K) 가 증명을 갖는가 하는 것이다. 이에 대한 답은 아니오, 이다. 왜냐면, 만약 그러한 증명이 있다면 Pk(K) 가 실제로 주장하는 내용, 즉 증명이 없다는 내용은 거짓이 될 것인데 형식체계는 절대로 거짓 명제들이 증명될 정도로 엉터리여서는 안된다. 따라서 Pk(K) 에 대한 증명은 없어야만 한다. 그런데 이것이 사실 Pk(K) 가 실제로 말하고자 하는 것이다. 따라서 Pk(K)가 주장하는 것은 참이어야한다. 그러므로 우리는 형식체계 안에서 증명할 수 없는 참인 문장을 갖게 되었다. 이 문장은 어떠한 알고리즘 내에서도 증명 불가능하지만, 인간인 우리는 그것이 참이라는 사실을 알고 있다. 그러므로 인간의 사고는 알고리즘으로 표현되는 것 이상이며, 결정론적일 수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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병장 노지훈(2006/08/15 15:11:45)

‘A, B, C가 서로 다른 물리적 구성을 가지는데 동일한 정신적 속성을 공유한다면, 그 정신적 속성은 물질과 전혀 상관없는 것임이 분명하다. …… 이것은 뇌의 결정론이 갖는 매력을 반감시키는 사실임에 분명하다.’

이것 형이상학적 논의로 발전할 수 있겠는데요.

유물론에 대한 비판적인 견해로서의 위 의견은 나쁘지 않다고 봅니다. 하지만 이렇게 형이상학적 관점으로 바라보게 된다면 뇌의 존재 자체를 어떻게 봐야 될 지 설명을 요하게 됩니다. 단순히 이것만으로는 결정론에 대한 유물론적 해석에 대한 반박일 뿐이므로 비결정론에 대한 주장이 되기는 힘들뿐더러 뇌의 성립 근거 또한 부정하게 됩니다. 그런 의미에서 승일님의 의견을 한 번 듣고 싶습니다.

덧. 마지막 부분은 괴델의 불완전성 정리에 대한 light한 증명이죠? 승일님은 정말 기억력이나 사고를 표현하는 능력이나 대단한 것 같습니다. 오랜만에 재미있게 잘 읽었어요. 저는 도저히 이런 글을 쓸 능력이 없으니까 태클이나 걸 뿐이니, 이해해주세요.(웃음)

상병 이승일(2006/08/15 20:29:31)

희석 / 제가 쓴 글이긴 하지만 심지어 제가 쓴 다른 글들에 비해서도 난잡하고 별로 결정적인 면도 없다는 것을 인정하지 않을 수 없을것 같습니다. (흑…) ‘이런 내용과 관련된 기초 서적’에서 ‘이런 내용’ 이 정확히 어디까지인지는 모르겠지만 .. 수학적인 부분만 따진다면 경문사에서 나온 “수학의 기초와 기본 개념” 을 (강력)추천합니다. 의식과 관련된 논의에 있어서는 Chalmers 라는 사람이 쓴 Conscious Mind 가 아주 유명하고 권위적인 책입니다. 번역본은 아직 없습니다 .. 제가 번역해보려다가 10쪽 하고 포기했습니다.(땀)

지훈 / 아주 아주 정확하신 지적입니다. 처음 논의는 단지 유물론적 관점과 뇌에 대한 결정론적 관점이 양립할 수 없음을 보여주는 것 뿐입니다. 제가 그 이야기를 한 것은 청하씨가 앞서서 ‘물리 세계의 인과 폐쇄성’에 동의한다고 하셨고, 이것이 바로 유물론적 견해이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꼭 청하씨가 아니더라도 많은 사람들이 유물론적 신념을 옹호하기 위해 결정론을 주장하는 경우가 많이 있습니다. 결정론과 유물론은 모두 경제적인 입장으로 평가받을 수 있으며, 오컴의 면도날에 의해 비결정적인 어떤 요소, 신비스런 요소들을 모두 제거할 수 있습니다. 저는 단지 결정론과 유물론이 전혀 친구가 아니라는 사실을 보이고 싶었을 뿐입니다.

자기 생각을 표현한다는 것은 정말 힘든 일임에 틀림 없는 것 같습니다. 특히 이렇게 난잡하고 어지러운 생각인 경우에는 더욱 더. 그런 점에서 다른 분들의 글을 보면 그 표현력에 감탄하곤 합니다. 휴우

병장 김정규(2006/08/15 23:04:14)

-글 흥미롭게 잘 읽었습니다..밑의 참고사항에 대한 저의 생각입니다..나름대로 이해하려고 애쓴 흔적을 글로 적어봤습니다..

처음에 ~∃x[∏x proves Pw(W)] 라는 식을 구성하여 G 언어체계에서의 존재를 가정하였다. 이것은 G가 이 명제를 참인 명제로 받아들인다는 것인가? 그럴 것이다. 일단 이 문장의 존재를 가정하고 G의 체계 밑에서 참이라는 것을 받아들이자.

Pw(X)라는 식을 X를 변수로 갖는 (꽤 많을 수 있겠지만 그래도 유한한) 술어들 중 w번째의 것이라고 해석한다면, 위의 제시된 문장(~∃x[∏x proves Pw(W)])이 Pk(W)라는 식으로 불려질 수 있는 것은 어떻게 설명할 수 있는가? 이해가 쉽지 않은 부분인데 자세한 설명이 필요할 것 같다.

P, k, W가 각각 어떤 뜻을 갖는지? P는 단순히 술어임을 나타내는 것인가? 그렇다면 Pw라고 쓸 때에만 쓰일 수 있을 것이다. 위의 술어는 (Pw라는 술어, Pw의 변수 W)라는 두개의 변수를 갖지 않는가? w를 고정시키면 되므로 상관없다고 치자.

그렇다면 분명 이 문장 또한 X를 변수로 갖는 유한한 식들 중 하나이므로 그 식을 k번째라 하면 X=W일 때 Pk(W)로 쓸 수 있는 것이다.

~∃x[∏x proves Pw(W)] = Pk(W)

이 식을 해석해 보자. ‘W에 관한 식 Pw(W)가 참임을 증명하는 명제집합이 없다‘라는 명제가 존재하므로 참이고 이 참인 명제를 Pk(W)로 쓸 수 있다.

만약 w가 k와 같았다면(w=k일 수 있는 언어체계를 가정하는 것일 뿐이므로 전혀 문제가 없다) ~∃x[∏x proves Pk(W)] = Pk(W) 가 되는데 달리 말하면 Pk(W)는 자기 자신의 참을 증명하는 명제가 없다는 명제이다. 그런데 이것은 존재하므로 참이다. 따라서 Pk(W)는 G라는 언어체계에서 참임을 증명하는 명제를 갖지 않는다. 따라서 G의 알고리즘 안에서 참이면서도 그 알고리즘 자체로 증명이 불가능한 명제가 존재한다. 하지만 G의 테두리 밖에서 우리는 이 명제의 진위여부를 증명한 것이나 다름없다. 이제 G를 마크트웨인의 DB로 환원시켜 생각해보면 결정론적 혹은 알고리즘적인 마크트웨인의 DB가 실제 마크트웨인의 뇌와는 똑같지 않음을 알 수 있다.

