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월 292003
 


목  차




Ⅰ. 머리말




Ⅱ. 본 론


  가. 가족 구성 이전의 개인


  나. 가족 생활 통사


  다. 사회 속의 나의 성장



 


Ⅲ. 맺음말




Ⅳ. 참고자료






Ⅰ. 머리말


  자기 자신의 존재에 대한 의문은 사춘기를 거치며 정체성을 확립해가는 과정에서 누구나 겪는 경험이다. 그리고 누구나 여러 가지 차원에서 그 과정을 밟고 성인으로서의 삶을 살아가고 있다. 그런데 문제는 철없는 시절의 다분히 주관적이고 감정적인 성장통의 차원을 넘어 냉철하고 객관적인 태도로 다시금 자신과 그 주변 인물을 “역사적”으로 바라볼 필요는 없는지 여부이다.


  사실 자신의 현재가 있기까지 주변 사람들의 영향과 사회 환경의 영향을 역사적인 안목에서 바라보는 것은 굉장히 의미 있는 일이다. 인문학의 중요한 의의 중의 하나가 자기 성찰과 삶의 방향 설정이라고 한다면 이러한 작업은 우선 자기 확인이라는 측면에서 매우 핵심적인 일이기 때문이다. 스스로 너무나도 자연스럽게 받아들이고 있는 어떤 사고방식이나 가치관은 실제로는 대부분 주위 환경에 의해 만들어진 것이지 않을까? 나에게 가장 큰 영향을 미쳐온 나의 가족, 특히 나의 부모를 나의 입장에서 어떻게 서술할 것인가? 교과서나 뉴스로 접한 역사적 사건들은 지금의 나의 존재와는 전혀 무관한 것일까?


 


Ⅱ. 본론


가. 가족 구성 이전의 개인


  가족은 일반적으로 두 남녀의 혼인 관계에 의해 탄생한다. 그러나 그러한 가족 구성 이전에, 또 다른 가족의 일원으로서 경험하고 가꿔온 개인의 삶을 살피는 것 또한 가족사 서술에 중요한 과제가 된다. 결혼 이전에 이미 오랜 시간을 거쳐 어른이 되는 중요한 과정을 경험했으며 이렇게 형성된 그들의 성격이나 특성이 하나의 가족의 역사에 있어 줄곧 커다란 영향을 미치기 때문이다.


 ㄱ. 이강길 (아버지, 1957. 3. 22. ~ )


  6.25. 전쟁 후 세대인 이강길은 4.19. 혁명에는 불과 4살에 지나지 않았고 5.18. 광주 민주화 운동 당시에는 이미 고등학교 졸업 후 세무서의 9급 공무원으로 조용히 근무했던 사람이다. 일단 주요 역사 현장에 있지 못하거나 않았다는 점에서, 그 스스로도 “나는 봉건주의와 반공/친미주의에서 조금 떨어져 나온 그러나 자유민주주의와는 거리가 있는 사람이다. 출세지향적이고 가족이기주의를 지상의 가치로 살아온 사람인 것 같다.” 라고 밝히고 있듯 날카로운 역사 의식은 다소 뒤떨어 진다. (현재의 그가 시대를 따라잡는다며 독서를 많이 하는 노력파 중년이기에 인터뷰가 용이했다.)


  50대의 이른바 근대화 세대와 경제부흥기 세대라고 하는 40대의 중간에 위치한 그는 “출세지향, 가족이기주의”의 가치 추구 과정에서 경쟁에 뒤쳐져 부유층이나 권력층이 되지 못한 안타까움을 내면화하고 있다. 학생 카드에 부모가 원하는 직업란이 있으면 늘 “법조인, 검사” 등을 적었던 일들이 이와 무관하지 않다. 그리고 이러한 그의 의식화 과정에는 우리의 급격한 근현대사의 영향이 숨어있었다.


 






<6.25 전쟁과 색깔 논쟁>


 


  일제 하 출생해서 전란을 겪으며 7남매를 길러온 조모 정순봉(83)과의 인터뷰를 통해 그의 소년기에 대해 좀 더 자세히 알 수 있었다. 조모의 말에 따르면, 조부 이기열은 이강길이 15세 일 때 위장병으로 일찍 세상을 떠났고 영특했던 자녀 중 막내 아들인 이강길 만큼은 고등학교 교육까지 마쳐줄 것을 유언으로 남겼다 한다. 그리고 장남인 이기호(61)가 실질적인 가장이었고 막내는 교육을 받는다는 다른 형들의 불만을 조절해주었다고 한다. 이북에 대해 물었을 때는 “뻘갱이들이 쳐들어와 거 소총으로 마구 쏴 죽였제. 그래 저 뒤에 대숲에 그땐 독 묻은건데 거가 숨고 그랬어.”로 부정적 인식을 분명히 보이는 한편 “다 불쌍허지, 다..”로 연민의 감정도 토로했다.


