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월 292003
 

연세대학교, 118년의 과거와 그보다 긴 미래 사이에서










사학입문


담당교수 : 이상의




김찬규/인문


주지윤/영문


신봉승/인문


이훈재/인문




2003년 4월 29일 화요일








               




                        동양을 향하여


 18세기 전반의 대표적인 계몽사상가인 볼테르는 “모든 면에서 교훈을 얻고 싶다면, 예술의 요람인 동양으로 눈을 돌리라”라고 말하였다. 그런데 두 세대 후인 1800년 전후에 활동한 헤겔은 “아시아는 정체된 사회. 그 중에서도 중국은 정체된 사회의 표본”이라고 동양에 대하여 독설을 퍼부었다. 볼테르와 헤겔은 서양인의 동양에 대한 인식의 전환을 상징적으로 보여주고 있는 것이다.


 19세기의 ‘매우 진보적인 사상가, 학자’였던 마르크스마저 “대영제국은 전근대의 질곡에 빠져 있는 아시아인을 각성시킬 책무가 있다”라는 어구로 그의 ‘아시아관’을 상징적으로 보여주었다. 19세기는 그런 시대였다. 보수적인 사람에서 진보적인 사람까지 거의 모두가 ‘역사는 발전한다’고 생각하였고, 유일하게 근대화에 성공한 서구 세력이 비서구권을 ‘각성’시키는 것은 ‘의무’라고 생각하던 시대였다. 그리고 이러한 사고 속에서 제국주의는 ‘침략’이 아니라 ‘계몽’이 되어버린다. 선교사를 비롯한 많은 서구인들이 우리나라를 비롯한 동아시아 국가들에 들어와 각종 계몽활동을 벌였고, 현지인들에게 환영과 함께 반발을 받았던 것도 그러한 시대적 흐름에서 이해될 수 있다.




                거대한 역사 속의 연세대학교   -서양과 동양의 연결점


 그리고 1900년을 전후한 시기에, 우리나라가 근대화와 식민화의 격랑 속에 있을 때, 연세대학교는 만들어지고 있었다.


 1885년 광혜원에서 1915년 조선기독교학교에 이르는 기간 동안, 알렌, 에비슨, 세브란스, 언더우드 등 미국과 영국에서 온 여러 인물들이 연세대학교의 기초를 닦는데 기여하였다. 그들의 뜻은 숭고하였다. 그들은 우리가 살고 있는 이 땅에 서구의 학문을 소개하고 그 씨앗을 심으려고 노력하였다. 그리고 동시에 연세대학교의 개교는 ‘서세동점(西勢東漸)’이라는 당시의 역사적 흐름에서 벗어날 수는 없다.






총 론 (전체적인 참고..너무 자세해 지는 걸 막으려면 총론만 부분부분 떼어내도 될듯)


첫째는 자연발생의 요인이었다. 당시는 부분적이기는 했으나 정신적인 쇠잔을 면치 못하고 있었는가 하면, 정치.사회,경제면이 혼란했다. 이 때, 일부의 지각있는 지식 층에서는 이를 개혁하여 민족의 문화의 정신을 부흥시킴과 동시에 자강하려는 움직임이 있게 되었다. 이와 같은 교육기관은 정치적 빈곤과 문화적 쇠퇴를 극복하려는 신문화운동의 내재적인 욕구, 구미사조의 아시아 진출과 우리보다도 한 발 앞서 개화된 인방 일본의 근대화과정에서 자극 받아 현저하여졌다.




둘째는 민족지도자의 양성이라는 민족적 요망에서 온 요인이었다. 당시, 우리 민족의 활로를 개척해 줄만한 지도자는 절실히 요구되고 있었다. 특히 일제가 한국을 병탄한 뒤에는 더욱 그러하였다.




세째는 당시는 기독교(신교)의 선교사업이 한국에서도 추진되고 있었다. 선교사업은 선교 이외에도 교육과 의료사업을 통하여 선교대상국의 고통을 덜어주는 일이었기 때문에 근대적인 병원의 개설과 학교설립이 추진되었다.




  위와 같은 시대적 요인과 여건에서 연세의 기틀이 이룩되었다.




연세의 역사는 1885년에 설치된 광혜원의 개설에서 시작된다. 이 광혜원은 북장로교 선교사 알렌이 고종황제의 위촉으로 개원한 왕립 병원이었다. 여기에서는 치료 뿐이 아니라 학생을 선발해서 서양의술을 학습케 하였기 때문이다. 한국 최초의 서양식 병원이 한국 정부와 선교사의 합작으로 이루어졌고, 이울러, 한국에서는 처음으로 서양의술이 교습되었다.


 그 후 광혜원은 제중원으로 개칭되었는데, 이 무렵부터 그 운영에 지장이 있게 되었다. 한국 정부에서 약속된 재정적인 보조가 여의치 못하였는가 하면, 선교사업과 병원경영이 병행되고 있어서 병원의 운영에 여러 가지 결함이 발생한데에서 기인했다.


  이에 북장로교회에서는 병원만을 전담할 청년 의사 에비슨을 파견하게 되었다. 에비슨은 1893년 내한한 후 병원을 정비해서 그 이듬해에는 한국 정부와의 관계를 끊고 선교부에서 전적으로 담당 관리하는 병원.학교로 재조직하였다. 이 때부터 이 기관은 자량의 발전이 시작되었다. 먼저, 제중원 의학교를 두어서 광혜원때부터 행해온 의학교육을 실질화하였고, 미국 실업가인 세브란스의 기부로 근대적인 병원을 신축 (남대문밖 복숭아골 현재 도동) 하있는가 하면, 신교의 각 교파를 망라한 연합재단을 만들어서 병원의 운영과 학교의 교육에 큰 진전을 기약하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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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혜원 설립


 당시 우리 나라는 쇄국정책을 겨우 벗어났으나 아직도 기독교를 엄금하고 있었다. 알렌은 선교사인 체 하지 않고 다만 공사관 의사로서만 행세했었다. 그러던 중 1884년 12월 4일에 갑신정변이 일어났다. 이 날 안국동에 신축한 우정국의 낙성을 축하하기 위해 개화당인 우정국 총판 홍영식이 정부 고관과 각국 공사를 초청하여 대연을 베풀었다. 낙성연이 끝날 무렵 개화당파에서 인가에 불을 지르니 당시 민비의 조카인 수구파의 거두 민영익은 금위대장으로서 우영사와 함께 진화를 하려고 먼저 문 밖으로 나가다가 미리 매복하였던 개화파의 자객들의 칼에 맞아 쓰러지자 당상에 앉았던 내빈들은 놀라서 흩어졌으며 동석하였던 독일인 외무협판 묄렌도르프가 민영익을 자기 공관으로 데려가서 알렌에게 응급왕진을 청하여 알렌이 민영익의 상처를 진료하게 되었다. 상처가 잘 치료되자 1885년 1월 알렌은 민영익으로부터 많은 사례를 받았을 뿐 아니라 정부의 신용을 얻게 되었다. 또 갑신정변 과정에서 부상을 입은 백여명의 청병을 알렌이 치료하여 좋은 효과를 보게 되자 알렌의 명성은 장안에 퍼지기 시작했다.


  알렌은 명성이 높아감에 따라 그의 치료를 받고자 하는 사람들이 늘어가므로 근대식 병원을 개설할 필요성을 느끼게 되어 1885년 1월 22일 미국 공사관 무관 포크 중위를 만나 상의한 다음 그를 통하여 관립병원 설립을 한국정부에 제의하였다.


 포크는 이 문제에 열중하여 수차의 협의를 계속한 결과 한국 정부와 고종도 그 필요성을 인정하고 1885년 이른 봄에 병원 설립을 허가하고 이전의 혜민국,활인국을 혁파하고 그 재원으로서 원래 이윤용의 저택 한성 북부 재동(현 창덕여고 소재지 북쪽) 에 왕립병원 광혜원을 설치하게 되었다. 1885년 4월 10일 개원한 이것이 곧 우리나라 최초의 근대식 병원이었고 왕립병원이며 현 연세의료원의 전신이다.




제중원 의학교


  1885년 4월 10일에 시작한 왕립병원 광혜원은 13일후에 제중원으로 개칭되었으며, 개원 후 환자가 날로 증가하던 중 갑신정변 때 개화파로 참화를 당한 홍영식의 주택이었던 한성 남부 동현(현 을지로 1가 내무부 근처)으로 1887년에 재동에서 이전하여 1904년 남대문 밖 신축 병원이 준공될 때까지 7년간을 이곳에 자리잡았다.


  알렌이 1887년 가을에 워싱턴 주재 한국공사관 고문으로 전직된 뒤 제중원은 북장로회로부터 증파된 선교의사 히론, 빈톤 등에 의해 운영됐다. 그러나 왕립병원의 재정은 정부의 재정난으로 인해 제대로 지불되지 못했고 왕립병원에서의 선교사업은 금지되었기 때문에 운영상의 문제점이 많았다.


  이에 북장로파 선교부에 의해 파송된 젊은 의과대 교수 에비슨은 제중원의 경영을 왕실으로부터 선교부로 이관하는 등의 일대 개혁을 추진하였다.






제중원의학교에서 세브란스의학교로


  제중원의 의학교육은 1899년(광무3년)에 정규의학교로 시작되었으며 1900년에 구한국 정부에 제중원의학교로 등록되었다. 초대 교장으로는 에비슨이 취임하였다. 이것이 우리나라 최초의 의학교인 동시에 최초의 현대식 고등교육 기관인 것이다. 1899년, 에비슨은 휴가차 미국에 돌아가서 뉴욕에서 열린 만국선교사회의에 참석, 한국에서의 근대식 병원의 필요성과 의학교육의 중요성을 역설하였다. 그리고 이에 공감한 실업가이자 자선가인 세브란스가 2만5천달러의 기금을 희사하여 1902년 현 남대문 밖 복숭앗골 (도동)에 기지를 매수하고 병원 신축을 시작하여 1904년 9월 3일에 준공하게 되었다. 세브란스의 공을 기려 병원이름을 세브란스병원이라고 명명하였으니 제중원은 이 때부터 세브란스병원으로 개칭된 것이다.




세브란스 창립 정신


개화정신 – 수천년 동안을 한방의약에만 의존해오다가 최초로 서양의학을 도입.


 기독교 정신 – 많은 사람들을 구제하고 혜택을 주기 위해 현대의학과 기술을 가르칠 학교와 병원이 필요함을 느끼다


 협동정신- 광혜원으로 설립될 때부터 건물 시설과 운영경비를 한국정부가 부담하고 의료기술진용은 미국 장로부선교부에서 담당하는 등 한미협동정신에 입각하였다.




선교사 교장시대에서 한국인 교장시대로…


 1934년 일생을 본교와 한국을 위하여 헌신한 교장 에비슨이 은퇴하고 제 2대 교장으로 한국인이 취임하였다. 그는 수많은 유능한 선교의사가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한국인 교육에는 한국인이라야 적합하다는 뜻에서 그 후임을 오긍선에게 위탁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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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희전문학교 창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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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브란스가 순탄한 노정을 걷고 있을 때, 연희가 창립되었다. 1912년 북감리교대회에서 한국에 지.덕.체의 교육을 표방한 고등교육기관을 설치할 것을 결정한 후, 재한 합중국 각 교파의 연합교육위원회의 찬동을 얻었으나, 대학 설립의 위치문제로 논란을 거듭하는 동안에, 1914년 수 년전부터 북장로교파에서 추진시켜온 경신학교 임시대학과가 설치되었고, 또 한편으로는 북감리교파의 배재학당 임시대학과가 설치되어 학생을 모집하고 있었다. 그러나 1915년 4월에 와서 재한 북감리교파,남감리교파,캐나다장로교파와 북장로교파가 공동관리하에 중앙기독청년회에서 경신학교 대학부의 이름으로 학교경영할 것을 합의하였다. 교장에는 언더우드 목사가 추대되었다. 그리고 학교 설립의 교섭은 대학을 목표로 하였다. 그렇지만 일제 총독정책으로 대학령이 없던 탓으로 학교는 1917년 전문학제로 인가되고 말았다. 학교 당국은 처음의 계획대로 학교의 조직과 구성, 과목만은 대학의 체체로 이루고자 하였으나 총독부의 간섭으로 뜻을 이루지 못했다. 그러나 학과는 문, 리(수물), 상, 농, 신과로 하고 교수도 대학의 교원자격자를 초청하는 등, 독자적인 발전을 다짐했다. 미국 실업가 언더우드의 기부로 현재의 교지를 구입하는 한편 교사의 건축이 착수되었다.