이 글에서 쓰인 소문자의 w, k는 단지 G언어에서의 정렬 순서에 의해 정해진 숫자이고 대문자의 W, K는 Pw, Pk가 받아들이는 변수가 갖는 특정 값으로 w, W, k, K가 서로 관련이 없지는 않지만 다른 개체임을 알리기 위해 다른 문자를 사용하는 것이 낫지 않았을까 싶습니다..읽을 때 헷갈려할 사람이 있을 것 같아서요..

위 글의 주장을 참으로 가정하고(웃음) 그에 맞춰서 저의 생각을 그 주장에 맞춰가면서 이해했는데 제 멋대로 이해한 것인지도 모르겠습니다..어렴풋이 알 것 같은 내용이긴 하나 간략한 정리의 형식을 띤 글을 읽은 저의 소고로 인해 많은 의문이 생기는 것은 어쩔 수 없네요..

상병 이승일(2006/08/16 07:59:31)

정규/

(1) ~∃x[∏x proves Pw(W)] 는 G의 적형식입니다. 이 식을 거짓이 되게 하는 별도의 공리가 없다면, 모든 적형식은 참으로 가정할 수 있습니다.

(2) 일단 k 는 G의 모든 식들을 정렬한 리스트에서 k번째 식이다 … 라는 의미만 갖고 있는 임의의 자연수입니다. 그리고 ~∃x[∏x proves Pw(W)] = Pk(W) 로 쓸 수 있는 이유는,

~∃x[∏x proves Pw(W)] 가 W 에 관한 문장함수이기 때문입니다. 양화사( ~∃x)에 속박되어있는 x는 자유변항이 아니기 때문에 고려할 필요가 없습니다. 따라서 위 식은 오직 W 값에 의존하는 함수로 볼 수 있기 때문에 여전히 P(W)로 쓸 수 있습니다.

(3) 이 부분은 혼란스러워할만함을 인정해야겠습니다. 우선 P는 술어라고 해도 크게 틀리진 않겠지만 더 정확히 말하자면 명제함수입니다. w,k 등은 임의의 자연수입니다. 이걸 Pw(W) 와 같이 대문자, 소문자를 구분해서 쓴 것은 … 분명 잘 못된 것입니다. 그러나 사실 아랫 첨자를 어떻게 쓰는지 몰라서 그렇게 썼습니다.(…….) 즉 Pw 에서 w 는 아랫첨자로서, 몇번째 P인가를 말해주는 숫자임에 반해, 괄호안의 (w)는 변항의 자리에 대입된 숫자입니다. 따라서 대문자, 소문자 구분은 어쩔 수 없이 한 것이며 전부 같은 숫자를 의미한다고 이해해주셨으면 합니다. 즉 이 글에서 w=W , k=K 로 쓰였습니다. 별도의 설명없이 그렇게 쓴 것은 분명 제 부주의입니다. 아랫첨자 쓰는 법 갈켜주세요 (…….)

두뇌가 결정론적인 이유 – 김청하

아래 글에서 승일 씨는 두 가지 반론을 제시해주셨는데, 아래 부분은 좀 어려워서 전부 이해했는지는 잘 모르겠습니다. 일단 제가 이해한 승일 씨의 글을 요약하자면 다음과 같습니다.

먼저 하나.

1. 두뇌의 메카니즘이 결정론적이고 양자효과가 그저 ‘에러’에 불과하다면 그것은 (유한한) 알고리즘으로 나타낼 수 있다.

2. 이 알고리즘은 여러 가지 형태로 구현될 수 있으며, 그들은 모두 동일한 정신적 기능을 가질 것이다.

3. 그렇다면 정신은 구현되는 형태와 무관하게 존재할 수 있다.

둘.

1. 두뇌의 메카니즘이 결정론적이고 양자효과가 그저 ‘에러’에 불과하다면 그것은 (유한한) 알고리즘으로 나타낼 수 있다.

2. 그렇지만 알고리즘적으로 처리 불가능한 명제를 인간은 처리할 수 있다.

3. 인간의 두뇌는 결정론적이지 않다.

저는 이 두 가지 모두에 대해 동의하지 않으며, 저는 이 문장의 아래에 승일 씨의 두 가지 반론에 대한 재반론을 각각 작성할 것입니다.

한 가지 말씀드리자면, 마크트웨인DB-책은 마크트웨인과 동일한 정신적 기능을 가질 수 없습니다. 1) 인간이 받아들일 수 있는 자극 조합의 수는 언어만 봐도 알 수 있듯이 ‘무한’하고, 2) 마크 트웨인은 외부의 자극 뿐만 아니라 내부의 상태도 고려하여 반응하는데, 책은 이런 저장수단이 없습니다. 이런 것들까지 모두 ‘경우의 수’로 간주하여 써넣는건 불가능합니다. 언어만해도 그래요. 양자 수준의 모든 경우의 수를 따진다면 가능할 수도 있겠지만 그 정도까지되면 사실상 무의미한 일입니다.

그럼 제 반론을 말씀드리겠습니다. 먼저 하나. 정신적 실체에 대해서는 여기선 별 의미가 없습니다. 그것이 물리세계의 인과폐쇄성이 인정된 유물론적(≒과학적) 세계관을 위협하는 의미에서 쓰신 것일지도 모르겠습니다만, 큰 오해를 하고 계십니다. 이 세계관 안에서도 충분히 ‘다른 형태 같은 정신’을 설명할 수 있습니다. 불을 예로 들어볼까요? 불은 담배에서도 타고 캠프파이어에서도 타고 가스레인지에서도 탑니다. 제 라이타에서도 타지요. 하지만 이렇게 많은 형태들이 어딘가에 ‘불’이라는 실체가 있다는 것을 증명하는 건가요? 그렇지 않습니다. 불은 그냥 하나의 ‘현상’입니다.

마찬가지입니다. 어느 순간 고아라 양과 ‘완벽하게’ 동일한 상태와 성질을 가진 생물을 1미터 거리에 만들었다고 생각해봅시다. 그 생물은 오리지널과 동일하게 예쁘고 귀엽고, 동일한 생각과 마음을 갖고 있을겁니다. 그러면 이 둘은 동일한 정신을 가진 두 몸인가요? 하나의 영혼을 가진 두 개의 육체일까요? 그럴리가요. 이 둘은 유전자 표현형 발현형 취향 키 코높이 눈크기 소속사(..는 아니겠지만) 어쨌든 뭐 기타등등 물리화학적 의미에서 동일하지만 그냥 두 사람의 인간입니다. 고아라 이미테이션은 제가 잘 키우겠습니다.