  이에 대해 이기호의 부연 설명은 전쟁이 가족에 미친 영향을 분명히 설명 해주고 있다. “우리집이 본래 기 백마지기 정도 농사를 졌었다고. 내 하민이(손자,7세) 만할 때 기억이 그래. 근데 전쟁 통에 아버지가 지서를 태우러 갔다고 누명도 쓰고, 이 근방이 전부 빨갱이가 숨고 거 전쟁 끝나고는 진짜 어려워졌지. 그래도 아버지는 꼭 양반처럼 수염을 길게 길러서는 늘 에헴에헴~ 이랬다고. 약주하시고 수염 털고 그랬지. 허허”


  사용자 삽입 이미지현재까지도 사진과 같은 구식의 흙집이 남아있는 전북 임실군 성수면 양암의 할머니 댁과 신문에 오르내리는 호남 소외론이 그 주요한 흔적들이다. 조사한 바에 따르면 1962년 제1차 경제개발 5개년 계획과 67년 제2차 계획, 70년 본격적으로 전개된 새마을 운동에서도 이 산골짜기 마을은 소외되어왔다. 겨우 90년대에 들어와서 민주화 이후에 상수도 공급이 완전해 지는 등 개발에 있어 차별을 받아온 지역이다.

 
  고등학교 졸업 후 야망을 가지고 육군사관학교에 지원했고 성적과 체력 등 여러 조건 상 합격을 기대했음에도 낙방하게 된 것을 여전히 납득하지 못하겠다는 이강길의 회고는 결국 “조부가 빨갱이였다” 라는 색깔 논쟁과 현재도 잔존하는 뿌리깊은 지역감정의 기원으로 연결된다.


 


<국가주의 교육의 희생자>


  국가주의(statism)란 간단히 말해 국가가 폭넓은 개입을 통하여 사회와 교육을 통제하고 규제하며 사익을 국가 이익에 종속시키는 것을 정당화하는 이데올로기라고 할 수 있다. 그리고 이때의 국가는 실제로 공공성을 담당하기보다 사적인 이해관계를 앞세우는 집단에 의해 지배되는 경향이 강하다.


  이강길이 9급 세무공무원으로 선발된 뒤 첫 발령지로 전주세무서 총무과에 가게 되었을 때 타자기로 작성했던 낡은 소감문 한 장은 박정희 정권이 실시한 국가주의 교육의 단면을 보여준다. “저는 민족 중흥의 역사적 사명을 가지고 이 땅에 태어나…” 로 시작하는 이 글은 결국 국가건설에 참여하고 봉사하는 주축이 되는 공무원으로서 헌신을 다할 것임을 다짐하는 것으로 끝맺는다. 1968년 12월 5일 선포된 <국민교육헌장>의 첫 문장이 그대로 반복되고 있는 것이다.


  박 정권이 불법으로 탈취한 자신들의 권력 안정의 방편으로 교육 활동을 전면적으로 통제하고 단속했던 당시는 온통 이강길의 학창 시절이었다. 이강길은 모든 학교의 교육 내용을 획일적으로 통제하여 동일한 국정 교육 과정을 공사립의 모든 학교에서 따르게 하였고, 학생들에게 가르칠 교수 요점도 세세히 제시되었던 국가주의 교육의 직접적인 희생자인 셈이다.


<자기희생적 가족주의, 한국 부모의 전형>


  이렇듯 질곡의 현대사를 겪는 과정을 통해 개인적인 야망을 실현하기 보다는 가난, 권위와 압제, 부정의에 눌려 현실적 패배감을 맛본 그의 삶은 자기희생적 가족주의에 맞추어 진행된다. 삶의 보람을 자녀의 성장에서 찾는다는 말을 당연한 것으로 여기는 한국 사회에서 그의 모습은 한국 부모의 전형을 보여주고 있다. 담당 업무에 있어서는 불만 없는 성실한 일꾼으로 가정에서는 좋은 아버지의 역할을 수행하며 그 자신 고유의 모습은 상당 부분 억누르고 있는 모습이 엿보인다. 다음에 제시한 것이 이와같은 그의 모습을 잘 보여주는 간추리고 편집한 일기 몇 편이다.


