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월 262009
 


   명절 전에 귀국한 건 편리한 선택이었다. 친척들에게 한 번에 인사를 할 수 있었다. 사실 명절 때나 애경사 때 겨우, 그것도 모두 다- 는 모이지도 않지만, 몇 달 전에 귀국했으면서 그간 인사도 안 했다고 서운해하거나 괜히 예절을 따져묻는 것을 피할 수 있다면 그렇게 하는 것이 좋다. 하기사 그냥 서울에서 학교 다니느라 바빴다고해도 모를 어른들도 많다. 친척들끼리 그리 친하지도 않고 그러기도 어려운 세상이다. 어렸을 때 만큼은 아니어도 나는 여전히 알맹이는 없고 격식만 차리는 예의를 별로 좋아하는 편이 아니다. 하지만 ‘형식’ 마저도 없다면 정말 남과 다를 바가 없는 사이인데, 그 ‘형식’이 간신히 실질적인 일말의 불씨 노릇을 하고 있다는 엄마의 말에도 일리가 있다고 생각한다. 장황하게 늘어놓았지만 간단히 얘기하면, 이런 것에서 엄마 말 잘 들어주고 참석률 높여주는 게 우리 엄마에게 가장 잘 먹히고 쉬운 효도다.

   늘어날 때마다 세어보려다가 말았던 것을 세어봤다. 형수 6명에 조카 11명….-_-(물론 다 사촌형얘기다)  게다가 올해에는 동갑내기 형수가 생길 예정이다. (서른넷 사촌형의 결혼예정자…-_-;)  뭐 동갑의 형수가 있으면 좋을 거 같다. 지금도 제일 큰 형수님은 날 깍뜻이 도련님이라고 대접해주고, 모 작은형수는 훈재삼촌 정도로 부르면서 자기가 처음 봤을 때 난 초딩이었다고 세월이 빠르다는, 별로 안 하는 것만 못한 말을 하곤한다. 애둘난 형수에게서 훈재삼촌 멋있어졌다! 따위의 인사치레를 듣는 것보다는, 안 보이는데서 “삼촌 옷이 그게 뭐냐. 요새 그런 거 입고 다니면 애들이 욕해.” 와 같은 피가 되고 살이 되는 조언을 해 줄 동갑내기 형수는 귀여울 것 같다. 상 치우는 거나 나르는 것도 좀 살살 도와주면서 아이고- 형수님 수고하십니다- 라고 놀려먹는 재미가 더 쏠쏠할 것 아닌가ㅋㅋ 명절은 그런 맛이다.

   이제 내 나이에는 쓸데없는 얘기지만 새배가 아니라 세배,  세배돈이 아니라 세뱃돈이다.  그래도 난 사촌형들과 나이차가 격심해서 형들이 세뱃돈아닌 세뱃돈을 줘서 받았다. 여기에는 그럴만한 가정사가 있다. 아버지께서 사촌형들이 어릴 때 항상 세뱃돈을 두둑히 줘 오셨고. 그러면서도 나는 큰아버지들로부터 받지 못해왔기 때문에…. 이제 형들은 다들 나이를 먹어 우리 세대 남은 20대라고는 스물아홉된 사촌형 한 명과 나랑 친동생 뿐이다.  머지않아 나도 수많은 조카들(갈수록 늘어만가는)에게 세뱃돈을 주게 될 텐데. 돈 계산을 해보면 결국 제로섬에 가까울 것 같다. 하지만 실제로나 경제학적으로 의미있는 일 인듯하다.

  그런 의미에서 연애대상이 아니라 결혼대상으로서 여자를 생각할 때, 나는 저 제로섬게임에 대한 이해도가 높은 여자가 좋다. 그런 여자는 아마도 정치력도 뛰어날테고 나와 자녀를 적절히 활용해서 온 가족친지에게 사랑받는 여자일 가능성이 높을 것이다. 명절 때 “어른들이 해오던대로 그냥 따라가자. 그냥가서 죽은 듯 몸으로 때우고 조용히 복종하자.” 이런 쪽이나 “배째라 내 맘대로 살겠다” 쌩까고 안 나타나는 쪽이나 모두 결혼대상으로 후한 점수를 주긴 어렵지않을까. 쭉 지켜봐온 결과 명절전통도 가풍도 대가족의 식습관도 다 바뀌기 마련인데 그 변화가 주로 가장 힘없고 고생한다는 며느리들에 의해, (속내야 어떻든) 화기애애한 방식으로 바뀌는 게 인상적이었다.

  결국 지겨운 현모양처이야기가 될까 싶어 스스로 경계를 해야겠다. (현모양처 –전통적 의미에서– 랑 살면 얼마나 지루할까! 으 끔찍하다.)  분명히 하면 현모양처인 척 위장할 수 있는 여자가 좋다는 생각이다. 사실 내 결혼상대는 저런 게임을 잘 할 필요까지도 없는 것 같다. 이제 대가족의 북적거리는 명절을 볼 날도 얼마남지 않았기 때문이다. 게다가 우리 엄마가 저 분야 워낙 고랩이라 자기며느리의 랩업에 매우 협조적일 것임에 틀림없다. 내 미래 배우자에게 남은 과제라면 이렇게 명절이라고 단지 먹고 놀기만 하는 게 아니라 부침개를 부치며 심도있는 관찰학습으로 꾸준히 내공을 쌓고 있는 나와 함께, 내부의 적이라고도 할 수 있는 우리 엄마를 삶아먹는 것 정도일 것이다ㅎㅎ

  10년 안쪽 심지어 언제 일어날 지도 모를 일에 대해서 이렇게 일찍 생각해보고 글로 적는다는 것, 이것이 내가 나이먹고있다는 증거인 듯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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