예. 제가 무슨 말을 하려는지 감을 잡으셨겠죠? 그러니까 이 세계관의 설명은, 정신 또한 그저 하나의 물리적 현상이라는 것입니다.

둘. 마크 트웨인DB-컴퓨터와 마크 트웨인의 차이는 무엇일까요? 그 차이가 무엇이기에 마크 트웨인은 모순을 처리할 수 있고, 마크 트웨인DB-컴퓨터는 모순을 처리할 수 없는 것일까요? 이 지점에서 승일 씨는 강력한 가정 두 개를 숨겨놓고 계십니다. 1) 컴퓨터는 정합적인 형식 체계만을 사용하며 2) 그것은 도중에 변경될 수 없다 는 것이지요. 결론부터 말씀드리자면 1은 참입니다만, 2는 거짓입니다. 제 반론은 여기에 위치합니다.

이렇게 두 개의 가정을 드러내놓고 보면 승일 씨의 주장은 인공지능 비판에서 그리 어렵지 않게 찾아볼 수 있는 레파토리가 되어버립니다. “인간은 모순을 처리할 수 있지만 기계는 모순을 처리할 수 없다. 그러므로 기계는 생각하지 못한다.” 이렇게요. 인공지능 연구자들은 이러한 비판에 대하여, 컴퓨터 또한 형식 체계를 바꿔가며 사용할 수 있음을 들어 반론합니다.

괴델의 불완전성정리가 틀렸다는 것은 아닙니다. 제가 보기에도 정합적이고 강력한 어떤 형식체계에서 필연적으로 증명 불가능한 명제가 발생한다는 것은 사실에 가깝습니다. 하지만 컴퓨터가 한 가지 형식체계만을 사용하지는 않는다면 이러한 문제는 근본적이라기보다는 그저 ‘기술적인’ 문제가 되고 맙니다.

인간이 모순을 처리할 수 있는 것은 인간이 무언가 근본적으로 뛰어난 능력을 가졌기 때문이 아닙니다. 저는 사실 인간이 정말로 모순을 처리하고 있는지도 의심스럽지만 일단 이 의심은 접어두고, 설령 그런 능력이 있다고 해도 그것이 예측할 수도 없고 통제할 수도 없는 양자적 요동에서 기인할 가능성은 제로에 가깝지요.

상병 이승일(2006/08/16 09:57:09)

흥미롭게 잘 읽었습니다. 그러나 1번 문제에 대해서는 조금 오해하신 듯 합니다. 그 부분은 다시 답변 글을 달겠습니다만, 어려운 문제임에는 틀림없는 것 같습니다. 2번 문제의 경우는 아주 간단합니다. 청하씨 말씀대로 ‘여러 개의 형식체계’를 골라 사용할 수 있으면 상황은 더 나아질 것처럼 보일지도 모르겠습니다. 그러나 문제는 ‘어떤 형식체계를 사용할 것인지를 결정하는 형식체계’ 도 있어야한다는 점입니다. 사실 실제로 대부분의 컴퓨터는 여러 가지 형식체계를 번갈아 사용합니다. 그러나 그 모든 형식체계를 포함하는(혹은 그것들의 연결에 의해 형성되는) 단일한 체계가 있어야합니다. 인간의 뇌는 단일한 체계임에도 불구하고 – 정신분열자가 아닌한 – 증명불가능한 참인 적형식을 찾아낼 수 있지만, 이 세상의 어떤 컴퓨터도 그렇게 할 수 없습니다.

그리고 인간은 ‘모순’을 다룰 수 있다는 말은 잘못된 것인데, 괴델의 정리는 모순과 아무 상관이 없기 때문입니다.

결정론과 두뇌 논의 점검 – 이승일

우선 앞에서 리플로도 말씀드렸다시피, 청하씨가 생각하시는 것처럼 여러 개의

형식체계를 사용하는 것은 형식체계의 불완전성을 개선하는데에 아무 도움을 줄 수 없음을 말씀드리고 싶습니다. 어떤 형식체계를 사용할 것인가를 결정하는 또 다른 형식체계가 필요하며, 만약 그러한 결정체계가 없다면 결코 알고리즘으로 구성할 수 없고 결정론적이라고 말할수도 없을 것입니다. 따라서 이 점만으로도 뇌가 알고리즘적이지 않다는 중요한 증거가 된다는 점을 부인할 수 없으리라고 봅니다.

제가 많은 지면을 할애했던 DB-컴퓨터 논의는 사실 개별자 – 보편자 논의를 차용한 것인데, 제가 의도했던 바를 명확히 표현하지 못한것 같습니다. 그것이 이 논의에 있어서 크게 중요한 부분이 아니기 때문에 그냥 넘어갈 수 있겠지만, 다음 기회에 다시 상술하도록 하겠습니다.

제가 드리고 싶은 말씀은 두뇌가 결정론적인가 아닌가의 논의에서 증명의 부담은 결정론적이라고 주장하는 쪽에 있다는 사실입니다. 청하씨께서는 두뇌의 작동을 관장하는 결정론적인 법칙이 존재한다고 하고 계시며, 저는 그러한 것이 존재하지 않는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만약 저희 둘다 스스로의 주장을 명확하게 증명하는데 실패한다면, ‘잠정적인’ 결론은 그러한 법칙이 없다는 쪽으로 날 수밖에 없습니다. 운명이라는 법칙이 있는지 없는지 확실한 결론이 나지 않는다면, 운명이 없다고 말하는 것이 합리적인 잠정적 결론이 듯 말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청하씨께서는 뇌가 결정론적이라는 적극적인 근거를 전혀 제시하지 않으셨습니다. 청하씨께서는, 만약 뇌가 비결정론적이라면 어떠한 개념적/논리적/물리적 문제가 발생하는지 보여주시던지, 혹은 직접적으로 뇌가 결정론적이라는 근거를 보여주셔야할 것입니다. 만약 그렇지 않다면 설사 청하씨가 저의 근거들을 받아드리지 않는다고 할지라도, 우리의 잠정적인 결론은 뇌가 비결정론적임을 인정하는 것이 될것입니다.

또한 보다 근본적인 부분에서 저희 논의가 그 초점을 잘못잡고 있다는 생각이 듭니다. 사실 청하씨의 본심은 ‘뇌가 결정론적이든지 아니든지에 상관없이’ 자유가 보존될 수 있다. 에 더 가까운 것으로 생각합니다. 그렇다면 논의의 초점은 자유의 개념 분석에 맞춰져야할 것입니다. 즉 ‘만약’ 뇌의 메커니즘이 결정론적이라고 하더라도 어째서 자유가 유지될 수 있는지가 사실 더 중요한 문제라고 생각합니다. 최소한 지금 상황에서는 말이죠. 만약 청하씨께서 뇌가 결정적일 수밖에 없는 적극적인 이유를 제시하지 못하신다면, 왜 자유가 결정론과 무관한지의 이유를 제시하시면 될 것입니다. 제가 생각하기엔 뇌가 비결정적이라는 저의 주장에 반론을 제시하는 것 말고, 결정론적일 수밖에 없는 적극적인 이유를 제시하는 것은 너무나 어려울 것이기 때문에 그것을 제가 강요하는 것은 너무 가혹한 것 같습니다. 이에 대한 판단은 청하씨께 맡기겠습니다.

