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월 122006
 


책마을 번개 후기


참석자 : 김청하, 박종민, 조주현, 주영준, 박진우, 이승일, 이영기, 이훈재, 민경국, 조병윤, 안대섭, 임현종

불참자에게는 어떤 응징을? 헤헷



원래 이 번개는 없었던 일로 묻어버리려고 했습니다만, 11월 11일 정모를 홍보하는 차원에서라도 뒤늦게 지난 번개 후기를 적어봅니다. 저는 지난 8월 책마을 정모에 처음 나갔고, 이번 번개가 책마을 사람들과의 두 번째 만남이었습니다. 이승일씨와 민경국씨와는 초면이었고, 다른 분들과는 두 번째, 종민이랑은 같은 생활관이라 지겹. 하여튼 이런 오프라인 만남, 아직은 서로 그리 익숙치 않을만도 한 사람들이지만, 놀랍게도 술 몇 순배 돌지 않았는데도 금새 막역한 친구들이 됩니다. 신기합니다. 신분만 같을 뿐 저마다 다른 곳에서 다른 일을 하는 사람들이, 이렇게 모일 수 있다는 것도 그렇고, 이런 즐겁고 의미있는 날샘 술자리가 가능한 것도 흐뭇합니다. (허원영-술을 마시는 일에 대하여 http://22.49.3.1/home/?article_srl=7817 참고)

이제는 룰이 되어버린, 모두 나이와 짬밥(!)에 상관없이 편하게 말 놓기, 즉 경어쓰지 않기는 분위기를 더욱 고조시킵니다! 저는 84년생인데, 보통 깍듯이 모셔야 할 선배들에게, 순식간에 맘 편하게, “형! 형은 어떻게 생각해?” 할 수 있으니, 역시 좋습니다.

먹고 마시고, 웃고 고민하고, 토론하고, 공감하고, 듣고만 있다가, 한마디 내뱉고, 피곤하면 쓰러져서 자기도 하고, 돈이 없으면 빌리고, 중간에 떠나기도 하고, 다시 돌아오기도 하고, 화장실을 다녀오면 좌석배치가 바뀌기도 하고, 또 다른 이야기에 귀를 기울이고, 그런 식으로 밤은 깊어갑니다. 안녕하세요, 이훈재입니다. 불과 몇 시간 전에 이렇게 뻘쭘한 자기소개를 했으면서, 새벽이 되어 다음 장소로 이동하느라 거리를 배회할 때, 벌써 우리는 오랜 친구마냥 편안함을 느낍니다.



종민이랑 늑장을 부리다 오후 다섯시인 약속시간에 늦었습니다. 제가 신촌이 홈그라운드임에도, 영기형은 친절하게도 굳이 지하철역까지 마중을 나왔습니다. 그렇게 1차로 저녁식사와 술을 동시에 했던 <명월이네>로 들어갔습니다. 우리가 도착한 것으로 모두 7명이었고, 잠시 후 민경국이 합류, 이번 번개 멤버 8명이 완성됐습니다. 진우랑 주현은 역시 액면가가 높았고, 솔직히 나도 그에 못지 않지만, 종민이랑 함께 연천학파로 묻힐 수 있습니다, 헤헤. 영준이는 형언할 수 없는 주영준스러운, 예술의 극치에 다다른 찌질함과 결연함이 뭉쳐진 주제에 후드티를 입고 있었습니다. 영기형은 편한 바지에 편한 남방을 입었는데, 지난 정모 후기에서 헤그리드다, 백재현이다 뭐 여러가지 말이 있었지만, 역시 신문사 대주필스러운 내외공의 포스가 느껴졌습니다, 노련하고 듬직한 그런. 가장 궁금했던 처음 보게 된 승일이형은 김현동만큼 꽃미남이었지만, 원숙한 느낌에다가 묵직하게 정돈된 목소리로, 그냥 딱 교수님이었습니다. 권기범의 뒤를 이어 독서후기계를 이끄는 민경국은 모범생스러운 권기범과 다르게 털털하게 스타일리쉬한 연극인의 외모, 구체적으로 조명과 무대디자인에 열정을 불태우는 모습이 묻어났습니다.