1992년 2월 29일 (제목: 우리아빠는 못난 사람)


  오늘 저녁에 아빠가 내가 할일이 많아 빨리빨리 못하자, “너 일기도 쓰지마 꼴 멍청이 되어도 모르니까” 라고 대꾸했다. 나도 꼴멍청이외 다른말에 화가나 이렇게 말했다. “아빠는 잘난 사람이야?” 아빠는 “공부는 잘해도 돈을 못 버니까 잘난 사람이 아니지” 했다. 돈을 잘벌려면 자기 일에 최선을 다해 자기 이름을 빛내면 사람들이 존경하며 돈을 퍼부어 버는 거니까 말이다.




1992년 10월 1일 목


  학교같다 집으로 돌아오자 아버지께서 누워 계셨다. 사무실에서 출장 나갔다가 도망 왔다는 것이다. 나는 아버지가 모처럼 일찍 들어와서 기분이 좋았을 것이지만 사람을 속이고 도망 오다니 정말 나쁜 일이다. 내가 아버지 였으면 안 그러고 차근차근 일을 다 하고 갔을 텐데. 아버지가 이해 되지 않는다. 잘 생각해 보면 아버지도 옳은 것 같다. 매일 늦게 들어오시는데 일주일 중에서 3일은 쉬고 4일은 일하는 아버지의 생각도 옳다.


1993년 5월 26일 금


  아버지께서 밤 늦게 들어오셨다. “하유! 일도 못해 먹겄어.” 힘이 하나도 없어 보이셨다. 원래는 6시에 퇴근하는 것이다. 근데 지금이 몇시 인고? 이것은 법이다. 6시 퇴근은 법이다. 확 같다가 그냥 법원에 고발해벌랑게?


ㄴ. 한선숙 (어머니, 1960. 6. 10. ~ )


  이강길과는 달리 비교적 유복한 가정 환경에서 5남매 중 셋째 딸로 자란 한선숙은 세 살 위 큰 오빠와 두 살 아래 남동생이 모두 대학에 진학한 것과 비교해서는 뒤떨어지나 당시 여성으로서는 쉽지만은 않았던 고등학교 교육을 마쳤다. 그 후 결혼 전에는 전주에서 도시 생활을 하면서 재봉사의 일을 하였던 직업 여성이었다.


  외가의 재산 형성 배경에 일제 하에 친일을 했는지의 여부는 분명치 않다. 한선숙의 말에 따르면 소문난 대부호는 아니었고, 아버지 한성희(  , 조부)가 마을 이장으로 오랫동안 일했으며, 집에서 담배를 떼어다 팔았기 때문에 ‘담배집’이라고 불렸다고 한다. 또 새마을 운동을 통해 근처 오수 5일장과 함께, 포장도로를 내고 가옥도 슬레이트 집으로 대폭 보수되었다고 한다.


  실제로 외가는 바로 기차 레일 옆에 위치한 마을의 중심에 위치해 있고 해를 거듭하면서 현재는 현대식 양옥으로 모습을 거의 바꾼 상태이다.


 


 <결혼 전 꼼꼼한 직업 여성, 결혼 후 훌륭한 전업 주부?>


  한국 여성사의 측면에서 보면 산업화 초기 단순 노동을 필요로 하는 섬유 공업 등의 생산직 노동 인력의 대부분은 여성으로, 그들의 역할은 매우 중요했다. 그러나 경제가 발전하고 산업구조가 고도화 되면서 많은 수의 여성 노동력이 가정으로 돌아가 전업주부가 되었다. 한선숙 역시 이 같은 일반적 흐름에서 멀지 않다. 꼼꼼한 그녀의 성격은 결혼 후 전업 주부의 역할을 성공적으로 수행하는 데 문제가 없었다. 고등학교 졸업 후 직업으로 재봉 일을 했던 만큼 눈썰미와 손재주가 뛰어나 집안의 커튼을 직접 만들거나 최근에 유행하는 십자수나 뜨개질을 해왔다.