두뇌의 결정성 – 김청하

왜인지 저나 승일 씨가 글을 올리면 괴로워하시는 분들이 계시는 것 같아 쪽지로 하는 것이 어떨까 생각도 잠시 해봤습니다만, 굳이 들어와서 리플 달아주시는걸 보면 사실 즐기고들 계신건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어 포스팅합니다. 흐흐. 흥미롭게 지켜봐주시는 분도 계시고.

제가 이 논의에서 최종적으로 말씀드리고 싶은 것은, 말씀하신대로 ‘결정론적인 두뇌 위에서도 우린 자유로울 수 있다’에 가깝습니다만, 저는 두뇌가 결정론적이라는 생각을 결코 포기하고 싶지 않습니다. (물론 명백하고 스스로 납득할 수 있는 증거 앞에서는 제 주장을 철회할 것입니다) 제가 하고 싶은 말은 “어쨌든 우리는 자유롭다”가 아니라 “결정론적이라도 자유롭다”이니까요.

물론 제가 입증의 책임을 질 수도 있겠습니다만 그건 도의적인 측면에서일 뿐입니다. 제가 말을 먼저 꺼냈기 때문이지요. 운명이 있는지 없는지 알 수 없다면, 그것에 대해서는 침묵하는 것이 과학적인 사고방식일 것입니다. 빛이 파동이라는 수도 없는 실험적 증거들에 대하여 빛이 입자라는 설을 제기하기 위해서는 그에 걸맞는 적절하고 명백한 이론적 실험적 뒷받침이 있어야 하겠습니다만, 두뇌가 결정론적이라는 주장을 제기하는 데에는 그 정도까지 필요하지는 않습니다. 두뇌가 비결정론적이라는 주장은 자연과학이라기보다는 인문학의 영역에서 이루어져 왔으니까요. 과학에 가설과 추측은 있어도 잠정적인 결론은 없습니다. 우린 두뇌가 결정론적인지 비결정론적인지 알 수 없었으니 침묵해야 했습니다. 그런데 계속 증명되지 않은 가설 위에서 얘기를 하다보니 그 가설을 믿게 된 것 뿐이구요. 하지만 어디까지나 가설은 가설이고 그에 반대되는 주장을 제기한다고 해서 입증의 책임을 온전히 지는 것은 아닙니다.

그리고 이젠 실험적 결과들, 그리고 뒷받침하는 이론들이 조금씩 쌓이고 있습니다. 그들은 두뇌가 결정론적이라는 주장을 지지하고 있구요. 승일 씨는 이런 ‘실험’과 ‘이론’들에 대해 물으셨고 저도 명확히 말씀드리고 싶습니다만, 이 부분은 제가 기억만으로 옮겨오기가 쉽지 않은 것들이기에 그들을 여기에서 학술적으로 온전하게 재현하는 것은 쉽지 않은 일입니다. 온전히 재현할 수 없다면 핵심적인 논리만이라도 재현해야 하겠지요.

앞서 저는 ‘두뇌가 결정론적이다’라는 주장에 대한 두 가지 근거로서 1) 이 세계가 결정론적이라는 것, 그리고 2) 두뇌의 메카니즘이 결정론적이라는 것을 제시했습니다. 제 부족으로 조금 파편적인 제시가 되어버리긴 했습니다만, 위의 주장과 기본적인 근거들은 제가 첫 번째 글에서부터 일관되게 보여드리려 노력하고 있는 것입니다.

사실 이 세계가 결정론적이라는 주장은 양자역학에 의해 이미 폐기되었습니다만, 굳이 1)과 같이 얘기하는 것은 그저 짧게 요약하기 위함입니다. 그러한 양자적 요동들이 이 세계 전체를 뒤흔들지는 않습니다. 양자들은 사실상 그 위치를 확률로밖에 예측할 수 없지만, 그들이 모여 만들어진 세포 규모로만 올라가도 양자적 요동은 이미 무시해도 좋을 확률이 됩니다. 이 키보드가 1초 후에 목성 뒷면에서 나타날 확률은 0이 아니지만, 소수점 50자리에서 반올림하면 0입니다.

물론 저는 이러한 ‘규모’의 문제만을 말하는 것이 아닙니다. 전 계층구조론적인 설명을 드리고 싶습니다. 이 설명의 힌트는 마크 트웨인DB-컴퓨터에서 출발합니다. 마크 트웨인DB-컴퓨터와 마크 트웨인이 동일한 특질을 가질 수 있다면 그 이유는 무엇일까요? 두뇌를 구성하는 형식 체계는 그 하부 계층과 분리된 논리 구성을 갖고 있습니다. 그 하부구조로부터 완전히 독립적인 것이지요. 책은 잉크와 종이로 이루어져 있지만, 책의 내용은 잉크와 종이의 분자 성분에서 독립적인 것과 같습니다. (아마 이후에 저는 같은 방식으로 인간의 자유가 하부 계층인 ‘두뇌’의 결정성과 독립되어 정립될 수 있음을 증명할 것입니다)

그리고 하부 구조(양자)가 상부 구조(두뇌)에 영향을 미칠 수 없는 이유가 바로 ‘규모’지요. 큰 물체는 양자론의 영향을 받지 않습니다. 고양이처럼 ‘거대한’ 물체의 생사를 알 수 없는 상황은 정말 극단적인 상황이구요. 그렇기에 그런 정도의 극단적인 상황에서 발생하는 비결정론적 결과는 ‘에러’라고 봐도 좋습니다. (그 이유는 1) 그런 결과가 발생할 확률이 0에 초 가까우며 2) 두뇌의 메카니즘과 관계없이 발생하기 때문 입니다)

결국 양자역학이 두뇌에 어떠한 식으로든 간섭을 해내지 못한다면, 두뇌는 결정론적으로 움직이는 것입니다. 새로운 비결정적 요소들을 찾아내지 못한다면.

+1. 플라톤이래봐야 언뜻언뜻 주워들은 정도라서 개별자-보편자 논의에 대해 명확히 알지는 못합니다만, 보편자가 세계 밖에서 세계에 영향을 미치는 방식으로 이 세계의 인과폐쇄성을 위협하지는 않는다고 생각합니다. 제가 보기에 보편자(처럼 보이는 환상들)는 ‘공식’이나 ‘법칙’의 형태로 “이 세계 안에” 존재합니다.