맛있게 밥과 술로 배를 채우며 담소를 나누는 와중에, 책마을 촌장 임청하는 아무리 연락을 해도 깜깜무소식이었습니다. ‘자유’에 관한 논의로 근 3개월간 책마을을 풍요롭게 한 두 주인공을 만나, 술잔을 기울이며 글에서 못한 뒷얘기나 솔직담백한 이야기를 듣고자 했지만, 아쉬웠습니다. 하지만 주영준 화백의 작품집을, 실물로 감상하게 되어 정말 기뻤습니다. “나한테 그림 팔아라”, “이거 어제 그린 건데, 색연필로 칠하고 그 위에 맥주부어서 수채물감처럼 됐다.”, “너 화가해라.”, 점점 즐거워졌습니다.

막걸리 무제한의 <포석정>의 구석탱이로 이동한 뒤에는, 좀더 진지한 이야기로 다들 시끌벅적, 조곤조곤거렸습니다. 온라인에서 하기엔 시/공간적으로 어려운 이야기들, 사적인 이야기나 묵직한 이야기들을 술과 함께 거침없이 나눴습니다. 광고학도인 종민이는 마찬가지로 광고학도인 진우에게, 자본주의에 비판적 시각을 갖고서 자본주의의 첨병인 광고에 투신한다면, 너무 무거운 짐을 지고 뛰는 거 아니냐, 과연 전력질주 할 수 있을 것인가, 우린 좋은 광고를 만들 수 있을까. 이런 질문을 던졌습니다. 영준이가 대답하고, 그 쪽 테이블에서 이런저런 이야기, 전역 필진 김형진의 이야기 등으로 이어졌는데, 종민이가 자세히 적어준답니다. 주영준, 민경국, 조주현, 박진우, 박종민 등이 무언가 많은 이야기를 했던 거 같습니다, 서로의 글에 대해서라든지, 문학이야기라든지, 흥미진진해보였습니다. 역시 종갑이나 다른 분이 자세히 적어줄겁니다.

제가 앉은 쪽에서는 우선 승일이형을 중심으로 “자유”에 대한 이야기를 했습니다. 주영준 쪽 테이블까지 전체가 다같이 이야기해보려는 마음에, 저는 “인간에게 자유의지가 있나 없나하는 문제는 결국 우리가 의지를 통해 세상을 이상적인 방향으로 변화시킬 수 있느냐 하는 문제랑도 결부되는 중요한 문제가 아닐까?” 이런, 중요하지만 꽤나 진부한 물음을 던졌습니다. 그러나 영준이가 잠깐 신념의 사회학도스러운 한차례 발언을 하고, 신념을 전제로 행동하기보다는 자꾸 회의하고 진실을 갈구하는 사이언승일형과의 차이가 느껴졌습니다. 결국 다시 테이블별로 하던 얘기를 신나게 계속해나갔습니다.

마음과 뇌, 정신과 육체의 문제와 관련해서 “유심론”, “유물론”, “동일론” 과 같은 원론적인 이야기도 했습니다. 이 분야의 통칭 <쉬운문제>–특정 정신활동이 뇌의 특정부위와 관련이 있음을 알아내는 일 따위–와 <어려운문제>–그런 뇌 속 물리현상이 우리의 정신작용과 동일한 것이라고 판단할 수 있는가, 그렇다면 우리의 자유의지는 어디에서 찾을 수 있는가? — 이야기도 나왔습니다. 책마을에서 승일이형이 언급했던 환원주의자 Dennett 교수 같은 경우에는 쉬운문제들이 조낸 많을 뿐, 어려운문제는 없다는 입장이라는 것, 우리가 그의 말을 믿거나 말거나, 당장 참-거짓을 밝힐 수는 없으며 어쨌든 쉬운문제들을 꾸준히 해결해나가야만 한다는 것에 동의했습니다. 양자역학에 대한 승일이형의 얘기를 듣고나니, 우리가 뇌가 결정론적인지를 알기 위해 측정을 하는순간, 중첩상태는 어느 한 쪽으로 무너지게 되고, 그런 양자역학적 시각에서 우리가 객관적 자유를 긍정할 수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이것은 신비주의스러운 복잡계/카오스 이론에 기대는 것도 아니며, 현재의 예측불가능성을 핑계로 긍정하는 것도 아닙니다. 양자역학은 수학적으로 매우 말끔하고, 평소에 박수영이한테 들은바에 의하면 실제 물리적실험을 통한 결과로도 입증되는 강력한 이론임에 분명합니다.