  그러나 가정 내에서 전업 주부로서의 그녀의 위치가 결코 낮은 것은 아니다. 부부 관계는 남성우월의 봉건적 잔재와는 무관하게 놀랄 만큼 수평적이고 대등한 관계를 형성하고 있다. 아마도 가족의 형태가 핵가족이고, 교육 수준이 높으며, 남편 이강길이 막내 아들로서 고교 시절 타향에서 자취생활을 해 온 탓에 온정주의적 성격으로 다정다감하다 등의 여러 요인의 영향이 있는 것으로 파악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여기서 문제 삼고 싶은 것은 그녀가 자신의 특기를 살려 직업이나 부업을 가질 수는 없는지 여부이다. 국가 차원의 인력 활용이나 가정 추가 소득의 차원보다도 우선 그녀 자신의 자아실현의 차원에서 아쉬운 점이 남는 부분이다. 여기에도 역시 “개인의 행복”이전에 무언가 다른 목적을 위해서 태어났다는 국가주의 교육과 가족이기주의가 판치는 사회 현실 사이에서 극심한 모순을 느끼고 결국 소시민으로서 다음 세대에 희망을 걸고 하루를 살아가도록 강요하는 우리 사회 구조적인 문제가 도사리고 있는 것이다, 특히 여성의 경우에 이 문제는 고정된 여성의 성 역할과 관련하여 더 심각하지 않았을까?


  지금은 천주교 신자로서 각종 사회 봉사활동에 열심히 참가하고 여러 “아줌마”모임에서 주도적인 역할을 하고 있는 한선숙의 모습에서 이러한 아쉬움은 배가된다.


1993년 11월 12일 금 – 운전면허증


엄마께서 운전 면허증을 따셨다. 어제 장거리 시험을 보셔서 합격되어서 말이다.






나. 가족 생활 통사







































급여


공제금


지급액


소속


1983. 11


161,000


60,650


135,350


1988. 11


263,500


102,941


305,559


간세과 남원세무서


1993. 11


484,500


140,000


782,510


간세과


1998. 11


936,300


150,000


1,790,230


직세과


2003. 2


1,659,300


649,330


2,101,470


징세과 전주세무서


사용자 삽입 이미지


 ㄱ. 가정 경제 약사


우리 가족의 소득원은 세무공무원인 이강길의 급여가 전부이다. 비록 사기업 수준의 큰 소득을 얻을 수는 없었지만 국가 공무원으로서 꾸준히 안정적인 수입을 보여왔음을 알 수 있다. 우리나라의 경우 전쟁 후 외환위기 이전까지 연 8% 이상의 초고속 경제 성장률을 내세우며 달려왔고, 그 과정의 소득액의 증가는 유례없이 가파른 상승 곡선을 탔다. 그러나 수출 대국의 신화와 소득 증가, 물가 상승의 반복을 통해 성장가도를 달리던 경제는 97년 말 IMF 외환위기로 정체되기 시작했다. (IMF 이후 그래프가 꺾여있다. 급여는 호봉에 의해 결정되므로 매년 오른다.) 한선숙의 말에 의하면 소비를 긴축시켜도 예전처럼 소득의 일정 부분을 저축하기란 불가능했고, 대부분 간신히 소비와 지출을 동일하게 맞추고, 지출이 많은 달에는 처음으로 “마이너스” 상태를 경험하기도 하였다고 한다.


  가족의 생활 터전의 변화를 살펴보면, 1987년 전주시 덕직구 우아동에 위치한 16평의 우아아파트를 매입하기까지 1983년 결혼 이후 약 6년 간을 군산, 이리(현 익산), 남원을 순회하며 월세방을 살며 돈을 모았는데, 이 배경에는 당시 국가적으로 저축을 장려하는 정책을 폈기 때문에 현재와 같은 저금리가 아니었다는 사실이 있었다. 다시 동일 아파트의 19평으로 집을 잠깐 옮긴 뒤 1998년 외환위기 사태 발발 불과 수 개월 전에 전주역 근처 새로운 아중택지개발지구에 위치한 36평의 현대아파트로 다시 이사했다. 만약 외환 위기가 좀 더 일찍 왔더라면 지금의 집에 살지 못했을 지도 모른다.


  기타 계획적인 재테크와 금융, 부동산 차원, 실물 소비 등 전체 재산 차원에서 가정 경제를 서술은 뒤로 미룬다. 이 부분은 한선숙의 계획대로 이강길의 퇴직 후 총 결산과 함께 다시 서술할 예정이다.


1992년 8월 7일 금 – 자동차


아버지가 자동차를 샀다 ‘엑셀’이다. 내 계획은 나도 설명서를 잘 읽어 아버지의 운전 보조가 되고 싶은 것이다. 난 오늘 잠이 안 올거 같다.




ㄴ. 가족 문화사


  가족의 일상 생활과 관련하여 가족 관계나 놀이문화의 변화 등을 간단히 짚어본다.


<가족 관계>


1993 4월 11일 – 존대말


그런데 친구가 부모님께 존대말을 쓰는걸 보고 나는 느꼈다. 집에 돌아온 나는 내일부터 나도 존대말을 해야겠다고 다짐했다. 