 연세가 시작된 일이 구 한말에서 일제 침략 초기에 있었기 때문에 한국인의 본교에 대한 기대와 신뢰가 컸다. 비록 민족의 독자적인 힘으로 이룩되지는 못하였지만 민족의 숙망을 대표할 수는 있었던 것이다. 그것은 민족의 요구에 의해서, 한편으로는 선교부가 일찍이 의료사업, 서구문화의 전달과 동시에 민족문화를 각성케하여 한국인의 근대화에 이바지했고 한국인의 자강과 독립을 도왔기 때문이다. 여기에서 학교의 운영도 한국인이 경영해야 한다는 정신이 나왔다. 초창기에는 책임자가 부득이하여 선교부에서 파견되었지만 사실상의 운영이 차츰 한국인의 손으로 이관되었다.




연희 설립 이념


연희의 창립은 기독교 정신을 토대로 하여 심오한 학문을 연구하며 고도한 기술을 연마해서 국가와 민족의 지도적 인물을 양성하며 더 나아가 세계인류의 평화와 행복을 위하여 공헌할 수 있는 인재를 길러 내려는데 있다. 만일 종교적 인물만을 양성하려고 하였다면, 신학교를 세움으로써 족하였을 것이다. 그러나 처음부터 연희가 종합대학교를 설립하려고 기도한 것은, 교회 뿐이 아니라 전 민족을 살리고 구원하기에 필요한 인물을 기르기 위함이었다.




연희전문학교와 세브란스의학교의 합동


   1928년에 접어들어, 연희와 세브란스의 합동론이 대두되었다. 연희가 창립되었을 때 세브란스의 에비슨교장이 연희의 부교장으로 되었던 일로 보나, 1916년부터 1934년까지 에비슨이 양교의 교장을 겸임한 일로 보아서도, 불가분의 관계에 있었던 것은 자명한 일이다. 양교는 설립이념과 이사회의 구성에 같은 점이 많았고, 서로의 발전을 기약하기에는 결합하는 것이 좋다는 선교부의 요청에 의한 것이 시발점이었다. 세브란스의 전신인 제중원에서 언더우드가 의학생을 가르쳤고, 또 에비슨이 내한한 후, 세브란스와 연희의 운영을 맡아 보면서 세브란스와 연희의 합동을 위해서 적극 노력하였다. 그러나 이 때의 합동은 당시 일제의 지나친 간섭하에 성취되지 못하다가 8.15 해방이후 양교가 각 선교 본부의 협조를 얻어 다시 논의하게 된 것이다. 그러나 6.25 동란으로 다시 좌절되고 말았다. 이후 합동후의 교명을 정하는 문제로 논의를 벌이다가 1957년 5월 11일 초대 총장을 백낙준으로 하는 ‘연세대학교’로 통합이 이루어졌다. 이로써 연세는 명실공히 종합대학교의 위용을 드러내게 되었다.






















<저항의 역사>




1. 일제하의 학생 운동 – 민족 독립을 위한 투쟁




(1) 3. 1 운동과 연세인의 역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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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 1 운동은 일제의 식민지 지배에 항거하여 일어난 우리 민족의 반제국주의 민족 해방 운동이었다. 이러한 민족적 거사에 우리 연세인들의 참여도 활발했다. 세브란스 병원 사무장 이갑성과 연희 전문 사감이던 박희도는 33인의 민족 대표로 참가했고, 김원벽은 연희 전문의 학생 대표로, 이용설은 세브란스의전 학생 대표로 각각 참가하게 되었다.


특히 기독교 세력의 방대한 세력을 지닌 김원벽의 주도로 학생들은 독립 운동 거사 계획은 단일화 합의에 이르렀다.


1919년 3월 1일 오후 2시 민족 대표 33인이 명월관에 모여 독립선언서를 낭독하고 대한 독립 만세를 삼창한 다음, 축연을 베풀고 주인을 시켜 총독부에 연락토록 했다. 이와 같은 시각에는 민족 대표와 기맥을 상통하던 연전학교 김원벽 등의 지휘에 의하여 독립 선언식에 참가하려고 회집한 학생 4, 5천 여 명이 집합하여 있었다. 이 때 경신 학교 졸업생인 정재용이 감격에 넘치는 감정으로 독립 선언서를 읽었다. 학생들만으로 모였던 군중은 어느새 시민과 지방민으로 가득 찼다. 태극기를 손에 든 수많은 군중은 지휘에 따라 시위를 전개했다. 이러한 시위운동은 오후 6시까지 계속되었으나, 연희 전문학교 부근에서는 학생들이 밤늦도록 해산하지 않고 모여 있었다.


3월 5일은 3월 1일의 독립 만세에 이어 학생들만으로 운동을 일으키기로 되었다. 김원벽이 주축이 되어 일어난 이 운동에서는 총독부의 과격한 탄압으로 수많은 학생이 희생되었다. 김원벽은 헌병과 왜경의 칼에 유혈이 낭자한 상태로 인력거에 쓰러졌고 왜경에 의해 체포되었다. 사태가 점차 심각해지자 총독부는 전국에 휴교를 명했고 이로 인해 연세대학교는 제 1회 졸업식조차 거행하지 못하였다. 학생 대표들이 차례로 학생 주도의 운동을 계획하였지만 김원경의 체포와 왜경의 삼엄한 경계 태세로 인해 난관에 봉착하게 되었다. 하지만 이에 굴하지 않고 검거 되지 않은 학생을 중심으로 세브란스 병원 4층 사진 암실에서 밤마다 등사판으로 독립신문을 간행하는 등 지하 운동은 얼마간 계속되었다.




(2) 6.10 학생 운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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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26년 6월 10일 연희 전문 학생 박하균, 이병립, 이석훈 등의 주동으로 일어난 학생 만세 운동이다. 3. 1 운동 이후 8년 간 일제의 학정과 강압에 억눌렸던 민중의 통분이 융희황제 (순종) 의 인산인을 계기로 분출되어 민족정신의 환기가 일어나길 염원하였다. 삼엄한 경계로 인해 연희 전문 학생 34명이 조기에 체포되는 등 3. 1 운동과 같이 전국적인 규모로 파급되지는 못하였지만 이는 훗날 1927년 광주 학생 운동에 큰 영향을 주었다.




(3) 광주 학생 운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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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 1운동이 발단된 지 10년 만에 1929년 11월 3일. 광주의 한, 일 학생 충돌에서 발단되어 전국적으로 민중 대회로 확대된 사건이 바로 광주 학생 운동이다. 광주에서 우리나라 여학생이 일본 남학생에게 농락당한 것이 발단이 되어 일어난 이 사건은 광주의 시가에서 만세 운동으로 급전하였고, 마침내는 전국적인 학생 만세 운동으로 번졌다. 이러한 영향은 연희 전문에도 파급이 되어 학생들은 적극 성원하며 일제의 살인 정책을 규탄하기에 이르렀다.  연전 학생회는 총회를 열고 동맹 휴학 건의까지 했었다.






2. 해방 후의 학생 운동 – 자유, 민권의 수호를 위한 투쟁




(1) 신탁 통치 반대 운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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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45년 8월 15일 민족 해방이 되자, 당시 혼란을 바로잡고 질서를 회복하고자 좌우익이란 구별 없이 학생들은 <조선학도대>를 조직하였다. 그러나 <모스크바 3상 회의>에서 한국을 5년 간 통치한다는 안이 발표되자 온 국민은 사상적 대립에 관계없이 반탁을 표명했다. 그러나 좌인 단체 측에서 돌연 찬탁을 표명하고 나서자, 이에 격분한 국민들은 반탁 운동을 전개하기에 이르렀다. 결국 좌우익에 구별 없이 결성되었던 <조선 학도대>도 좌우익으로 갈라져 반탁운동에 나선 <전국학생총연맹> 과 찬탁운동을 벌이는 <민주주의 학생통일동맹> 과의 투쟁이 전개되었다. 우리 학교 본교생은 반탁 운동의 선두에 나섰다. 특히 이동원, 김득신을 비롯한 본교생들은 활약한 바가 컸으며 연전 학생회에서는 1946년 1월 2일 행동방침을 결의하였다. 행동 방침의 골자는 신탁 통치 절대 반대와 완전한 독립 주장, 학원의 자유 확보와 학계의 사대주의적 봉건 사상 감척, 전국 학생 운동의 활발한 전개 등이다.


결사적인 대규모의 저항에 미국측은 <신탁 통치를 반대하는 것은 한국민의 자유  의사이다> 라는 입장으로 미. 소 공동회를 끝을 맺고 신탁 통치안도 거두었다.




(2) 4. 19 혁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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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월19일 정오 백양로 출발 혁명시위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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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19. 교수단의 시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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쓰러진 이승만 동상



자유당 정권의 비민주적이고 강압적인 정책 (부산 정치 파동, 사사오입 개헌, 2.4 파동 등, 특히 3.15 정, 부통령 선거에서는 그 부정이 극에 달함) 에 대항하는 움직임이 연세대학교를 중심으로 일어났다. 민주주의를 되살리기 위하여 혁명의 최선봉에 선 것이 바로 진리, 자유를 교훈으로 삼아 온 연세대학교 학생이었던 것이다.


연세대학교 학생 3천 여 명은 4월 19일 12시에 대강당 앞에 자발적으로 모여 평화적인 학생 시위운동에 들어갔다. 서울대학교와 고려대학교 학생들과 함께한 이 시위는 평화로운 의사표시의 자유를 행사하는 것으로서 학생들의 무력 사용은 없었다. 그러나 자유당 경찰은 이 시위 학생들을 무력으로 진압하기 시작했고 사태는 악화되기 시작했다. 무장된 경찰의 무차별 실탄 사격 등 과격한 진압의 결과 우리 대학교 학생인 고 최정규 (의예 2) 군은 목숨을 잃었다. 김흥수 군 (행정학과 3) 은 오른편 상박에 관통상을 입는 등 중상을 입었다. 평화적으로 시위를 벌이던 학생을 강경 대응으로 사망에 이르게 하는 등 당시 상황은 너무나 불안하고 긴장되었다.


시위 운동 후 귀교한 우리 학생들에게 당시 총장 백낙준은 “연세의 아들 딸들아! 너희들이 올바른 소신을 가졌고 그 소신을 발표할 용기를 가진 것을 나는 자랑스럽게 여긴다.” 라는 훈시를 주었다.


그러나 학생 운동의 결과는 미봉적인 해결책을 이끌어 내는 것에 불과했다. 정부는 오히려 비상계엄령을 선포하고 책임지는 자가 아무도 없었다.


이에 격분한 우리 대학교 교수단들은 자진해서 시위를 벌였다. (4월 25일) 당시 대학 교수들의 시위는 대한민국 정부 수립 이후 처음 있었던 일로 획기적이고 충격적인 일이었다. 사회 각계각층에 큰 영향을 미쳤을 뿐만 아니라 특히 당시 대학생들에게 새로운 용기와 자극을 주었다.


