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월 142004
 













조선 시대 제문(祭文) 감상



: 여성을 중심으로







연세대학교



심리학과 2학년



이훈재











과목명 : 2004-1 인문한문



교수명 : 황수연



제출일 : 2004-05-14











1. 여는 말







  우리가 발 디딘 현 시대의 변화의 속도와 내용이 아무리 빠르고 많아도, 변함없는 것들은 여전히 많다. 그 중 하나가 바로 죽음이다. 인간 한계를 극복하기 위한 부단한 노력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죽음은 우리를 옥죄고 있다. 이별, 공포, 불안, 절망, 상처 등 인간 보편의 정서들도 그 중심에는 분명 죽음의 문제를 두고 있다.



  최근에는 망자에 대한 추모나 그 슬픔의 표현이 좀 더 직설적인 감성적이고 신체적인 표현으로 나타나고 있는 것 같다. 물론 논란이 있을 수 있는 문제이지만, 일반적으로 조선 시대 우리 조상에 대한 일반적 느낌은 감정의 직접적 표현을 자제하고 억지로 소리내어 우는 (哭) 것과 같은 부자연스러운 모습으로 상상된다. 점잖은 선비나 유교 사상의 느낌은 감정은 배제하고 형식에 집착하는 것으로 종종 비난을 받기도 한다.



  그러나 예(禮)의 본질이 형식과 실질의 조화에 있듯, 과거 우리 조상의 초상문화는 단순히 형식에 치우친 것이 아니었다. 수많은 제문과 그 내용을 통해 알 수 있듯 오히려 제사를 통해 훨씬 자주 반복적으로 죽은 사람을 회상하고 기리고, 관련한 추억을 떠올리는 계기였다. 그것이 잘 드러난 것이 과거의 제문들로, 생애를 시간 순서대로 읊은 것에 지나지 않는 최근의 형식적인 제문들과는 질적으로 달랐다.



  이번 조선 시대 제문 감상을 통해, 조상들에 대한 오해도 풀고 인간 보편의 감정을 재확인하는 계기로 삼았다. 배우자, 연인, 자녀, 친척, 친구 등 한 사람에게 있어, 진정 소중한 사람의 죽음은 얼마나 큰 슬픔인가? 또, 남아 선호 사상이라는 인습을 현재까지 남겨왔다는 점에서 늘 비판의 대상이 되어 온 조선 시대 사대부. 그들이 여성을 대상으로 과연 어떤 제문을 작성했을까?







2. 감상 및 분석



  총 6개의 제문을 감상했다. 김창협(1651~1708)의 祭亡媒文 “다시는 너를 볼 수 없겠지”, 박지원(1737~1805)의 伯媒贈貞夫人朴氏墓誌銘 “새벽달은 누님의 눈썹 같았네”, 이덕무(1741~1793)의 祭媒徐妻文 “우리 형제는 넷이었는데”, 김종직(1431~1492) 祭亡妻淑人文 “우리 딸이 시집 갈 땐”, 이하곤(1677~1724)의 哭鳳惠文 “바람이 문풍지를 흔들던 날”, 강정일당(1772~1832)의 殤女瘡誌 “이 마음을 헤아리시라” 였다.







1) 형식적 측면



 ① 시작과 끝의 관용구



  제문의 기본 형식을 맞추기 위한 것 같은 기본적인 내용이 공통적으로 등장하는 것을 볼 수 있었다. 즉, 첫 부분에서는 제문을 올리는 날짜, 올리는 사람, 죽은 사람, 죽은 일시, 묻힌 곳, 죽은 이의 간략한 가족사항, 특징을 소개해놓았다. “유세차~”로 시작하는 제문 낭독을 들은 적이 있는데, 원문을 통해 확인해 본 결과 김창협과 이하곤의 제문에서도 維歲次를 찾을 수 있어 반가웠다. “영전에 고한다.”, “술과 음식을 차려” 와 같은 글귀도 관용적으로 첫 부분에 쓰임을 알 수 있었다. — 첫 부분이 아니면 뒷부분에라도 꼭 나온다. —







  예) 신유년(1681) 2월 을유삭 초이틀 병술, 둘째 오라비 창협은 슬픔을 머금고 눈물을 참으며 죽은 누이 이씨의 부인 영전에 영결을 고한다. /  유인의 이름은 아무개이니 반남 반씨다. 그의 아우 지원이 묘지명을 쓴다. 유인은 열다섯에 덕수 이택모 백규에게 시집가서 딸 하나 아들 둘을 두었는데, 신묘년 9월 1일에 세상을 뜨니 나이가 마흔셋이다. 지아비 선산이 아곡이니 이곳 서향의 언덕에 장사지내려 한다 / 우리 형제 4남매 중 내가 너보다 여섯 살이 많으니 / 아무 달 아무 날 지아비 김종직은 삼가 맑은 술과 시절 음식을 약간 갖추어 슬픔에 겨워 망실 조씨 숙인의 영전에 고하오. / 병술년(1706) 2월 상사일은 망녀 봉혜를 묻은 다음날이다. 그의 아비는 떡과 고기와 과일을 대충 마련해 놓고 글을 지어 아이의 무덤 앞에서 곡하노라. / 아아, 여기는 파평 윤관영의 어려서 죽은 딸이 묻혀 있는 곳이다. 그 이름은 계숙이고 어미는 강씨이다. 아이는 갑술 8월 29일에 약재 탄원 댁에서 태어났다.







  한편 끝 부분에는 尙饗 으로 끝나는 형식적인 것 말고도, 자신의 감정을 글로 다 할 수 없는 것을 안타까워하는 글귀가 으레 들어간다. 실컷 장문으로 감정을 드러내놓고는 마지막에는 예의상 적는 관용적 표현인 것이다. 또 공통적으로 하늘이나 불특정의 제3자를 원망하는 듯한 목소리로 끝을 맺는 편이다. 이제 어찌 하나, 통곡이 끊이질 않는다, 또는 위와 같은 제문을 썼음을 알리는 듯한 어투가 등장한다. 어느 정도 제사에 참여한 사람들에게 낭독을 통해 들려주는 것을 염두해 두었다고 불 수 있겠다.



