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월 122006
 


살아가는 데는 궁극적인 이유가 없다. 수많은 철학자들과 종교지도자들이 이성과 신이라는 이름 하에 삶을 살아가야만 하는 이유, 그리고 어떻게 살아야만 하는가에 대한 내용과 이유를 만들어왔다. 그러나 나는 그 어떤 것도 우리의 삶을 전체적으로 설명하지도, 전적으로 이롭게 하지도 못한다고 믿는다. 물론 “왜 살아야 하는가?” 이 질문을 마주하는 사람들의 흔한 대답이나 삶의 양상을 정리해 볼 수는 있다.


새내기 :  성공(외적-권력, 금력, 명예) 또는 행복 (내적-상대적, 주관적)을 얻기 위해 산다고 믿는다.


염세주의 : 성공한 다른 사람(더 가진 사람)을 보며, 상대적 행복마저 객관화시키며 “나는 행복할 수 없는가? 그렇다면 내 삶의 의미는?” 하고 자문한다. 아무래도 부정의한 사회, 불공평한 사회일 뿐이다.


허무주의 : 지금껏 (성공 또는 행복의 목표 아래) 열심히 살아왔는데, 그것을 성취한 뒤 이것이 삶의 의미가 아니었던 것 같다고 생각하고 허무에 빠진다.


불가지론 : 태어나고 싶어서 태어났나요? 나의 탄생은 내가 경험 너머의 것인데, 그런 내 삶의 이유를 내가 알 수 있을까요?


쾌락주의 : 삶의 의미를 고민하다가 삶이 다 지나간다. 인생 뭐 있나! 그저 나 기분좋게 재미있게 사는 거지!


실용주의 : 내가 해야 할 일을 해야 하기 때문에, 주위 사람들, 세상에 나는 필요한 사람이기 때문에 산다.


생물학적, 과학적 입장 : 우리는 동물이고 대자연의 일부이기 때문에. 보이지 않는 생존 경쟁, 보이지 않는 본능으로 인해 진화를 거듭해 유전자의 영속성을 위한 개체의 찰나의 삶을 이어갈 뿐이다.


  글쎄, 실용주의든 허무주의든 위의 얼토당토않은 나열보다 훨씬 넓고 깊은 함의를 지니고 있다는 걸 알고 있다. 하지만 공부가 부족한 얼치기인 내 입장에서 볼 적에, 마찬가지로 동서고금의 사상과 친하지 않은 생활인들의 자기 고백은 대략 위와 같이 정리되지 않을까. 역시 어떤 이유이든 완전하지는 못하다는 느낌이 들고만다. 그러면 대체 왜 살아야 하냐고. 나보다 더 못한 처지에 있는 사람을 생각하고 열심히 살자, 못 해본 일이 많아 억울하니 살자, 태어났으니 살자 등 저마다의 변명이 참 많다.
 
  아- 결국 인간 삶의 목적이란 딱 하나로 깔끔하게 떨어질 수 없는 것인가? 실존주의 철학에서 말하는 “(인간)실존은 본질에 선행한다”를 생각하면 본래 인간에겐 목적이 없다. 뭔가를 기록해야했기 때문에 연필과 종이가 있게 되었고, 멀리 가야했기 때문에 자동차와 기차가 있게 되었지만, 인간은 왜 태어났는지 알 수 없다. 하지만 사르트르가 “인간은 목적이 없기에 자유롭다.” 라고 했듯 인간은 반드시 해야만 하는 목적이 없으니까 뭐든지 할 수 있다고도 할 수 있겠다. 그리고 삶의 이유를 묻는 질문 자체가 안고 있는 한계를 얼마간 인정한다하더라도, 이런 고민이 말장난에서 그치지 않기 위해서는 역시 삶이란 것, 그것의 가능성을 자의든 타의든 어떻게든 끌고 가야만 한다, 아니 누구든 살아가는 이들은 누구나, 끌고 가고 있다. 스스로의 선택에 맡겨버리는 것은 편리하다. 삶의 이유에 대해 각기 다른 대답을 하듯, 아쉬움이 남을 뿐.


  나는 우울증을 비롯한 많은 마음의 병의 원인이 주로 선천적이거나 만성적인 환경요인에 있다고 생각한다. 그리고 그런 원인에서든 아님 책상 앞에서 너무 오래 앉아 궁상을 떨다 갑작스레 우울증에 빠졌든 간에 ‘삶’에 이렇게 열려있는 가능성과 선택의 순간들이 있기 때문에, 마땅한 삶의 이유를 찾지 못하고 고민하고 두려워하는 사람들을 목격해왔다. 그리고 그런 경우 (나를 포함하여) 제법 구체적인 처방전이랍시고 (지금 갖고 있는 것 중) 도움이 될 만한 걸 추려보면 아래와 같다. 많은 분들의 처방전 제공을 바라며.
 
