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월 252006
 

진리란 무엇일까 2006-09-25 20:52:42

만약 진리의 목적이 실재를 충실히 재구성하는 데 있다고 한다면, 일단 진리는 실재가 아니다. 실재가 정의상 인간으로부터 독립적인데 반해, 진리는 언제나 담론 또는 표상의 질서에 속하기 때문이다. 철학적 탐구의 본질적 부분이라고 할 수 있는 진리는 하나의 사실이나 사물이 아니다. 여기서 우리는 진리에 접근할 수 있는 조건과, 참된 판단의 기준에 관한 문제에 부딪친다. 그리고 그 문제를 푸는데 있어서 우리들 각각은 어떤 당위나 가치를 갖고 있는 것 같다. 이것은 우리의 고유성향일지도 모르고 학습의 영향일지도 모르지만, ‘진리’를 둘러싼 태도, ‘진리’에 대한 접근 방식에는 차이가 있음이 분명하다.

  가령 플라톤의 철학은 진리 탐구에 관련해 세가지 관념을 제시한다. (수학정석책에서 집합론에만 때가 타듯, 서양철학사에서도 플라톤 부분 까지는 그래도 많이 봤군요. 젠장할)

1) 인간의 이성과 인식능력에 대한 긍정 : 참된 진리에 도달하려는 인간의 노력은 성공할 수 있다.
2) 재구성의 진리 : 진리를 말한다는 것은 전혀 낯선 어떤 것을 말하는 것이 아니다.  진리를 배우는 것은 빈 그릇을 채우는 것이 아니다. 그것은 자신의 밑바닥에서 진리를 재발견하는 것이다. 즉, 우리가 이미 알고 있었던 지식이나 사실을 바탕으로 잊혀진 것들을 재구성한 것이 진리라는 의미다.
3) 항구성과 보편성의 진리 : 진리는 항구성과 보편성을 통해서 정의되며, 따라서 상대성이나 변덕과 혼동해서는 안된다.

  서양의 철학사는 대략 이런 베이스 위에서 자라왔다고 할 수 있다.

  그런데 철학사를 훑어보다보면, 사람들은 진리를 일종의 상응 또는 일치로서, 즉 정신과 실재의 일치로서 정의해 온 것 같다. (이런 걸 진리상응설이라 부른다고 한다.) 예를들어 “비가 온다.”는 명제는 실제 비가 올 때에만 참인 것이다. 이 같은 정의는 필연적으로 비교적 최근의 사상적 경향과 맞닿아 있지 않을까. 즉, 진리는 실재의 성질이 아니라 언어의 성질인 것이 되버린다. ‘참’과 ‘거짓’은 사물이 아닌 명제에 적용되는 개념이다. 사실,  일치의 개념은 명제나 믿음이 일치해야 하는 그 사실이나 언어로부터 독립적이어야 함을 전제로 해야한다. 그러나 세계에 대해 말하려는 모든 시도는 이미 세계에 대한 하나의 해석이 아닌가.

  물론 진리를 이렇게 규정하는 것에 모두가 찬성하진 않는다. 진리를 (논리적)’정합성’에 의해 정의한다면, 예를 들어 하나의 과학적 이론은 그것이 사실들에 일치할 때가 아니라, 그 이론을 구성하고 있는 명제들이 서로 정합적일 때, 즉 서로 양립할 수 있을 때 참이다. 즉, 명제들 사이의 상호모순이 없고 일관적이어야 한다. 그러나 이 정의도 문제가 있다. 어떤 이론을 구성하는 명제들이 정합적이어야 한다는 것은, 그 이론이 참이라는 사실의 필요조건이지 충분조건은 아니다. 그러니까 우리의 개념들, 명제들이 서로 정합적이면서도 실재와는 모순될 수 있는 것이다.