그렇지만 현상학적 자유를 떠올려보면, 현실적으로 객관적자유와 연결고리가 그리 분명해보이지 않습니다. 저는 우리가 살아가는 현대사회가 여전히 분명 뉴턴역학과 과학기술혁명에 기초를 두고 있지 않나, 당장 우리가 쓰는 컴퓨터는 양자역학적 해석없이 예측가능한 결정론적세계 안에서 우리에게 충분한 편의를 제공하고 있습니다. 산업혁명과 그 부산물 속에서 우리가 겪는 현상학적 자유의 문제가, 양자역학이라는 새 패러다임에 의해 어떤 식으로든 영향을 받기 위해서는, 어떤 의미에서 유물론적인, 물적 변화가 있어야 하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영기형과 승일이형이, 다소 엘리트주의처럼 들릴 지 모르지만- 하고 운을 떼며, 결국 세계관은 교육에 의해 끊임없이 재생산되고, 이런 이론적인 논의가 정치/사회/경제/예술 등 사회 전분야에 점점 스며드는 식이라는, 원론적인 말을 했습니다. 저는 워낙 공학적이고 실용적인 데 관심이 있어서인지, 양자역학이 돈을 가져다줄까? 이런 싹둑없는 질문이나 했습니다, 푸핫.

줄곧 듣고 있던 영기형은 경제학의 복잡성 이야기를 하다가, 누가 물었더라, 하여튼 왜 공무원이 되려 하는가? 질문에 대한 대답을 조리있게 했습니다. 자세한 건 생략하고 인상깊은 한마디는, “난 불명확한 권력은 믿지않아.” 나중에 종민이랑 같이 생각해보니, 이 때 영준이한테도 물어볼 걸 그랬습니다. 입버릇처럼 교육공무원이네 교육부장관해야겠네 하는데 그냥하는 농담인지 어쩐지 말입니다. 하여튼 영기형을 중심으로 승일이형이랑 셋이서 얘기하다가 문득 영기형이 급한 일이 생겨서 떠났습니다.

그리고나서는 민경국이 우리 테이블로 와서 연극이야기, 구체적으로는 조명이야기를 했습니다. 승일이형이랑 저는 생소한 분야에 대해서 이런저런 질문을 해가며 즐겁게 들었습니다. 연극에서 조명의 위상에 대한 이야기라든지, 표현에 있어서 언어의 한계라든지, 대사없는 표현, 음악의 역할 등등의 이야기가 있었습니다. “직관”을 둘러싼 인식의 한계 문제와 관련해서, 셋이서 그럼에도 어쨌든 “이성”의 중요성에 공감했습니다. 선과 악의 개념에 관하여, 선의 대척점에 악이 오롯이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선이 점점 옅어지는 그라데이션의 어느 지점에서 우리가 편의상 어느 지점에서 악을 정해버리는 것이라고, 마찬가지로 “직관” 역시 그것이 이성을 완전히 부정해버리는 것으로 정의되는 순간, 우리는 그것을 절대 (이성적으로) 증명할 수 없다는 얘기였습니다. 희석씨가 그리워지는 순간이었죠. 그리고 뭐, 셋이서 삶의 자세에 관하여, 우린 모두 조금씩 관심사는 다르지만, 얼척없는 출세욕이나 공명심에 사로잡혀 사는 건 좀 문제라는 이야기라든지 (사실 이것보다는 훨씬 폼나게 말했습니다. 예를들어, 인류의 지식에 발톱의 때만큼이라도 보탬이 될 수 있을지 없을지도 모르지만 꿋꿋이 하루하루를 채워간다. 내가 조명으로 비추는 곳을 관객이 보든 말든, 꿋꿋이 비춘다. 식으로) 세계관에 대한 이야기나, 개인적인 얘기 등등 하여튼 많은 얘기를 나눴습니다.



물론 이런 토나오는 이야기만 한 건 분명 아닙니다. 더 기억에 남고, 결국 모두가 유쾌해진건 종민이의 완전 개. 자폭 때문이었습니다. 주영준보다 훨씬 찌질한 그의 연애담에 우리는 모두 포복절도, 그러나 웃을 수만은 없는 슬픈 이야기가 너무 절절히 들리더랍니다. 종민이는 벌써 몇 년이 지난 일에 대하여, 자기가 전화를 걸었던 시분초 까지 정확하게 기억하고 있는, 황당한 재능을 보여주었습니다. 그리고 부대 후임으로써 그가 너무 측은해서, 저도 일부러 컨셉을 잡아 자폭해보기로 결심하게 됐습니다. 그러니까 절대 제가 원래 그런 놈이거나 그런 건 아닙니다. 모두 분위기 띄우기위한 컨셉일 뿐. 사실 제가 무슨 얘길 해봐야 종민이보다 더 하겠나 싶어서 술술 늘어놓았는데, 제엔장.