+2. 형식체계들의 교환을 결정하는 메타-형식체계 또한 정합적이지만 그리 강력하지 않기 때문에, 증명불가능한 명제가 발생하지 않을 수 있습니다. 또한 그 이전에, 단일한 메타-형식체계를 사용할 필요도 없습니다. 형식체계의 교환 결정은 그 이전의 형식체계 안에서 이루어질 수 있는 것이니까요. 굳이 “이나영 빼고 고아라 넣어” “이은성 빼고 고아성 넣어” 하는 중앙 체계를 가정할 필요는 없습니다. 이나영이 “아, 난 안되겠다, 고아라로 바꿔야지” 할 수도 있다는 얘기.

상병 이승일(2006/08/17 11:06:04)

거시적인 규모에서 양자역학의 확률존적 속성이 사라진다는 것은 ‘전혀’ 사실이 아니며 반투명 유리에 의해 반사되는 빛과 같이 아주 간단한 실험 속에서도 그것은 명백히 밝혀질 수 있습니다. 지금 보고계신 컴퓨터 모니터에 창문에서 흘러들어온 빛이 살짝 반사되고 있다면, 그 역시 오직 양자론적 효과에 의해서만 올바르게 해석될 수 있습니다. 슈뢰딩거 고양이의 예는 단순화된 예일지는 몰라도 전혀 극단적인 예가 아니며, 청하씨의 컴퓨터 모니터를 통해서도 끊임없이 그와 같은 일들이 일어나고 있습니다. 또한 설사 극단적인 예라고 치부하더라도, 그러한 극단을 포섭할 수 없는 사고방식은 결코 세계에 대한 온전한 사고라고 할 수 없겠지요.

그리고 마지막 부분에 아주 커다란 오해를 보여주셨습니다. “결국 양자역학이 두뇌에 어떠한 식으로든 간섭을 해내지 못한다면, 두뇌는 결정론적으로 움직이는 것입니다. ” 는 전혀 사실이 아닙니다. 저야 양자역하기 유일한 비결정론적 요소라고 생각하고 있지만, 그 외에도 다양한 비선형적 요소의 후보들이 있고, 이들 모두 활발히 연구되고 있습니다. 오히려 증명의 부담이 결정론을 주장하는 쪽에 있음을 아셨으면 좋겠습니다. 청하씨께서는 ‘잠정적인 결론’ 이 과학에서 없다고 하셨지만, 사실은 대부분의 결론들이 잠정적인 결론입니다. ‘침묵’ 은 과학철학자의 선택일수는 있어도 현장과학자의 선택과는 거리가 멉니다. 현실에는 언제나 충분한 증거가 있는 것은 아니기 때문이죠.

무엇보다도, 맨 마지막 부분은 명백한 오류로 생각됩니다. ‘강력하지 않은’ 형식체계가 무엇을 의미하는지 불분명하지만, 어떤 의미이든지 충분히 강력하지 못한 체계는 결코 결정론적일 수 없습니다. 왜냐면 그 체계로부터 따라나오지 않는 귀결이 있을것이기 떄문이죠. 이나영이, 나 안되겠다, 고아라로 바꿔라, 라고 하든, 어떤식으로 하든, 결론은 매우 간단합니다. 그 체계가 다음 주자를 결정해줄 수 있는 힘이 있다면 괴델 정리에서 벗어날 수 없고, 그럴 힘이 없다면 결정론적이라고 말할 수 없는 것입니다.

마지막으로 자유가 결정론’에도 불구하고’ 유지될 수 있는 이유 – 이것이 사실 저희 논의에서 가장 중요한 부분인데 – 를 듣고 싶군요.

상병 김청하(2006/08/17 12:00:33)

답글 잘 읽었습니다. 그런데 우리 글이 그렇게 다른 분들께 ‘피해’를 끼치고 있었나요! 흑흑.

1. 입증의 책임

저는 일단 생각이 다릅니다만, 이 부분은 나중에 쪽지로 논의하고 싶습니다. 전 입증책임을 두고 너무 흩어지는 것을 바라지 않습니다. 다만 저는 분명히 입증했으며, 그것을 소극적인 근거라고 보시는 이유를 모르겠습니다. 저는 아래와 같이 말씀드렸습니다.

[두뇌에 영향을 미치는 요소들 중 비결정론적인 요소는 오로지 양자적 카오스 하나 뿐이며, 이것이 두뇌에 충분한 영향을 미치지 못한다면 두뇌는 결정론적이다.]

이 논리를 정면에서 부정하려면 “양자적 카오스는 두뇌에 충분한 영향을 미친다”라는 입증을 하셔야 합니다. 이번엔 승일 씨의 오해가 아닌가 싶습니다만, 비선형 모델들이라고 해서 비결정론적인 것은 아닙니다. y=sin(x) 곡선은 비선형이지만 결정론적입니다. 심지어 우린 선형적인 알고리즘을 통해서도 얼마든지 비선형적인 움직임을 보일 수 있습니다.

2. 양자역학에 대한 오해

예, 제가 몇 가지 오해한 부분이 있었던 것 인정합니다. 다만 우리의 원래 논점은 ‘거시 세계’ 전체라기보다는 ‘생물계’였고, 제 글에서 말씀드린 주장의 범위를 좀 수정한다면 그 말은 여전히 유효합니다. 제가 정말 말씀드리고 싶었던 부분은, [양자세계의 법칙과 생명현상의 법칙이 지배하는 논리 계층은 완전히 분리되고 독립되어 서로의 영향이 (저확률의 ‘에러’를 제외하면) 없다.] 라는 것이구요. 두뇌는 양자론 위에 만들어졌지만 양자론과는 무관합니다.

빛은 거시 세계의 불확정성을 논하기엔 너무 특수한 예입니다. 말씀하신 빛은 ‘단일한 광자의 집합’이기에 그러한 미시적 속성이 증폭될 수 있을 뿐이지요. 물론 이 세계가 거시 세계 전반에 대해 결정론적이라는 말에 대해서 빛은 훌륭한 반례가 될 수 있겠지요. 그 부분은 제 오해였습니다. 두뇌에 대해서만 생각하다가 그만.

3. 괴델과 두뇌

제가 논리학은 잘 모릅니다만, 강력하다는 말은 모든 명제에 대하여 서술할 수 있을 정도로 넓은 범위를 가진다는 말입니다. ‘한정된 명제’에 대해서만 서술하는 임의의 형식 체계는 불완전성 정리가 성립할 수 없을 수도, 그러니까 ‘완전할’ 수도 있다는 말이지요. 이 메타-형식체계가 그렇게 완전할 수 있다면, 더이상의 논의는 불필요합니다. 문제는 완전할 수 있는가 인데, 이 부분에 대해서 얘기하기엔 제 수준에선 좀 어려운 일입니다만, ‘필연적으로 불완전한 것은 아니다’ 정도만으로도 우리의 논의에는 충분합니다.