  



 ② 반복되는 감탄사



  한문의 경우 글을 통해 특별히 감정을 세심하게 표현할 수단이 없기 때문에, 자연물이나 여타 신체부위와 관련한 비유적 표현을 통해 간접적으로 감정을 드러내는 것을 알 수 있다. 이러한 표현들은 간접적이기 때문에 절제된 아름다움 속에서 더욱 애절하게 느껴지기도 한다.



  그런데 이런 애틋한 분위기 속에서 감정적으로 격양, 폭발, 분출과 같은 강한 느낌을 전해 주는 역할을 하는 것이 바로 “감탄사” 라고 생각한다. 비록 그 종류가 많은 것 같진 않지만 주기적으로 등장하여 형식미를 보여주기도 하고, 분위기가 고조되는 부분에서는 반복적으로 등장하거나 뭉쳐서 등장하여 감정의 절정을 표현한다.



  嗚呼哀哉 : 아아 슬프다! , 悲夫悲夫 痛矣痛矣 : 슬프고 슬프구나! 가슴이 미어지는구나! (김창협의 제문에서 반복적, 주기적으로 등장, 특히 각 문단의 끝 부분에서) 이덕무의 제문에서는 嗚呼哀哉 가 거의 문단의 시작을 알리는 역할을 하고 있었다.



  제문의 말미에서는 감탄사가 아니더라도 의문문 형식의 문장이 자주 등장하여 격양된 감정을 토로하는 경향이다.







2) 내용적 측면



 ① 과거의 자세한 회상



  죽었을 당시의 정황은 물론 죽은 이의 특징이나 기억에 남는 일화를 매우 상세하게 적고 있는 것을 볼 수 있었다. 김창협의 제문에서 보듯 누이가 죽었을 때 자신이 어디에 있었고, 그래서 죽음을 보지 못하고 뒤늦게 달려갔던 슬픔이 매우 실감나게 표현되어 있다. 이덕무의 글에서도 누이가 죽기까지의 과정을 구체적인 날짜, 그 날의 날씨까지 함께 적는 등 매우 자세하다. [유인은 죽을 쑤고 서모는 머리를 짚어 주었으며 몸종이 말동무를 해주었지만 손을 저으며 귀찮아하였다.] 가히 극본의 지시문을 방불케하는 자세함이다. 다른 제문에서도 이렇게 특정 장면에 대한 클로즈업이 나타나는 것으로 보아 이는 어느 정도 당대의 문체적 특징이었다고 생각한다.



  죽은 이의 특징 역시 빠지지 않고 자세히 서술된다. 탄생이나 혼인, 가족관계에 관한 내용으로 간단한 프로필을 적는가 하면 개인적인 평가나 기억도 적혀있다. 흥미로운 것은 당연하겠지만, 대부분 좋은 평가 일색이라는 것이다. 죽은 사람들은 한결 같이 자질이 뛰어났고 수려한 용모를 지녔다. 효성이나 행실이나 어느 것 하나 빠지지 않고 모든 미덕을 갖추었다. 사실은 전란과 같은 불가피한 상황으로 죽지 않은 이상 건강에 문제가 있었거나 정신적 스트레스가 심했거나 등의 여러 가지 문제가 많은 사람이었을 것 같다. 가난과 같은 환경의 탓을 하지 않을 수 없지만 일정 부문 죽은 사람의 책임도 분명 있을 법 하다. 하지만 비록 원수더라도 죽었을 경우 욕하지 않는 우리네 정서와 예의를 생각하면, 제문을 올리는 사람의 입장에서는 온갖 미사여구를 동원해서라도 그를 기리고 싶을 것이라는 심정에 공감을 한다.



  그 밖에 누님이 시집가던 날 심술을 부렸던 일을 떠올리며 눈물짓는 박지원의 제문은 사뭇 낭만적인 느낌도 들게 한다.



  



② 죽은 사람과 대화



  제문이라는 형식상의 특징에 바탕을 둔 것으로, 과거에 대한 회상에 이어지는 죽은 뒤의 자신의 생활과 죽은 사람이 관심을 두었던 내용에 대해서 자세하게 알려주는 것에서 잘 살펴볼 수 있는 부분이다.



  청자가 이미 이승의 사람이 아닌데 무슨 말을 들을 수 있겠는가? 하지만 화자도 이미 그것을 알고 있고, 그럼에도 불구하고 제사상에 죽은 자의 혼백이 와 있다고 가정하고 대꾸없는 혼잣말, 혼자 대화를 하는 것은 그 비극성과 애절함을 극에 달하게 만든다. 가령 김종직의 망실문에서 죽은 부인에게 당신의 흔적인 이부자리, 세숫대야, 빗, 식기 등을 그대로 남겨두고 유택을 조성하겠다고 말하는 부분에서 우리는 감동하지 않을 수 없다. 아버지가 건강하게 잘 계시며 정원도 있고 노복도 많은데 당신이 없으니 무슨 소용이냐며 호소하기도 한다.



  이덕무의 글에서 “우리가 언제 하루라도 정의를 잃은 적이 있었느냐?” 고 물으며 “컴컴한 흙구덩이에 차마 어찌 옥 같은 너를 묻으랴.” 라고 부르짖는 것은 처절하기 까지 하다. 죽은 사람의 동생이 이사를 간 것, 장가를 간 일을 모두 전해주면서 살아 있었다면 좋았을 것이라고 안타까워하는 모습이 애틋하다.