더불어 포석정에서 나오기 직전에 벌어진 주영준과 이승일의 정치적 운동에 관한 불꽃튀는 논쟁도 참 인상적이었습니다. 상술하기가 귀찮은데, 종민이한테 맡깁니다.



포석정을 나와서 신촌거리를 헤매는데, 추석이라고 들어갈 술집이 없어서 난감했습니다. 신촌이 홈그라운드인 사람들이 많았는데 이런 상황에 놓이니, 다들 자기집 안마당에서 푸대접 당하는 느낌이라, 쪽팔리기도 하고, 골목을 몇 바퀴 배회하면서 드는 생각이라곤, 우리 진짜 이번 번개는 없었던 걸로 합시다. 풋. 전역한 김모달같은 또다른 신촌가이드가 있었더라면, 좋은 데로 안내했을지도 모른다는 아쉬움이 남았습니다. 이때 경국씨가 갔죠 아마?


아무튼 싼 데는 다 문닫고 비싼 술집만 열었던데, 이자까야에 안착하여, 맥주에 맛난 안주를 먹으며 하나둘씩 죽어가는 가운데 또 소소한 이야기를 나눴습니다. 주영준이 민중가요를 부르며 죽어갔던 것도 인상적이었고, 조주현이 메탈음악이야기를 신나게 하는 가운데 박종민도 점점 죽어갔고, 주현, 승일, 진우랑 책마을 사람들 여럿 뒷담화도 좀 깠고, 하하 역시 뒷담화는 재밌습니다. 주영준은 화장실에 들어가서 나올 생각을 안 하는 것이, 아무래도 거기서 잠들었나봅니다. 진우의 해군 이야기, 무시무시한 바다 생활, 배멀미나 파도의 공포에 관한 이야기 같은 것도 들었습니다. 꽤 빡세겠구나 하는 생각을 잠깐 했습니다만, 완전 말년 진우의 회고담 따위야, 아직 두 자리수 병장에 불과한데다가 최전방에 있는 제게 적합한 감정은 “부러움”이라는 걸 이내 깨달았습니다. 진우는 늘 자기 속내를 속시원히 드러내지 않는 모양이지만, 전역하면 히치콕부터 해서 영화를 조낸 보겠다는, 그런 얘기 정도는 해줬습니다. 화장실을 갔다와서 보니 진우랑 승일이형이 “어떻게 믿을 수 있니?” 하며 종교이야기를 재밌게 나누고 있는 것 같았는데, 조주현도 죽었고 해서, 저도 잠깐 눈을 붙였다가 일어났습니다.

그렇게해서 기념사진을 찍고, 지하철 역까지 가서 모두 해산했습니다.

종민이네 가서 잤고, 원래 계획은, 영화 타짜를 보자, 김혜수가 죽인다는데, 였지만
주구장창 잤습니다. 그러다가 짬뽕 국물로 해장하고 복귀했습니다.

지친 몸을 끌고 복귀하는 여정에는, 이런 주영준식의 미친 듯 퍼먹고 날새 조낸 달리기 식의 번개나 정모는 쫌 아니라는 생각이 들었지만, 복귀 후 찬물로 샤워를 정갈히하고 나니까, 생각이 제대로 돌아왔습니다.

역시 참 알차고 즐거운, 소중한 만남이었습니다. 괜한 여자애한테 찝쩍거리고 돈 쥘알하는 것 보다야, 춤도 못 추면서 음흉한 마음으로 클럽가서 부비적거리는 것보다야, 나이트 폐할 때 즈음에 문 앞에서 하이에나처럼 배회하는 것보다야, 아님 방 구석에서 야식이나 시켜놓고 키보드 두들기는 것보다야, 비교도 할 수 없을 만큼 소중한 만남 아니겠습니까.

새로운 만남을 원하십니까. 진짜 조금만 용기를 내면 됩니다. 일단 나오세요. 그럼 나머지는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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