1995 4월 27일 목


우리집은 부모와 자식의 의견차이가 많이 난다. 그것도 먹는 것으로 말이다. 하루는 외식을 하는데, 아버지께서는 등심, 어머니, 나, 동생은 갈비로 통일하였다. 내 동생은 자기 주장만 내세운다. 비록 사소한 음식일지는 몰라도 엄청난 뜻이 담겨져있다. 그것은 바로 다수결의 방식이다. 식구들이 많이 선택한 쪽에 따르는 것이 가장 좋은 것이다.


/ 네 식구가 모두 친구처럼 편안하게 상대방과 스스럼없이 대화를 나누는, 민주적이다 못해 무례할 수 있는 가족 관계를 엿볼 수 있다. 성인이 된 지금도 나는 존대말을 쓰지 않는다. 유아, 아동기에는 비교적 음식이나 개인 취향과 같은 차원에서 차이의 존재를 인정하고 서로 말하는 것이 일반적이었다. 일기를 통해 볼 때는 뉴스를 통해 사회 제 문제에 대한 눈을 뜨게 되고 또래 집단의 결속이 두드러진 1995년 (12세) 까지는 다른 부분에 관해서는 부모의 말을 잘 따랐던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시간이 흘러 모든 판단을 자신이 직접 해야하고 그만큼 자신에게 책임이 주어진다는 것을 자연스럽게 깨닫게 된 것 으로 보인다. 1997년 ~2000년 중학교 재학 중인 이훈재가 컴퓨터 프로그래머나 과학자가 되겠다며 각종 관련 대회에 출전하고, 자신의 책상에 놓인 컴퓨터로 잠을 안 자고 인터넷을 하고, 진로 선택의 고민, 대학 선택의 고민 등에 결국 부모로부터 “너 하고 싶은 대로 해라. 도와주겠다.”는 대답을 듣게 되는 가족 문화는 이러한 가족 분위기와 가족관계에 기초를 둔 것이고 그 기저에는 구성원간 높은 신뢰와 상호 정직성이 놓여있는 것이다.


1991년 11월 24일


나는 집보기 때문에 동생이 오줌을 쌀 때 내가 쌔워줄 때도 있었다. 동생은 언제 나만큼 클까? 궁금하다.


1997년 1월 22일 : 500원 협상


민재와 내가 심하게 싸우니까 아빠와 500원 협상을 했다. 내가 얼마나 싸웠으면…어쨌든 새해부터 좋은 사건이다.


  500원 협상


제1조. 500원 협상은 훈재, 민재의 싸움을 없애는 목적으로 한 것이다. 제2조 달력에 싸우지 않은 날에 동그라미를 쳐서, 월말에 O날 수 *500원으로 계산하여 훈재, 민재에게 각각 돈을 준다.


이리하여 훈재, 민재의 싸움이 상당히 줄어들 것으로 보인다. 한달 내내 지킨다면 15000원이나 받을 수 있다. 오늘 체결했으니 이번 달은 최고 5000원을 받을 수 있다. 원래 내 용돈에 비하면 정말 혁신적인 것이다. 1살 먹으니 좋은 일이 이어지내…




/ 이훈재보다 네 살 어린 이민재도 성장과정에서 이러한 가족 문화의 영향을 많이 받았고 다시 가족 문화의 변화에도 주도적인 역할을 하고 있다. 일기 자료에서 보이듯 이훈재와는 굉장히 자주 다투었고, 승부욕과 성취욕, 개성이 매우 강한 사람이다. 이훈재가 마치 장남이라는 콤플렉스에 사로잡혀 학업에 열중하는 것에 비하면 훨씬 자유분방하고 감정에 솔직하며 동네축구, 농구, 바둑, 장기, 컴퓨터 게임, 최근에는 “마술”에 이르기까지 오락의 즐거움을 만끽하는 사람이다. 역시 자율 등을 위시한 가족 문화의 영향을 빼놓을 수 없다.


<학습>


1991년 10월 21일 월 맑음 : 공문수학하기


오늘은 학원 갔다와서 놀라 나갔는데 공문수학 선생님께서 통로로 오고 계셨다.


그래서 나는 집으로 올라갔다. 이제 선생님이 오시자 이번주 공문수학문제지를 풀었다. 그런데 9+3에서 늦게 풀었다. 공문수학문제가 점점 어려워서이기 때문이다.




1991년 12월 2일


오늘은 다달학습 총정리를 오늘로 마쳤다.




1992년 2월 20일


2학년때에는 피아노 학원을 다니기로 어머니와 약속을 했다. 책도 선물로 주셨다. 제목은 E.T.이다.