다음 날 (4월 26일) 에는 비단 학생과 교수 뿐 아니라 각계각층의 수많은 국민들로 시내가 메워졌다. 수많은 국민이 염원하는 가운데 결국 정치 부정으로 일그러진 독재 자유당 정권은 이승만이 대통령 직을 사임함으로써 그 막을 내렸다. 부정 선거를 인정하고 재선거를 약속함으로써 우리의 주장이 관철되었던 것이다. 투쟁의 역사의 한 정점, 그 불가피한 소용돌이의 바로 중심부에 감연히 뛰어들어, 진리와 자유와 정의의 사도인 우리 연세의 학생들과 교수진들은 그 선두가 되었고 중심으로써 우리 역사상 최초의 민주 혁명이라는 눈부시고 훌룡한 승리를 거둔 것이다. 더 민주적, 자주적 신념에 입각하여 정치 및 사회의 모순 된 제반 문제에 민감한 반응을 보이면서 적극적으로 사회 참여를 시도하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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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 한일 조약 반대 투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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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65 한일 굴욕 수교 반대 (신촌로타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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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일 굴욕 수교 반대 (이대앞)


1963년 정권을 담당한 공화당 정부가 한일 국교 정상화를 위한 한일 회담을 개최하기에 이르자 한일 회담에 임하는 정부의 자세가 굴욕적이라는 것과 함께 한일 회담 반대 학생 데모가 벌어졌다. 1964년 3월 24일 3000여 명의 학생이 시위에 참여한 가운데 우리 학생의 부상도 있었다. 당시 결의문의 골조는 국민 의사를 무시한 매국적인 한일 회담을 중단하고 삼천만의 평화선인 생명선을 포기할 수 없으며 악벌 재벌을 타도하고 민족 자본을 육성할 것과 4, 19 정신에 위배되는 모든 정치적 동을 자제할 것 등 이었다.


1965년 12일 낮 12시 연세대학교 학생 2000여명이 교내 대강당에 모여 한일 회담 성토대회를 벌였다. 연세대학교 총학생회 주최로 열린 이 대회에서는 “민족 주체를 망각하고 1백만 어민의 생명선인 평화선을 포기한 정부의 태도를 규탄하고 한일 회담 가조인의 전반적인 무효 여부를 국민에게 물어보라고 촉구한다.” 는 대정부호 소문과 선언문과 결의문을 채택하였다.


시위 운동의 결과 우리 학교 학생 59명이 연행되었고 이 중 3명이 실제 구속되기도 했다. 이러한 긴박한 사태로 인하여 학교는 1주일간 휴교하였고 한일국교 정상화의 정부 방침이 강행되는 현실에서 당시 학교의 상태는 상당히 불안하였다.




(4) 유신 반대 투쟁 (70년대의 학생 운동)




유신 체제 이전에는 근로 조건 개선 운동 (1970년 11월 13일 평화 시장 재단사 전태일의 분신 자살 사건 이후 전태일 추모식과 아울러 촉발된 민권을 수호하기 위한 운동) , 교련 강화 반대 운동 ( 1971년 대폭 강화된 대학 교련에 저항한 운동) 등이 있었다.


유신 이후 그 반민주성과 독재성에 침묵하고 있던 대학가는 10. 2 시위를 계기로 민주 투쟁의 불이 되살아났다. 이는 10월 유신 이후 최초의 민주 선언이었고 각 대학에 파급 효과도 컸다.


우리 대학에서는 11월 14일 총학생회장이 대강당 채플이 끝날 무렵 [총학생회 선언문]을 발표하였다. 한편 연세 기독교 학생회에서는 학생회관 로비에서 기도회를 갖기도 하였다.  각 학교로 퍼지는 이 열기를 잠재우고자 정부는 에너지 절약을 구실로 조기 방학을 단행했고 시위는 진정되는 기세를 보였다. 그러나 더욱 가열되는 시위를 진압하기 위해 정부는 [긴급조치] 라는 비상 수단 까지 내세웠다.


이로 인하여 우리 학교 학생과 교수가 구속되었다. 구속된 교수, 학생의 석방을 위해 교수 기도회가 열렸고 단식 농성도 단행되었으나 자진해산에 그치고 말았다. 우리 대학교의 자진 휴강 결정으로 인해 구속되었던 교수와 학생은 결국 석방되었다.


10월 25일 채플 직후 우리 학교 학생 1 천여명이 유신 헌법 철폐를 외치며 시위를 벌였고 이를 진압하려던 경찰과 충돌이 있었다. 이는 상당히 크고 격렬했던 학생 시위였으며, 각 대학 파급 효과도 컸다.


10. 25 시위 이후 다시 우리 학교의 학생 운동은 거의 중단되었다. 1979년 10.26 사건으로 유신체제가 막 내리기 한 달 전인 9월 노천 극장에서 연고전 응원 총연습 도중 유신 철폐를 외친 것을 마지막으로 우리 학교 학생들의 반유신 민주화 운동은 끝을 맺었다.






(5) 6월 항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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학우여! - 이한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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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월항쟁 – 이한열 열사 민주국민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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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월 항쟁-최루탄을 쏘지 마라



6월 항쟁이란 1987년 6월 전국적으로 일어났던 민주화시위를 말한다. 그 해 전두환 정권은 국민의 민주화 열망을 억압하고 장기집권을 꾀하였다.


1987년 6월 9일, 1,000여 명의 연세대학교 학생들이 국민평화대행진(6·10대회)을 하루 앞두고 이 대회에 출정하기 위한 연세인 결의대회를 마친 뒤, 정문 앞에서 시위를 벌이던 중 연세대학교 경영학과 2학년에 재학 중이던 이한열이 경찰이 발사한 최루탄을 맞고 쓰러졌다. 그는 바로 병원으로 옮겨져 세브란스병원 중환자실에서 치료를 받았으나, 의식을 회복하지 못한 채 그해 7월 5일 뇌 손상으로 인해 심폐기능이 정지됨으로써 결국 사망하였다.


1986년과 1987년은 학계·문화계·종교계 등 각계각층에서 민주화 열기가 고조되었던 때로, 1987년 5월 18일 박종철 고문 치사 사건의 진상이 밝혀진 직후에 발생한 일이어서 더욱 충격적으로 받아들여졌다. 사후 5일이 지난 7월 9일 ‘애국학생 고 이한열 열사 민주국민장’으로 치러진 영결식에는 학생·시민·정치인과 재야단체 회원 등 총 7만여 명이 참석하였고, 시신은 광주 망월동 5·18묘역에 묻혔다.


1982년 숨진 이한열과 박종철은 14년 만인 2001년에야 권위주의 정권에 항거하다 숨진 민주화 운동 관련자로 결정되어 정부에서 공식적으로 명예를 회복하였다.




6월 10일 국민운동본부는 ‘박종철 고문살인(1987년 1월 14일 서울대생 박종철(朴鍾哲)이 치안본부 남영동 대공분실에서 조사를 받던 중 고문 ·폭행으로 사망한 사건) 은폐조작 규탄 및 민주헌법쟁취 범국민대회’를 개최하여 6월 항쟁의 기폭제가 되었다. 같은 날 노태우가 대통령 후보로 선출되자 전두환 정권에 대한 국민의 저항이 급격히 확산되었다. 15일까지 명동성당농성투쟁, 18일 최루탄추방대회, 26일 민주헌법쟁취대행진에 이르기까지 20여 일간 전국적으로 500여 만 명이 참가하여 반독재민주화를 요구하였다.


이렇게 되자 전두환 정권은 국민의 민주화 요구를 받아들이지 않을 수 없게 되어 민주정의당 대통령 후보 노태우가 직선제개헌과 평화적 정부이양, 대통령선거법 개정, 김대중의 사면복권 등을 주요 내용으로 하는 6 ·29선언을 발표하였다. 6월 항쟁은 전두환정권의 권위주의적 권력유지를 민주세력과 시민의 역량으로 저지시켰다는 점에서 그 의의가 크다. 그러나 직선제 이외에는 이렇다 할 만한 성과를 거두지 못하였다는 점에서 한계를 지닌다.































        연세대학교, 지성의 전당을 향하여   상아탑 안에서, 학술의 역사


연세의 역사가 곧 한국 근현대사라 할 만큼 연세는 우리나라의 근현대 역사와 함께 했다. 이러한 연세의 역사 중심에는 우리 연세를 빛낸 많은 분들이 계시는데 특히나 20세기 초 우리나라의 기둥으로 활약하신 분들이 많다. 우리가 익히 들었던 위당 정인보 선생이나, 외솔 최현배, 윤동주 같은 분들 말고도 국어학계의 큰 별이셨던 한결 김윤경 선생과 실학을 다산의 사상으로 집약하여 조명하셨던 홍이섭 선생, 그리고 비록 월북하기는 하셨으나 우리나라 경제사학 발전에 개척자이셨던 동암 백남운 선생 등 그 외에도 우리가 잘 알지 못하는 많은 분들이 계시다. 연세를 빛내신 분들을 아는 것은 연세의 역사를 아는 것이고, 이는 곧 한국 근현대사를 아는 것이라고 할 때 이분들에 대해서 이해하는 것은 연세인에게는 필수라고 할 수 있다.




위당 정인보


본관 동래. 자 경업. 호는 담원, 미소산인. 아호 위당. 1893년 서울에서 출생. 어려서부터 외삼촌 서병수를 통해 조선 후기 양명학자 이건창 선생의 문하에서 한학을 수학하였다, 1910년 중국으로 망명하여 박은식, 신채호, 신규식, 문일평 선생 등과 함께 동제사를 경성하여 독립운동을 전개하는 한편 동포 계몽에 힘썼다. 양명학에 대한 깊은 이해와 역사에서 정신적 요소를 강조하는 그의 학문관은 이때 기초가 이루어졌다. 귀국 후에는 연희전문, 이화전문, 세브란스의전, 중앙불교전문 등에서 국학 및 동양학을 강의 하면서 ‘국학’의 개념을 정립하였고, 그 연구의 기초를 실학에서 찾아 민족사관의 확립에 주력하였다. 1923년부터는 연희전문의 전임이 되어 조선문학과 한문학 강의를 담당하면서 동양사란 이름 아래 우리 역사를 강의하기도 하였으며, <시대일보> ,<동아일보> 등의 논설위원으로도 활동하였다. 그의 역사연구는 자료정리로부터 시작되었는데, 특히 심혈을 기울인 것은 실학파의 저술이었다. 이를 기반으로 본격적인 역사연구를 진행하여 동아일보에 <오천년간 조선의 얼>을 발표, 민족정기를 일깨웠다. 그는 ‘얼’의 역사관을 통해 신채호의 사학, 나아가 실학파의 학풍을 계승하여 우리 역사의 계통과 민족사의 이해를 바로잡고자 하였다. 오늘날 새로운 말 ‘얼’의 개념 형성은 이 글로 말미암은 것이다. 1935년에는 정약용 서거 100주년을 계기로 안재홍 등과 ≪여유당전서≫를 교열, 간행하는 등 조선학운동을 주도하였고, 조선후기 실학연구의 초석을 마련하였다. 뿐만 아니라 민족사관에 입각한 ≪조선사연구≫를 저술하여 우리 고전연구의 터전을 마련하기도 했다. 또한 외솔 최현배와 더불어 국학의 중심 인물 중의 한명으로서 1930년 문과 교수 논문집 ≪조선어문연구≫ 제 1 집에 <조선문학원류초본> 등을 남겼고, 한문학 강의를 통하여, 한국문학과 한국사에 대한 자주적 해설을 폈다. 일제의 내선일체 정책에 따라 조선어 강좌가 폐지 되자 1938년 연희전문을 사임하고 전북 익산군에 은거 중 광복을 맞았다. 광복 후에는 남조선 민주의원으로 선출되기도 하였으나 곧 탈퇴하고 국학대학의 초대학장을 지냈다. 1950년 6?25 전쟁 때 북한군에게 피랍되었다. 1992년 대한민국 건국훈장이 수여되었다. 실심을 강조한 양명학 연구의 대가였으며 한민족이 주체가 되는역사체계 수립에 노력한 역사학자였다. 저서로는 ≪조선문학원류고≫, ≪양명학연론≫, ≪담원시조집≫ 등이 있고, 1985년에 ≪담원 정인보 전집≫이 발간되었다.