③ 의외의 내용



  오빠, 남동생, 부인, 아버지의 입장에서 여성을 대상으로 작성된 제문을 살펴보았기 때문에 감상 전부터 조선시대 여성의 사회적 지위나 생활상에 자연스럽게 집중을 하였다. 조선시대에 관한 본래의 생각을 지지하는 내용도 많이 찾아 볼 수 있었지만, 그것은 포괄적이고 대외적인 하나의 이데올로기였고 실생활에서는 세부적인 부분에서 남녀를 막론하고 하나의 인간으로 그 주변 사람의 사랑을 받았음을 알 수 있었다. 물론 여기서 제문을 작성한 사대부들의 이중성을 꼬집어 볼 수도 있다. 하지만 남녀차별이 유교의 근본이념이 아니라는 것을 상기해 볼 때 “수신제가치국평천하” 라는 말에서와 같이 가정을 사회의 기본단위로 매우 중요하게 여기었던 유교적 이념이 사회 안정을 위해서 각 가정의 부부관계나 가족관계를 강력하게 통제하기를 원했던 지배층의 정치적 도구로 사용되었기 때문이라고 볼 수 있을 것이다.



  본 감상문에서 남성을 대상으로 하는 제문과 구체적으로 비교하진 않았지만, 죽은 사람에 대한 표현의 정도에 있어서 특별히 남녀의 차이가 느껴지지는 않았다. [백 사람이 조금씩 나이를 덜어 죽은 사람에게 더해주는 것은 옛사람도 원했던 바이니, 만약 우리 여섯 형제로 하여금 각각 자기 나이를 덜어 너의 목숨과 바꿀 수 있다면 어찌 터럭만큼이라도 아까워하겠느냐.] 와 같은 표현에서 볼 수 있듯 “여성”에 대한 글이라고 특별히 표현을 자제하고 있지는 않다. 부인에 대한 사랑과 그리움도 기대와는 다르게 굉장히 거침없이 표현되어 있다. 부인이 남편을 따른다는 개념만이 있었을 듯한 당대에 [죽은 자는 그렇게 하거니와 살아 남은 자는 누구를 따른단 말이오?] 와 같은 의외의 표현도 등장한다.



  김창협의 제문 말미의 [너는 평서 시서를 익히지는 않았지만 글 읽는 소리를 좋아했었지. 그래서 나는 매양 너를 위해 글을 읽어 네가 듣도록 하지 않았더냐?] 이덕무의 제문에서 [단연과 분묵도 좌우로 나누었으며, 꽃을 따도 그랬단다. 내가 경사를 읽을 적에는 옆에 앉아 따라 읽으며 재잘거렸으며, 삼강오륜에 대해서는 같이 그 뜻을 품어보기도 했었지.]에서와 같이 여성도 글과 학문에 관심을 뒀을 뿐만 아니라 그것을 엄격하게 금지하지는 않았던 것으로 보인다. 오히려 사대부 집안의 여성의 경우 어깨 너머로 혹은 형제 자매의 배려를 통해 상당 수준의 학식을 갖추었을 것으로 예상할 수 있다.



  놀라운 것은 아예 남녀의 문제에 대하여 직접적으로 언급하면서 이데올로기에 정면으로 배치되는 내용도 심심치않게 등장한다는 것이었다. 이는 이덕무의 제문 중[형은 아우의 죽음을 애처롭게 여기고 아우는 형의 죽음을 슬퍼하는 것이 당연한 이치이니 여기에서는 누구도 예외가 아니겠지.], 이하곤의 제문 중 [너의 외증조부 월당공께서 편지를 보내, “자네는 아들을 바라다가 딸을 얻었는데 무엇이 그렇게도 기쁜가?” 하셨기에, 나는 도연명의 “딸아이가 사내는 아니라도, 마음을 달래주기엔 없는 것보단 낫다오."란 시구를 들어 답시를 올렸단다.] 에 잘 드러나있다. 죽음에 있어서는 남녀의 차이 없이 슬프다는 말, 없는 것보다는 낫다라고 말하여 비록 소극적이기는 하지만 차별적 정서보다는 그 인간적 정을 한껏 드러낸 부분이 인상적이다. 또 강정일당의 제문 중 [이 아이가 마지막에 태어났기에 잘 자라주어 사내아이처럼 사랑하려고 하였다.] 도 비슷한 맥락이다.



  물론 여성에 대한 일반적 시각을 그대로 드러내어 칭찬한 부분도 많다. 김창협의 제문 중 [고운 행실은 여칙에 부합하였으니], [살아서는 시부모님을 찾아 뵙지 못했고]  이덕무의 제문 중 [시집온 지 11년 동안, 말이 적고 성품이 고요하여, 요란하지 않고 단아하므로] 등이 그것이다. 남성에 대한 제문이 그의 학식이나 업적에 치중되는 것과 대조가 되는 부분이다. 여성에게는 사회적 지위나 역할이 주어지지 않았기 때문에 필연적인 결과라고 볼 수 있지만 그것이 한편으로는 유교 이념이 가지고 있는 남녀 역할 분담론의 한계를 잘 드러낸 것으로 보아야 할 것이다. 아무리 진정한 유교의 정신을 논하더라도 문제가 있는 부분은 반드시 지적되어야 할 것이다.







3. 맺음말



  6개의 제문을 통해서 형식적 측면에서 제문의 특징으로 시작과 끝의 관용구, 반복되는 감탄사 등을 살펴보았고, 내용적 측면에서도 과거에 대한 자세한 회상, 죽은 사람과의 대화, 여성에 대한 의외의 내용 등을 찾아볼 수 있었다. 제문을 여러 번 읽는 가운데 전체적으로 절제미 속에서 잔잔하고 깊이가 더해지는 슬픔을 느낄 수 있었다. 죽은 이를 글로 추억하는 선조들의 지혜를 본 받을 필요가 있을 듯 하다. 기회가 된다면 다음에는 보다 많은 제문을 시대별, 작가별로 나누어 살펴보거나 남성에 대한 제문과 직접 비교해보고 싶다.