 
——사유를 통한 정면돌파를 원하신다면 다음 두 글을 참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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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전략) 사람이란 자기가 속한 삶의 범주 속에서 행복을 추구한다는 것이며, 어떤 거시적인 담론이 한 필부가 하루 노동 후 느낀 보람보다 훨씬 적은 행복을 가져다 주는 때도 있다는 것입니다. 그는 적어도 그의 가족을 위해 헌신했고, 직장에서 동료들과 부딪히며 보람을 나누었으며, 작지만 무언가를 이루었다는 성취감에 뿌듯한 걸음으로 집으로 향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이렇듯, 내가 내 삶에 있어서 만족감을 느끼고 의욕을 느끼는 데는 어떤 거대한 운명론이나 삶의 절대 의미론 따위는 필요치 않습니다. 오히려 내 삶이, 또는 내가 속한 이 작은 환경이 얼마나 관심을 필요로 하는지, 그 안에서 얻어지는 행복이 얼마나 소중하고 당당한 것인지 이해하려는 노력이 절대적인 운명론을 찾아나서는 것보다 더 시급한 것일 수도 있습니다. 하지만 만약 당장 자신의 삶을 돌아보지 못하고 거시적인 담론을 추구한다면 그건 한낮 지적인 유희나 공상에 불과한 것일 수 있습니다. 그리고 그것이 집착으로 변하고 벗어날 수 없는 허무로 이어진다면 우리는 당장 우리 스스로의 삶의 토대를 바라보는 게 나을 수도 있다고 봅니다. 어쩌면 우리가 처해 있는 작은 삶의 범주가 너무 버겁고 힘들어서 좀더 넓고 거대한 담론으로 우리의 눈을 옮겨가고 있는 것인지도 모르기 때문입니다. 인생이 덧없음을 한탄하기 이전에, 왜 내 인생이 덧없어졌는가 스스로에게 물어보십시오. 당장 내게 주어진 이 삶의 토대, 삶의 범주는 어떻게 생겼으며, 내가 그것을 애써 외면하고 있지는 않은가, 그것을 하잖게 보고 있지는 않은가 돌아보십시오. 그리고 그 안에서 내가 할 수 있는 작은 최선들을 찾고 만끽하십시오. 일일 수도 있고, 사람과의 관계일 수도 있습니다. 아니면 그 둘 다일 수도 있고요. 그러나 어느덧 그로 인해 자신의 삶이 충분히 ‘의미있어져’ 있는 것을 발견할지도 모르겠습니다. 그리고 그때 스스로를 채찍질하는 수단으로서, 다시 말해, 안주하는 삶보다 조금 더 원대한 바다로 나아가는 삶을 이루기 위해 보다 보편적이고 궁극적인 삶의 의미를 추구해보십시오. 그래야만, 그제서야 삶의 의미에 대한 허탈한 물음이 실제론 얼마나 충만하고 즐거운 물음이 될 수 있는지 알게 되시리라 믿습니다.
—— 김혜성 씨의 글, (http://egalite.new21.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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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즘 흔히 접하게 되는 사고방식 중에 하나는, 과거 여러 시대에 사람들이 관심을 갖고 열정을 쏟았던 것들을 죽 훑어본 뒤에 이 세상에는 삶의 보람으로 삼을 만한 것이 더 이상 남아있지 않다고 생각하는 사람을 현명하게 여기는 것이다. 역사상 다른 많은 시대에도 이런 생각을 하는 사람들이 많았다. 이렇게 생각하는 사람이야말로 참으로 불행한 사람이다. 하지만 그들은 자신들의 불행을 자랑거리로 여기고 불행의 원인을 우주의 본질로 돌려버린다. 그리고 이런 태도야말로 지식인에게 어울리는 유일한 이성적 태도라고 생각한다.


지적인 수준에서 그를에게 다소 못 미치는 사람들은 불행을 자랑하는 그들의 태도를 보고 그 진실성을 의심한다. 즉, 불행을 즐기고 있는 사람은 결코 불행하지 않다고 생각하는 것이다. 하지만 이러한 견해는 너무 단순하다. 물론 불행한 사람들은 자신을 우월하고 통찰력있는 존재라고 여기며 이러한 자부심에서 약간이나마 보상을 얻는다. 그러나 그 정도의 보상으로는 행복의 상실감을 충분히 메울 수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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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버트란드 러셀, 행복의 정복Conquest of Happiness p. 27 <이유없이 불행한 당신>


——즉각실행을 통한 효과를 원한다면 다음 두 찌라시를 참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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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생활에 질서를 부여하자
2. 용모를 단정하게 가꾸자
3. 절망감이 생기더라도 하던 일을 포기하지 말자
4. 감정, 특히 분노와 같은 감정이 치받칠 때 억누르지 말자.
5. 날마다 무언가 새로운 것을 배우고 공부해 보자.
6. 할 수 있는 한 많은 도전을 해보자.
7. 일정 기간 동안만 자기 문제에 대해 얘기하지 말고 지내 보자.
8. 주변의 인간 관계에 성실하자.
9. 자신의 삶을 다른 사람과 비교하지 말자.
10.인생이라는 커다란 강물에 흘러가는 뗏목처럼 그렇게 스쳐지나는 모든 계기를 포착하자.


——- 조지 와인버그의 ‘있는 그대로 바라보면 사는 법이 달라진다’ 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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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어떤 사람도 사상도 맘에 들지가 않고, 만사가 뒤엉켜 그저 모든게 짜증날 때,
제발 그것때문에 몸과 마음, 내 주변을 망치지 말아야 해. 해결책은 간단.


안 씻어서 그래, 샤워하거나 아님 머리만이라도 감자.
소화가 안 되서 그래, 똥 싸.
너무 굶어서 그래, 질펀하게 섹스 한 판…


삶의 여유와 관용은 머리에서 오지 않는다.


——- 이훈재, 2004년 ‘새해 결심’ 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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