외솔 최현배


1894년 경상남도 울산에서 출생. 1910년부터 주시경 선생의 조선어강습원에서 우리말 글 교육과, 말??얼 삼위일체의 언어관과 민족사상을 익혔다. 1926년에 연희전문에서 강의를 시작, 위당 정인보와 더불어 당시 국학의 중심인물로서 일제에 의한 한민족 말살정책에 맞서 우리의 말과 글을 지키고 갈고 닦아 후세에 길이 전하기에 온갖 정성을 다하였다. 당시의 최현배의 학문적 업적과 민족정신을 나타내는 저서로 민족의 삶을 위한 자각의 필요성을 부르짖은 ≪조선민족갱생의 도≫와, 연세 국학의 위대한 상징적 업적인 ≪우리말본≫이 있으며, <한글맞춤법통일안> 제정에 주도적으로 참여하여 오늘날 문화 민족으로서 과학적인 우리 문자생활의 질서를 잡기도 했다. 1937년 9월에는 일제의 탄압정책으로 소위 흥업구락부사건을 조작하여 민족주의적 반일 교수를 학교에서 추방하는 바람에 서대문 경찰서에 갇혀 3개월 동안 학대와 고문을 받고, 일본 경찰의 강요로 사직서를 쓰고 연희를 물러났으나, 그 후 1941년 5월까지 실직 중에 한글연구를 위한 ≪한글갈≫ 저술에 종사하였다. 조선어학회 창립에 참여하고 1929년 조선어사전편찬위원회 준비위원이 되었으며, 1933년 ‘한글맞춤법통일안’ 제정 등에 참여하는 등 활발한 활동을 전개하던 중 1942년 이른바 조선어학회사건으로 3년간 옥고를 치르고, 1945년 광복과 더불어 출옥했다. 광복 후 미군정청 문교부 편수국장을 2차례나 지냈고, 1954년 연세대학교 교수?문과대학장?부총장을 거쳐 학술원 회원에 선임되었다. 1949년부터 20년간 한글학회 이사장을 지내고, 1957~1968년에는 세종대왕기념사업회 대표이사 등 국어운동의 중심적 인물로 지내며 국어학 연구, 국어정책 수립, 교육학 연구 및 한글운동에 전념하여 많은 처서와 논문을 남겼다. 민주국민 교육을 위한 교과서 편찬을 주도했고, 연희?연세의 교수로서, 한글학회 이사장으로서 일하는 동안 ≪글자의 혁명≫, ≪우리말 존중의 근본 뜻≫, ≪나라 사랑의 길≫, ≪민주주의와 국민도덕≫, ≪나라 건지는 교육≫과 같은 저서를 통한 끊임없는 창의적 연구와 우리말 글 펴기에 진력함으로써, 한글문화창조와 문자의 과학화(기계화)와 한글세대 형성에 앞장섰다. 일제시대 때 우리말과 글로써 민족혼을 일깨웠고, 우리말과 글을 지키고 가꾸고 널리 펴는데 평생을 바쳤던 이라고 할 수 있다.




홍이섭


1914년 서울에서 출생. 1933년 배재고등학교, 1938년 연희전문 문과를 졸업했다. 서울기독교청년회학교 교사로 있으면서 1945년 이후 국학대학, 고려대학 문과대 교수를 역임했다. 1953년 연세대학 문과대 교수가 되었고, 사학과장?문과대학장?동방학연구소장 등의 교내 보직을 맡았다. 연희전문에서 정인보, 최현배, 김윤경, 백낙준과 같은 국학의 선각들에 의해 이어온 연세학풍을 이어 받았고, 역사연구의 실증적 태도의 한계를 강조하여 역사인식과 이해를 중시하였다. 일제하인 1944년에 한국사를 발전적으로 이해하기 위해 일찍이 ≪조선과학사≫를 저술하기도 하였는데 이는 한국의 과학사를 전시대에 걸쳐 종합적으로 정리한 초의 저술이다. 해방 후에는 실학에 몰두하여 정인보 선생의 학문을 계승 발전시켜 1954년 정약용의 문집인 ≪여유당전서≫를 입수하여, 그 연구결과로 ≪정약용의 정치경제사상연구≫를 발표하는 등 실학을 다산의 사상으로 집약하여 조명하였다. 이 연구는 정약용 사상에대한 본격적인 첫 연구성과엿다. 이후 천주교, 식민지시대 연구와 독립운동사 등 근대사 전반에도 관심을 가지면서 이에 관한 여러 연구와 계몽적인 글을 남겼다. 특히 1953년부터는 연세대학 교수로서 후학을 가르치는 한편, 특히 ≪한국사의 방법≫, ≪한국근대사≫, ≪한국정신사≫ 등의 저술을 통하여 일제의 한국식민사 체계를 탈피하기 위한 학문적인 노력을 하였으며, 1960년대 이후에 새로운 민족주의 사학이 등장할 수 있는 기초를 마련하였다. 연세 국학의 선각들이 지녔던 숭고한 정신을 계승하여 국학 연구의 기초를 공고히 다졌다. 1966년 연세대학교에서 문학박사 학위를 받았다.




한결 김윤경


1894년 경기도 광주 출생. 1911년 상동청년학원에 들어가 주시경 선생의 가르침을 받았다. 1913년 졸업하여 마산 청신학원에서 교직생활을 하였다. 1921년에는 스승의 뜻을 이어받기 위해 국어연구학회에 뿌리를 둔 조선어연구회의 창립회원이 되어 우리말글 연구와 정리 보급에 앞장섰다. 1922년 연희전문 문과를 졸업한 뒤 배화여고보의 교원이 되었다. 1926년 일본으로 건너가 1929년 릿교 대학에서 사학과를 졸업하고, 다시 배화여고보의 교원이 되었다. 일제 치하의 우리 젊은이들에게 말 글 교육을 통한 민족정신을 불어넣는 한편, 조선어학회의 <한글맞춤법통일안> 제정에도 크게 공헌했다. 1937년에는 수양동우회 사건으로 검거되었다가 1941년 무죄판결을 받았고, 1942년에는 조선어학회사건으로 다시 검거되었다가 1943년 기소유예로 석방되었다. 1945년 10월에 모교인 연희전문의 교수로 임명되었고, 이후 연희(세)대학원장(1953), 총장대리(1947,1950) 등의 중책을 맡았다. 1953년 동대학 대학원장으로 취임하였으며, 1961년 정년으로 물러나 한양대학교 명예교수?문리대학장을 지냈다. 뿐만 아니라 조선어학회 상무이사를 지내는 등 한글화 운동에 주력했고, 1948년에는 ≪나라말본≫을 내어 주시경 선생의 말본체계를 발전시킴으로써 우리말 연구의 한 큰 갈래를 이루었다. 또한 그는 불후의 명저인 ≪조선문자급어학사≫를 지었으니, 이는 우리 역사 이래 이어온 선각의 학문을 분석 체계화한 것으로 연세 국학뿐 아니라 우리나라 국학의 크나큰 금자탑이 되고 있다. 그 외의 저서로는 ≪한결 국어학논집≫, ≪새로 지은 국어학사≫ 등이 있다. 1977년 건국포상이 추서되었다.




윤동주


1917년 중국 길림성 화룡현 명동촌에서 출생. 평양 숭실중학교를 다니다가 일제의 신사참배 강요에 항의하여 자퇴한 후 용정의 광명중학교를 졸업하고 1938년 연희전문 문과에 입학하였다.1941년 졸업 후, 잠시 고향으로 돌아갔다가 1942년 일본의 입교대학을 거쳐 동지사대학 영문학과로 전학했다. 그 이듬해 여름 방학을 맞아 귀국하다 독립운동 혐의로 검거되어 징역 2년을 선고받고 1945년 2월 16일 복역 중이던 규슈 후쿠오카형무소에서 조국의 해방을 보지 못한 채 운명했다. 용정에서 중학교에 다닐 때 연길에서 발행되던 ≪카톨릭소년≫에 여러 편의 동시를 발표했고, 1941년 연희전문을 졸업하고 도일하기 앞서 19편의 시를 묶은 자선시집을 발간하려 했으나 뜻을 이루지 못했다가 자필로 3부를 남긴 것이 그의 사후에 빛을 보게 되어 그의 유고 30편을 모아 정지용이 서문을 써서 출간한 시집이 바로 <별헤는 밤>, <서시> 등이 포함된 ≪하늘과 바람과 별과 시≫이다. 이 시집이 세상에 나옴으로써 비로소 알려지게 된 윤동주는 일약 일제강점기 말의 저항시인으로서 크게 각광을 받게 되었다. 주로 1938년~1941년에 씌여진 그의 시에는 불안과 고독과 절망을 극복하고 희망과 용기로 현실을 돌파하려는 강인한 정신이 표출되어 있다. ≪서시(序詩)≫, ≪또 다른 고향≫, ≪별 헤는 밤≫, ≪십자가≫, ≪슬픈 족속(族屬)≫등 어느 한 편을 보더라도 거기에는 울분과 자책, 그리고 봄(광복)을 기다리는 간절한 소망이 담겨져 있다. 그가 배움의 길을 걷던 연세동산에 그를 못잊어 하는 벗과 후배들의 손으로 세워진 시비가 서 있다. 그가 기거하던 옛 기숙사 핀슬홀(지금의 재단사무처)의 창 밖으로 내려다 보이는 곳으로, 아마도 윤동주의 연희전문 시절 그의 눈길이 가장 자주 머물렀던 곳으로 생각되는 자리이다. 전면에 <서시>가 새겨져 있는 시비 앞에는 오늘도 윤동주와 그의 시를 사랑하는 많은 사람들이 찾고 있다. 간도 용정중학에도 그의 시비가 세워졌으며, 1995년에는 일본의 도시샤 대학에도 그의 대표작 <서시>를 친필과 함께 일본어로 번역, 기록한 시비가 세워졌다.


















동암 백남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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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94년 전라북도 고창 출생. 수원고등농림학교와 일본의 동경상과대학을 졸업한 뒤 1925∼1938년에 연희전문학교 교수로 재직하면서 주로 한국사회경제사 연구에 몰두하였다. 1933년에는 우리나라 원시, 고대사회경제에 관한 최초의 사회경제사적 연구라 할 수 있는 《조선사회경제사》를 발간하였다. 그로부터 4년 후인 1937년에《조선봉건사회경제사 상》을 발간하였는데, ‘조선사회경제사 제2권’으로 되어 있어 1933년의《조선사회경제사》의 속편임을 알 수 있다. 일제강점 하에서 우리나라의 원시 고대 중세에 해당하는 삼한 삼국 고려조까지의 사회경제에 관한 경제사적 연구에 몰두하여, 그의 방법론의 성격여하를 불문하고, 업적을 남김으로써 우리나라 경제사학 발전에 개척자적 구실을 하였다는 평가를 받고 있다. 연희전문학교 교수로 재직 중이던 1938년에는 이순탁, 노동규 등 동료교수 그리고 학생 10명과 함께 이른바 연구회사건으로 일제에 의하여 피검되어 옥고를 치르기도 하였다. 8
?15광복 직후인 1945년 9월에는 조선학술원을 설립, 원장에 취임하고 민족문화연구소도 설립하였다. 1946년 2월에는 금두봉 한빈 등이 북한에서 결성한 조선신민당의 경성특별위원회(후에 남조선신민당으로 발족)의 위원장을 맡는 한편, 좌익세력의 집결체인 민주주의 민족전선의장단의 의장 및 상임위원 경제대책위원 등으로 정치활동을 하였다. 같은해 5월에는 《독립신보》의 고문으로 추대되기도 하였다. 당시 조선인민당 조선공산당 남조선신민당의 3당연합으로 남조선노동당이 발족할 때에는 여운형 등과 사회노동당을 결성하였다. 1947년 5월에는 여운형과 함께 근로인민당을 창설하여 부위원장에 취임했으나, 곧 월북하였다. 월북 후 1948년 8월에 최고인민회의 대의원, 9월에 교육상을 역임하고, 1952년에 과학원 원장, 1961년에 최고인민회의 부위원장, 1969년에 최고인민회의 의장, 1974년에는 조국전선의장 등을 역임하였다.


