메타-형식체계의 역할은 형식체계들을 적당히 바꿔치기해주는 거라서 좀 약해도 괜찮다, 대신 그 역할 자체는 ‘완전하게’ 수행할 것이다. 이런 것이지요. 물론 그 상황을 알아야 할테니 메타-형식체계 또한 모든 명제를 다룰 능력이 있어야 하는 것은 아니냐, 하는 반론도 있을 수 있습니다만 그냥 메타-형식체계는 한 형식체계 내에서 그 명제를 다룰 수 있는가 없는가, 없다면 다른거로 체인지. 정도 역할만 하는 거니까 괜찮으리라 생각합니다. 다음 주자를 어떤 것으로 결정할 필요는 없습니다. 그냥 다음꺼 아무거나 해서 걔도 안되면 또 바꾸면 되는 거지요. “어떠한 형식체계에서도 설명될 수 없는 명제”가 있다면 모를까 이런 식이라면 마크트웨인DB-컴퓨터가 마크트웨인 과 다를 이유가 없습니다. (이건 하나의 가능성일 뿐이고, 말씀드렸듯이 전 논리학은 잘 모릅니다. 여건이 되면 관련된 기존의 논의를 참조하여 추가 답변 드리겠습니다.)

사실 저는 개인적으로, 인간이 [신비하고 복제될 수 없는 능력]을 갖고 있기에 그런 어려운 일들을 처리할 수 있다는 생각에는 아무래도 의심이 생깁니다. 인간 또한 두뇌 내부에 그런 일을 처리하는 어떤 알고리즘을 갖고 있을 거라는 가설이 더 믿음직하지요. 아니면 예전에도 말씀드렸듯이, 인간은 그런 문제를 ‘처리하지 않고’ 그냥 인식할 뿐이라는 가설도 있구요.

4. 자유가 결정론에도 불구하고 정립될 수 있는 이유

이 부분은 시작하기가 좀 어려워서 저도 나름대로 열심히 생각을 정리하고 있습니다. 지금 승일 님과 제가 얘기하고 있는 것은 “두뇌가 결정론적인가?” 부분이니 크게 관련은 없지만. 일단 저는 위에서 말씀드렸듯이 힌트를 이 세계의 ‘계층구조(책의 내용은 잉크와 종이에서 독립적이다)’와 버클리와 매트릭스에서 찾고 있습니다만, 조금 더 가다듬을 필요가 있을 것 같습니다. 제 영역이 아닌 것 같아서 다른 분들께 조금 도움을 청해야 할 것 같기도 하고.

번외편 – 무한에 관하여 – 이승일

무한∞ ——–

인간이 가진 수많은 개념과 관념들 중에서 무한 만큼 불가사의한 것도 없을 것이다. ‘캬발라’ 라는 고대 유대교 집단은 무한성에 대한 묵상을 통해 신을 지각할 수 있다고 가르쳤다. 그리스인들에게도 무한성, 혹은 영원성은 신과 인간을 구분지어주는 결정적인 척도였다. 르네 데카르트는『성찰』에서 유한한 인간이 무한성에 대한 관념을 품을 수 있는 것은 오직 무한한 존재가 그것을 우리에게 주었기 때문이라고 주장하며, 무한성의 관념을 통해 신을 논거하였다. 버트런트 러셀은 자신의 연인 오톨라인에게 보내는 편지에서 ‘당신이 신이라고 부르는 것을 나는 무한이라고 부릅니다’ 라는 말로 무한함에 대한 그의 동경을 나타내었다. 무한은 뉴턴과 라이프니츠가 개발한 미적분에서 가장 핵심적이고도 문제시되는 개념이었으며, 현대 수리철학의 기반이 된 집합론에서도 가장 중요한 개념이다. 무한이라는 개념은 일상에서 거의 대화의 소재가 되지 못하겠지만, 수천년의 역사를 가진 인류의 종교, 철학, 과학에서 언제나 신비롭고도 중요한 자리를 차지해왔다.

바로 이 무한에 관해 이야기해보자.

일반적으로 무한이라고 하면 다 같은 무한으로 받아드리곤 한다. 그러나 무한에 대한 해석은 크게 두 가지로 나뉘며, 나는 이 두 무한의 차이를 통해 세상을 바라보는 두 가지 다른 시각을 생각해보고자 한다.

수학자 가우스는 다음과 같이 말했다고 한다.

“내가 무한이라는 용어를 사용할 때, 그것은 어디까지나 일종의 과정으로서의 개념을 의미한다. 한계가 없는 것, 헤아릴 수 없는 것 … 그러한 소극적이고 수동적인 의미로서만 무한은 나에게 의미를 가진다.”

우리가 일반적으로 생각하는 무한에 대한 이미지도, 가우스가 가졌던 것과 크게 다르지 않을 것 같다. 이러한 시각으로 비춰진 무한을 가무한 이라고 한다. 말하자면 가짜 무한이라는 뜻이다. 가무한은 무한을 어떤 실체로서 인정하는 것이 아니라 ‘단지 말하는 방식’ 으로 간주한다.

가짜 무한이 있다면 진짜 무한도 있어야할 것 같다. 그렇다. 진짜 무한, 즉 실무한은 수학적 실재로서 간주된 무한이다. 실무한을 주장하는 사람들에게 무한은 단지 말하는 방식이 아니라 진짜로 존재하는 무엇이다.

‘힐베르트 호텔’ 이라는 예는 실무한의 개념을 잘 보여준다.

『우주의 어느 장소에 무한한 객실을 가진 호텔이 있다. 어느 날 무한한 손님이 들어와서 모든 객실이 다 찼다. 그런데 갑자기 한 명의 손님이 나타나서 제발 하룻밤만 묵게 해달라고 애원했다. 호텔 지배인은 방이 다 찼다며 거절했지만, 손님의 애원에 못 이겨 다음과 같은 조치를 취했다. 각 호실의 방번호에 1을 더한 호실로 이동해 줄 것을 손님들에게 요구한 것이다. 즉 1번 방 손님은 2번 방으로, 2번 손님은 3번 으로 ….n 번째 방 손님은 n+1번 방으로 등등. 그러자 1번 방이 비었고, 한명의 손님을 더 받을 수 있었다. 그런데 다음날 또다시 무한한 수의 손님들이 들이닥쳤다. 지배인은 놀랐지만, 침착하게 상황을 해결했다. 지배인이 취한 방법은 다음과 같다. 각 호실의 방 번호에 2를 곱한 번호의 방으로 손님들을 이동시킨 것이다. 즉 1번 손님은 2번으로, 2번 손님은 4번으로, 3번 손님은 6번으로 …. n번째 손님은 2n번 방으로 등등. 그러자 홀수번호를 가진 방이 모두 비었다. 이렇게 해서 지배인은 또 다시 무한한 손님을 받을 수 있었다. 』

약간은 헛소리같지만, 이 이야기는 ‘진짜로’ 무한을 다룬다는 것이 어떤 것인가를 보여준다. 실무한이라는 개념을 인정하지 않는다면, 위의 이야기는 말이 되지 않는다. 애초에 무한한 호텔이 있다고 해도 그곳에 손님이 다 들어찰 수는 없기 때문이다. 그러나 실무한을 인정하면 위의 이야기는 지극히 정상적인 이야기가 된다.