4. 참고 자료



이승수 편역, 『옥 같은 너를 어이 묻으랴』, 태학사, 2003







5. 첨부 : 원문자료 (번역본)







김창협(1651~1708)의 祭亡媒文 “다시는 너를 볼 수 없겠지”







  신유년(1681) 2월 을유삭 초이틀 병술, 둘째 오라비 창협은 슬픔을 머금고 눈물을 참으며 죽은 누이 이씨의 부인 영전에 영결을 고한다.



아아 슬프다! 네가 죽은지 벌써 석 달이나 되었구나. 처음에는 아득하기만 하여 네가 죽었는지 귀신이 되었는지 알 수가 없었단다. 염을 마치고 관 뚜껑을 덮고 한두 달이 지나니 만사 또한 이미 다 끝났더구나. 내 마음 또한 그제서야 슬프기 시작했단다. 하지만 자나깨나 네가 늘 있는 듯하고, 드나들 때에는 늘 너와 마주칠 것 같았지. 찾아도 나타나지 않고 다가가도 보이지 않았지만 우두커니 서서 먼 곳을 바라보면 네가 다시 나타날 것만 같았구나. 분별을 잃은 마음과 어리석은 망상은 떠난 사람이 다시 돌아오기를 기다리고 잠든 사람이 깨어나기를 기다리는 것과 같았지. 그런데 이제 술과 음식을 갖추어 네게 올리고 너의 죽음을 곡하며 너와 영결하게 되었으니, 내 어찌 차마 너의 죽음을 믿어 다시 너를 기다리지 않을 수 있단 말이냐!



  아아 이게 무슨 일이냐? 형제의 정은 손발과 같으니 현명하거나 어리석거나 재주가 있거나 없거나를 떠나 사랑하는 데 사이가 없으니, 장수다복을 사람이면 누군들 바라지 않을 것이며, 죽어 헤어짐을 누군들 애도하지 않으랴만, 오직 나는 네게 보통의 경우 보다 곱절의 정이 있지 않았더냐. 너는 아름다운 자질과 수려한 용모로 효우는 지성에서 나오고 고운 행실은 여칙에 부합하였으니 여러 미덕을 고루 갖추었었지. 또 우리 집안에 태어났으니, 너의 장수를 바라고 너의 복록을 기약한 것이 마치 차용증을 들고 아침저녁으로 빚을 갚으라고 독촉하거나, 좋은 곡식을 심어 놓고 가을을 기다려 두는 것과 같았는데, 이제는 모두가 반대로 되었구나. 부모님이 계셔도 끝까지 봉양하지 못했고, 남편을 섬겼으되 세 해를 채우지 못했구나. 살아서는 시부모님을 찾아 뵙지 못했고 죽어서는 어린 것을 보호하지 못했으니, 사람으로 태어나 극한 참척을 갖추었고 천하에 둘도 없는 궁액을 겪은 것이다. 누구라서 너의 현숙함으로 이렇게까지 운명이 기박할 줄 알았겠느냐? 하늘이냐, 사람이냐, 신이냐, 아니면 귀냐, 너를 이렇게 만든 자가 누구란 말이냐? 슬프다 슬프다, 아 가슴이 미어지는구나!



  우리 형제 일곱 중에서 너는 여섯째였지. 나보다 열네 살이 어리니 이제 너의 나이 나에 비하면 겨우 반 밖에 안 되었구나. 나이를 덜어주는 것이 도리에 맞지는 않지만, 백 사람이 조금씩 나이를 덜어 죽은 사람에게 더해주는 것은 옛사람도 원했던 바이니, 만약 우리 여섯 형제로 하여금 각각 자기 나이를 덜어 너의 목숨과 바꿀 수 있다면 어찌 터럭만큼이라도 아까워하겠느냐. 하지만 하늘이 너 한 사람의 목숨만을 일찍 거두어 우리 형제의 가슴을 이토록 아프게 하는 것은 어찌된 일이냐? 죽이고 살리고 덜고 더해주는 것은 하늘도 어쩌지 못하는 것이란 말이냐? 슬프고 슬프구나! 가슴이 미어지는구나!



  네가 죽었을 때 나는 산사에 있었으므로 아이를 낳고 병이 있었다는 것은 알지 못했구나. 뒤늦게 급보를 듣고 미친 듯이 달려 돌아왔지만 이미 때는 늦었다. 문에 들면서 부르고 온몸을 던져 마루에 오르며 부르짖느라 간장이 다 찢어졌지. 겨우 수십 리를 떨어져 있고 7~8일 보지 못하는 사이에 이렇게 갑자기 영원히 헤어지게 될 줄을 누가 알았겠니? 듣자니 너는 병들었을 때 형제들을 생각하여 여러 번 입밖에 냈으나 큰 형님(김창집)께서는 기휘에 매여 들어와 보지를 못했고, 바로 아래 아우(김창흡)는 멀리 동쪽 산골짝에 있어 모두 만나지를 못했구나. 아아, 살아남은 자의 슬픔은 물론이고, 멀리 가는 너의 혼 또한 머금은 한이 끝이 없겠지. 슬프고 슬프구나! 가슴이 미어지는구나!



  우리 형제들이 부모님의 슬하에 함께 모이지 못한 것도 오래되었다. 아버님께서 남쪽 바닷가에 유배되신 이래로 가족들은 남북 천리 사이에 흩어졌다. 너와 막내는 늘 부모님 곁에 있었지만 나머지 형제들은 각각 오가며 문안을 드렸는데, 이르는 시기가 다르고 모였다가 흩어지는 것이 일정치 않아 끝내 하루에 다 모이지는 못했었지. 이제 다행히 두 어른을 모시고 다시 서울로 돌아왔으니 영원토록 단란하게 전날의 화목함을 회복할까 했었는데, 네가 이렇게 하루아침에 떠나 영원히 다시 모두 모이지 못하게 될 굴을 누가 알았겠니? 슬프고 슬프구나! 가슴이 찢어지는구나!