                                연세대의 여성


 연세대학교는 1946년, 국내 최초로 남녀공학 제도를 실시하였다. 그러나 본래 남학교로 출발하였던 환경 탓에 초창기에는 여학생에 대한 교육, 환경 상의 배려가 충분치 못하였다. 명목상으로는 ‘남녀공학’이었으나 기구, 시설, 교과목 등은 여전히 남학생 본위로 운영되었으나 오랜 시간에 걸친 학생들과 학교 당국의 노력으로 이제는 여학생이 신입생의 약 38%를 차지하는, 완연한 남녀 공학의 모습을 갖추게 되었다.




 연세대학교 여학생사의 주요사항은 다음과 같다.




























































































1946.8.15


연희전문학교에서 문학원, 상학원, 이학원, 신학원의 4학원과 11학과를 가진 종합 대학 연희대학교로 승격되면서 학칙에서 입학자격 중 “남자”에만 국한하던 조항을 없애버림으로 여학생에게 문호를 개방하여 국내최초로 남녀공학 제도가 도입됨.


1947.9


연희대학교 최초의 여학생으로 10명이 입학하였으나, 7명만이 졸업함.


1948


학교당국은 남·녀 공학제도의 의의를 극대화 하기 위하여 여학생들만의 친목단체 성격으로 녹양회를 조직해주는 한편, 휴식공간, 여학생들만의 체육, 교양학과 시간을 제공함. 녹양회(綠羊會)란 이름은 당시 원 한경 박사 부인께서 명명함.


1954. 7


학교가 신촌 캠퍼스로 돌아온 후 확장계획의 일환으로 여학생 생활관을 마련하고, 한자로 「閼魯廈」로 명명. 즉 신라 박혁거세왕비 「알영」에서의 「알」과 고려 공민왕비 「노국공주」의 「로」를 따온 것으로 ‘황후의 집’이자 ‘후덕한 여성들의 집’이란 뜻이며, 하와이 교포들의 희사로 되어진 곳이기도 하여 하와이 말인 「Aloha」즉 반갑다, 고맙다는 인사의 뜻도 내포됨.

 이 알로하는 연희 여학생들의 중심체 역할을 하였는데, 때로 이 ‘금남의 집’에 남학생들을 초대하여 ‘남녀 학생간 대화의 기회‘를 마련하기도 하였다.


1954. 9


남녀공학제도의 효과를 최대화하기 위한 여학생 특별프로그램으로 “여학생 생활실습” 6학점 과목(가정경제, 가족관계, 아동학 등)을 개설하였고 실습 교육장소로 생활관인 알로하를 활용, 졸업하기 전 한학기 동안 이 곳에서 생활케 하였음.


1955. 9


연희대학교 전교생 무시험 입학전형 실시후 여학생수가 증가.

여학생수의 증가로 여학생지도를 전담하는 여교수 임명함(최초의 여학생 지도교수: 심치선(’52 사학과 졸)-생활관 담당을 겸임케 함)


1955. 10


친목단체로서의 녹양회가 조직을 갖춘 여학생회로 전환되어 활동을 전개함.


1955. 11


여학생들의 교양을 높이고 상호간의 친목도모와 휴식을 위하여「논지당(論志堂)」을 신축함. 백낙준 총장이 「모여서 의논하는 집」이라는 뜻과 Lounge의 동의어로 명명함.


1956


여학생 전담지도기구로서 행정본부에 여학생처가 출범.


1957


연희대학교와 세브란스 의과대학이 연세대학교로 통합되어 연세대학교로 되면서 3년제 간호전문학교가 4년제 정규대학 과정인 의과대학 간호학과로 승격(초대학장:홍신영 교수). 제1회 여학생 22명이 4학년으로서 이과대학에서 공부하였음.


1972


여학생 기숙사 「알로하」외에 「미우학사(美友學舍)」건립. 「아름다운 친구들의 학문하는 집」이라는 뜻.


1975


녹양회가 해체되고 여학생회는 학도호국단에 제3연대로 개편됨.


1979


최초 여자동문 모임으로 백양모임이 발족됨.


1980


학원 자율화조치에 따라 학도 호국단체제가 총학생회로 개편되고, 여학생대표 기구는 여학생부로 개편.

(이때 여학생부는 각 단과대학에서 선출된 대표자로 구성되었고, 총학생회에 참여함과 동시에 여학생처장의 지도로 독자적 활동을 폄.)


1981


간호대학에 남학생 입학



여성의 지위 향상을 위해 여학생처가 중심이 되어 노력한 끝에 여직원 결혼후 6개월 내에 자진 사퇴하는 직원의 성차별적 규정을 폐지시킴.


1983.3


가정대학에서 남학생에게 문호개방


1988.5


여학생 대표기구가 총학생회에서 독립하여 총여학생회로 발족

(초대 여학생회장: 이은희(’90 철학))


1993.4


백양모임을 정식 조직을 갖춘 총 여자 동창회로 발족

(초대 여자 동창회장: 이상희(’58교육졸))


1995.1


여학생처 주선으로 연세출신 여성 언론인 모임을 발족함.

(초대회장: 신동식(’62정외졸)-총회원 262명)


1995.5


연세출신 여성 대학교수 모임을 발족함.

(초대회장: 이상란(’61경제졸)-총회원 305명)


1995.6


여성 연구소 설립(초대 여성연구소장: 이 영 교수)


1996.6




현재까지 배출된 여동문 수는 약 35,000명(전체동문의 21%)으로 방송언론계, 광고계, 개인사업, 대기업, 금융계, 학계, 교육계, 행정, 사법계, 사회봉사, 문화예술 등 각계 각층에서 활약하고 있음.



현재 재학중인 학부 여학생 수 6,042명으로 전체 학부생의 27%임.




2000.10


성폭력 예방 및 처리에 관한 규정을 제정함.


2001.3




현재 재학중인 학부 여학생 수는 9,532명으로 전체 학부생의 37.9%










                        ‘연세여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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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화여대에 May-Queen이 있었다면 우리 학교에는 ‘연세여왕’이 있었다.


 1957년, 연세대학교 창립기념식 전후에 새출발을 기원한다는 명목으로 [여왕대관식]이 열려 매년 ‘지와 덕을 겸비하고 뛰어난 예모를 갖춘 캠퍼스의 여왕’을 뽑았던 것이다.


 “(전략) 장하다 장하다 연세의 여왕. 빛나라 빛나라 오월의 여왕. 우리들의 여왕에게 영광 있으라 (후략)”라는 가사를 가진 [연세 여왕 송가]가 만들어지기도 하였는데, 1962년 중단되었다가 창립 80주년을 맞아 채플시간을 통해 장장 3일간에 걸쳐 전교생의 직접투표로 선출되었다.


 오늘날 미인대회는 여성의 상품화라는 비판 속에 끊임없이 그 존속 의미에 의문이 던져지고 있다. 아마 ‘연세여왕’도 이러한 이유로 시대의 흐름 속으로 사라진 것 같다. 지금 시각에서 보면 해프닝처럼 느껴지는 이 ‘사건’은 연세대학교의 역사도 시대의 흐름 속에서 성장해 왔다는 것을 말해주고 있는 듯 하다.






                                학생회


 연희 전문 학생청년회는 1920년, 시내 고등보통학교와 전문학교의 학생들과 함께 [조선 학생대회]를 조직하여 22년까지 조선학생 상호 간 친목과 단결을 도모한 바가 있었다. 22년에는 [조선 학생회]로 재조직되었는데, 1924년 사회주의 계열 학생들은 [조선학생과학연구회]를 조직하여 학생운동은 두 개로 분열되었다. 그리고 교내 학생 단체로는 학생 기독교 청년회와 전체 학생이 참여하는 학생회가 있었다.


 해방 후에는 학생 단체로 학도호국단이 생겨났다. 1949년 9월 28일 대통령령에 따라 발족한, 학생자치단체로서, 학생층의 사상통일(思想統一)과 단체적 훈련을 강화하여 애국심을 함양시키고 국가에 헌신봉사함을 목적으로 하였다. 중앙학도호국단 산하에 시·도 및 각 대학학도호국단이 설립되었고, 중등학교 이상의 각급 학교 학도호국단은 그 교직원 및 학생으로 조직되었다.


 학도호국단은 당시 권위주의 정권이 지배하는 사회분위기의 산물로서, 운영진 선출과 학생회 운영 등이 학교 당국에 의해 통제되는 어용성 때문에 학생들로부터 외면을 받는 경향이 있었다. 이는 1956년 호국단 총위원장 선거에 전체 재학생 3,000명 중 1,700명이 참가하여 총위원장이 1/6이 채 안 되는 480여표로 당선되고, 기권표가 525표에 달하는 일로 그 심각성이 노출되기도 하였다.


 학도호국단은 1960년, 4월 혁명 이후 해체되었다가,  그 1년 사이에 잠시 권위주의적인 성격에서 벗어나 자율성과 민주주의를 표방하는 [연세대학교 학생회]와 여러 학교 학생회로 구성된 [전국 대학생 총연합회]가 생겨났으나, 이듬해 5.16 쿠데타로 모두 해체되고, 과거 학도호국단의 성격을 계승한 [재건학생회]가 학생회를 대신하였다. 그러다가 1975년에 다시 [학도호국단]으로 개칭되었다.


 학도호국단과 재건학생회는 반공교육과 교련 훈련 등 당시 권위주의 정권이 지향하는 집단주의 사고와 체제를 확립하는데 목적이 있었기 때문에, 학생들의 의사를 대변한다기보다는 어용성을 띄어, 일반 학생들로부터 외면받을 수 밖에 없었다.


 그러다 1985년 학도호국단은 해체, 전교생의 직접선거로 구성되는 총학생회가 부활되었다. 부활 첫 해 학생회 선거의 투표율은 61.5%였다.




 1955년부터 ‘검소한 분위기 조성과 건전한 기풍 표상’을 명목으로 흑색 빛깔의 교복을 착용하였고, 여행을 갈 때도, 교복과 교표를 착용하고 가게 되었다. 그러나 이것은 이를 결정한 학도호국단과 일반 학생들간의 의견의 괴리를 나타내기도 하였다.












졸업정원제


 한때 졸업정원제가 실시된 시기가 있었다. 그리하여 1980년에 2,310명이었던 신입생은 이듬해인 1981년에 5,380명으로 대폭 증가하였고, 연세대, 고려대, 서울대, 이화여대가 모두 입학생이 정원에 미달되는 초유의 사태가 일어났다. 그리하여 1980년, 10,281이었던 학부 재학생은 졸업정원제가 실시된 4년만인 1984년에는 19,917명으로 2배 가까이 증가하였다. 그리고 1981년도 입학생 5,380명 중 4,140명만이 졸업할 수 있었다.


 재수생 누적과 대학의 안일한 학문풍토, 타성적 학사관리 해결로 인한 대학 문호 확대, 면학풍토 정착의 명목으로 실시된 이 제도는,




A. 선진국의 대학들은 자율적으로 학업에 게으른 학생들을 가려내고 있는 데 비해, 한국은 국가의 방침에 따라 일률적으로 운영하고 있는 점,


B. 초과 모집인원을 일정 비율에 따라 탈락시키는 것은 각 대학의 특성을 고려치 않은 경직된 제도운영이라는 점,


C. 중도수료자가 다시 진학 ·편입학할 기회가 거의 없다는 점.




이와 같은 문제점들을 해소하고 이 제도를 정착시키기 위하여 1984학년도부터 졸업정원제를 대학의 책임 아래 융통성 있게 운영할 수 있는 방향으로 개선하였다. 그러나 졸업정원제가 갖고 있는 문제점들이 해소되지 않아 졸업정원제는 1990년(의학 ·치의학 ·한의학과는 1992년)까지 졸업하는 자에 대해서만 적용되었고 현재는 폐지되었다.








 연세학원의 공식적 근대 스포츠 활동은 1921년 정월 보름, [제1회 전조선 축구대회]에 [연희구락부]라는 이름으로 참가한 데에서 시작한다. 연희전문 축구부는 1회 대회 참가 이후 선수 부족으로 해체되어 있다가 1924년 세의전과 함께 전국대회에 매년 참가하였다.