1992년 4월 7일 역사책


어머니께서 역사책을 사주셨다. 만화로 되어 있어서 더 읽는 것이 재미있다.


/ 80년대 후반부터 사회적으로 두드러지기 시작한 강한 교육열이 그대로 반영되어 있다. 눈높이(과거 공문수학), 재능, 장원, 아이템풀 등 아동용 학습지 시장이 크게 형성되었다. 학원 문화 역시 이 시기에 폭발적으로 형성된 것으로 피아노, 미술, 서예, 한문, 태권도, 컴퓨


터 등이 망라됐다. 민음사 박맹호 대표가 말하고 있듯 80년 그리고 90년대 출판업계의 호황의 시작은 외판원의 가정 방문과 부모들의 높은 교육열에서 비롯되었다. 어느 집이나 문학 전집 한 질씩은 책꽂이를 채우고 있는 경우가 많다.


다. 사회 속의 나의 성장


  초점을 주변 인물들과 그들을 만들어 낸 사회 환경과 시대상황을 분석하는 것에서 과거부터 현재까지 내가 어떠한 시각으로 현실을 인식하고 시대를 그려왔는지 살펴보는 것으로 옮겨보았다.




<정치, 역사의식>


1992 8월 21일 금  – 한중수교


한중수교를 했다. 이에 의해 대만 경제는 큰 타격을 입었다. 또 핵문제에 도움도 되었다. 난 수교가 먼지 몰라도 하여튼 돕는 것일 것이다.




/ 초등학교 2학년 당시에는 단순히 신문이나 TV 매체에서 접한 사실의 보고 차원에 그치는 것을 알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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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93년 2월 10일 수 – 역사책


책을 보았다. 5. 삼국의 역사이다. 우리고장 백제가 막 당해서 참 안 좋았다. 어휴 백제가 힘을 내야 할텐데. 꼭




/ 이 때까지도 논리 이전의 감정적 차원에서 역사 문제를 파악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자신의 고장이 당해서 기분이 나쁘다는 문장에서는 현재까지도 우리 사회를 좀 먹고 있는 지역 감정 문제가 사실은 초등학교 3학년 생에 어울리는 낮은 수준의 의식에 기초를 두었다는 생각을 하게 된다.



 


1993 6월 25일 금


오늘은 제 43주년 맞는 6.25 날이다. 어째 우린 지금 6.25에 대해 잘 모르고 지내는 것 같다. 단 오늘만이라도 6.25에 대해 생각을 했으면 좋겠다.


1994 2월 28일 월요일


내일이 3.1 절이다. 사람들은 그냥 노는날이야 하고 지나치지만 나는 그렇지 않을 것이다. 날이면 날마다 다 의미가 있다. 어떤 날은 어떤 사람 생일, 국경일, 명절 등 모든 날들이 우리 삶에 필요하다. 내일은 마냥 좋다고 놀지만 말고 일본의 침략에도 불구하고 꿋꿋이 3.1운동을 한 유관순 누나 또 그 밖의 독립투사와 국민들, 이 사람들이 모두 한 마음 한 뜻으로 만세를 불렀던 내일.




/ 자신이 모르고 있는 많은 진실에 대해서 의문을 갖기 시작한 것으로 보인다. 가치 평가나 판단에 이르기 전에 “사실이 궁금하다, 알아야 겠다”는 생각을 가지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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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94. 6월 20일 월 – 웅변대회


음악실에서 통일안보 웅변대회가 열렸다. 난 관중의 한 사람이었는데 박수를 빼먹은 적이 많아 아쉽다.




1994년 6월 25일


오늘로 6.25 44주년이다. 항상 이날만 되면 생각나는 전쟁 생각 실로 6.25는 수많은 인명피해, 전쟁고아, 이산가족을 만들어 낸 전쟁이었다. 같은 민족끼리 총부리를 겨누고 다투다니! 요즈음에는 핵문제로 또 한번 시끄럽다. 하긴 한반도를 날려 버릴 핵에 우리가 가만히 있을 순 없다. 이제 남북정상회담에 길을 열어 하루 빨리 평화통일을 이루어 경제발전을 이룩해야 겠다.




1994 7월 10일 일요일 – 김일성 사망


어제 새벽 2시경 김일성 주석이 심근경색으로 사망하였다. 역시 아까워 죽겠다. ‘정상회담을 열수 있었는데’ 이제 가장 통일을 쉽게 하는 방법은 이복동생 김평일과 김정일의 권력다툼이고 좀 어려운 방법은 중국식 개방과 공산체제의 붕괴라고 생각된다. 사실상 정상회담은 어렵게 됐고 이제는 김정일의 권력에 눈길이 쏠려있다. 과연 통일은 언제 올까?