  나의 작업은 정확히 이런 고민들 사이에 놓여있다. 나는 우리의 믿음이 실재와 일치할 수 있다고 믿고 있고, 그걸 가능케하는 작업은 위 모든 노력의 총합 그 이상을 끊임없이 시도하는 데 있다고 생각한다. 진리상응설을 기초로 다채롭게 세울 수 있는 여러 개의 가설 진리(주1 참고)는, 우선 그 진리 자체로 정합성을 갖추어야하겠고, 엄격한 과학적 방법을 통해 실재와 괴리되지 않음이 증명되어야 한다. 여기서 주의해야할 것은, 하나의 믿음이 사실들과 일치한다는 것은, 실용주의의 입장처럼 실재에 대해 효과적으로 행위할 수 있도록 해 준다는 의미가 아니라는 점이다. 물론 사유가 행위능력을 증가시킨다는 것은 분명한 사실이다. 그러나 실용주의는 진리의 규칙을 성공에 두고 있다는 점에서 문제가 있다. 진리의 규칙은 성공이 아닌 증명의 방법에서 찾아야 한다. 검증되지 않는 진리는 의미가 없다.

 

 


주1. 여기서 가설은 매우 중요한 문제라고 생각한다. 가설은, ‘복잡한 물리-수학의 법칙을 바탕으로, 그것과 일치하는 실재를 애써 찾아내어 억지로 적용하려드는 것’, ‘지극히 주관적인 경험과 판단이나 직관에만 의존하여 법칙을 끌어내려하는 것’ 등 을 초월한 그야말로 ‘자유주의’의 입장에서 얻어질 필요가 있다. 우리는 실재를 관찰해야하며 직관이든 추론이든 이성이든 감성이든 총출동시켜, 그야말로 ‘삶’을 사는 것으로 좋은 가설을 얻을 수 있다고 생각한다.

 


부록 : 논증과 관련된 몇 가지 용어 정리

<추론>

“몇 개의 증거를 바탕으로 하여 어떤 사실이 성립되어 있음을 미루어 추측하는 일.”

추리라고도 한다. 전통적 논리학에서는 논증을 추리라 하고, 이것을 직접추리와 간접추리로 나누었다.

직접추리란, 예컨대 ‘미치광이가 아닌 천재가 있다’에서 ‘모든 천재가 미치광이라고 할 수는 없다’를 유도해 내는 것과 같은 것으로, 하나의 판단을 전제로 하고 다른 한 판단을 결론으로 하는 일이다.

간접추리란, 주로 삼단논법을 말한다. 그러나 추리를 하는 마음의 움직임이 그대로 논증으로 나타나 있는가 어떤가는 의문이므로 현대논리학에서는 추리라는 말은 별로 쓰이지 않는다.


<실증, 실증주의>

“(논리나 관념에 의하지 않고) 실물이나 사실에 근거하여 증명함, 또는 그에 따른 증거. “
“철학의 방법이 과학의 방법과 다른 것이 아님을 주장하는 철학적인 입장”
“과학으로 얻어지는 지식의 총체 이외에 참된 지식은 없다고 하는 입장”
“오로지 검증이 가능한 증거에 의지하여 여러 가지 문제를 풀려고 하는 입장”

등드르등등. 내가 들어 본 정의는 위와 같다.

실증주의라는 이름은 자연과학의 방법을 철학에 적용하려고 하였던 생시몽에서 비롯되었고, 콩트가 확립하였다고 한다. 그 연원은 영국의 경험론과 프랑스의 계몽주의 유물론에 있다지만, 배경에는 자연과학의 급속한 발달과 공업 사회의 성립이 있다.

<반증>

어떤 주장에 대하여 그것을 부정할 증거를 드는 일, 또는 그 증거.
 

<예증>

  실례(實例)를 들어 증명함. 또는 증거로 드는 예.


으… 알 듯 말 듯합니다

이런 분야에는 워낙 먹통이라..

실용주의가 진리의 규칙을 성공에 두고 있다는 건 ‘ 진리와 실재와의 일치 여부’를 진리의 규칙으로 삼았다는 뜻인가요?

 긁적긁적

부디 저 같은 문외한도 좀 알 수 있게 약간의 해설을 해주시면….
2006-09-25 21:17:35  

병장 이훈재
 한컴사전을 빌어보면,

실용-주의(實用主義)[—의/—이]
??철학? 19세기 후반 이후 미국을 중심으로, 실제 결과가 진리를 판단하는 기준이라고 주장하는 철학 사상. 행동을 중시하며, 사고나 관념의 진리성은 실험적인 검증을 통하여 객관적으로 타당한 것이어야 한다는 주장으로, 제임스, 듀이 등이 대표적이다. ≒실제주의?프래그머티즘.