 야구부 역시 1922년 봄, 개성 송도보고 출신의 투수 최규남을 중심으로 팀이 조직되어 1922년 전국대회(전조선야구대회)에 처음 참가하였다.


 농구부는 1930년에 조직되었다. 그 이전에는 여러 차례 축구부 선수들로 팀을 조직하여 농구대회에 출전한 에피소드도 있었다. 농구부는 창단된 해 9월, [전문학교 농구선수권대회]에 첫 출전하여 보성전문을 이기고 연세 농구 역사 첫 우승컵을 차지하였다.


 1927년은 축구부와 야구부가 일본인들과 대등한 대결을 할 수 있게 된 해이다. 축구부는 이 해, 일본선수권을 쥐고 있던 [히로시마 이성축구단]을 3-2로, 내한한 [와세다 팀]을 4-0으로 승리하였다. 당시 국내 무적으로 군림한던 야구부 역시 경성의전의 일본학생들에 10-4로 승리하고, 다음 해인 1928년에는 일본의 식산은행을 12-10, 야하다제철을 3-2로 이겼다.


 또 이 해는 연세응원전의 시초가 된 해이기도 하다. 경성운동장이라는 넓은 운동장에서 경기를 하게 되어, 악단을 동원한 단체응원이 가능하게 되고, 3.3.7 박수 등 조직적인 응원전이 시작된 것이다.






                                연고제(연고전)


전조선 축구대회 우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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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조선 야구대회 우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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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연세대와 고려대는 한국을 대표하는 사학(私學)이자 대학스포츠를 양분하던 학교이기도 했기 때문에, 연고전은 두 학교 뿐 아니라 전국적인 관심이기도 하였다. 처음에는 연보전이라는 이름으로 시작되었는데, 연보전이라 함은 지금과 같은 정기대항전이 아니라 각종 대회에서 두 학교 팀이 벌이는 경기를 가리켰다.


 양교의 첫 대결은, 1902년 [제1회 조선축구대회]였었는데, 연희 측은 밴드 반주를, 보성 측은 농악을 응원가로 사용했던 그런 시대 이야기이다……


 본격적인 첫 대결은 1927년이었다. 3개의 축구 대회에서 맞붙어 모두 연세대(당시 연희전문)가 승리하였다.


  해방 이후, 양교 친선을 위한 대항전이 열리게 되었는데, 초창기에는 O.B들간의 대결과 현역들간의 대결로 나누어, 현역의 대결은 양교 주최로, OB전은 연우 및 고우 체육회 주최로 열리는 것이 통례였다.




  두 학교의 대항전은 산발적으로 열리다가, 1956년 10월, 축구, 야구, 농구, 럭비, 아이스하키 5종목으로 첫 종합 대항전이 열리게 되었다.


 선수자격 문제로 1961~64년 동안 중단되었던 연고전은 1965년 부활되었는데, 이 때부터 학교 당국에서 체육활동에 제도적으로 적극적인 뒷받침을 하기 시작하였다.


 연고전은 항상 ‘양교 우의’의 명목이 강조되었고, 그에 따라 1966년에는, 양교 제전의 주제가로 고려대의 조지훈 교소가 작사하고 연세대의 나운영 교수가 작곡한 [친선의 노래]가 제정되기도 하였다.


  그러나 연고전은 이를 처음 구상한 백낙준 총장의 말 중, “제각기 다른 입학생들의 기질을 연희 정신에 따라 개조”이 상징적으로 보여주듯, 애교의식 내지 집단의식의 함양과 교세 과시의 측면이 강해졌다.


 그래서 “연고전에서 3번 연속 지면 총장퇴진론이 나온다”라는 말이 나오기도 하였는데, 1967년에는 연고전에서 참패하자 체육부장이 [연고전 패배 공개사과문]을 발표하기까지 했었다.


 또한 그 열띤 관심이 지나쳐 여러 차례 충돌 사건을 낳기도 하였는데, 그 시초는 1931년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전조선축구대회] 준결승전에서 선수들 간의 충돌이 응원단 간 충돌로 비화된 적이 있었다.


  특히 정기대항전 이전 시기인 1947년, [전국체육대회], 럭비 결승전에서의 시비에서 비화한 두 학교 학생들간의 충돌은 서울운동장, 동대문, 종로 일대에서의 충돌과 상대 학교에 대한 습격으로 번져 해방 후 최초, 최대 학원폭력사건으로 확대되었다. 더군다나 이 사건은 당시 분열되었던 학생운동의 양상을 반영하여 좌우 학생의 충돌로까지 번져, 서울 시내 전대학으로 파급되려 하기까지 했었다.


  이렇게 연고전은 폭력사태와 계속되는 비판 등 때문에 61~64년, 71~72년 80년, 83년에 중단되기도 하였다. 특히 75년, 양교는 [정기 연고전 중지]를 공동 발표하기도 하였고, 80년대 들어서 중단론이 크게 대두되어 지금에 이르고 있다.


 연고전의 문제점은 경비 부담, 대학 스포츠의 직업주의화, 지나친 승부의식, 학벌의식 조장 등이 거론되는데, 이 외에도 최근에는 개인주의 풍조로 인한 학생들의 관심 저하까지 추가된 느낌이다.


 연고전은 1984년 학도호국단에 의해 [연고제]로 명칭을 변경하고 체육 뿐 아니라 학술, 문화 등 다방면에 걸친 종합 축제로 승화시키려는 시도는 꾸준히 있으나 아직은 ‘연고전’, 즉 양교의 체육대결으로서의 이미지가 강하다.


 1979년 9월, 노천강당에서 연고전 응원 총연습 도중, 유신철폐를 외치던 5백여명의 학생들이 “썩어빠진 연고전을 중지할 것”을 요구하였던 사건이 있었다. 이것은 사회 속의 연고전에 대하여 생각해 볼 때, 상징적인 사건이 되는 것 같다.


























                        재적학생수

















학부


     18 대학 89 학과(전공)

     – 서울 : 14 대학 55 학과 25,184명

     – 원주 : 4 대학 34 학과 8,937명


34,121명 


대학원


     18 대학원

     – 서울 : 16

     – 원주 : 2


13,059명 


부속교육기관


     언어연구교육원 (1,815명)

     어린이생활지도연구원 (235명)

     국제교육교류부 (264명)

     사회교육원 (1,572명)


3,886명




부설연구기관 117개




개설강좌











서울캠퍼스


2,566개    


원주캠퍼스


831개    






교원수














전임교원


     1,379명 (서울캠퍼스: 1,117명, 원주캠퍼스: 262명)


명예 · 객원교수, 어학강사


     517명 (서울캠퍼스: 498명, 원주캠퍼스: 19명)


시간강사


     1,441명 (서울캠퍼스: 1,176명, 원주캠퍼스: 265명)




직원수














서울


484명    


의료원


4,186명    


원주 90명, 일산 1,111명


1,201명    






장학금    36,871,984,000원











교외장학금


11,547,109,000원    


교내장학금


25,324,875,000원    










기숙사 수용인원   5.727













서울, 의료원


시설규모: 44,165 M2


인원: 2,657명


원주, 일산


시설규모: 36,866 M2


인원: 3,070명




동문수  239,692

















세브란스 전문대학


1,994명   


연희전문대학


3,857명   


연세대학교(학부)

(대학원)


120,033명   

68,839명   


부속교육기관


44,969명 




도서관장수       1,903,252

















구분


좌석수


장서수


서울,의료원


5,623


1,598,560


원주,일산


1,781


304.692




















1926년 백양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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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26년 백양로



1957년 캠퍼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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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57년 캠퍼스


1961년 백양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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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61년 백양로


1985년 백양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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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1년 백양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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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1년 백양로

사용자 삽입 이미지사용자 삽입 이미지교내 체육 대회
사용자 삽입 이미지사용자 삽입 이미지사용자 삽입 이미지의과대 학생들의 무의촌 진료
사용자 삽입 이미지사용자 삽입 이미지축제
사용자 삽입 이미지입학시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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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단계


1. 연세대학교 지도


 우리 배움의 터전이다. 백양로와 백양로에서 본관 양 옆, 문과대 방면과 청송대 방면으로 뻗어나 있는 길들이 연세대학교의 이니셜인 Y 자 모양이다. 정문에서 왼편은 이공계 건물들이, 중심부와 중심부의 왼편은 인문사회 건물이 배치되어 있고, 학교 오른편 아래에는 세브란스 병원과 의대 건물들이 모여 있다. 학부대학은 백양로의 중간 왼편에, 기숙사는 북쪽 끝에, 외국 어학당과 새천년 기념관등은 동문 방면에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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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연세대학교 정문


 우리는 매일 아침, 이 정문을 통하여 등교한다. 연세대학교의 시작이 되는 이 문. 우리는 입학하여 대학생으로서 처음 이 문을 들어왔을 때와 졸업하여 대학생으로서 마지막으로 이 문을 나갈 때, 얼마나 한결같을 수 있고, 무엇이 달라졌다고 할 수 있을까?




3. 연세 공학원


 연세대학교는 원서 접수를 이 곳에서 한다. 때문에 많은 연세의 학생들이 연세인이 되기 위한 시작을 이 곳에서 하게 된다.




4. 독수리상


 ‘연세 기상의 상징’이다. 연세의 표상인 독수리를 캠퍼스 안에 세우려는 학생들의 염원이 실행에 옮겨져 학생들 스스로 700여만원의 기금을 모아 건립한 독수리 상은 창립 85주년 개교 기념일이인 1970년 5월 9일에 제막식을 가졌다. 독수리상의 규모를 보면 총높이 12.3m 로 8.5의 사각탑신 위에 청동으로 만든 2.5톤의 독수리가 세워졌는데, 독수리의 높이는 2.6m 폭은 5.2m 이며, 후면에 총학생회의 건립 취지문이 새겨져 있고 네 귀통이에는 진리와 자유 수호에 이바지할 연세인의 상이 조각되어 있다.




5. 연세 한글탑


 ‘상아탑으로서의 연세’의 상징이다. 한글은 우리 겨레얼의 상징으로 우리 문화 창조의 힘이다. 일찍이 연세는 진이 자유의 이념 아래 어려운 역사 속에서도 몸과 마음을 바쳐 우리말과 글을 갈고 지키고 폄으로써 나라 사랑과 학문의 정신을 뜨높임에 크게 이바지하여 왔다. 이러한 연세의 정신적 전통을 기리고 이를 이어받아 더욱 다져서 온누리에 위대한 한글의 슬기와 연세의 이상이 넘치도록 힘쓸 것을 다짐하는 뜻으로 1992년 5월 9일 이 탑을 세웠다.




6. 본관 (Underwood Hall)


 이 건물은 1924년에 본 대학교의 전신 연희 전문학교의 창설자이자 그의 형제인 존 언더우드씨의 기부금으로 지은 것이다.


건평 209.74평, 연건평 876.38평인 이 4층의 석조 건물은 문과대학 전용으로 사용되어 오다가 지금은 대학 본보 건물로 총장실, 기획실, 교무처, 총무처 및 재무처에서 사용되고 있으며 문화재 사적 276호로 지정되어 있다.








2단계


7-1. 알렌과 광혜원 설립


 :


7-2. 한국의 근대화와 연세의 창립




7-3. 광혜원 옛 모습


 : 본래 갑신정변의 주역 중 하나인 홍영식의 자택으로 1885년 이래 광혜원으로 쓰였다. 그 터는 현 헌법재판소 안에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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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4. 광혜원 현 복원 모습


 : 연세대학교 학생회관 뒤편에 광혜원을 복원해 놓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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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5. 광혜원모형




7-6. 광혜원 조감도


 :


7-7. 루스채플-영조의 후궁 영빈 이씨(사도세자의 母)의 무덤인 수경원의 봉분이 있던 자리. 영빈 이씨의 무덤은 1969년 경기도 고양군에 서오능으로 이장.




7-8. 정자각- 수경원 건립 당시 지었던 건물. 광혜원 옆에 있다. 현재 기록보존소로 활용.