  오늘 이후로 나는 더 이상 바랄 것이 없다. 아침저녁으로 침전에 문안을 여쭐 때 형제들이 다 모여도 너는 있지 않구나. 아침저녁으로 어른들을 모시고 밥을 먹을 때 형제들은 나란히 앉아 있지만 너는 있지 않구나. 나들이할 때도 너와는 함께 하지 못하는구나. 웃으며 말을 할 때에도 너와는 같이 하지 못하는구나. 죽을 때까지 너를 다시 볼 수는 없겠지. 하늘이여, 아 하늘이시여! 어찌하여 나의 반신을 잘라갔으며, 어찌 차마 나의 삶에서 너를 빼앗아 갈 수 있단 말이냐? 슬프다!



  나와 큰 형님이 백운산(포천에 있음) 아래에서 오두막집을 엮고 살 때 너는 동주(지금의 철원, 김창흡이 은거하던 곳임)에서 험한 길을 넘어와 모였다가 열흘 남짓 머물고는 다시 돌아가곤 했지. 산나물 반찬에 거친 밥을 먹어도 싫어하지 않았고, 깊은 숲 산골짝 시내를 오르내리면서도 싫증낼 줄 몰랐지. 너는 내 소박한 살림을 좋아했고, 나 또한 너의 시원하고 발랄한 성품을 좋아했더랬지. 이제 나는 곧 예전에 살던 동쪽 집으로 돌아가는데, 산은 텅비고 물만 공연히 흐르겠지. 오두막집은 그 모습 그대로이겠지만 예전에 노닐던 곳은 모두 묵은 자취가 되겠지. 나는 이제 어디에 마음을 두어야 하느냐? 슬프고 슬프구나! 가슴이 찢어지는구나,!



  나의 회포는 이루 다 말할 수 없는데 종이를 앞에 놓고 붓을 잡으니 정신이 눌리고 생각이 막혀 글을 지어낼 수가 없구나. 또 애사가 있어 대략 너의 행적을 말하였지만 거기서도 슬픔이 끓어올라 자세하게 말하지 못했단다. 너는 평서 시서를 익히지는 않았지만 글 읽는 소리를 좋아했었지. 그래서 나는 매양 너를 위해 글을 읽어 네가 듣도록 하지 않았더냐? 이제 이 글로 너를 곡하게 되었으니, 아 이게 어찌된 일이냐! 이게 어찌된 일이냐! 슬프다, 아 슬프구나!







박지원(1737~1805)의 伯媒贈貞夫人朴氏墓誌銘 “새벽달은 누님의 눈썹 같았네”







  유인의 이름은 아무개이니 반남 반씨다. 그의 아우 지원이 묘지명을 쓴다. 유인은 열다섯에 덕수 이택모 백규에게 시집가서 딸 하나 아들 둘을 두었는데, 신묘년 9월 1일에 세상을 뜨니 나이가 마흔셋이다. 지아비 선산이 아곡이니 이곳 서향의 언덕에 장사지내려 한다.



  백규가 어진 아내를 잏고 나서 가난하여 살길이 막막하여 어린것들과 계집종 하나, 솥과 그릇, 옷상자와 짐 궤짝을 이끌고 강물에 띄워 산골에 들어가려고 상여와 함께 더불어 떠나가니, 내가 새벽에 두포의 배 가운데서 이를 전송하고 통곡하며 돌아왔다.



  아아, 누님이 시집가던 날 새벽 화장하던 것이 어제 일만 같다. 나는 그때 갓 여덟 살 이었다. 장난으로 누워 발을 구르며 새 신랑의 말투를 흉내내어 더듬거리며 의젓하게 말을 하니, 누님은 그만 부끄러워 빗을 떨구어 내 이마를 맞추었다. 나는 성나 울면서 먹을 분에 뒤섞고, 침으로 거울을 더럽혔다. 그러자 누님은 옥오리 금벌 따위의 패물을 꺼내 달래며 울음을 그치게 하였다. 지금으로부터 스물여덟 해 전의 일이다.



  말을 세워 강 위를 멀리 바라보니, 붉은 명정은 바람에 펄럭거리고 돛대 그림자는 물위에 꿈틀거렸다. 언덕에 이르러 나무를 돌아가더니 가리어져 다시는 볼 수가 없었다. 그런데 강 위 먼 산은 검푸른 것이 마치 누님의 쪽진 머리 같고, 강물 빛은 누님의 화장 거울 같고, 새벽달은 누님의 눈썹 같았다. 그래서 울면서 빗을 떨구던 일을 생각하였다. 유독 어릴 적 일은 또렷하고 또 즐거운 기억이 많은데, 세월은 길어 그 사이에는 언제나 이별의 근심을 괴로워하고 가난과 곤공을 근심하였으니, 덧없기 마치 꿈속과도 같다. 형제로 지낸 날들은 또 어찌 이다지 짧았더란 말인가.







떠나는 이는 두 번 세 번 뒷날의 기약을 남기지만,



외려 보내는 사람의 옷깃을 눈물로 얼룩지게 하네.



조각배는 이제 떠나면 언제 돌아오려나,



보내는 이는 하릴없이 강둑을 뒤로하고 돌아서네.