/ 당시 통일에 대한 시각을 단적으로 드러내주는 글이다. 교과서에 있는 “평화통일”과 “경제발전” 의 용어를 사용하고 있지만 7월 10일의 일기에서 볼 수 있듯 실제로는 “북한 내 권력 다툼에 의한 사회 불안, 개방에 따른 체제 붕괴”를 통일의 방법으로 생각하고 있다. 당시 언론 매체와 정부의 모순된 대북 외교 정책을 여과없이 보여주는 글이라고 생각한다. 교과과정에서는 제외되었지만 여전히 교내에서 통일안보 웅변대회를 열고 “반공”, “국방”의 구호를 외치고 있지 않은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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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95년 4월 19일 수요일


4.19이다. 전국의 국민들이 들고 일어서 민주주의를 다시 펴낸 그 뜻깊은 날이다. 이승만 대통령… 독재정치 때문에 정말 나쁘다. 최루탄을 김주열 형의 눈에 박은 사람은 경찰이지만 돈에 눈이 멀어서 저지른 이승만의 명령이었다. 12년 독재정치 이승만 대통령 결국에는 사임하고 하와이로 망명하였다. 잘됐지롱. 우리나라는 이런 것이 많다. 12.12 등으로 날짜를 적은 날들.




1995 12월 3일 일요일 – 전두환 구속


얼마전에 노태우 전 대통령이 구속되더니 이제 전두환 전 대통령이 구속되었다. 난 정말 전두환씨가 구속되니까 신이 났다. 다른 것은 잘 몰라도 무고한 사람들은 쏜 것은 엄청난 죄다. 특히 광주 사람들…그래서 나도 신났다. 내 생각에는 지금의 당이고, 정치고 등등을 전부 없애고 감방 넣을 사람 넣고 다시 처음부터 참신한 인물들로 하여금 깨끗한 정치를 하였음 한다.




1996년 8월 19일 월


 요즘 신문,TV를 보면 매일 나오는 것이 바로 이 한총련 관련 기사다. 싸워서 다쳤다는 둥 교통이 마비됐다는 둥. 연세대 안으로 전경 투입, 화염병 등등. 대학생들의 격렬 시위 때문에 일어나는 일이다. 쇠파이프를 가지고 경찰과 싸운다는 소리, 화염병 던지고….난 모르겠다. 그들이 왜 시위를 하는 건지 그래서 설명받고 싶다. 또한 뭐하는 단체인가? 학생들이 시위를 그만두어 온 국민이 안정을 되찾고, 학생들 부모도 안심할 수 있어야 겠다. 전경도 막는 것은 좋은데 너무나 때려패지 않아야 할텐데. 피흘리지 말고 어서 이 상황이 끝났으면 좋겠다.




/ 이 시기부터는 적어도 의식적으로 자신의 판단에 근거하여 표현하려는 노력의 흔적이 드러난다. 초등학교 5, 6학년으로서 혼탁한 사회 현실을 비교적 단순한 해법 (나쁜 사람은 감옥에 몰아넣기, 시위의 이유는 모르나 피 흘리지 말고 끝낼 것)으로 재단하고 있다.


<사회>


1994 9월 7일 수요일


청소, 책상 나르기 등 때문이다. 그런데 그것도 남자만 하였다. 왜 남자만 시키나? 하니 남자가 힘든일을 잘하니까? 가 답변이었다. 그래서 남자들은 더 화가 났다. 남녀 평등 주장할 땐 언제고.




/ 남녀평등의 문제가 오래전부터 제기되왔고 그로 인한 역차별의 문제도 이미 생활에서 인지되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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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95년 2월 10일 금 – 어린이회


선생님께 ‘서로 먹는 도시락의 묘미를 세워서 먹자’하는 의견을 내놓았는데 그 내용을 기각하셔서 정말 분했다. ‘특히 방해가 안되게 먹으면 되는데’하는 생각이 들어 정말 화났다. 이건 선생님께서 내준 어린이들의 토의시간이다. 그런데 어떻게 선생님께서 끼어들어!




/ 권위주의에 대한 자연스런 반발심을 보이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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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95 9월 13일 수요일 – 사람은 모두 다르다, 아니 달라야 한다.