한편, 우리는 ‘무한히 큰’ 것만 생각할 수 있는 것은 아니다. ‘무한히 작은’ 이라는 개념도 마찬가지의 두 가지 해석을 허용한다.

우리가 일반적으로 고등학교에서 배우는 미적분은 가무한적인 방식으로 ‘무한히 작은’ 이라는 용어를 개념화한다. 많은 사람들이 싫어하는 리미트(lim)가 바로 그것이다. 리미트란 어느 한 점으로 무한히 다가가는 ‘과정’을 묘사한 것으로서 결코 그곳에 도달한다거나 하는 말을 하지 않는다. x 가 2에 수렴한다고 할 때, x 는 결코 2가 되지 않으며, 단지 2에 점점 가까워질 뿐이다. 이러한 개념은 아마도 뉴턴이 처음 제시한 것으로 생각한다.

그러나 미적분학의 또 다른 창시자 라이프니츠는 다른 방식으로 접근했다. 라이프니츠는 ‘가장 작은 수’ 라는 개념을 만들고 그것을 무한소 라고 불렀다. 그리고 그것을 dx, dy 등으로 쓴다. 무한소는 말 그대로 이 세상에서 가장 작은 수이다. 또한 그것은 2나 4처럼 실재하는 수이기도 하다. 가무한적인 방식에서는 ‘x 가 2에 수렴한다‘ 라고 표현하지만, 무한소를 사용한 접근법에서는 ’x = 2 + dx‘ 라고 표현한다. 즉 x가 2보다 무한소만큼 더 크다는 이야기이다.

흥미로운 것은 이 두 방식이 실질적으로 아무런 차이도 만들어내지 않는다는 것이다. 수학적인 결과에 있어서, 무한소를 인정하든, 리미트 개념을 사용하든, 모든 것은 동일하다. 간단한 예를 들어보자. (언제나 그렇듯 수학을 싫어한다면 건너 뛰어도 상관 없다.)

y = x² + 2x + 1

라는 식을 미분해보자. lim를 사용하는 방식은 고등학교 때 배우므로 생략하겠다. 위의 식을

lim를 사용하여 미분하면, y’ = 2x +2 가 나온다는 것은 쉽게 알 수 있을 것이다. 이것을 이제 무한소 개념을 사용해서 미분해보자.

함수의 미분이라는 것은 하나의 변수에 아주 작은 변화가 일어났을 때, 다른 변수는 얼만큼 변하는가의 문제로 이해할 수 있다. 위의 경우, x에 아주 작은 변화가 일어나면, y 에는 어떤 변화가 일어나는가를 알아보면 된다. y가 취할 수 있는 가장 작은 변화를 dy 라고 부르자. x가 취할 수 있는 가장 작은 변화를 dx 라고 부르자. 그래서 우리가 알고 싶은 것은 x가 아주 조금 변했을 때의 y의 변화량, 즉 dy 와 dx 의 비율, 다시 말하면 dy/dx 이다.

이제 다음과 같은 식을 써볼 수 있다.

y + dy = (x + dx)² + 2(x + dx) + 1

여기서 우리는 y 대신에 y + dy를, x 대신에 x + dx를 넣은 것이다. y가 dy 만큼 커질 때 x 는 dx 만큼 커지는 것으로 가정했으니깐.

위의 식을 풀면,

y + dy = x² + 2xdx +dx² + 2x + 2dx + 1

이 된다.

그런데 여기서 맨 처음 식, y = x² + 2x + 1 를 빼주면,

dy = 2xdx + dx² + 2dx

가 된다. 한편, dx 는 x가 취할 수 있는 가장 작은 값이므로 dx보다 더 작은 dx² 이라는 값은 의미가 없다. 따라서 dx² = 0 으로 처리한다. 그러면 위의 식은

dy = 2xdx + 2dx

가 될 것이다. 한편 우리가 알고자 하는 것은 dy/dx 였음을 기억하자.

따라서 위 식의 양변을 dx 로 나눠주면,

dy/dx = 2x + 2

를 구할 수 있고, 2x + 2 는 lim로 구한 방식과 정확하게 같다.

사실 복잡한 식일수록 lim를 이용한 방식보다는 무한소를 이용한 방식이 더 쉽고 편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고등학교에서 무한소 방법을 사용하지 않는 이유는 단지 무한소가 있다고 믿기 힘들기 때문이다. “이 세상에서 가장 작은 수” 라는 개념은 분명 그냥 받아드리기에는 부담이 되는 개념이다. 그러나 그것을 받아드렸을 때에도 모든 것은 정상적으로 진행되고, 오히려 더 쉽게 진행된다.

가무한과 실무한은 서로 동등한 수학적 결과를 얻어낸다. 때문에 수학적으로는 그 둘 중 어떤 것을 선택해야할지, 어떤 것이 옳은 개념인지 판단할 수 없다. 무한이라는 것이 정말로 실재한다고 말하든, 단지 말 하는 방식에 불과하다고 하든, 우리가 얻는 결과는 대부분의 경우 동일하다. 그러나 그것은 미학적으로 차이가 난다. 실무한을 받아드리면, 모든 것은 더욱 간결해지고, 가무한적 시각으로는 도달할 수 없는 놀라운 영역에 도달할 수 있다. 이 영역은 집합론이라는 영역이다. 집합론은 칸토어라는 천재적인 수학자가 거의 혼자 만든 분야로서, 현대 수리, 언어철학에 지대한 영향을 주었다. 집합론에서 흥미로운 증명 중 하나가 칸토어의 대각화 증명인데, 이것은 실수의 개수가 자연수의 개수보다 더 많다는 것이다. 다시 말해, 무한에도 크기의 차이가 있다는 것이다. 이 흥미로운 증명은 다음에 기회가 된다면 제시해보도록 하겠다.

만약 우리가 실무한을 받아드리지 않는다면, 칸토어의 작업은 그 근본부터 무의미하다. 우리가 실무한을 받아드려야할 실질적인 이유는 전혀 없다. 그러나 그것을 받아드리면 세상은 더 간결해지며 새롭고 흥미로운 질서가 펼쳐진다.

우리가 선택할 수 있는 세계관은 종종 실무한과 가무한의 경우처럼 대등하게 둘로 나뉘곤 한다. 이 세상에 어떤 것이 존재하느냐의 물음에 대해 일반적으로 서로 상반되는 두 가지 답변이 있다. 그것이 실재한다는 의견과 실재하지 않는다는 의견이다. 전자를 실재론, 후자를 반실재론이라고 부른다. 이런 문제들 중 대다수가 정말로 쉽지가 않다. 신은 존재하는가? 수는 존재하는가? 의식은 존재하는가? 양자는 존재하는가? 등 등 ..