이덕무(1741~1793)의 祭媒徐妻文 “우리 형제는 넷이었는데”







  우리 형제 4남매 중 내가 너보다 여섯 살이 많으니 나는 신유년(1741)에 태어났고, 너는 정묘년(1747), 네 아우는 무진년(1748)에 태어났다. 공무는 정축(1757)생으로 가장 늦게 태어났다. 아직 아우를 보기 전 아기 적에 아주 예뻤는데, 그때 아장아장 놀던 모습이 아직도 눈에 선하단다. 업어주면 두 어깨에 손을 걸쳤고, 이끌어주면 꼭 두 손을 내밀었단다. 한 개의 떡이라도 절반으로 나누었고 한 알의 과일도 똑같이 갈랐다. 단연과 분묵도 좌우로 나누었으며, 꽃을 따도 그랬단다. 내가 경사를 읽을 적에는 옆에 앉아 따라 읽으며 재잘거렸으며, 삼강오륜에 대해서는 같이 그 뜻을 품어보기도 했었지.



  흉년 든 해에는 끼니를 잇기도 힘들었는데 어머니께서는 병까지 많아 강가 집을 옮겨다녔지. 그때가 을해년(1755)과 병자년(1756)이었구나. 쑥으로 빚은 보리떡과 나물을 버무린 죽을 겨우 목으로 넘겼고, 누런 된장국과 멀건 죽밖에 없었지. 먹다 남은 듯한 비린내 나는 물고기를 계집종이 배에서 주워오면 머리를 맞대고 먹으며 어머니를 위로하였단다. 아버지께서 멀리 계시다가 오랜만에 돌아오시면 안타까워하실까 굶주리던 일을 말하지 않았다. 너무 좋아하다가도 또 나가실까 두려워 옷깃을 잡고 주위를 멤돌았다.



  네 나이 18세에 서씨 집안에 시집갔는데, 서군은 훌륭한 인격에 풍채도 준수하였다. 딸은 아리땁고 사위는 의젓하여 부모님은 몹시 기뻐하셨으나 이듬해 여름에 어머니께서는 세상을 떠나셨다. 우리 형제는 슬퍼 울며 애통한 마음을 폐부에 새기면서도 평소보다도 서로를 아껴주었다.



  네 동생은 상을 마치고 원씨의 아내가 되었는데, 각각 아들 하나씩을 낳아 안고 옛날은 생각하며 슬퍼하였다. 너희들이 그리우면 곧 가서 보곤 했는데, 가엾게도 근래 너는 굶주리고 헐벗어 화로에는 불을 피우지 못하고 소반에는 밥그릇이 오르지 못하였구나. 너는 비록 태연한 척하였으나 얼굴에는 부황기가 있었다. 기침 소리는 목에서 그치지 않았고 담은 어깨벼에 깊이 들었지. 지난 여름에 너를 데려와 약을 먹이는데, 시아버지께서 돌아가셨으므로 곡을 하며 돌아갔었지.



  겨울에 또 병세가 급하여 내가 가서 약을 달여 주고 집으로 데려왔는데, 자리에 누워 피를 토하고 쿨룩거리면서 겨울이 지나고 봄이 되어 거의 한 달이 되었으나 낫지 않았다. 오래 머물러 있을 수 없어 시집으로 돌아갔는데, 살은 빠지고 뼈만 앙상하게 남아 약으로도 부지하기 어려웠다. 늦봄에 다시 돌아왔으나 회복을 기대하기 어려웠다. 아버지께서는 늙어 쇠약한 몸으로도 힘을 다해 간호하였단다. 부엌 살림은 군색하였으나 어육은 반드시 갖추었고, 그 어육을 먹이고자 하여 곁에서 돌보았다. 유인은 죽을 쑤고 서모는 머리를 짚어 주었으며 몸종이 말동무를 해주었지만 손을 저으며 귀찮아하였다.



  너는 죽을 줄 알면서도 마음이 흔들리지 않았다. 네 동생이 와 이별을 하다가 너의 뺨에 눈물을 떨어뜨리니, 너는 말없이 젖은 눈으로 자주 올려보았다. 내 어찌 차마 이 광경을 볼 수 있었겠니? 하늘도 너를 위하여 침침하게 흐렸었지. 서군이 와서 보고는 할 말이 있느냐고 물으니, 할 말이 없다 대답하고 서군에게 저녁밥만 권하였구나.



  6월 3일에 폭우가 쏟아지며 캄캄해졌는데, 저녁부터 아침까지 집안 식구들이 모두 밥을 굶었다. 네가 이를 알고 얼굴을 찡그렸는데, 이 때문에 병세가 더욱 악화되었다. 아이를 집으로 돌려보내자 너는 갑자기 숨을 거두었다. 늙은 어버이는 흐느껴 울며 부자 형제 세 번 곡하였으니, 천하에 지극히 애통한 소리였다. 너는 이제 영원히 잠들었으니 이를 듣느냐, 듣지 못하느냐? 아버지는 예법을 살피고, 유모는 목욕시켜 수의를 입히며, 나와 서군은 염습을 하는데 손이 벌벌 떨리고 이마에 땀이 줄줄 흘렀다. 너의 시집과 우리 집안의 모든 어진 이들이 부의를 내어 장례를 치렀는데, 급히 9일장으로 하여 너의 시댁 선영으로 데려갔다.



  우리 4남매가 각각 한 가지씩 돌아가신 어머니를 닮았는데, 너는 늘씬한 키가 어머니를 닮았고, 나는 어머니의 이마를 닮았으며, 네 동생은 말씨를 닮았고, 공무는 머리 곁은 닮아 각각을 모아보면 어머니를 잃은 그 슬픔을 위로할 수 있더니, 이제 그 늘씬한 모습을 볼 수 없게 되었으니 슬픔을 견딜 수가 없구나.



  내가 너의 집에 가면 너는 늘 반가이 맞았었다. 바느질 품팔아 모아 두었던 돈으로 종을 시켜 술을 받아다가 웃으면서 내 앞에 술상을 놓아주곤 했지. 내가 그 술을 다른 그릇에 조금 따라 너에게 권하면, 너는 그 술을 받곤 했고, 안주는 조금씩 나누어 아중을 먹였지. 이제는 백 번을 가더라도 눈에 보이는 것마다 슬픔을 자아내기만 하겠구나.