7-9. 비각- 수경원 건립 당시 지었던 건물. 광혜원 옆에 있음.




8-1. 연세세브란스빌딩


 : 1904년 이래 제중원과 세브란스병원이 있던 자리이다. 병원은 1963년 신촌으로 이전하였다. 지하6층 지상24층 높이로, 지금은 사무실, 매자 임대 등 연세대학교의 수익사업의 용도로 쓰이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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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2. 에비슨과 세브란스


 : 사용자 삽입 이미지


8-3. 에비슨 족자


 : 고종이 에비슨의 탁월한 의술을 격려하기 위해 이 족자를 하사하였다고 한다. 에비슨의 손녀인 헬렌 여사가 소장하였던 것으로, 1996년 연세대학교 의과 대학 안이비인후과 병원 봉헌식에서 기증하였다.




8-4. 제중원


 : 현 헌법재판소 위치에 있던 제중원은 1886년에 구리개(현 외환은행 본점 부근)로 이전하였다.




8-5. 첫 번째 졸업 사진 : 1908년, 허스트 교수와 제중원 의학교 1회 졸업생들




9-1. 원두우 (언더우드)


9-2. 언더우드 사택


 : 현재 생활과학대(삼성관) 너머 위치해 있다. 현재 연세서예회 건물로 쓰이고 있다.


9-3. 치원관 터- 연세 동산의 첫 건물. 1915년 연전이 창설되어 YMCA에 신세지고 있다가 1917년 학교 승인이 나자, 연세동산에 목조 2층의 첫 교사로 마련한 건물. 6․25때 없어졌으나 ‘치원관터’를 조성. 과학관과 공과대학 신관 건물 사이에 있음.




10. 스팀슨관


 : 신촌캠퍼스 최초로 지어진 건물. 이 건물은 1920년 완성되었으며, 건평 131.75평, 연건평 414.56 평의 석조 2층 건물로서 연세 캠퍼스에 최초로 세워졌다. 미국 캘리포니아 로스엔젤레스의 스팀슨씨의 기부금으로 지은 것으로, 대학 본부로 사용하다가 현재는 대학원과 대외협력처에서 사용하고 있으며 1981년 9월 25일 문화재 사적 275호로 지정되었다.




11.언더우드관(본관)


 : 앞의 1단계-6번사진(11번은 사진없음)




12. 아펜젤러관


 : 미국 메사츄세츠 피츠월드의 제일 감리 교회에 의한 기부금으로 1924년에 준공된 이 신학관은 현재 신학 개학 전용으로 이용되고 있으며 건평 131.34평, 연건평471.59평의 석조 3층 건물로 문화재 사적 277호로 지정되어 있다.




13-1. 한경관


 : 1940년에 세워진 이 건물은 연희 전문학교 제 3대 교장이었던 원한경 박사의 이름을 붙여 한경관이라 부른다. 건평 130평, 연건평307평인 석조 2층의 이 건물은 교직원 식당으로 쓰이고 있다.




13-2. 원한경 묘석


 : 현 연세대 내 복원된 광혜원 내부에 있다.


 원한경은 연희전문 설립자인 T.G.언더우드의 장남으로 한국 서울에서 출생하였다. 미국에서 수학한 후, 1912년 장로교 선교사로 한국에 돌아왔다. 연희전문학교 교수로 재직하다가 에비슨에 이어 연희전문학교 3대 교장에 취임하였다. 학교 운영의 많은 부분을 부교장인 유억겸에게 맡기고 해방 후에는 유억겸에게 교장 자리를 이양하여 연세대학교의 운영이 미국인에서 한국인으로 옮겨지는 과도기적 역할을 수행하기도 하였다. 한국인과 한국문화를 사랑하였던 그는 2차 대전이 일어난 후에도 한국인과 생사를 같이 하겠다고 한국에 남아 있다가 일제에 의해 연금되기도 하였다. 1951년 피난지 부산에서 지병인 심장병으로 서거하였다. 그의 5남매는 모두 한국에서 출생하였고, 모두 한국을 위하여 봉사하고 있다.




14. 백낙준 동상 
 : 백낙준은 종합대학교로서의 연희대학교 초대 총장이며, 통합 연세대학교의 초대 총장이기도 하다. 그는 평북 정주에서 태어나 미국 파크 대학을 졸업하고, 프린스턴대, 예일대, 파크대 등에서 신학, 철학 석사, 박사 학위를 받고, 1965년 연세대학교에서 문학박사 학위를 받았다. 1927년 연회 전문 학교 교수를 거쳐 연회 대학 총장, 연세 대학교 총장을 지냈다. 1950년 문교부 장관을 지내기도 하였고, 1960년 참의원 의장이 되었으나 1961년 5.16군사 혁명으로 말미암아 정계에서 물러나, 연세 대학교 명예 총장이 되었다.


 한국 기독교사를 정리한 연구 성과를 보이기도 하였고, 연세대학교 발전에 많은 기여를 한 것은 사실이나, 태평양 전쟁 시기 “태평양전쟁은 아시아인의 해방을 위한 성전”이라고 찬양하다가 해방 이후 일제의 만행을 비난하고 미군을 환영하는 뜻에서 [코리아 타임스]를 창간하는 등 기회주의적인 처신을 보이기도 하였다. 그의 발빠른 변신은 미국 문화에 익숙한 미국 유학파 출신이었기 때문에 가능한 것이기도 하였다. 연세대학교 중앙도서관 앞에는 어느 동문의 흉상보다도 눈에 띄는 그의 동상이 우뚝 솟아 있다.




15. 연희관


 : 석조 5층의 방대한 이 건물은 1956년 10월에 미 제 5공군과 본 대학교에 의해서 지어진 건평 423.80평, 연건평 2014.65평의 연희관으로 현재 사회과학대학과 행정대학원이 사용하고 있다. 특히 이 연희관은 이 건물을 세우는데 도와준 미국의 원조, 협력 정신을 체득하여 세계 평화와 자유 정의의 실현을 위하고 과학 교육으로 문화 창조, 진리의 거화를 밝힌 선배들의 유풍선양을 기념하고 진리, 자유의 정신을 구현하기 위해 쓰이고 있다. 연희관이라 부르게 된 것은 1957년 “연희” 와 “세브란스” 가 통합될 때 “ 연희”란 이름을 남기기 위해 지어진 것이다.




16-1. 연신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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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제선교협의회 (I.M.C)에서 기증한 사업 기금으로 세워진 이 건물은 건평 95.38평, 연건평 195.01평의 석조콘크리트 2층 건물로서 1964년 11월에 준공되었다. 여기에는 60여 좌석이 있는 예배실을 비롯한 침실(34명을 수용할 수 있는 17개실)과 기타 부대시설이 완비되어 있었으나 1987년 6월 전면 개수공사를 하여 예배실 및, 도서실, 강의실, 사무 공간으로 변경하여 사용하였다. 이 건물은 신학 선교 센터라는 이름으로 재건축이 진행 중이다.




16-2. 연신원 터에서 나온 잔해


 : 학교 당국은 신학선교센터로 재건축을 계획 중이다. 연신원은 학교 역사를 상징하는 아름다운 건축물 중 하나였기 때문에 철거를 둘러싼 마찰이 계속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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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단계




17. 한글 – 뉴욕에 있는 우리 겨레로부터 붙여줌


 : 민족(民族)이라는 한자어 대신 겨레라는 순우리말을 기리는 뜻에서 붙여졌다.




18. 위당 정인보 선생 (1893~1972)


 : 연희전문 교수. 양명학자. 국학의 개념 정립과 그 연구의 기초를 실학에서 찾아 민족사관확립에 기여하였다.




19. 외솔 최현배 선생 (1894~1970)


 :  연희대학교 교수. 국어학자. 한글문화 창조화 한글세대 형성에 평생을 진력하였다. [우리말본], [한글날]과 같은 연세국학의 상징적인 위대한 업적을 남기었고, [우리말맞춤법제정안]에도 주도적으로 참여하였다.




20. 한결 김윤경 선생 (1894~1969)


 : 연희대학교 교수, 총장 대리. 수양동우회 사건과 조선어학회 사건으로 옥고를 치루고, 우리말 연구와 정리, 보급에 앞장섰다.




21. 홍이섭 선생 (1914~1974)


 : 1938년 본교 문과 졸업. 본교 문과대 교수로 재직하며 국학 연구와 일제의 한국식민사 체계를 탈피하려는 노력으로 60년대 이후 새로운 민족주의 사학 등장의 초석을 마련하였다.




22-1. 윤동주 (1917~1945) – 핀슨홀에서 기숙함


1922년에 건립된 건평 84.09평, 연건평 224.15평의 3층 석조 건물로서 이 건물의 건립을 위하여 자금 각출에 공헌이 큰 핀슨 박사를 기념하여 핀슨 홀이라 부른다. 처음에는 남학생 기숙사로 사용되었으나 , 그 후 신과대학으로 사용되어 오다가 한때 종교 음악관 전용으로 사용하였으며, 현재에는 법인 사무처에서 사용하고 있다.




22-2.윤동주 시비


 : 윤동주는 민족의 수난기였던 1917년 독립 운동의 거점 북간도 명동에서 태어나 그곳에서 자랐고, 1938년 봄 연희동산을 찾아 1941년 문과를 마쳤다. 그는 다시 일본으로 건너가 학업을 계속하며 항일 독립 운동을 펼치던 중 1945년 2월 16일 일본 후꾸오까 형무소에서 모진 형벌로 29세에 유명을 달리하였다. 그가 이 동산을 거닐며 지은 시들은 암흑기 민족문학의 마지막 등불로서 겨레의 가슴을 울렸으며, 그 영향은 지금까지 면면히 이어지고 있다.  1968년 11월 3일 그가 따르고 아끼는 학생, 친지, 동문, 동학들이 정성을 모아 핀슨관 앞 작은 언덕애 그의 시 한수를 새겨 시비를 세웠다.




23. 이과대 천문대


 :




4단계


24-1.학도병 순국묘소 안내 표지판


24-2.학도병 순국묘소 사진 2.


 : 1945년 9월 9일, 오후 9시 경, 학도대 연희전문중대는 치안단 장병과 협력하여 성북경찰서에 걸려 있던 일장기를 끌어내렸고, 총독부 울 밖을 겹겹이 둘러싼 군중은 환호성을 울렸다. 그리고 경찰서에는 성조기가 나부꼈다.


                                                -매일신문 1945.9.11




 조선학도대원이었던 본교 출신의 안기창, 이이제는 타 대원들과 함께 치안활동을 위해 성북경찰서장과 교섭하던 중, 경찰서 내에서 일본 경찰관들의 갑작스런 발포로 한 명이 즉사하고 한 명이 응급치료 중 사망하였다. 학도대본부는 12일 오전 10시 휘문중 교정에서 전조선학도대장으로 장례를 집행하였다.




25. 4.19 당시 시위대 사진




26-1. 이한열 추모비


26-2. 이한열 추모비문


 : 이한열 열사는 1986년 본교 경영학과에 입학하여, 1987년 6월 9일, ‘6.10 출정을 위한 연세인결의대회’에 참가 중, 연세대 정문 앞에서 경찰이 쏜 직격최루탄에 피격당해 순국하였다. 1987년 7월 9일, 민주국민장으로 장례가 치루어졌고, 그와 박종철 열사의 순국은 6월 항쟁을 대대적으로 촉발시켜 군사정권을 압박해 갔다. 현재 광주 망월동 민족민주열사 묘지에 안장되어 있다.




26-3. 6․15 남북공동선언 비문- 이한열 추모비 옆에 세워져있음.




































































                                 後記 




   -[한국근현대사아와 연세대학교 역사] 조사를 마치며














































                        우리 이름은 ‘무식한 명문대생’


 우리는 아마도 인생에서 처음 겪었을 ‘대대적인 경쟁’에서 ‘승리’하여 명문사학이라고 불리는 연세대학교에 입학하였다. 그러면 우리는 엘리트에 관한 아주 보수적인 개념이라는 ‘노블리스 오블리제’에라도 충실한가?