이런 개념들은 그 자체가 너무 근본적이고 기초적이어서, 다른 개념들로 해체하거나 환원하기 힘든 개념들이다. (물론 해체했다고 주장하는 사람도 있지만.) 이런 존재자들이 실재한다고 믿건, 실재하지 않는다고 믿건 사실 현실에서 나타나는 결과는 엇비슷하다. 신이 있다고 해도, 신이 없다고 해도 세상은 나름대로의 방식으로 잘 설명될 수 있다. 수가 실재한다고 해도, 인간의 가공물이라고 해도 수학은 나름대로의 방식으로 잘 돌아간다. 이것들이 있다고 하든 없다고 하든, 우리는 그에 맞는 설명방식을 찾아낼 수 있고 실질적인 의미에서 어떤 것이 정답인지 영원히 찾아내지 못할 수도 있다.

그러나 우리는 대부분 어느 한쪽을 택하여 그것을 믿고 살아간다. 아무런 실질적인 근거가 없는데도 말이다. 이 믿음, 혹은 끌림은 다름 아닌 아름다움에서 기인한다고 생각한다.

실무한을 믿어야할 실질적 이유는 없다. 그러나 그것을 받아드렸을 때 얻을 수 있는 아름다움 때문에 사람들은 그것에 끌린다. 마찬가지로 신을 믿어야할 이유는 이 세상에서 찾을 수 없다. 그러나 신을 인정하면, 새로운 세계가 드러나며 이것이 우리를 끌어당긴다.

물론 같은 이유에서 가무한을 믿을 수 있고, 무신론을 믿을 수도 있다. 아름다움의 기준이야 다를 수밖에 없으니깐. 그러나 최소한 나는, 간결함이 복잡함보다 아름다우며, 풍성한 질서가 메마른 허무함보다는 아름다운 것 같다.

이 세상의 중요한 문제들에 대한 합리적인 답을 얻을 수 없다는 것이 나는 정말 의미있는 성찰이라고 생각한다. 그렇다고 그것을 아무렇게나 생각해야한다는 것은 아니다. 해답의 후보들 사이에는 비대칭적인 아름다움이 있다. 이성과 논리의 사다리는 더 이상 우리를 안내해주지 못하지만, 그렇다고 침묵이 우리에게 주어진 유일한 선택지는 아니다. 우리의 이성이 그 역할을 다하는 지점에서 우리는 아름다움을 볼 수 있는 눈을 뜨게 된다. 그 눈이 우리를 어떤 믿음으로 이끌어가며, 이 믿음이 우리의 삶을 이끌어가고 있을 것이다.

상병 황선태(2006/08/17 14:54:49)

잘 읽었습니다.

무한소에 대한 미학적인 견해는 주위에서 접해온 의견과 반대 성향의 것이라 흥미롭게 읽을 수 있었습니다. 하지만 그 견해를 논하기에 앞서 짚고 넘어갈 문제가 있습니다. 바로 실무한과 가무한의 의미입니다. ‘실무한이 가무한보다 아름답다.’는 견해는 개인의 것이므로 가타부타 말할 성질의 것이 아닙니다. 그러나 실무한과 가무한의 개념 자체가 잘못되었다면, 그것을 짚고 넘어가지 않을 수 없습니다.

위에서 설명하신 가무한은 ‘극한’의 개념에 가깝습니다. 가무한이란 말 자체에서 알 수 있듯이 그것은 ‘진’무한이 아닙니다. 그러나 실무한의 예로 드신 dx, dy(즉 우리가 무한소라 부르는) 것들 역시 가무한이지 실무한이 아니라는 점에서 문제가 발생합니다. 무한소 역시 가무한적 개념이며 극한의 의미와 (어떤 의미에서) 같습니다. 그렇다면 과연 실무한이란 무엇일까 하는 점이 문제로 남게 됩니다. 인류의 역사에서 실무한과의(보통 무한과의) 싸움이 시작된 것은 19세기로 보고, 그 시작을 수학에 있어 미적분학 이후 최대의 업적이라 이르는 ‘집합론’에서 찾습니다. 왜? 왜 집합론 이전에는 실무한을 이야기하지 않았을까? 하는 의문이 드실 겁니다.

실무한이란 실제 무한을 다루는 것입니다. 우리는 그것을 ‘집합’을 통해서 다루고 있습니다. 무한함은 도처에서 발견할 수 있지만 실제 무한은 그럴 수 없습니다. 윗 글에서 예로 든 자연수와 실수의 개수 차이(정확하게는 기수, 혹은 농도cardinal))은 다른 말로 하면 ‘자연수의 집합’의 원소의 개수와 같은 말이며, 그렇게 해서만 우리는 실제 무한을 다룰 수 있습니다.

세상에서 가장 큰 자연수를 생각해보면, 그 수보다 언제나 큰 수가 있습니다. 어떤 수를 생각하더라도 그 수보다 큰 수를 생각할 수 있습니다. 따라서 자연수의 개수는 무한하며, 그것을 센다는 것은 불가능해 보입니다. 그러나 무한한 시간이 주어진다면 그 무한한 자연수를 모두 셀 수 있다는 것이 칸토어에 의해서 알려졌습니다. 하지만 그 센다는 것은 지금까지의 의미와는 무척 다른 것이었습니다. 칸토어가 그것을 가능하게 했던 것은 인간이 수를 셈한다는 것, 그 의미의 본질을 파악하였기 때문입니다. 센다는 것의 의미는 결국 어떤 것을 자연수와의 1대1 대응으로 파악하는 것입니다. 자연수의 개수를 다 세어 몇 개다! 라고 말할 수는 없지만 칸토어는 자연수를 자연수에 1대1 대응 시킬 수 있다는 것을 발견했습니다. 따라서 실무한은 자연수로부터 출발하며, 무한집합의 출발인 자연수 집합의 농도 – 그것을 헤브라이어 알파벳 첫 글자인 알레프를 따서 알레프 제로라 명명하고 무한에 대한 논의를 시작하게 되는데 그것이 바로 칸토어의 집합론(공리적 집합론과 구별하기 위해)의 핵심이며, 실무한 개념의 출발인 것입니다.

힐베르트의 23가지 문제의 첫 번쨰가 바로 연속체 가설인데, 이 연속체 가설 역시 칸토어의 집합론에서 출발한 실무한의 문제이며, 그것의 대략적인 개념은 알레프 제로 다음의 무한의 단계가 과연 연속체인 것일까, 그렇지 않으면 또 다른 어떤 무한의 단계가 존재하는 것인가에 대한 것입니다.

정리하자면, 극한과 무한소는 모두 가무한적 개념이며(무한하다고 생각할 뿐이지 실제로 그것은 존재하지 않는 개념) 실무한이란 그것과 다른 개념이란 것입니다. 무한소(dx)의 제곱은 너무 작기 때문에 의미가 없으므로 무시해도 된다는 것은 수학적 엄밀성과 미학에 맞지 않는 것이며, 논리적으로 문제가 있기 때문에(무한히 작다 = 없다가 아니므로) 무한소는 얼마 전까지만 해도 수학에서 기피되는 개념이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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