어느 사회나 그리고 우리 학교 어느 반에든지, 밥 잘먹고 부지런한 사람, 평범한 사람, 밥도 안먹고 게으른 사람 등 사람마다 각각 다른 생각, 다른 행동, 다른 능력을 가지고 있을 것이다. 만약에 너무나 질서 정연하고 생각, 능력, 행동이 모두 같아지면 흥미가 없을 테고 그 즉시 모두가 로봇이 되는 것이다. 각자 다른 생각, 능력, 행동이 있기에 이 사회에 사랑, 우정, 미움, 싸움, 질투, 희망, 꿈 등이 생기는 것이다. 밤하늘이 아름다운 것은 큰 별, 작은 별, 밝은별, 약간 어두운 별 등 각기 다른 별들이 뒤섞여 빛나고 있기 때문이다. 5반 선생님 같이 사람의 능력, 행동, 생각이 같아지도록 하면 안된다. 난 그래도 크게 놀림받지는 않지만 나의 능력과 남의 능력을 비교해서 남을 놀리거나 그 사람의 생각, 행동을 알고는 내 생각, 내 행동만 옳다고 하는 것이 얼마나 어리석은 짓인지 알게 되었다. 내가 다른 아이들 능력을 내 능력과 비교해서 내 생각, 행동만 옳다고 해서 다른 아이들을 놀리거나 짓밟은 적이 있으면 그 아이들에게 진심으로 사과한다.




/ 현재에도 굉장히 유효하다고 생각되는 수준의 다양성을 진심으로 인정하는 글이다. 도리어 현재가 후퇴한 것은 아닐까?


Ⅲ. 맺음말 & 참고자료


  위의 가족사를 한 마디로 요약해 본다면, 가족만의 독특성에 초점을 맞추어 특색 있는 말을 할 수 있다기보다 역사와 개인의 관계의 차원에서 “역사 속의 가족”이 적절할 것 같다. 군사정권, 쿠데타, 민주화운동 등 수많은 역사적 사건과 우리 가족의 의식주 및 일상 생활사이에 괴리감을 느끼고 사회 현실에 대체로 무관심했던 보통 사람들에게 자신들의 역사가 이렇게 한국 사회의 역사와 같이 호흡하고 있다는 사실을 알게 한 것이 성과라고 할 수 있다.


  한 가족의 역사 역시 개인과 마찬가지로 결코 시대 현실과 동떨어져서는 존재할 수 없다는 점을 다시 확인 할 수 있었다. 그리고 이강길과 한선숙의 삶을 바라보는 현재의 나의 시각과 견해는 내가 그들과는 다른 역사관을 가지고 있음을 보여주었다. 즉, 역사의식의 차이가 삶 전체의 차이와도 직결된다는 중요한 사실이다.


 


후기>


  가족사 서술에 앞서 염려했던 것은 과연 어떤 방식으로 글을 서술할 것이며, 개인의 주관이나 의견을 어느 정도 포함시킬 수 있느냐의 문제였다. 처음부터 끝까지 편년체 서술을 한다는 것은 생각할 수도 없는 일이고 사건 중심의 기사본말체 역시 일상의 평범한 삶을 영위해 온 우리 가족과 각 개인에게는 적절하지 못했다. 고민을 거듭하다 택한 방법은 역사적 사건과 시대상이 개인과 가족에 끼친 영향을 중심으로 몇 가지 중요한 화제들을 들추는 방식이었다. 그리고 그에 대한 현재의 나의 견해를 덧붙였다. 서술의 대상이 인물이기에 어느 정도 ‘전기’의 형식이 될 수 밖에 없었다. 다만 그것이 내 가족의 역사이고 나에게 있어 고맙고 소중한 사람들이기에 ‘위인전’으로 쓰여져 버릴 것을 크게 걱정했다. 그래서 경어를 배제하고 지금의 생각에 기대기보다 과거에 적힌 일기장과 같은 구체적인 자료에 최대한 근거했다.


  지난 5월 17일 할머니 생신을 겸해 큰아버지 이기호(61)와, 할머니 정순봉(83)의 옛 이야기를 전해 듣고, 전업 주부인 어머니가 결혼 후 빠짐없이 모아 온 아버지의 월급명세서 (안타깝게도 가계부는 한 차례 유실되어 최근의 것 밖에 남지 않아 사료의 가치가 떨어짐), 초등학교 전 학년 동안의 나의 일기장을 사료로 수집했다.


  빈약한 자료와 평소 부모로부터 들어온 여러 이야기에 기초를 둔 “가족사 서술”이기에 한계가 있었지만 되도록 객관적인 시각에서 담담하게 서술하려 노력했고 평생 잊을 수 없는 기억이 될 듯 하다.


이 글은 스프링노트에서 작성되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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