 얼마 전 우리 학교에 한겨레신문 기획위원 홍세화 선생님이 강연을 하셨다. 그의 강연은 이렇게 요약된다.




 “사회귀족에 편입된 것을 축하드립니다, 무식한 대학생 여러분”




 그렇다. 우리는 무식하다. 솔직히 자평(自評)하자면, 무식하다 못해 인간적으로 한심할지도 모른다. 프랑스에서 자란 홍세화 선생의 아들은 중3시절, 고3인 누나에게 “누나는 개량주의자야”, 이 한 마디를 던졌었다고 한다. 그리고 성인이 된 남매는 지금도 누나는 사회민주주의자, 동생은 사회주의자이라고 한다.


 그런데 우리는 중3 시절, ‘개량주의’의 사전적 의미조차 모르고 있었다. 그리고 성인이 된 지금은 사회주의와 사회민주주의가 어떻게 다른지조차 모른다. 그러면서 ‘우리는 명문대생. 따라서 우리는 지성인’을 마음 속으로 외치며 살아간다.


 우리가 살아가는 목표는 오직 물질적 가치와 허위 의식을 위해서이다. 연세대학교에 온 이유는 우선은 좋은 직장을 갖기 위해서이고, 그 다음은 나 자신을 치장할 수 있기 때문이다. ‘연세대학교 졸업장’은 나 자신을 빛내는 간판으로서 가치가 있을 뿐이다. 내가 연세대학교에서 어떻게 공부하고 사회와 호흡하였는가는 이미 관심 밖의 일이다. 왜냐면 그런 교육을 받아본 적이 없으니까. 부모님으로부터, 선생님들로부터, 친구들을 쓰러트리고 경쟁에서 승리하는 방법만을 배우고, 인생이란 그런 것이라고 배우며 자라왔으니까.




 그래서 우리는 대학 4년을 다녀도 ‘우리 학교’가 어떻게 만들어져서 어떤 과정을 겪어 지금에 이르렀는지 모른다. 왜? 무식하니까.




                                ‘우리조’ 급조!


 내가 [사학입문] 수업에서 조별과제로 [한국 근현대사와 연세대학교 역사]를 택한 이유는 간단하다. 옆에 앉아 있던 어느 여학생이 같이 이 과제를 할 것을 제안했기 때문에. 나는 수락했고, 뒤의 두 남학생을 영입하여 우리 조는 가장 빨리 만들어졌다. 그리고 이 과제를 선점(?)할 수 있었다. 우리 조는 그렇게 만들어졌다.




 그런데 나도 학교 역사를 조사하고 싶은 마음은 있었다. 연세대학교에 입학한 이상, 이제 평생을 연세인으로 살아가게 되었으니, 내가 입학한 학교가 어떤 학교인지 알고 싶은 마음이 드는 것은 당연하다.


 특히 교내 답사를 하면 그동안 무심코 지나쳤던 곳, 기회가 없어 들러보지 못한 곳들을 여러 군데 가보게 된다. [우리 학교 역사 조사]의 교내 답사는 답사 자체로도 의미가 있는 것이다. 더불어 새로운 사실을 알게 되는 기쁨. 위당관에서 위쪽으로 올라가면 무덤 2개가 있는 것을 아는 사람은 드물 것이다. 무덤 입구의 소개 게시판만을 보면 무덤의 주인공들이 어떤 경위로 순국했는지 알기 어렵다. 그래서 [자료대한민국사]에서 그들이 순국한 시기를 찾아보면, 해방 후에 학도대라는 학생 단체가 활동했었고, 그 와중에 본교 출신 두 명이 순국하여 위당관 위쪽에 묻혔다는 사실을 알게 된다. 그리고 새로운 사실을 안 기쁨은 이내 숙연함으로 전이된다.




 조별 과제는 재미있는 작업이 될 수도 있지만, 피곤한 작업이 될 수도 있다. 하지만 이러한 과제를 혼자 하기에는 무리가 따른다. 여럿이 과제를 수행하면서 정보를 공유하고, 분업과 협업의 과정을 익히는 것은 수업 시간에는 얻기 어려운 것을 얻을 수 있게 해준다. 자신을 위해, 조를 위해, 그리고 학교의 역사를 위해 노력해준 조원들에게 감사하고 싶다. 그리고 우리 모두가 앞의 셋이 별개가 아니라는 것을 알게 되기를 바라게 된다.




                        나의, 우리 역사부터 알아가기


 “그대 이름은 무식한 대학생”


 그런데 나는 무식하게 살고 싶지는 않다. 배부른 쁘띠부르주아가 되더라도 가슴 속에 이룰 수 없는 꿈을 잃고 싶지는 않다.


 ‘우리 주변의 역사 알기’. 역사는 단지 과거가 아니라 과거와 현재, 그리고 미래의 연장선을 연구하는 학문으로 느껴진다. 우리는 과거와 미래 사이의 현재라는 시간적 공간에 서 있다. 그 현재는 과거의 토대 위에 만들어졌고, 앞으로는 과거가 되어 미래의 토대가 된다.


 현재와 미래의 토대를 이루는, 과거에서 현재에 이르는 시간을 아는 과정. 그것은 ‘무식함’에서 벗어나 내가 대학이라는 고등 교육기관에 온 이유를 찾는 하나의 토대를 이룬다. 그 중에 나의, 우리 주변의 역사부터 알아가는 과정은 그것의 가장 기초적인 토대를 이룰 것이다.






                         -2003년 4월 28일 월요일. 인문계열 03학번 김찬규


































 사전 조사를 하면서 학교에 대한 새로운 사실을 많이 알게 되었다. 2년 동안 내 생활의 일부였던 학교에 대해 너무 무지했음이 부끄러울 정도였다. 중앙 도서관에서 먼지에 잠들어 있던 여러 책들을 찬찬히 읽어 내려가는 동안 연세대학교의 새로운 면모가 새록새록 내게 다가오는 듯 했다. 사전 조사가 끝나고 실제 답사를 하니 평소에는 그냥 지나치던 풍광이 하나 둘 보이기 시작했다. 학교가 워낙 넓어 생각보다 가볼 곳이 참 많았다. 작은 것 하나라도 중요한 의미를 담고 있을 것 같아 그냥 지나칠 수가 없었다. 연희관 지붕 언저리에 태극 무늬 발견도 신기했고 노천 극장 앞에 교표 모양의 백양목도 재미있었다. 늘 상 가던 위당관에서 불과 채 100 미터도 되지 않은 곳에 한 때는 우리와 같은 학생이었던 분이 숨져 묻혀 있었다는 사실은 적잖은 충격이었다.


사학입문을 듣는 대부분의 학생은 연세대학교의 새내기들이다. 그들에게 학교에 대해 좀 더 알리고 싶어 우리는 작은 것 하나도 놓칠 수가 없었다. 의미 있는 유적 하나라도 더 찾아내기 위해 청송대와 노천 극장 근방을 샅샅이 뒤졌고, 기숙사 올라가는 길 옆 숲으로 들어가 헤매기도 했다. 비록 헤맨 곳에서 뚜렷한 유물을 찾지 못해 마치 보물 찾기에 실패한 아이 마냥 아쉽기도 하다. 하지만 우리 조원은 이 보고서를 위해 모이기 바로 한달 전 쯤보다 한층 더 연세대학교와 가까워졌다. 나의 학교, 우리의 학교에 대해 잘 안다는 것은 바로 자신 스스로를 아는 길이기도 하다. 우리가 준비한 이 자료들이 사학입문 강의를 듣는 많은 학생들에게도 도움이 되기를 기원한다.






























                         -2003년 4월 28일 월요일. 영문학과 01학번 주지윤




















 처음 이 주제를 맡게 되었을 때, 많은 기대와 걱정이 엇갈렸다. 학교 구석구석, 우리가 몰랐던 많은 곳을 찾아다니면서 우리 학교에 대해서 조사한다는 것이 큰 기대가 되었으나 우리 학교 조사는 아주 잘해야 한다는, 못 할려면 안 하는 게 낫다는 교수님의 말씀에 아주 잘해야 된다는 그런 심리적 압박감이 밀려왔다. 학교답사는 쉽지가 않았다. 부지런히 했음에도 불구하고 시험기간과 겹쳐서 그런지 시간이 많이 부족했고, 조사의 방향을 잡기도 쉬운 일이 아니었다. 내가 맡은 부분은 인물파트였다. 나름대로 상당히 노력했음에도 불구하고 다른 조원들이 한 것에 비해 내용이 빈약해 보인다. 조원들에게 조금 미안한 감정이 든다. 우리 학교를 빛낸 인물들을 조사하면서, 연세의 역사는 눈에 보이는 건물들의 역사가 아니라 연세를 걸었던 수많은 사람들의 역사라고 생각했다. 내가 조사한 몇 명의 위인들뿐만이 아니라, 민주를 위해 피를 흘리며 항쟁했던 많은 선배님들과 연세의 발전을 위해 힘쓰시는 많은 분들, 그리고 지금 연세 백양로를 걷고 있는 우리들이 연세의 역사를 더 나아가 한국의 역사를 만드는 것이라는 생각 말이다. (넘 거창한가? ㅡ,.ㅡ;) 실제 답사는 힘들긴 했지만 매우 재미있었다. 맨날 과방이 있는 용재관과 종합관만 다니다가 학교 곳곳을 돌아다니며 잘 알려지지 않은 곳들을 돌아다니는데 상당히 재미가 있었다. 조용하면서도 운치 좋은 곳도 몇 군데 알아냈다. 신기한 것은 정말 아는 대로 보인다는 것이었다. 많은 것들이 평소 우리가 다니는 길에 있었고 또 평소에는 그냥 지나칠 그런 것도 사실은 심오한(?) 뜻이 있기도 했다. 학교가 워낙에 넓은지라 쉴틈없이 다녔는데도 4시간이나 걸렸다. 이 때는 학교가 넓은 게 원망스럽기도 했다. 여태까지 했던 수많은 과제 중에서 가장 힘들지 않았나 싶다. 그러나 힘든 만큼 우리 학교에 대해 많이 알았기에 보람도 느껴진다. 조사에 큰 도움도 못 되면서 이런저런 말이 많았던 것이 아닌가 싶기도 하다. 너무도 수고하신 찬규 형, 지윤이 누나, 그리고 이기사 훈재에게 다시 한번 죄송하고 미안한 느낌이다.


























-2003년 4월 28일 월요일. 인문계열 03학번 신봉승
















사학 입문을 들으면서 이번처럼 고생하고 또 노력한 적은 없었다. 중학교, 고등학교 때도 방학숙제로 답사를 해본 적은 있지만 이번처럼 절차를 지켜 사전조사부터 철저히 한 것은 처음이다. 직접 구석구석을 그것도 순서에 맞춰서 찾아다닌 것이 특히 기억에 남는다. 그냥 아무거나 보면서 쓱쓱 지나가는 게 아니구나. 나는 보고서에서 사진, 캠코더, 컴퓨터 작업등 기술적인 부분을 많이 맡았는데 지금 생각하면 좀더 역사적인 시각에서 화면 하나하나를 잡아내지 못한 것 같아 아쉬움이 남는다. 하지만 역시 나 개인의 역사로서 오늘의 경험이 나중에 또 다시 답사를 하게 될 때 소중한 재산이 될 것임을 믿는다. 내가 서 있는 바로 이 자리가 어떻게 생겨났고 바뀌어왔는지 이제 다른 사람에게 자신있게 한 마디쯤은 할 수 있겠다.




– 2003년 4월 29일 화요일. 인문계열 03 이훈재

  3 Responses to “연세대학교, 118년의 과거와 그보다 긴 미래 사이에서”

  1. 발표 PPT 다운로드 <- 클릭

  2. 난 1926년 백양로가 더 좋다능 !

    그나 저나 너는 무슨 조사, 프로젝트 이런거 무지 많이 하는 듯 ㅋㅋ

    • 하핫 그냥 학교 숙제였을 뿐이지 뭐… 1학년 사학입문 시간?
      백양로 지하를 파서 공사한다는데 어떻게 될 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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