  네 아우는 올 가을에 협현으로 이사가는데, 너의 병이 위중하자 더욱 시름에 젖어 그리워했단다. 매년 어머니 기일에는 둘이 와서 참여하였는데, 이번에는 더욱 비통하구나. 너도 다시 일어나지 못하고 네 동생마저 멀리 보냈으니, 명년 어머니 기일에는 두 사람이 모두 없겠지.



  공무는 5월에 기해에서 장가를 들었단다. 사모관대로 예를 마쳤으나 병중에 슬픔을 머금었으니, 신부가 신행 와도 대하기 어렵게 되었구나. 일마다 이렇게 마음을 아프게 하니 아무래도 죽어서나 잊을지 싶구나.



  내 동생이 된 지 38년 동안 우리가 언제 하루라도 정의를 잃은 적이 있었느냐? 서군도 “제게 시집온 지 11년 동안, 말이 적고 성품이 고요하여, 요란하지 않고 단아하므로 편협한 마음과 조급한 행동을 참고 진정할 수 있으며, 동서끼리 서로 화목하여 틈이 없었습니다”고 하더구나. 이와 같은 여자의 품행을 지녔으니 응당 그 후에가 길어야 하건만, 다섯 살 되는 아증이 너와 같은 병을 앓아 누렇게 파리하며 기침하는 것이 마치 너의 얼굴을 보는 것 같다. 그러나 잘 보살펴 길러서 너의 아픔을 위로하려 한다.



  평소 남들이 형제가 몇이냐고 물으면 아무개 아무개 해서 넷이라고 하였더니, 이제는 누가 물어도 넷이라 말할 수 없게 되었구나. 네 몸이 이렇게 굳으니 나는 살을 발라내는 듯 아프구나. 형은 아우의 죽음을 애처롭게 여기고 아우는 형의 죽음을 슬퍼하는 것이 당연한 이치이니 여기에서는 누구도 예외가 아니겠지. 너의 생사를 겪으니 나는 원통할 뿐이란다. 너는 비록 이제 편해졌지만, 내가 죽으면 누가 울어줄 것이냐? 컴컴한 흙구덩이에 차마 어찌 옥 같은 너를 묻으랴. 아 슬프다! 상향







김종직(1431~1492) 祭亡妻淑人文 “우리 딸이 시집 갈 땐”







  아무 달 아무 날 지아비 김종직은 삼가 맑은 술과 시절 음식을 약간 갖추어 슬픔에 겨워 망실 조씨 숙인의 영전에 고하오.



  아아 숙인이여! 나를 어찌 이렇게 빨리 버렸소? 백년의 약속 중 이제 겨우 3분의 1을 채웠을 뿐 아니오. 30년을 짝을 이루어 살다가 하루아침에 이렇게 헤어지니, 지난 일들을 돌이켜보나 어찌 차마 말을 하겠소.



  아아 슬프오! 당신은 명가에서 태어나 어쩌다가 가난한 선비의 아내가 되었소. 품성을 부드럽고 너그러웠지만 그 안에 엄연한 법도가 있었소. 돌아가신 어머니를 공경하여 따랐으며 나이가 들수록 더욱 따스했소. 어머님께서는 늘 “우리 며느리는 배울 점이 많아”라고 말씀하셨지요. 내 누이들하고도 사이가 좋았으니 시누이 올케 사이에도 한번 거스르는 일이 없었소. 마을의 친척들에게도 편협하게 좋아하거나 싫어하지 않았으니, 덕은 이렇게 다 갖추고 있으면서 수명은 어찌 이렇게 갖추지를 못했소?



  아아 슬프오! 내 천성이 졸렬하여 양식이 떨어질 때가 많았는데, 당신 또한 가난을 잘 견디고 이익에 뜻을 두지 않아, 거친 음식과 헤진 옷으로 시종과 다름없이 지냈지요. 제사를 지내고 손님을 접대함에는 위의를 갖추었소. 당신은 특히 음식을 잘 만들어 콩잎국도 맛있었다오. 당신이 옛날 부덕이 뛰어났던 맹광 적씨와 닮았으니 나는 깊이 의지하였다오. 벼슬을 그만두고 산에서 나무하고 물에서 고기를 낚으며 늘그막에 서로 의지하며 여생을 보내려는 계획이 이제 다 이루어져 가는데 이게 웬 일이오?



  아아 슬프오! 당신은 세상에 태어나 온갖 고생과 액을 다 만났소. 한 돌이 못 되어 어머니를 여의어 의증조 내외분이 길러주셨지만, 출가하기까지 여러 차례 의지할 곳을 잃었지요. 여범은 외할머니께 배웠는데 그분마저 돌아가시자 슬픔을 이기지 못했소. 내게 시집와서는 좋은 일 궂은 일이 많았지만, 즐거운 일보다는 어려운 일이 많았지요. 두 번 3년상을 지내는 동안에는 힘써 정성을 다했지요. 나는 도를 듣지 못해 온갖 귀신이 작해하여 2녀 5남을 연이어 잃었으니 당신은 오장이 찢어져 묵은 병이 도졌소.



  아아 슬프오! 옛날 그대가 병을 얻은 것은 아이를 낳다가였소. 풍사와 혈독이 속에서 돌아다녔는데, 10년을 복약하여 쌓인 것을 모두 없앴지요. 가끔 다시 발작하기는 했지만 증세는 대단치 않고, 오래되면 의당 없어져 회복되겠기에 그대로 두고 치료에 힘쓰지 않았는데, 끝내 이 때문에 세상을 마치게 되니, 나는 부끄럽기만 하오.