아마 내 글이 구려서 전달이 잘 안됐을겁니다. 내가 다시 읽어봐도 (한컴사전을 찾은 뒤 보니 더욱더) 오히려 왠지 실용주의를 긍정하는 것으로 읽힐 수 있겠네요. (사전을 찾아보며 글을 써야겠음) 간단히 부연설명하면, 실용주의 입장에만 따른다면 우리는 위에 언급한 진리의 항구성, 보편성에서 요원해진다는 것입니다. 과학연구를 빗대어 생각해보면, 마치 ‘이론’의 중요성을 간과하는 것과 같달까요. 수많은 아이디어로서의 가설을 실험을 통해 검증만해내는 것으로는, 우리는 파편화된, 행동에 유용한 단순 사실을 얻을 순 있지만, 진리에 접근해가고 있다고 보기는 힘들 것입니다.

2006-09-25 21:38:30  

상병 이승일
 잘 읽었습니다. 훈재씨의 진지하고도 순수한 지성이 잘 느껴지는 것 같습니다.
제가 현재 이 분야를 전공하고 있다는 사소한 사실에 기대어 첨언해보자면,  지금 언급하신 내용들 – 즉 진리론- 을 다루는 분야는 흔히 논리철학(혹은 철학적 논리학)이라고 불리는 영미철학의 분야이고,  이 분야에 종사하는 사람들 중 진리정합론이나 진리 합의론, 혹은 실용주의적 진리론을 진지하게 받아드리는 사람은 거의 존재하지 않습니다. (진리 정합론이나 진리 합의론은 20세기 초반부터 중반까지 매우 유행했던 생각이고, 현대의 일반인들의 마음에 가장 그럴싸하게 보이는 이론이기도 합니다.) 이러한 경향에는 여러가지 이유들이 있겠지만, 가장 큰 영향력을 미친 것은 “진리의 의미론적 개념과 의미론의 기초” 라는 타르스키Tarski의 논문입니다. 보통 논문 한편으로 철학의 흐름이 바뀌는 경우는 흔하지 않은데, 바로 그렇기 때문에 이 논문이 매우 가치있게 평가받곤 합니다.  의미론은 기본적으로는 진리대응설의 아이디어에 기초한 것이지만, 그 구체적인 형식은 훨씬 엄밀하고 그래서 또한 복잡하기도 합니다.
 이 논문은 현재 번역된게 없어서 읽으려면 영어로 읽을 수밖에 없어요. 연대 도서관 인터넷 홈페이지에서 학술정보데이터베이스에 들어가서 Stor 로 검색하면 찾을 수 있습니다. 사실 이 논문을 제가 일병 때 번역을 하고 있었어요. 한 3분의 1정도밖에 못했는데, 만약 나중에라도 번역을 다 하게되면 드릴게요.  대충 주제가 어떤 것인지, 맨 앞의 서론 부분 번역한 것만 올려보겠습니다.




2006-09-25 21:24:16  

병장 이훈재
 우워. 정말 감사합니다. 제 사유의 깊이나 폭도 승일씨 덕분에 굉장한 진전이 있을 것 같아요. 저는 이 분야 전공이 아니지만, lab에서 제 손으로 개구린 컴퓨터프로그램 짜고 실험설계해서, SPSS가 다 해주는 통계처리를 통해 정말 보잘 것없는 단순한 사실을 얻어내는 연구를 하며, 이게 무슨 의미인지, 내가 인류의 지성에 일말의 보탬이 되는 것인지 많은 고민을 하게 됐거든요. 확실히 진리정합론이나 진리대응설 어느 쪽이든 마음에 걸리고 잘 이해가 되지 않는 부분이 있습니다. 이건 솔직히 상당부분 제 지적수준의 문제때문에 독해의 어려움에 기인한 거라고 생각됩니다만, 이 주제에 관한 승일씨의 생각, 그리고 말씀하신 타르스키의 논문에 대한 소개가 정말 궁금합니다.
2006-09-25 21:45:32  

병장 엄보운
 두 청년의 진지한 논의가 진심으로 아름답게 보이네요. 본문과 댓글 모두, 잘 읽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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