  아아 슬프오! 당신 아버지는 아직도 정장하게 살아 계시는데 좋은 시절 아름다운 날에 누가 술을 마련할 것이며, 당신이 낳은 두 딸 중 어린것이 방안에 있는데 이 아이들이 시집갈 때 누가 짐을 꾸려줄 것이며, 당신의 아우들은 모두 이름이 높은데 수염을 태워가며 끓인 죽을 누가 맛볼 것이오? 노비들은 뜰에 가득해도 의지할 그늘을 잃었으니 이것저것 불러 시키는 일을 누가 할 것이며, 새로 지은 집에 못도 있고 정원도 있는데 당신이 없으니 누구와 함께 손질한단 말이오.



  아아 슬프오! 적막한 서쪽 집은 당신이 살던 곳이오. 이부자리며 세숫대야며 빗 등속은 마치 당신 살아있을 때처럼 벌려있고, 식기들 또한 그대로 두려하오. 당신은 여러 아이를 낳았어도 끝내 한 아이도 남아있지 않으니, 누가 집상을 하겠소. 아아 다 끝이오! 나는 병을 핑계삼아 1년 동안 상복을 입으려 했는데, 잘못 성은을 입어 약을 내려 치료하게 하시니, 은명을 저버릴 수 없어 서울로 가려 하오. 당신의 장사에는 내 급히 돌아오리다. 이승과 저승은 사이가 없으니 나의 슬픔을 알 것이오.



  아아 슬프오! 미곡 벌에 가레나무 울창하고 옥과엔 두 언덕이 있는데, 그 사이에 안장하려 하오. 당신 어머님과 아들은 두 언덕 동쪽에 있소. 오는 겨울에 당신의 유택을 조성할 것이니, 구천에서 만나 즐거이 보내시오. 죽은 자는 그렇게 하거니와 살아 남은 자는 누구를 따른단 말이오? 술을 부어 고하매 통곡이 끊이질 않는구려. 아아 슬프오!







이하곤(1677~1724)의 哭鳳惠文 “바람이 문풍지를 흔들던 날”







  병술년(1706) 2월 상사일은 망녀 봉혜를 묻은 다음날이다. 그의 아비는 떡과 고기와 과일을 대충 마련해 놓고 글을 지어 아이의 무덤 앞에서 곡하노라.



  아아, 나는 스무 살이 넘도록 자식을 보지 못했는데, 네 엄마 또한 몸이 약해 병치레가 많아 대를 잇지 못할까 걱정이었다. 그러다가 경진년 봄에 네가 처음 태어났단다. 너는 날 때부터 용모가 아름답고 신기가 빼어나 내가 매우 기뻐했으니, 딸을 낳은 아쉬움도 몰랐단다. 너의 외증조부 월당공께서 편지를 보내,



“자네는 아들을 바라다가 딸을 얻었는데 무엇이 그렇게도 기쁜가?” 하셨기에, 나는 도연명의 “딸아이가 사내는 아니라도, 마음을 달래주기엔 없는 것보단 낫다오."란 시구를 들어 답시를 올렸단다.  (후략)







강정일당(1772~1832)의 殤女瘡誌 “이 마음을 헤아리시라”







아아, 여기는 파평 윤관영의 어려서 죽은 딸이 묻혀 있는 곳이다. 그 이름은 계숙이고 어미는 강씨이다. 아이는 갑술 8월 29일에 약재 탄원 댁에서 태어났다. 외모는 반듯하고 머리는 총명하여 난 지 서너 달만에 부모의 얼굴을 알아보았으니, 울다가도 부모를 보면 문득 울음을 그쳤다. 다가가면 방긋방긋 웃고 멀어지면 눈길이 좇아오며 칭얼거리니, 주자가 이른바 “아무 것도 모르는 아이도 아비를 보면 웃는다”는 것인가?



  이 아이보다 앞서 5남 3녀를 낳았는데 모두 미처 말하기도 전에 일찍 죽어서 부모는 엄마 아빠라고 부르는 소리를 들어본 적이 없었다. 이 아이가 마지막에 태어났기에 잘 자라주어 사내아이처럼 사랑하려고 하였다. 그러나 어미가 본디 젖병을 앓아 젖이 나오지 않았다. 겨우 난 지 한 이레에 포대기에 안고 다른 사람에게 가서 젖을 먹이는데, 얻은 몇 방울 젖으로 목숨을 부지해나갔다. 춥고 더운 기후와 멀리 오가는 거리 때문에 미처 그럴 겨를 없이 싸래기죽을 먹이기도 하였다.



  그러다 보니 자연 바깥 기운이 침입하여 위가 상하게 되어 병을 얻게 되었다. 집은 본래 가난하고 때마침 흉년이 겹쳤다. 친구들이 사정을 알고 도와 살리려 하였지만 도움이 계속 이어지기는 어려웠다. 병이 심해져 설사를 하기에 약을 써서 낫기를 바랐으나 한 달이 지나도록 낫지 않아 마침내 구하지 못하고 말았다. 죽은 날이 올해 정월 초나흘이니, 산 기간이라야 1년 미만이다. 광릉에 선산이 있지만 거기까지 가지 못하고 일단 마을 남쪽 언덕 기슭에 얕게 묻었다가 그 달 14일 이곳에 잘 묻어주었다.



  아아, 무릇 혈기 있는 것들은 태어나면 죽게 마련이니 모두 하늘의 명 아닌 것이 없다. 혹 잘못 길러 그 성명을 온전하게 하지 못하는 경우도 있는데 이 또한 하늘의 명이라 할 것이다. 이 아이가 이렇게 일쪽 죽은 것 또한 하늘의 명이니 따질 일이 못 되는가, 아니면 사람의 일이 마땅함을 잃은 것인가? 슬픔에 겨워 버려 두지 못하고 글을 지어 그 사연을 기록하니 이는 마음에 복받치는 정이 있어서라. 바라건대 후세 사람들은 이 마음을 헤아려 밭가는 소로 하여금 밟아 뭉개지 않도록 하시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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